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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원하심 (계 7:13-14 [6:1-7:17])

우리가 지금 계시록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오늘은 6장과 7장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내용들이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운 좀 판타지 소설 같은 그런 내용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가 읽어나가다 보면,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하지 못해서, 또 내용을 파악하기도 어려워서 제가 그림으로 그려보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화면에만 띄워줬더니 너무 작아서 안 보인다. 흐려서 안 보인다.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셔서 주보 안에다가 그 그림을 집어넣어 주었습니다. 하나씩 받으셨습니까?

요한계시록 6장의 말씀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보았을 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고, 그 두루마리에 7개의 인이 찍혀 있어서. 박혀 있어서. 함부로 아무도 아무나 열 수 없던 그 인을 어린양 예수님께서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실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살펴봤는데요. 요한계시록 6장은 그 인 하나하나를 뗄 때마다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숫자를 하나씩 써놨으니까, 그림을 보시면 아실 텐데요. 첫 번째 인을 떼니까, 하얀 말을 탄 사람이 등장하는 겁니다. 손에는 활을 가지고 나타나는데, 그 인 하나를 떼니까, 말을 타는 그 사람이 등장하는 겁니다. 어떻게 등장했을까요? 말을 타면서 아마 등장을 했겠죠. 그런데 그 사람이 이기고, 또 이기려 하더라 했으니까, 그 사람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다 쓰러져 죽는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전쟁을 하는데, 이 흰말을 탄 이 사람에 의해서 모두가 다 쓰러져 나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 것이죠. 환상 가운데 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인을 떼니까, 이번에는 붉은 말을 탄 사람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손에 큰 칼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이 다니면서, 모든 곳의 평화를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 되는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들이 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제는 세 번째 인을 떼니까, 이번에는 검정색 말을 탄 사람이 등장합니다. 검정색 말을 탄 사람의 손에는 저울을 가지고 있는데, 그 저울은 무슨 용도입니까? 무게를 재는 것이죠. 양을 재는 것인데, 밀 한 되를 재는데, 얼마의 값을 받느냐? 한 데나리온을 받고, 보리 석 되를 재는데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면 얼마 정도의 값어치가 있다고 여러분들 기억하십니까? 하루치 일당이죠. 어떤 남자 장정이 하루 종일 일해서 받을 수 있는 그 하루 품삯을 1 데나리온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루 종일 수고해서 얻은 1 데나리온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는가? 밀 한 되를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보리 석 되를 살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비싼 건가요? 싼 건가요? 비싼 것이죠. 아무리 일해도, 겨우 밀 한 되 밖에 얻을 수 없는 그런 힘든 세상이 될 거라고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 바로 이 세 번째 인을 뗐을 때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이제는 네 번째 인을 떼니까, 파리한 말에 탄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리 한국말 성경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청황색 말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 헬라어 원문은 초록색 말로도 번역할 수도 있고, 파리한, 그러니까 아주 약한 말로 그렇게 번역할 수도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무튼 그 사람이 나타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지구상에 흉년이 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게 되고, 짐승의 공격을 받아서, 사람들이 쓰러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인을 떼니까, 제단 앞에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데, 그 영혼들은 누구냐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 증거를 하다가,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다가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울부짖는 겁니다. 하나님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힘든 일들이 있어야만 합니까? 울부짖을 때, 들려오는 목소리가 무슨 목소리가 들리냐면, 아직도 멀었다는 겁니다. 수가 다 찰 때까지, 지금 순교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 정도 순교한 것 가지고는 안 되고, 좀 더 순교하는 사람들이 더 있을 때까지, 이런 일들이 계속될 거라고 하는 그런 음성을 듣게 됩니다.

여섯 번째 인을 떼면, 그러면 더 아주 공포스러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지진이 일어나고요. 태양은 어두워지고, 다른 핏빛으로 변해버리고, 하늘은 두루마리처럼 말려져 버리고, 산들과 섬들은 그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져 버리고, 수많은 별들이 떨어지는 그 장면을 보게 되는 것이고, 바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제발 우리를 가려달라.” “이 진노를 누가 피할 수 있을까?” 이야기하는 그 장면을 사도 요한이 보았다고 오늘 계시록 6장 말씀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말들의 색깔이 하얗기도 하고, 빨갛기도 하고, 검정색이기도 하고, 또 활을 들기도 하고, 검을 들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모습들이 묘사되고 있는데, 이 구체적인 모습들이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가를 밝혀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주관적인 생각으로 이런 해석을 말할 수도 있고, 저런 해석을 말할 수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정확한 해석을 말하는 것은 어렵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환상을 통해서, 6가지 인을 떼는 그 장면 하나하나를 보면서, 우리가 전체적인 숲을 보았으면 좋겠고, 전체적인 그림을 봤으면 좋겠는데요. 이 인을 하나하나 뗄 때마다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나쁜 일 재앙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재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인을 뗄 때마다, 고통스러운 일들이 생겨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재앙들이 나타나게 될 거라고 하는 이야기를 지금 예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어 나갈 것이고, 흉년이 들 것이고, 물가는 뛰어올라서,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든 그런 세상이 다가오게 될 거라고 예언해 주고 있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이 무엇이냐면, 공포스러운 때가 언제냐면, 여섯 번째 인을 뗄 때입니다. 지진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늘 함께 사는 그 태양이 갑자기 시컴해져 버리고, 달이 핏빛으로 변해버리고,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지고, 산과 섬들이 움직이는, 그런 재난이, 아주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게 되는 겁니다. 자 이런 예언을 보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이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이 가장 먼저 생길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는 걸까요? 언제 이런 일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일까요? 정답은 “모른다”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마지막 때에 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날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인자가 오는 것은 어떻게 오는가? 마치 도둑이 쳐들어오듯이, 우리가 예상치도 못하고, 준비하지도 못했을 때, 갑작스럽게 도둑이 쳐들어와서 깜짝 놀라게 되듯이, 마지막 때는 언제 오게 되는가? 아무도 모르는 그런 불시의 시간에 닥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으면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런 재앙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고, 지금 엄청난 재앙들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이런 재앙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고 곧 일어날 거라고, 그렇게 공포심을 유발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사건이 지금 당장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수천 년 뒤에도 일어날 수도 있고, 언제 일어날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보면 수많은 잘못된 이단에서, 그리고 종교 사기꾼들, 그리고 엉터리 목회자들이 요한 계시록의 사건이 지금 일어나고 있으며, 아니 조금 뒤에, 며칠 뒤에, 아니면 1년 뒤에 일어날 것이라고 그렇게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전도하는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말하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종종 만나게 됩니다.

어디 가면 만나게 되나요? 한옥마을 가면 만나게 되고, 저기 어디 역 같은 데 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이제 마지막 때가 다가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사람들은 모두 다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잘못된 메시지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재앙 같은 일을 만납니다. 갑작스럽게 지진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요. 물가가 폭등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우박이 떨어지고,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갑자기 짐승들이 갑자기 막 나타나기도 하고, 흉년이 들기도 하고, 운석들이 많이 떨어지는 그런 모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을 경험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금이야말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그때가 지금이라고, 이제는 대비해야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너무나도 자주 반복돼 왔어요. 예전에 로마 황제가 초대교회를 박해하고 있을 때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생각했냐 하면, 저 로마 황제야말로 사탄이고, 저 로마 황제야말로 666이고, 저 로마 황제가 하고 있는 그 일이 바로 이 요한계시록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사람들을 죽이는 그 일들을 저 로마 황제가 하고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히틀러가 집권해서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갈 때,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히틀러가 누구냐?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바로 그 666이고, 사탄이고 짐승이고, 지금 히틀러가 이 요한계시록의 사건을 성취하고 있는데,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지 않느냐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서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쓰나미가 생기고 지진이 일어나고 전쟁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지금이야말로 종말이 되었다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지금 요한계시록 6장에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을 하나씩 뗄 때마다 엄청난 재앙들이 나타나는 그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재앙의 환상을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먼저 발견해야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 그런 재앙들을 보면서, “이때가 마지막 때로구나”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라고, 그런 재앙의 환상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재앙의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이냐면, 아무리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이러한 일들을 만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재난들이 그냥 우연히 우리들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 살다 보면 어쩌다 보니까 이런 공포스러운 일들이 우리들에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컨트롤 하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재앙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재앙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두루마리 안에 기록된 대로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거예요. 마치 예방 접종을 통해서 면역 주사를 해서, 우리들에게 바이러스를 우리 몸 안에 집어넣지만, 그렇게 우리들의 몸 안에 바이러스를 집어넣는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질병에 걸려서 죽게 만들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의사의 컨트롤 속에서 우리를 더욱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떠한 공포스러운 일들도 우리가 이 세상에 만나는 그 어떠한 힘들고 어려운 재난과 힘든 모든 일들이 어쩌다 보니까 그런 일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뜻 가운데서, 통제되는 가운데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다섯 번째 인을 뗄 때에,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순교를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이렇게 억울하게 순교를 당하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일 언제까지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그렇게 울부짖을 때, 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아직 더 남았다.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아직도 일이 있을 거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컨트롤하고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을 만나면, 그 고통이 너무나도 커서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못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한 이야기인데요. 우리가 치통을 앓게 되면, 이가 너무 아프면, 그 치통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다른 몸에 다른 부분이 건강하다고 하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우리들의 발가락이 아프면 그 발가락이 아픈 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내가 팔꿈치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아무리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일어나고, 물가가 폭등하고, 엄청난 고통스러운 일이 당하고, 완전히 저 하늘이 말려가 버리고 별들이 떨어지고, 태양이 시커머지고 달이 핏빛으로 물든다고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재난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컨트롤하고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고통이 끝날 것 같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고 하더라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들의 삶이 흔들려버리고, 이제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할지라도, 너무나도 무섭고 충격적인 일들이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진다고 하고, 심지어 우리의 생명이 끊어지는 한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들이 엉터리로 주장하듯이 7년 대 환란이 마지막 때에 있다고 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일들이 있다고 한들, 걱정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는 그런 말씀으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이런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림을 봤으면 좋겠는데요. 네 천사가 땅의 네 귀퉁이에 서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그런 바람들을 막고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림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보여준 환상이 아니라, 1세기 평면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여준 환상입니다. (그림은 이제 치워주시고요.) 조금 전에 우리가 요한계시록 6장에서 여섯 번째 인을 뗐을 때 보여주었던 환상도, 역시 평면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준 환상이었습니다.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려가는 거, 별들이 떨어져서 땅 위에 막 우수수 떨어지는 거, 이런 것들은 21세기 과학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그런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묘사를 통해서 그 당시에 평면적 세계관, 그러니까 지구는 평상처럼 생겨서 바다 끝으로 가다 보면 떨어져 죽을 수도 있고, 하늘에는 별들이 매달려 있는데, 그 별들이 떨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재난이 어떠한 엄청난 재난을 설명하기 위한 환상으로 이런 모습으로 그려주고 있는 것인데요. 이런 모습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만들어 놓으셨고, 그리고 그 구원받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고난과 아픔 그리고 재난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구원받는 백성이 될 거라고 하는 것이 요한계시록 7장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7장은 수많은 사람들을 혼란시켰던 말씀 가운데 하나인데요. 왜냐하면 구원받는 사람들이 14만 4천 명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14만 4천 명이면,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은 겁니까? 적은 겁니까? 적어요. 현재 우리 대한민국의 크리스천 인구가 몇 명이라고 하죠? 200만? 900만? 현재 크리스천 인구만 해도 900만이 된다고 하는데, 900만이 아니라 14만 4천 명만 천국에 간다고 하면, 많아요? 적어요? 적어요. 여기서 인쳤다고 하는 표현은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표현해 주는 방식입니다. 그 옛날 목동들이 목장주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양들이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소에다가 인두를 지져서, 이것이 누구의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가 잃어버렸다고 할지라도, 누군가 발견하게 되면, 소에게 찍혀 있는 그 인두를 보고, “아, 이건 아무개네 집 소구나.”라고 알 수 있는 것처럼, 14만 4천 명이 하나님의 인심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14만 4천 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14만 4천 명이라고 하는 아주 적은 숫자만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크리스천이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만 해도 900만 명이고 1천만 명이고 한다면, 그중에서 14만 4천 명이면 여러분 그 안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14만 4천 명이라고 하는 숫자는 지금까지 수많은 이단들, 그리고 종교 사기꾼들, 그리고 엉터리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착취하는 악용하는 그런 수단으로 사용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누가 들어가는가? 아무나 못 들어간다. “그딴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14만 4천 명 안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협박하면서, 여러분 그 14만 4천 명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 되고, 헌금도 많이 바쳐야 되고, 열정적으로 신앙생활해야만 그 안에 들어가지, 그렇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고 협박하면서, 성도들의 신앙을 착취하는, 영적인 착취를 하는 그런 방법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습니다.

마치 선착순이나 성적순과 같은 겁니다. 서울대학에는 어떻게 들어가나요? 성적순으로 들어갑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그 성적 안에 들어가야 합격을 하는 거예요. 선착순은 뭡니까?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선착순으로 도착해야만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거예요. 제가 군대에 가서요. 삼사관학교라고 하는 그 부대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입대를 하니까 그 부대에 있는 조교나 부대장 교관들 이런 분들이 얼마나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지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오셔서 입대하시는데 수고 많았습니다.”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주는데, “군대도 괜찮은 곳이구나” 하면서 입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배웅 왔던 사람들이 다 나가고, 문을 탁 닫는 순간, “일어서” 딱 그러는데, 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교관이 하는 말이 “저기 있는 전봇대 보이지? 전봇대까지 뛰어갔다가 돌아오라”라고 하면서, “선착순 3명.” 그러는 거예요. 막 뛰어가는 거예요. 뛰어가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열심히 뛰어가지고 선착순 세명에 들었을까요? 못 들었을까요? 아니, 제 실력을 어떻게 보고? 못 들었어요. 달리기를 잘하는 세 명은 선착순으로 들어와서 그 자리에서 쉬고 앉아 있는데, 그 4등부터는 다시 뛰어야 되는 거예요. 다시 제가 몇 번을 뛰었는지 몰라요. 엄청나게 뛰었는데, 등수 안에 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14만 4천이라고 하는 게 뭐냐면, 영적인 선착순인 것이죠. 14만 4천 명 안에 안 들면, 다 엉터리다. 못 들어간다. 그 말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면서,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종교단체를 기하급수적으로 단 시간에 성장시킬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캐치프레이즈가 되는 것이죠.

이단들이 빨리 성장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주 의아하게 생각하시지만, 그들이 빨리 성장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진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선착순으로 그들을 달달 볶기 때문에 성장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장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고, 그 숫자에만 여러분들이 매료당하면, 큰 낭패를 당할 위험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14만 4천 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잘못 악용되어 왔던 메시지인데요. 사실 14만 4천 명이라고 하는 이 숫자는 그러니까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14만 4천 명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숫자는 정확한 숫자를 말할 수도 있지만, 어림수로 이해할 수도 있고, 상징수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림수라고 말하자고 한다면, 대략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인구가 몇 명이죠? 5천만 명. 5천만 명이라고 이야기하면 맞은 건가요? 잘못된 건가요? 잘 말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정확한 대답은 아니죠. 정확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아무도 몰라요.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2020년 5월 기준으로 5,184만 2524명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매일 사람이 죽고 매일 사람이 태어나니까, 자꾸만 변화해서 정확한 숫자를 말할 수 없기에, 우리들은 대한민국의 인구를 뭐라고 이야기하면 됩니까? 그냥 5천만 명이라고 이야기하면 맞는 걸로 해주는 거죠. 그게 바로 어림수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14만 4천 명도 각 지파에서 1만 2천 명씩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1만 2천 명의 숫자를 정해놓고 1만 2,001번째는 구원을 안 시켜준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1만 2천 명이라고 하는 그런 어림수로 이해할 수가 있는 가능성이 있고요.

또 하나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상징적인 숫자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많다”라고 하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1만 2천 명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꼬마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너 엄마를 얼마만큼 사랑하니?”라고 말하면 우리 꼬마 아이들은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나는 엄마를 사랑하는데, “열(10)”만큼 사랑해요. 열(10)이 많아요? 적어요? 그 아이에게는 전부예요. 나는 내 전부를 다해서 사랑한다고 하는 그 말을, 나는 열(10)만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열이 적어요? 많아요? 숫자로 정확한 숫자로 보면, 적지만, 상징적인 숫자로 본다면, 그것은 다 정말 내 100%를 다해서 사랑한다고 하는 그런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70번씩 7번 용서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490번까지만 용서하고, “491번째는 이제는 용서 안 해도 되는 것이죠?”가 아니라,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하는 말씀인 것과 마찬가지로, 각 지파에서 1만 2천 명씩, 14만 4천 명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몇 명 구원받는가를 정확하게 말해주는 숫자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 14만 4천 명만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계시록 7장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절 말씀입니다. “이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이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한번 보시면, 요한계시록 7장 그림을 한번 다시 한번 보시면, 14만 4천 명의 인심을 받은 자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나오는 숫자라고 한다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가운데서는 각 나라와 각 족속 중에서 흰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든 사람들은 몇 명입니까? 몇 명? 셀 수 없어요? 셀 수 없어요? 하늘의 별들을 셀 수 없고, 바닷가에 모래알을 셀 수 없듯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찬송과 경배를 드리게 될 거라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14만 4천 명만 구원을 받느냐? 그게 아니라 요한계시록 14장 3절부터 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3절 5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14만 4천 명이 뭐라고요? “처음 익은 열매라.” 그 얘기는 14만 4천만, 딱 열매가 맺히고, 그다음에는 열매가 안 맺힌다는 얘기입니까? 그 뒤로 또 맺힌다는 얘기입니다. 또 맺힌다는 그러니까 천국에 몇 명 정도 들어가겠습니까? 몰라요. 셀 수 없는, 성경에서 일관적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거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입니다. 믿습니까?

구원은 스타벅스가 아니에요. 스타벅스에서 말하기를 어느 커피 마시고 어느 커피 마시고, 다 모으면 예쁜 가방 준다고 해서 열심히 커피를 마시고, 쿠폰에다 도장 찍고 해 가지고 갔더니, 재고가 다 소진돼서 못 준다는 거예요. 제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요. 이 세상의 것들은 물건 떨어졌으니, 더 이상 못 준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에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가졌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마음의 문을 여는 자마다 우리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교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죠.

14만 4천 명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저 천국에는 소수만 들어가니까, 너희들 제대로 신앙생활 안 하면 어림도 없다고 하는 그런 협박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자격이 없고 아무런 공로가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전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 7장에서 그려주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아무도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좌 앞에 앉아서, 그들이 찬양을 하는 겁니다. 뭐라고 찬양을 합니까?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구원하심이 누구에게 있어요?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다는 거예요. 구원하심이 어디에 없어요? 우리에게 없어요.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 내가 얼마나 공로를 세웠느냐? 내가 얼마나 뛰어나느냐에 따라서, 선착순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하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거예요. 어린양에게 있다는 거예요. 왜? 우리는 다 위선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한없이 모순된 게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입으로는 거룩을 말하고,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고, 입으로는 의로운 말을 하는데, 뒤로 호박씨 까는 인생들, 들춰보면 먼지밖에 보이지 않고, 들춰보면 더러운 것밖에 보이지 않는, 이중 인격자들인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없고,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겁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데, 장로 중에 어느 하나가 나타나서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굽니까? 이 구원받은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왔습니까?” 그때 대답하기를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온 자들인데” 즉 구원을 받은 자들인데, 이들은 누구냐?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희게 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이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하늘에 장막을 치고, 그들을 보호해 주시고, 이제는 그 천상에서 다시는 눈물도 없고, 다시는 주리지도 않고, 다시는 아픔도 없고, 다시는 슬픔도 없는 그 기쁨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불러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그 생명샘으로 인도해 주셔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만나는 일들은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전쟁의 소문을 듣게 될 것이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염병의 시대를 우리가 맞이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지금 이 상황보다도 훨씬 더 공포스러운 미래를 우리가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면,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게 주님 앞에 나와 믿음을 지키고 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운데는 요한계시록 6장에서 그려주고 있는 것과 같은 일들이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서 있을 수가 있어요. 이것은 전 우주적인 재난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런 재난들이 개인적인 재난으로 느껴질 수도 있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난의 시기를 지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그런데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컨트롤하고 계시고, 결국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를 씻어서, 내 자신에게 구원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우리의 구원이 있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번 한 주간 살아가는 동안에, 그 옛날 사도 요한이 바라보았던 이 환상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다시 한번 힘과 위로가 되고 또 살아가는 그 힘을 주는 그런 귀한 말씀으로 새겨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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