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 거짓말을 말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려울까요? 나름대로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진리를 말라는 게 쉬울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리를 말하게 되면, 진실을 말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들의 민낯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더러운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한다고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죠.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은 철저하게 타락한 존재입니다. 죄성으로 가득한 것이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좋은 면을 보여주고 싶겠지만, 그러나 필연적으로 좋지 않은 면들이 많이 있는 겁니다. 정말 부끄러운 수치스러운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실수하고, 쉽게 분노하고, 쉽게 넘어지고, 또한 탐욕적이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하고, 정말 온갖 더러운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늘 나타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은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고, 진실을 드러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아픈 것일 수밖에 없기에, 진실을 말하는 게 쉽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진실을 말한다고 하면, 진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기도 하고, 진실이 드러나게 되면 정말 부끄럽기 때문에, 진실이 드러나게 되면 수치스럽기 때문에, 그렇게 진실을 가리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진실을 말하면 사람들이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저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플라톤이 한 말이 있는데, 그 말 가운데 하나가 무슨 말이 있냐면, “진실을 말하는 자는 그 누구보다도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공감이 되십니까? 진실을 말하게 되면, 진실을 말한다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미워하게 되고, 싫어하게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러한 예는 멀리 가서 찾아볼 것도 없습니다. 바른말을 하고, 진실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주고, “그렇구나” 그렇게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말했던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는 것이죠. 정말 작심하고 결단해서, 정말 문제들을 이야기하면, 그 문제들을 이야기한 사람이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심지어 고발을 당하게 되고, 처벌을 받게 되기도 하고, 잘못한 사람은 멀쩡한데, 잘못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처벌을 받게 되는 그런 일들이 우리 삶 가운데서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늘 그래 왔던 것 같아요.
성경에도 보면 이런 예가 있습니다. 헤롯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동생의 아내를 가로채는 일을 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을 해버린 것이죠.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아내를 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헤롯 대왕이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이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버리고 만 것이죠. 결국에 이 세례 요한은 처형을 당하게 되는 잘못은 헤롯 대왕이 했는데, 그 잘못에 대해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회개를 촉구했던 세례 요한이 오히려 처형을 당하게 되는 이런 모순된 일들을 성경에서 보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일들이 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세례 요한과 같이 행동하기보다는, 진실을 알면서도 눈감아 버리고, 진실을 알면서도 입을 닫아버리고, 가지고 악을 행하고 있는 권력자들 앞에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그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아합 왕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합 왕을 향해서 미가야 선지자는 진실을 이야기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 아합 왕은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당신의 나라에 선지자가 없습니까? 선지자에게 좀 들어봅시다. 선지자에게 좀 이야기를 들어보고, 우리가 무슨 일을 결정해 봅시다 하는데, 이 아합 왕은 미가야 선지자를 불러서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 22장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이 미가야 선지자는 일부러 나쁜 거 이야기하겠어요? 일부러 좋은 일이 있는데도, 나쁜 이야기만 하겠어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이야기하고,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사실을 이야기하면,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 미가야 선지자를 미워하는 것이죠. 왜 나에게 나쁜 예언만 하느냐? 왜 나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이야기만 하느냐 하면서, 진실을 말하고 있는 사람을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모습이 아합 왕에게서 있었던 것이고요. 이번에도 전쟁에 나가면 죽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예언을 하게 되자, 아합 왕은 이 미가야 선지자를 감옥에 쳐 넣어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열왕기상 22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잠언서 12장 17절 말씀에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속이는 말을 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말해주어야, 진실을 말해주어야 의가 드러나게 된다. 참된 것을 이야기해줘야, 사실을 이야기해줘야, 진실을 이야기해 줘야, 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참된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진실을 이야기했는데요. 나단 선지자 같은 경우는, 다윗 왕 앞에 나아가서 다윗 왕의 죄를 지적해 주었습니다. 다윗 왕을 향해서, 당신이 바세바를 취하고 그 남편을 죽인 것이 하나님 앞에 죄악이라고 하는 사실을 담대하게 이야기한 것이죠.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내가 이 진실을 말하다가 다윗이 나를 죽인다고 해도 나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진실을 이야기하게 될 때, 놀랍게도 다윗은 그때 헤롯 대왕처럼 반응한 것이 아니라, 아합 왕처럼 반응한 것이 아니라, 다윗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기 시작한 것이죠.
진실을 애써 감추었었고, 진실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했었고, 자신의 그 더러운 모습을 일부러 꼭꼭 감추어 두어서,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 다윗, 이제 적법하게 그 과부가 된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고, 그리고 그 남편은 전장 최전방에 보내서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상대방의 화살에 맞아 죽었던, 그런 깔끔하게 모든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도 자신이 저질렀던 그 죄를 모르고, 모든 것이 완벽한 완전 범죄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었던 그 다윗을 향해서, 나단 선지자가 죄악을 드러내 이야기해 준 것이죠. 사실을 이야기해 준 것이죠. 그때 그 다윗은 자신의 죄를 바라보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었고, 사울처럼 망할 수도 있었던 그 다윗이 그 진실을 듣게 되었을 때에,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그 파렴치한 죄를 저질렀던 그 다윗도 용서받게 되고, 회복되게 되고, 그리고 의를 이루게 되는, 결과적으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용납함을 얻게 되는 그런 구원을 얻게 된 이야기를 우리는 성경에서 살펴볼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한국말 성경에 번역이 돼 있는데요. 정확한 번역을 한다고 하면, “참된 것을 하여”가 아니고, 그 앞에 “말”자를 하나 집어넣어서 번역을 해야,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이해가 쉬운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랑 안에서, in love,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 speaking the truth, 진실을 말해주어서, 진실을 이야기해주어서, 그래서 모두가 다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만들어라 하는 권고가 에베소서 4장 15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권고는 무엇입니까? 우리 성도들이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 가족들이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진실을 서로서로 이야기해줘야 된다 이 말이에요. 진실을 이야기해주고, 진실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진실을 이야기해야 되는가? “사랑으로” 진실을 이야기해 주라는 거예요. 정죄하는 태도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책망하는 태도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금 우리 남편이 이렇게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되는데, 내 아내가 이렇게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되는데, 우리 성도님이 이렇게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되는데, 안타까워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실을 이야기해주어서, 그래서 그 진실을 듣게 될 때 서로가 자신의 죄악을 버리고, 잘못했던 것에서부터 돌이켜서, 이제는 좀 더 거룩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성숙의 길로 걸어가게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에베소서 4장 15절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우리들의 허물을 잘 모릅니다. 마치 우리의 얼굴에 무엇인가 더러운 게 묻어 있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볼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인 잘못과 죄악들을 잘 모릅니다. 때로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죠. “괜찮아. 이건 아무 문제가 아니야. 이것은 할 수 있는 일이야. 이것은 내 권리야. 이것은 내가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리는 것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야.” 내가 악을 행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을 향해서 늘 그 악을 정당화하는 일들을 하는 것이죠.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늘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내가 나쁜 짓을 쉽게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악한 일을 그냥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심어놓은 그 양심이,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채찍질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함부로 악을 행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악을 행하는가? 우리들의 양심을 향해서 먼저 설득 작업을 하는 것이죠. “괜찮아. 네가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를 찾는 거야.” 우리의 양심을 향해서, 우리가 스스로 속이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를 속이면서, 설득을 시키면서, “네가 화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 이것은 정당한 거야. 네가 빼앗겼던 권리를 찾는 거야. 네가 가만히 있으면, 너는 바보가 될 거야. 네가 이런 상황 가운데서 그냥 침묵하고 있으면, 그러면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릴 거야. 그러니까 너의 권리를 찾는 정당방위인 것이고, 정당하게 화를 내는 것이고, 의로운 분노인 것이지, 이것은 괜찮은 것”이라고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남의 것을 가져갈 때도 그냥 가져가지 않습니다. “이 정도는 가져갈 수 있는 거야. 이건 큰 거 아니야. 이거는 바늘에 불과해.”라고 그렇게 설명하면서 설득시키는 겁니다. 이 정도는 괜찮은 거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이것을 가져갈 권리가 있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도 속이고, 다른 사람도 속이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잘못을 하면서도, 우리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을 알 것 같은데, 사실은 우리가 망각해 버리고 있는 겁니다. 잘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하고 있으면서도, 잘못하고 있는 것을 잘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정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시고, 또한 교회라고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가정으로 우리를 만들어주시고, 큰 가정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로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는 큰 가정과 같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부를 때 형제님 자매님 이렇게 부르잖아요? 우리 형 동생 하면서, 누나 동생 하면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또 나이 드신 분한테는 할아버지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장로님이라고 하는 말이 할아버지란 말이에요. 할아버지. 헬라어로 장로라고 하는 말은 할아버지, 할아버지 연세 많으신 분을 의미하는, 가정, 가정의 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우리 교회가 무엇을 하는 것인가? 서로에게 거울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죠. 당신의 얼굴에 묻어있는 그 더러운 모습을 한번 봐라. 나가기 전에 거울 한번 들여다보라고 그렇게 진실을 말해 주어서, 그래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그리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을 말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함부로 정죄해도 괜찮다고 하는 말이 아니고, 잘못한 것을 보면 무조건 그렇게 잘못에 대해서 지적해도 괜찮다고 하는 말씀이 아니고요. 이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하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사랑으로 해라” 이 말이에요. “사랑으로 진실을 말해라.”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빌립보서 2장 1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서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권면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누군가 잘못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지적해 버리고 책망해 버리고 정죄하라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악의 모습을 보았을 때,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하늘의 영광 버리시고, 하나님의 형체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신 것처럼, 사랑으로 겸손하게 회복시키기 위한 일들을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교회는 서로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줄 수 있는 그런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되겠고, 우리 가족들도, 우리 가정도 그렇게 서로 사랑으로 세워질 수 있는 그런 믿음의 가정, 진리를 사랑 가운데 말할 수 있는 귀하고 복된 가정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진리를 말한다고 하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정의를 추구하는 일에 마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편들어야 할 것은 악한 자나 불의한 자의 편에 설 것이 아니라, 손해를 당하더라도 진실의 편에 서야 되고 진리의 편에 서야 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진리의 편에 서서, 정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참된 것을 증언하기보다는 거짓을 증언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뻔히 모든 사람들이 다 아닌 걸 아는 데 맞다고 우기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저건 아니라고 하는데, 이건 괜찮다고 우기는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우리 성도 중에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성도들은.
그런데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왜 우리 사회에서 우리 삶 가운데서 그런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고 있는가? 진실이 아닌 거짓의 편에 서고, 거짓의 증인들이 되어 가고 있는가? 우리 사회가 모든 게 정치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정치화되어 버려서, 우리 편인가 우리 편이 아닌가라고 하는 이분법으로 편 가르기가 이루어져 버렸고 그래서 모든 것이 진영 논리로 평가되면서, 선악을 결정할 때 이것이 옳고 그름을 결정할 때 진실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에 유익한가 우리 편에 유익하지 않는가로 결정을 하는 정치의 노예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정치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회복해야 되는 것이고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진영 논리에 따라서 말을 바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참된 것은 참이라고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선의 편에 서고, 악의 편에 서지 않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그 말씀이 이 잠언서의 말씀이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진실의 편에 서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실의 편에 서게 된다고 한다면 이런 모양 저 저런 모양으로 위협이 가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진실을 이야기하면, 다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죠. 그래서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먹고살기 위해서 진실에 대해서 침묵해 버리고, 거짓의 편에 서야 하는 그런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정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났었죠. 제사장들과 권력자들이 선동해서, 예수님에 대하여 불리한 증언을 하라고 하는데, 그 증언마저도 서로 맞지 않아서 재판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거짓 증인으로 나와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게 되는 일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데요.
원하기는 우리 성도님들은 참된 것을 말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혹은 회사를 다니고 혹은 공무원을 하면서,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거짓 증언을 하도록 강요받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때로는 당근으로 때로는 채찍으로 우리를 그렇게 몰아간다고 할 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진리를 말하고 참된 편에 설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짓말을 하게 될 때는, 선량한 피해자들이 양산되기 때문이고, 그러한 선량한 피해자들이 너무나도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의 편에 항상 서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아요. 우리의 삶 전체가 휘둘릴 수 있을 것 같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려워 보일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넘어지기가 쉬운데, 그때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하고, 우리를 위해서 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날마다 날마다 겸손하게 또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