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친구가 있습니까? (잠 17:17)

우리 사람들은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을 신의 힘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면서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누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친구가 도움을 줄 수가 있는 거죠. 또 누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가족들이 도움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도와주기는 좀 어려운 것 같아요. 물론 그 상황 가운데서, 정말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들을 보게 되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도와주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경우가 아닐 경우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쉽지가 않을 겁니다.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친구의 도움을 받기가 쉬운 것이죠. 가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잠언서 17장 17절 말씀인데요.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위급한 때는 형제만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형제든 친구든 언제나 위급한 때나 평상시나, 그 어떤 상황이든지, 모두 다 도움이 되고, 사랑을 베푸는 그런 좋은 그런 관계다 하는 것이 오늘 잠언서 17장 17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질문이 하나 떠오르게 되는 거죠. “어떻게, 그러면, 이런 좋은 친구를 둘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런 좋은 가족을 둘 수 있을까?”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어떻게 친구를 사귀는 건가요? 어떻게 좋은 가족을 둘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건 그냥 자연스럽게, 어쩌다 보니까 좋은 친구를 얻게 되는 것이고, 어쩌다 보니까 좋은 가족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친구를 사귀는 것이나, 내가 좋은 가정 가운데, 좋은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은 “그것은 그야말로 우연이다.” 그야말로 내가 우연스럽게, 그냥 내가 어떤 노력을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이 좋게, 어쩌다 보니까, 좋은 친구, 어쩌다 보니까 내가 태어난 곳이 금수저, 어쩌다 보니까, 내가 태어난 것이 좋은 가족들 가운데 태어난 것이고 어쩌다 보니까, 내가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군대에 들어갔더니, 군대 동기가 손흥민이에요. 군대 동기가 김민재예요. 그래서 군대 동기들이, 어쩌다 보니까 연예인을 만나기도 하고, 어쩌다 보니까 유명인을 만나기도 하고, 어쩌다 보니까 평생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좋은 사람들을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런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하필이면 우리 가족의 가족들은 서로 싸우고 다투고, 정말 좋지 않은 가정에 내가 태어났구나. 내가 어떻게 이런 가족에 태어나게 되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정말 어쩌다 보니까, 우리 가족은 정말 사랑이 많고, 정말 도움을 잘 주고, 그래서 정말 행복한 가정이구나. 그러다 보니까, 이 친구를 사귀는 것이나, 가족을 두는 것, 가족을 만나게 되는 이 모든 것들이, 어쩌면 그냥 내 선택이 아니라, 우연의 결과일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저절로 친구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저절로 가족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이 좋은 가족이 되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고 깊은 정을 나누면서, 그래서 좋은 가족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게 될 때, 그때 가족들이 정말 좋은 가족이 되는 것이죠. 어쩌다 보니까 그냥 내가 좋은 가정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그냥 좋은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참 가족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서로 도와주면서 서로를 배려해 주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그런 부단한 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가족이 될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잘 알 수 있나요? 모든 가족이 다 행복한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가족지간인데 서로 원수처럼 살기도 하고, 가족인데 서로 소송을 걸고, 서로 재산 다툼을 하고, 그리고 고발을 하기도 하고, 가족이지만 남남보다 못한 관계로 깨어져버린 가족들이 정말 이 세상에 많이 있는 것을 보면서, 가족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내가 그 가정에 태어났기 때문에, 위급한 때라도 돕는 그런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수많은 노력과 수고와 헌신들 희생들에 의해서, 그런 관계가 만들어져 왔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친구도 마찬가지죠. 친구를 두게 되는데, 그 친구가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 그런 친구가 되는 것인데요. 그 친구를 어떻게 내가 사귀게 되었는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어쩌다 보니까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되어서, 초등학교 친구, 군대를 같이 생활했기 때문에, 군대에서 맞는 그런 군대의 친구들, 아니면 직장을 같이 다녔기 때문에, 직장에서 만난 좋은 친구, 우리 교회도 보니까 직장에서 만난 친구가, 두 사람이 너무 좋아가지고, 너무나도 친하게 지내면서, 우리 교회에서도 같이 신앙생활하는, 그 직장에서 만난 친구가, 교회와, 그리고 평상시 삶 가운데서 계속 그 관계가 이어지는 그런 경우도 있게 되었는데, 이렇게 어쩌다 보니까, 같은 학교, 같은 직장, 같은 군대, 같은 교회를 다녀서, 그래서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겠지만, 그렇게 같은 곳에 있었다고 하는 것만으로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함께하는 시간이라고 하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잘 활용해서,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서로 친구가 되는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친구가 위급한 때라도 친구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도움이 되고 사랑을 베푸는 그런 좋은 친구가 된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친구를 사귀고, 어떻게 하면 좋은 동역자를 둘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농사짓는 것과 비슷합니다. 식물을 기르는 것과 아주 비슷한 것이죠. 식물들을 어떻게 기릅니까? 늘 돌보고 관심을 가지고, 그래서 물을 늘 주면, 그러면 식물들이 잘 자라게 되는 것이죠. 이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주변에 사랑의 물을 뿌리기 시작했을 때, 우리 주변에 사랑을 베풀기 시작했을 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가 만들어져 나가는, 그래서 내가 사랑을 베풀 때, 그 좋은 관계가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도, 가족들이 서로 사랑을 베풀어줄 때, 그 가족들이 정말 사랑이 넘치는 그런 가족이 되는 것이고, 친구들도 서로 사랑을 베풀고, 정말 많은 도움을 주고, 그리고 여러 가지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갈 때, 그럴 때 좋은 관계가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이 아주 하나님의 법칙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둔다고 하는 게 바로 하나님의 법칙인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겠는가? 어떻게 좋은 가정이 될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좋은 형제자매가 되고, 어떻게 좋은 우리 친척들이 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내가 먼저 그들을 향해서,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내가 먼저 사랑을 베풀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 때, 그럴 때, 좋은 친구의 관계로, 좋은 관계가 만들어져 나간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하면서, 우리의 주변 가운데, 사랑을 베풀고 손을 내미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 아내가 어떻게 화초를 잘 기르는가 했더니, 저는 화초 기르는 것을 잘 안 보잖아요. 집에서 나와버리면, 제 아내가 화초를 어떻게 기르는지 잘 모르니까, 평상시에는 잘 몰랐는데, 요즘에 이 화초를 여기다 가져다 놓으니까, 그 화초에 얼마나 정성을 쏟는지를 잠깐 보게 되더라고요. 아침에 와가지고 물을 계속 줍니다. 이제 가자, 그러는데, “갑시다” 해놓고, 또 계속 물 주고 있어요. 다 됐다고 하면서, 또 내려가다가 또 물 주고, 그 화초 하나하나 물이 말랐나? 물을 너무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세심히 살펴보면서, 계속해서 그 화초 하나하나 물을 주고 관리하고, 잎을 따주고, 그리고 순 치기를 해주고, 가지도 잘라주고, 모든 걸 다 해줄 때, 이 화초들이 잘하는 것이지, 그냥 저절로 자라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 사람의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인 거죠. 어떻게 좋은 친구가 만들어지는가? 어떻게 좋은 형제자매가 되고, 좋은 가족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아니하면서, 아무런 힘도 쓰지 아니하면서, 그냥 좋은 친구가 생겨졌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좋은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면서, 그렇게 소망하고 있는 것은, 헛된 소망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은 참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용사 자체가 아주 훌륭한 용사이기도 했지만, 다윗이 혼자만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무엘서에 보면 다윗 주변에 수많은 용사들이 있었고, 그 수많은 용사들이 다윗을 도와주었는데, 마치 자신의 목숨을 다 내어주면서까지, 다윗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목숨을 내놓는 그런 용사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특별히 아주 눈에 띄는 그런 하나의 일화가 있는데요. 어느 날 다윗이 베들레헴을 저 앞에 둔 상태에서, 블레셋 민족과 대치하고 있을 그 상황 가운데, 다윗은 자기 고향 베들램에 가보지도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자신의 고향을 블레셋 사람들이 정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바로 지척에 두고 있는 그 베들레헴을 바라보면서, 이 다윗의 마음 가운데 간절한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저, 내 고향 베들레헴 저곳에 가면, 내가 어렸을 때 놀던 바로 그곳이, 내가 지내던 곳이 바로 저 베들레헴인데, 그 베들레헴에서 마시던 그 우물물을, 언제 내가 다시 한번 마셔볼 수 있겠는가? 한탄하면서, 그렇게 자조가 섞인 그 말을 내뱉은 그 순간에, 그 이야기를 들은 3명의 용사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주, 우리의 다윗, 지도자가 저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3명의 용사들이 무장을 하고 블레셋 진영을 쳐들어갑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블레셋 군대가 진 치고 있어서, 잘못 들어가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3명만 들어가면 힘이 달려서, 죽을 수도 있는 그 위험한 상황 가운데, 놀랍게도 세 용사는 블레셋 진영을 쳐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들과 싸우고, 그리고 그 베들레헴의 우물우물에서 물을 떠다가 다윗에게 주는 거예요. “힘내세요” 하면서, 주는 거예요. “여기 베들레의 우물물이 있으니, 마시고 힘내세요.” 그렇게 바치는 거예요. 지난, 작년에 제가 성지순례를 가게 됐었는데요. 첫날 밤중에 도착하고, 하룻밤 숙박을 한 다음에, 이제 두 번째 날부터 관광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관광을 하게 돼 있는데, 그런데 버스를 타고 이렇게 쭉 가는데, 그래서 버스 타고 이렇게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데, 저 바깥에 뭐가 하나 글자가 보여요. 글자가 딱 보이는데 뭐가 보이냐면 이런 게 보였어요. ad david regis cisternam이라고 하는 라틴어가 써있는 글자를 딱 봤어요. 이게 뭐냐? “다윗 왕의 우물” 야, 저곳에 가서, 내가 물 한번 떠먹어 봐야 되는데. 그런데 거기 안 서고, 그냥 쑥 지나가버리더라고요. 그래서 차 속에서, 지금 저 사람 모자도 보이죠. 저 차 속에서, 저 다윗의 우물을 찍어야 되겠다고 찍었는데, 저거밖에 못 찍었어요. 물은 안 보여요.

다윗은 정말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동역자들, 다윗이 데리고 있던 부하들은 어떤 부하였는가? 다윗을 위해서라고 한다며 목숨을 내놓고, 다윗을 위해서 헌신해 주는 그러한 세 용사들이 있었는데요. 어떻게 이 세 용사들은 다윗을 위해서 이렇게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윗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목숨을 내놓을 정도까지 되었을까요?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겁니다. 그냥, 다윗이 우리 대장이니까, 대장이니까, 그냥 한 게 아니라, 그것은 명령도 아니고, 다윗이 요청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 이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가 다윗을 위해서 가자”라고 하는 마음이 세 사람이 똑같이 든 거예요. 왜? 아마도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다윗이 그 사람들을 돌봐준 거죠. 갈 곳 없이 헤매던 사람들을 한 명씩 한 명씩 거두고, 아둘람 굴속에 찾아온 억울한 사람들, 여러 가지 힘들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와서, 억울한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때,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그를 위해서, “내가 너를 위해서, 내가 가서 싸워주마.” 그를 위해서 싸워주기도 하고, 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윗이 최선을 다하고, 그동안 다윗이 이 부하들을 위해서, 최선의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면서, 모든 것을 다 친절을 베풀어 주게 되었을 때, 이 세 용사들의 마음 가운데 감사함이 남아 있는 거예요. 다윗은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던가! 나에게 이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위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투를 벌여주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가서 당장 해결해 주고, 정말 자신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아깝지 않게,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섬기는, 그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다윗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을 친구와 같이 여기고, 그래서 최선의 헌신을 다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좋은 친구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른 데 방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부터 조금씩 조금씩 사랑을 베풀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서, 내가 먼저 그들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내가 먼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일들을 해나가기 시작할 때, 그러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친구가 생기고, 그리고 우리 동료가 생기고, 가족들도 따뜻한 가족으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인생의 길 가운데, 나는 외롭고,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나는 왜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가? 나는 왜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왜 다 떠나가 버리고 마는가?”라고 생각이 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그만큼 사랑의 물을 덜 뿌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게서 사랑의 향기가 나고, 사랑의 물을 뿌려주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지만, 그러나 마음을 차갑게 닫아버리고, 마음을 닫아버리고, 손을 내밀지 않고, 아무런 눈길조차 주지 않고, 숨어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외로운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제가 예전에 미국에서 목회하던 가운데 어떤 분의 장례식을 치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니었고 그냥 한인이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던 어떤 한국 사람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어떤 장례를 치러야 되는데, 장례를 집전할 목사님이 없다고 해서, 그래서 어떻게 연결이 돼서, 장례식을 치르러 가게 되었는데요. 장례식을 집전하는데 조문객이 아무도 없어요. 그 필라델피아에서 살고 있은 지 몇십 년이 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해 줄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정말 외롭고 쓸쓸한 장례식을 그렇게 치른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그분이 어떻게 살았는가? 살면서 아무하고도 관계를 하지 않고, 아무하고도 연락을 하지도 않고, 그냥 혼자만 살아간 거예요.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우들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외롭게 쓸쓸하게 그렇게 장례식을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안타깝고 참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들도 우리들의 마음들을 계속 닫아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사랑이 끊이지 않는, 그런 친구들, 위급한 때까지 있는 그런 가족들이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내가 먼저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우리가 베푸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손해가 아닌 거예요. 내가 사랑을 베푸는 것은, 내 물질을 써야 되는 것이고, 내 시간을 써야 되는 것이고, 내 모든 노력을 써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허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것은 허비가 아니라, 더 엄청난 친구를 얻는, 그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아주 아주 오래전에 불렀던 복음성가가 하나 있는데요. 무슨 복음 성가가 있었냐면,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그런 찬양이 있었어요.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닢, 움켜 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이게 이상하죠. 이상한 거예요. 이상해요. 내가 썼는데 더 풍성해지는 거, 내가 도움을 주었는데, 더 풍성해지는 거예요. 그게 사랑의 역설이고, 친구의 역설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친구를 사귀고, 가족들을 사귀고, 그래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그래야 우리가 정말 혼자 살아가는 그런 어리석음이 아니라, 함께 믿음으로 같이 승리하는 그런 삶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일들을 잘하지 못하는데요. 친구를 사귀는 것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친구를 사귀려고 했다가, 씁쓸한 경험을 한 적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친구가 되겠다고 해서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겠다고, 가까이 다가가기도 했고, 또 우리 가족을 위해서, 내가 헌신도 하고, 우리 친구들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었지만, 그러나 항상 좋은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너무나도 씁쓸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친구가 되고 싶어서 다가갔지만, 돌아온 것은 친구가 아니라, 배신을 당하는 그런 경험들을 혹시 해보셨습니까? 나는 친구로 생각하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고, 내 속살을 내보여주었는데, 그런데 오히려 가시에 찔린 경험들을 해 보셨습니까? 그냥 멀리 좀 떨어져 있으면 괜찮았었을 텐데, 친하게 지내다 보니까, 너무 가까이 지내다 보니까, 그러니까 배신을 당하는 일들이 생기는 거죠.

마치 고슴도치처럼, 좀 약간 떨어지면 괜찮은데, 가까이 다가가면, 고슴도치의 그 가시에 찔려버리는 거죠. 그것처럼 우리가 그냥 조금 약간 떨어져서 사귀면, 아무 문제없었을 텐데, 친하게 지낸다고, 가까이 가고, 친구가 되겠다고 가까이 갔다가, 그래서 오히려 가시에 찔리게 되는, 그런 씁쓸한 경험들이, 우리들한테 많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선뜻 다가가기가 어려운 것이죠. (고슴도치는 사실은 안 찔린다고 합니다. 친구들끼리 있을 때는 가족들끼리 있을 때는 가시를 내리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데 그런 경험들이 우리들한테 많이 있는 거예요.

셰익스피어라고 하는 작가가 쓴 율리우스 시저라고 하는 그런 소설이 있는데요. 로마의 황제와 원로원과 그런 권력 암투에 대한 소설인데 사실을 근거로 했다고는 하지만은, 아무튼 창작이 많이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 율리우스 시저 로마의 황제가 나중에 원로원의 반대에 의해서 쫓겨나가게 되고, 그리고 원로원이 함께 뭉쳐서, 그 원로원에서 시저를 죽이는 일에, 그 원로원들이 다 일어서서 시저를 죽이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 시저가 죽는 가운데, 시저가 보면서 깜짝 놀란 게 하나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자기를 죽이겠다고, 반역의 대열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누구였냐면, 자기가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친구 “브루투스”라고 하는 친구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과 함께 대열에 서서 자신을 죽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율리우스 시저 황제가 죽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et tu brute?” “부르투스 너마저도. 브루투스야” 하면서, “네가 나를 죽일 수 있냐?” 하면서, 그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하는 아마 셰익스피어의 창작이겠죠. 그런 경험과 같은 일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있는 거예요.

예전에 정말 단짝이었는데 원수가 되어버리고, 정말 늘 같이 붙어 다니고 친했었는데, 둘도 없는 원수가 되어버리는, 그런 경험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어서, 그런 씁쓸한 경험들을 할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다시는 내가 친구를 안 사귀겠다. “정 주지 않으리라.” 다시는 내가 내 마음을 주지 않겠다. “다시는 내가 깊이 사랑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그런 다짐을 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우리 성도님들도 종종 그렇습니다. 제가 성도님들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떤 성도님들이 이런 얘기를 해요. 종종 그렇게 말씀하시는 성도님들이 계신데, “제가 목사님 하고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요.” 목사님 하고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왜 그래요? 그러면 목사님하고 가까이했다가 상처받고, 그래서 목사님 잃어버리고,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그냥 멀리서만, 거리를 두고, 그렇게 지내고 싶다고, 그렇게 말을 해서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좋다는 말인지, 헷갈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라 보고 놀랐다고 해서 솥뚜껑도 갖다 내버리면 안 되는 거죠. 자라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솥뚜껑도 같이 내버릴 게 아니라, 그런 씁쓸한 경험들이 있다고 해서 포기할 게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셔서, 저의 이 완악한 마음을 바꾸어 주시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게 해 주옵소서. 닫혔던 마음을 치유하여 주셔서, 사랑을 베풀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좋은 친구를 사귀고, 좋은 가족을 만들고,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의 친구들은 완벽한 친구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친구는 좋은 것 같으면서도, 늘 결정적인 순간에는 배신을 할 수밖에 없고, 이 세상의 친구는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기도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 친구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친구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것이죠. 요한복음 15장 12절에서부터 15절 말씀에 보면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구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배신을 당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참된 친구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월남전 때 있었던 이야기라고 해요. 베트콩들을 섬멸하기 위해서 전투에 들어간 소대가 있었습니다. 지금 저쪽에 베트콩이 있다고 해서, 이 소대원들이 전진을 해서, 지금 공격해서 섬멸하려고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숨어 있던 베트콩들이 쫙 나타나서 역습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 가운데서, 베트콩들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소대장은 빨리 후퇴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숫자도 적고, 뭐 아무튼 지형지물 상태도 그렇고 모든 게 다 불리하기 때문에 후퇴라고 해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총을 쏘면서 막 후퇴를 하는데, 그런데 막 총알이 빗발치니까, 무사히 안전하게 후퇴를 한 것이 아니라, 어떤 병사 한 명이 총탄을 맞은 거예요. 그러니까 소대장이 그 병사의 상태를 보니까, “아, 이 병사는 소용없구나. 이 병사는 살릴 수가 없구나.”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이 병사를 데리고 가겠지만, 근데 총탄에 맞아서, 이 병사는 아주 심각한 부분에 맞았기 때문에, 데리고 가봤자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안, 이 소대장은 그냥 포기하고, 그냥 다 나머지 사람 무조건 후퇴하라고 명령을 내린 거예요.


그런데 후퇴하다가 어떤 한 병사가 소대장님한테 이야기를 한 거죠. “소대장님, 저는 저 병사 놔두고 못 가겠습니다. 제가 저 병사 업고서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소대장이 이야기를 했어요. “안 돼. 그냥 후퇴해. 저 병사 데리고 가봤자, 어차피 죽은 목숨이야.” 그냥 후퇴하라고 얘기를 했어요. 하지만 이 병사가 이 전쟁 속에서 소대장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 그냥 뛰어가서, 그 병사를 들쳐업고 그리고 후퇴하기 시작한 겁니다. 전장에서 소대장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그건 사형감인데, 그런데 이 친구가 그 병사를 업고서 후퇴하기 시작한 거예요. 결국 여차저차해가지고, 겨우 겨우 무사히 빠져나와가지고 안전하게 후퇴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병사를 안고 업고서 후퇴를 했지만, 안타깝게 그 병사는 죽었습니다. 심각한 부위에 맞았기 때문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소대장이 그 병사를 향해서 혼을 냈어요. 내가 뭐라고 했냐고, “하마터면, 너까지 죽을 뻔했잖아.” 하면서, 엄청나게 혼을 내고 있을 때, 그 병사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소대장님, 맞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가서, 이 병사를 들쳐 매고, 그리고 후퇴할 때, 이가 이 애가 나한테 한 말이 있어요. 뭐라고 얘기했냐면, ‘다른 사람은 안 와도, 너는 올 줄 알았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을 같이 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를 한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이 세상의 친구들은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위기의 순간 가운데 도망갈 수 있습니다. 가족들도 위기의 순간에 우리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들의 문제와 아픔과 질고를 쥐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아예 포기해 버리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살 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과 은혜를 나누어 주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그런 결단들을 해야 될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할 때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주님의 자녀로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