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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반창고처럼

– 이국진

NIV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번역할 때, “항상 보호하며(always protects)”로 번역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덮으며(covers)”로 번역한다. 약간의 의미상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덮고 보호한다”는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이런 의미로 번역하는 이유는 이 단어가 “덮는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일차적으로 다른 곳에서, 이 단어를 “절제하다” “참는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덮고 보호한다고 하는 의미가 이 단어에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리고 덮고 보호하는 것이 사랑과 깊은 관계가 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언 10:2)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 전서 4:8)

사랑은 덮는 것이다. 사랑은 잘못을 지적하고,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허물을 덮고 가리는 것이다. 물론 덮는 것은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썩어져가는 것을 덮어두면 더 썩을 수 있다. 쓰레기 더미 위에 포대기로 덮어놓아 보아라. 쓰레기는 그 속에서 더 썩어져 갈 것이다. 상처도 마찬가지이다. 상처가 생겼을 때, 치료하지 않고 그냥 덮어버리면,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덮는 경우도 있다. 상처가 생겼을 때 붙이는 반창고는 상처에 다른 균이 침입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장치이기도 하고, 그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외부로부터의 균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으면서, 상처를 낫게 하는 것으로 반창고가 사용되는 것처럼, 사랑은 잘못과 죄를 덮어서, 그 죄가 효과적으로 치유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상처를 치유하는 덮음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쉬쉬하며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하는 것은 아니다. 온정주의에 빠져 그냥 덮기만 한다면, 반창고처럼 치유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 더미에 거적을 덮어두는 것처럼 더 썩게 만들 것이다. 예를 들어, 담임목사가 간음의 죄를 지었다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 목사의 직분을 박탈하고 담임목사의 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옳다(마태복음 18:15-20; 디모데 전서 3:1-7). 다윗도 간음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계속적으로 왕의 직분을 유지했다는 논리를 갖다 대는 것은 옳지 않다. 간음죄를 지었다가 끌려온 여인을 예수님이 용서해 주었다는 논리를 갖다 대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실 죄가 없기 때문에, 설령 담임목사가 간음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겠지만, 그것이 담임목사의 직을 계속해야 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10장 참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11장 참조)이기 때문이다. 처벌을 정당하게 받는 것이 잘못을 행한 사람 자신을 위해서 좋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정당한 절차에 따라 교정(correction)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며, 치리(discipline)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죄를 덮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를 덮는다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죄를 덮는다는 말의 반대개념을 생각해 보면 쉬울 것 같다. 죄를 덮는 것의 반대개념은 “교정(correct)의 과정을 거치지 말고, 치리(discipline)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를 덮는 것의 반대개념은 “그 죄를 비난하고(criticize) 정죄하는 것(accuse)”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죄를 덮는다고 할 때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감싸고돌면서 당연히 받아야 할 치리와 교정을 거부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덮음은 쓰레기를 더 썩게 만드는 덮음이다. 더 썩게 만드는 덮음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고 낫게 하는 덮음은, 치리와 교정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면서도 그 죄를 저지른 사람을 향한 비난과 중상모략을 피하고, 따뜻한 애정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은 쓰레기 더미를 덮은 거적이 아니라, 상처 위에 덮는 반창고이다.

야고보서는 죄를 지을 때, 죄를 덮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만일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진리에서 떠나 방황하는데,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한다면, 여러분들이 알 것은 죄인을 그 방황 가운데서 돌아오게 하는 자는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5:19-20 私譯).

야고보 사도가 전한 말씀에 의하면, 죄를 덮는 것은 죄에서 떠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죄를 지을 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쉬쉬하는 것이 아니다. 반창고는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다. 반창고는 상처를 보고 비난하고 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창고는 상처가 있을 때, 그에게로 가서 거기서 나오는 피와 고름을 참으며, 덮는다. 거기서 나오는 피를 자신에게로 흡수하며,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막아낸다. 그래서 사랑은 반창고와 같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고슴도치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고슴도치는 서로 사랑하지만, 가까이 있으면 서로의 가시 때문에 찔리기 때문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지내야만 한다. 너무 가까이도 말고, 너무 멀리도 말고, 그저 적당히 상처받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사랑하는 것을 고슴도치의 사랑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와는 다른 이야기이다. 고슴도치는 적에게만 가시를 치켜 올리지, 사랑하는 상대를 향해서 가시를 올리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 적당한 거리를 두는 사랑은 성경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외면도 아니고, 참지 못해 분노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잘못을 무조건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감싸주고 덮어주며 참는 것이다.

MBC TV 뉴스데스크 앵커로 활약했던 조정민(56)씨가 목회자로 변신해 돌아왔다고 하여, 일간신문에 기사화된 적이 있다. MBC보도국 워싱턴 특파원, 사회부장 등을 거쳐 iMBC 사장으로 재직하던 그는 4년전 돌연 회사에 사표를 내고, 필자가 공부했던 미국 보스턴의 고든콘웰(Gordon-Conwell) 신학교로 떠났다가 최근 귀국해 곧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10년 전 어느 날 새벽에 골프연습장에 갔다가, 집의 문이 잠겨, 아내가 다닌다는 인근 온누리 교회 새벽예배에 들어갔다고 한다. 새벽에 예배드리는 광경을 본 조정민 앵커는 서울 한복판에 이단집회가 열리는 것처럼 느껴졌고, 일주일간의 취재를 한 후에 뉴스를 보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교회에 취재를 위해 출석하면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뒤에는 그 부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 부인은 남편이 술 취해 집에 돌아와 자는 모습을 보면서, 양말을 벗기며 이 발이 교회를 가는 발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 참으면서 기도하였던 열매가 드디어 맺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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