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3. 일곱 교회 (계 1:20) +++ 5. 구원하심 (계 7:13-14)
우리가 대화를 하다 보면, 대화의 주제는 어느덧 사라져 버리고, 대화 가운데 있었던 조그마한 표현 하나, 어떠한 행동 하나에 갇혀서, 그래서 그 대화가 건설적으로 진행이 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튀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 자녀들하고 이야기를 할 때, 혹은 우리 부부가 이야기를 할 때, 원래 주제는 그게 아니었는데, 원래는 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무심결에 튀어나온 그 단어 하나, 어떤 행동 하나에 마음이 상해서, 우리가 원래 이야기하려고 했던 주제는 어느덧 사라져 버리고, 그것 때문에 싸움으로 변질이 되고, 그리고 관계가 틀어지는 그런 경험을 아마 많이 해보았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 말씀을 읽는 가운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어떤 단어 하나, 자구의 표현 하나에 자꾸만 신경을 쓰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그런 전체적인 그 메시지를 발견하기보다는, 조그마한 표현 하나에 우리가 갇혀서,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경우가 너무나도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어떤 것에 비유할 수 있냐면, 우리가 나무를 살펴볼 때, 어떤 그 한 나무에 이파리가 얼마나 많이 달렸는지, 그리고 그 가지가 어떻게 뻗어나갔는지, 그 나무 둥치에, 그 나무의 표면이 껍질이 어떠한 상태인지, 거기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쓰다가 보면, 그 나무 하나하나를 정확히 분석하고 알아가는 데는 일가견이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그 나무가 여기 심겨 있고, 저기 숨겨져 있고, 숲 전체를 이루고 있는데, 그 숲 전체를 바라보지 못하고, 그냥 나무 하나만 보고 끝나버리는 그런 우를 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느 정원에 갔다고 한다면, 수목원을 간다든지, 어떠한 시설에 간다고 하면, 꽃을 여기 심어놓고, 나무를 저기 심어놓고 해서, 전체적으로 그려주고 있는 그 그림을 보면서, 조망을 해야 할 텐데, 그런데 그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한 채, 그저 조그마한 실수들의 눈길이 가고, 여러 가지 사실 의도치 않았던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을 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에 그 세미한 내용들 하나하나, 표현 하나하나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일점일획이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참 우리가 모든 말씀을 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놓쳐버리면, 성경에 대한 상식이 많고, 그리고 성경에 대한 지식들이 많아서, 성경 퀴즈 대회를 하면, 그 퀴즈 대회에서 1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디테일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꿰고 있지만,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그 메시지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성경 읽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표현 하나, 디테일 하나하나의 함정에 갇혀버리게 된다고 하면, 하나님의 메시지 전체 그림을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우를 범할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특별히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요한계시록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나가면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전체의 그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그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숲을 보아야 하는 책이 바로 요한 계시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읽다 보면, 우리가 평상시에 그냥 자연스럽게 대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평상시에 대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그런 상징들이 등장합니다. 요한 사도가 환상 가운데서 바라보게 되는 그 모습들을 보면, 기괴하고 이상한 모습들을 한 장면들이 등장하게 되는데요. 그 환상을 통해서 본 그 상징들 하나하나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 구체적인 그 모습 하나하나의 의미를 따지기 시작하게 된다고 하면,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 상징 하나하나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혀나가기 위해서, 거기에 매몰되다 보면, 우리가 헤어 나오지 못할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수많은 이단들이 걸었던 길이 바로 그런 길이죠. 수많은 이단들이 요한 계시록을 해석하면서,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숫자 하나하나, 상징 하나하나, 표현 하나하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설명하려고 했고, 그러한 설명들을 하다 보니까, 결국 삼천포로 빠지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이 상징들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그 표현들, 그림들, 상징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이 세상에 그 누구가 100퍼센트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상징들을, 이 상징이 이것을 의미한다라고 설명을 하게 된다고 하면, 그 설명이 객관적이고 타당하고, 그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그런 해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한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누가 말하기를 “이것은 이것을 상징한다”라고 주장을 하면, 그냥 그 사람의 주장인 것뿐이지, 그것이 객관적으로 타당하고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정답과 같은 것이 아닌 것이죠. 언제 그 상징의 내용들이 정확하게 밝혀질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천국에 가야,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오늘날과 같은 깨끗한 거울이 아니라, 2천 년 전 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그 시대의 거울이 아주 희미해서, 어렴풋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가 지금 이 요한 계시록의 상징들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 당시에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아주 희미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내용을 우리가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그때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구체적인 그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밝히는 것보다도, 숲 전체를 조망해보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이런 환상을 사도 요한이 보았습니다. 계시록 4장의 내용입니다. 보니까 보좌가, (그림을 한번 보여주면 좋겠어요.) 4장의 내용을 그냥 글씨로만 쓰여 있으니까, 잘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제가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봤습니다. 제일 먼저 본 것이 무엇이냐면 보좌인데,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이었는가? 벽옥 같고 홍보석 같다 그랬어요. 그 보좌에 앉으신 이 주변에는 무지개가 있는데, 그 무지개가 마치 녹보석과 같다고 설명을 하고 있고요. 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는 24 장로가, 24명의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쓰고 앉아 있는데, 그 보좌에서는 번개가 치고 큰 음성이 나고, 우레 소리가 나고, 그리고 그 앞에는 일곱 개의 등불이 있는데, 그 일곱 개의 등불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보좌 앞에는 네 생물이 있는데요. 하나는 사자, 사람의 모양, 독수리의 모양을 한 4개의 생물이 있고, 그 생물들은 각각 6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눈이 가득한 모습을 한 아주 기괴한 모습의 그런 생물들이 그 보좌 앞에 있는데, 그 생물들이 노래를 하는 겁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노래를 하면서, “전능하신 이요.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그렇게 노래하고 찬양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그 보좌 앞에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펼쳐져 있다고 하는데, 바다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그냥 바다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여기서 하나의 그 대야를 그려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성전에 가보면 대야를 만들어 놓고, 물두멍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바다라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수정 같이 맑은 유리 바다가 그 앞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그 24 장로들이 자신의 머리에서 금관을 벗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노래하면서, 만물을 지으셨고, 주의 뜻대로 있었고, 이 세상이 주의 뜻대로 지음을 받고 했다 하는 그런 찬양을 부른다고 하는 그 환상을 요한 사도가 보게 됩니다.
“이 환상의 내용이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라고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벽옥과 같고 홍보석과 같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누군가는 설명을 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한 설명일 수가 없고, 주관적인 설명일 뿐이고, 정답인 설명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것이죠. 하지만 이 가운데서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내용들 몇 개를 선택한다고 하면, 아마도 24 장로는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들을 의미하지 않겠나? 그렇게 추측할 수가 있어서, 신구약을 대표하는 자들이 다 그 앞에 하나님 앞에 모여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해할 수가 있겠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네 생물이 있다고 하는데, 사자가 있고 소처럼 생긴 생물이 있고, 사람처럼 생긴 모습, 그리고 독수리와 같은 것이 있다고 했는데, 아마 사자는 육식 동물이고, 소는 초식 동물이고, 사람 모양은 사람이고, 그리고 독수리는 새니까, 어쩌면 모든 생물들이 그 앞에 다 나와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우리가 아마 추측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장면이 무슨 장면이냐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들과 모든 그 생물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이 그 앞에서 경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특별히 24 장로들이 자신들이 쓰고 있던 면류관을, 금관을 벗어서 주님 앞에 드린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그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 통치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오직 하나님에게만 통치권이 있고, 하나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온 세상에 왕이시라고 하는 그런 고백을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 장면이 요한계시록 4장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장면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지금 이 세상 실제 지금 우리가 매일매일의 삶에서 만나고 있는 실제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매일매일의 실제, 요한 사도가 살고 있던 그 당시, 요한 사도가 만나고 있는 현재의 실제 상황이 무엇이냐 하면, 황제가 다스리고 있고, 로마 황제가 다스리고 있고, 그 로마 황제의 지배 가운데서 힘들게 힘들게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 실제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존재가 누구냐면, 로마 황제인 것이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경제적인 파워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있는 그 로마 황제 앞에 모든 사람들이 굴복해야만 하고 있는 그 상황이 그 요한 사도의 삶 가운데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여기는 로마니까, 로마의 법을 따르라.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했으니까, 이제는 로마 법을 복종하면서 살으라고 하는 그 위협이 존재하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요한 사도가 본 것이 무엇이냐면, 그런데 로마 황제가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와 백성과 온 세상이 만왕의 왕이신 그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진정으로 참된 왕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고, 그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돌려지게 되는, 그리고 24 장로들이 그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 앞에 드리는, 그래서 모든 권세가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이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면,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아무리 이 세상이 험악하게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겁먹지 말라는 말이에요. 이 세상이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을 바라보면 모순 덩어리예요. 이 세상을 바라보면 악인이 판을 치고 있어요. 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고난을 당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황제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악을 행하는 자는 떵떵거리며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죄악을 저지르고, 그리고 약삭빠르고 눈치 빠른 사람은 그때그때마다 상황을 바꿔가면서, 그래서 승승장구하면서 편안히 살고, 악을 행했지만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대접을 받다가 편안하게 백 살까지 잘 살고, 그렇게 잘 살다가 죽는데, 정말 의를 위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은 대우받지 못하고, 고난을 당하고 비난당하며 사는 이 모순과 같은 이 세상에, 주님께서 보여준 환상이 무엇이냐면, 그러나 이 세상이 그런 이 악마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이 아니라, 결국은 주님께서 다스리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최후의 승리를 믿으며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이런 그림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한 번 제가 요한계시록 5장을 그림으로 그렸는데요.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에 일곱 개의 인이 박혀 있는 거예요. 인을 어떻게 칩니까? 촛농을 녹여서, 그래서 그 촛농에 인주를 박아가지고, 그 인이 박히면, 함부로 뗄 수 없고, 오로지 허락을 받은 사람만이, 오로지 그 인의 주인만이 그 두 마리를 그것을 펼칠 수 있는, 그런 닫아놓은 것이 바로 인이 박힌 두루마리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에 일곱 개의 인이 박힌 두루마리가 있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말을 하는 겁니다. 이 닫혀져버린 두루마리를 도대체 누가 떼어서, 그 인을 떼고, 그 두루마리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읽어줄 것인가? “누가 이 내용을 펼쳐줄 것인가?”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사도 요한이 바라보고 보니까, 아무도 떼는 자가 없는 거예요. 저 정말 소중한 두루마리 같은데, 저기 정말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을 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사도 요한이 그것을 보면서 엉엉 울게 울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24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나타나서 사도 요한에게 말하기를, “울지 마라” 왜냐하면 다윗의 뿌리가 있는데, 그 다윗의 뿌리 가운데, 다윗의 뿌리라고 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겠죠. “다윗의 자손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일곱인을 뗄 것이다.”라고 하면서, 어린양을 가리키는데, 그 어린양을 보니까 일곱 개의 뿔이 있고 7개의 눈이 있고, 일찍이 죽임 당한 것 같은, 그런 어린양이 있어서, 그 어린양이 그 두루마리의 인을 떼고, 떼는 것을 보는 것이죠.
24 장로들은 금 대접과 현악기를 가지고 찬양하는데, 두루마리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그 어린 양이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렸고, 제사장을 삼으니, 결국 왕 노릇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찬양을 부르게 될 때에, 24 장로들과 네 생물 근처에 있던 천천만만의 수많은 천사들이 노래를 합니다. “어린양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천사들이 노래를 하고, 또 모든 피조물들이 노래하기를 “보좌에 앉으신 이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찬양하는 노래,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 요한계시록 5장의 그림이 무엇입니까? 두루마리에 그 인을 뗄 자가 없는데 누가 뗐어요? 어린양이 떼었고, 그 어린양이 떼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보여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어린양을 향해서,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린다고 하는 내용이 계시록 5장의 내용입니다.
두루마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두루마리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뗄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죠. 사도 요한이 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무리 저 천상에 화려하고, 아무리 저 천상에 기쁨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내가 들어간다고 하는 확신이 없다고 한다면 괴로운 것이죠. 그런데 그 닫혀 있어요. 두루마리가. 그러니까 너무나도 괴로운 거예요. 과연 내 이름이 거기에 있을까? 그 내용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죠. 그런데 그 두루마리를 누가 폈는가? 어린양 되신, 어린양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두루마리를 펼쳐 보여주십니다.
이 환상은 과거의 일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까?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까?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는, 그 이야기를 주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이야기를, 이 환상으로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시는 환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치 닫힌 것과 같이 사도행전 28장 25절에서부터 2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두루마리가 있는데요. 읽어도 내용을 알지 못하고 아무리 보아도 깨닫지 못하니, 그것이 닫힌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게 지금까지의 모습인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지만,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들은 사람들이 읽지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인이 찍혀서 닫혀 있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거예요. 특별히 누가 그랬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고 성경 지식이 있었고, 모든 내용들을 다 꿰뚫고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무엇이었습니까? 교만의 재료이었을 뿐이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수단이었을 뿐이고, 그걸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는 거예요. 두루마리가 마치 닫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걸 통해서 영생을 얻거나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교만의 재료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정죄의 재료로만 사용되는 그런 모습들이 바리새인들의 모습 가운데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모습이 누구의 모습입니까? 바리새인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사실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우리들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이 목적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그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성경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똑같이 행동한 것이죠. 신학교를 다니고, 신학 박사가 돼도, 성경을 암송을 하거나, 필사를 해도, 일 년에 몇 번씩 성경을 읽고 통독을 해도,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목적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닫혀 버린 성경, 닫혀버린 두루마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시골 쥐의 멘탈리티가 있습니다. 시골 쥐의 멘탈리티. 무엇이냐면 시골쥐하고 도시 쥐가 만나 가지고 서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도시 쥐가 시골에 놀러 와가지고 자랑을 합니다. “넌 어떻게 이런 시골에 사니? 서울에 가면 어마어마한 건물들도 있고, 먹을 것도 많고” 서울 자랑을 잔뜩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골 쥐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서울이 그렇게 좋은 곳이야? 그러면서, 내가 한번 서울에 놀러 갈 테니까, 나를 반갑게 맞이해줘 하면서, 시골 쥐가 서울에 올라갔어요. 근데 그 시골쥐가 서울에 올라가서 무엇을 했을까요?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예요. 서울에 올라가서 쓰레기통을 뒤지고서 하는 말이, 무엇을, 무슨 말을 하냐면, 서울도 별거 없네. 다 썩은 음식이고, 다 먹지 못할 것이고, 더럽고, 정말 좋지 못한 것이 서울이나 시골이나 똑같네 하면서, 실망하고 내려온 겁니다.
우리들도 어쩌면 하나님의 그 생명의 말씀이 주어져 있는데, 우리들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 내 생각이 너무나도 꽉 들어 있어서, 하나님의 두루마리를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보면서도,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내가 생각했던 것만 다시 보면서, 거기서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시는 그 고귀한 말씀들을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면, 닫혀버린 두루마리밖에 안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두루마리를 누가 여시냐면, 바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여시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예수님으로 풀어야 제대로 풀리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의 말씀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누구에 대하여? “내게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구약은 예수님을 예언하고 있고, 신약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보여주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주님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것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그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게 만드시는 우리는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타락하고 철저하게 모순된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입으로는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추악한 모습을 보이는 꼴을 우리가 얼마나 자주 봅니까? 성직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웠던 그 모습들을 우리가 종종 발견을 합니까? 이 세상에 그 누가 완벽한 사람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단 한 사람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타락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탐욕적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린양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씻기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고, 에티오피아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이사야에서의 말씀에서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성령으로 그 들의 마음이 가득 차게 된 것이죠.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참된 믿음으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오늘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저 천상에서 보게 될 놀라운 예배 놀라운 찬양을 그 환상 가운데 본 것을 보게 됩니다. 천상에서 무슨 일이 있을까요? 우리가 천국에 가면 무슨 일이 있을까요? 예배가 있습니다. 찬양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 아이들한테 그런 말 하면, “아이고, 지겨워. 나 천국 가기 싫다”라고 이야기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천상의 예배, 오늘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서 그려주고 있는 그 천상의 예배가 뭡니까? 우리가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아카데미 시상식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 감독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상을 휩쓸 때, 그 자리에서 정말 격한 감동 속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하지 않습니까? 그 업적을 서로가 칭찬하면서, 박수하면서 정말 잘했다고 박수 치는 그 감격적인 그 장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게 돼서, 그 우승자들에게 트로피를 주고, 메달을 선사하는 그 엄청난 그 장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게 될 때,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그래서 정말 기쁨과 환희로 그 장면을 바라보는 그 장면, 그것과 수천 배의 수만 배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영광이, 그 천상 가운데, 죄인을 다시 살리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들이, 주님 앞에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그 엄청난 감격에 자리입니다.
그것이 천상에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나게 될 엄청난 기쁨의 자리가 될 것이고, 우리가 매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 맛을 조금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패하기도 하고, 또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아픔을 당하기도 하고 힘들게 살았지만, 그러나 다시 이곳에 모여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날을 생각하며, 다시 위로받고 돌아가서 힘을 얻는 것이 예배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저 천상의 예배를 소망하면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