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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경과 여성 안수 – 최갑종 교수

성경과 여성안수

“사도 바울은 여성안수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최갑종(백석대학교 신약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성경은 여성안수를 허용하고 있는가, 금하고 있는가? 장로교단 목사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웨스터민스터의 신앙고백을 따라 “성경을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무오(無誤)한 영감 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성경에 근거하여 어떤 분은 성경은 여성안수를 금한다고 보고 있고, 다른 어떤 분은 성경은 여성안수를 허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동일한 성경관(聖經觀)을 고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안수문제와 관련하여 왜 이처럼 의견을 서로 달리하고 있는가?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직하게 말해서, 여성안수문제는 누가 성경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거부하고 있는가를 묻는 성경관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관련된 성경본문을 어떻게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에 관한 성경해석학적 문제이라는 것이다. 여성안수문제를 성경관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해석학적 문제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신구약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명시적으로 “여성안수를 하라”든지, 혹은 “여성안수를 금하라”고 직접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이 “서로 사랑하라”, “성령을 따라 살라” 등의 말씀처럼, 직접 명시적으로 “여성안수를 하라”나 혹은 “여성안수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고 한다면, 여성안수문제는 직접 성경관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명시적인 성경본문을 그대로 받아들여 순종하려는 자를 높은 성경관을 가진 정통보수주의자로, 명시적인 성경본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적으로 대하려는 자를 낮은 성경관을 가진 진보자유주의자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여성안수문제와 관련하여 어느 곳에서도 직접 명시적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여성안수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관계없이, 이점은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안수반대자들이 종종 자신들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4:34과 디모데전서 2:12나, 여성안수지지자들이 종종 자신들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3:28이나 고린도전서 11:11의 경우를 보자. 먼저 전자의 경우를 보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34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치고 있고, 디모데전서 2:12에서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성안수반대자들은 이 구절들과 관련하여, 여성이 목사로 안수를 받게 되면 자연히 교회에서 말하게 되고,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게 되기 때문에, 여성안수를 허용하게 될 경우 이 말씀과 근본적으로 배치된다고 본다. 그러나 어떠한 여성안수반대자들도 교회 예배중에 여성가대원들이 찬양을 부르거나, 여교사가 남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여전도회에 헌신예배 중에, 남자교우들이 참석하여 있을 경우에도, 여전도사가 설교하거나 성경을 강론하거나, 혹은 신학교에서 여교수가 목사후보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이 본문들과 배치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직하게 이 본문들을 접하는 자는 이들 본문들이 여목사나 여전도사나 혹은 여교사나 성가대원이나 여교수를 구분하여 누구는 되고, 누구는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구분하거나 선을 긋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이 본문을 해석하여 그렇게 적용하려는 사람이지 본문 자체는 아니다. 본문자체는 특정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거나,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여성안수반대자들도 성경본문을 명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 성경본문을 해석하려고 하는 점은 그들이 고린도전서 11:2-16이나 16:20을 접근할 때에 쉽게 들어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16에서 여성들이 교회에 나올 때 머리에 수건을 쓸 것을 말하고 있지만, 여성안수반대목회자 중 그 누구도 공 예배시에 여성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참석하라고 명하지 않으며, 16:20에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인사를 하라고 명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자기 교인들을 향해 주일 예배에 참석하려 올 때마다 서로 입맞추라고 명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도 이들 교훈들이 당시 고린도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나 문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문화와 상황이 서로 다른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그대로 적용하기 힘들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고린도전서 14:34의 본문의 경우에는 이 본문이 당시 고린도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나 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종종 갈라디아서 3:28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의 본문이나, 고린도전서 11:11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아니하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 하느니라”의 본문에 근거하여, 성경은 여성안수를 허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이 본문들이 남녀의 성차별을 반대하고, 남녀의 동등성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즉 여성의 성직안수를 반대하는 것은 일종의 성차별에 해당되고, 그리고 이들 본문들은 성차별을 반대하여 남녀의 동등한 권익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본문들은 여성안수를 지지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들 본문들이 아무리 남녀의 성차별을 반대하고, 남녀의 동등한 권익을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 본문들로부터 여성안수지지를 끌어내는 것은 본문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돌아가는 것이라기보다도, 본문으로부터 유추해 낸 해석학적 주장임이 분명하다. 남녀의 동등성과 여성안수문제가 서로 연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양자는 똑같은 문제는 아니다. 여성안수를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더 심한 성차별을 만들 수 있고,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분야에서 여성의 권익과 동등성을 확장시킬 수 있다.

이처럼 여성안수문제는 성경이 직접 가르치는 명시적 교훈이 아니고, 여성안수를 반대하든, 찬성하든 관계없이, 특정한 성경본문으로부터 유추하거나 적용하려는 데서 나오는 일종의 해석학적 문제이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여성안수문제와 관련하여 누가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묻기보다도, 누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제 필자는 여성안수문제와 관련하여 종종 이슈가 되고 있는 몇몇 바울서신들에 대한 해석학적 시도를 할 것이다. 성경해석자로서 필자의 주된 관심사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들 성경본문들이 무엇을 말하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들 성경본문들을 오늘의 우리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자는 자연히 이 본문들을 처음 쓴 사도 바울이 이들 본문들을 처음 접하게 되는 독자들에게, 왜, 무슨 의도로, 무엇을, 어떻게 썼는가, 그리고 독자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이들 본문들을 어떤 의미로,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초점이 주어질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이들 본문들을 여성안수문제와 관련시킨다면, 이들 본문들이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있는지, 아니면 찬성하고 있는지에 초점이 주어질 것이다.

2. 이슈가 되고 있는 성경본문의 주석

여성의 안수문제와 관련해서 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본문은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몇몇 본문들이다. 여성안수반대자들은 자신들의 반대근거를 주로 고린도전서 11:2-16, 고린도전서 14:34-35, 디모데전서 2:8-15의 본문들에 두고 있으며, 반면에 여성안수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주로 갈라디아서 3:28, 고린도전서 11:11-12과, 그리고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여성사역자들에 관한 본문들에 두고 있다, 과연 이들 본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들 본문들로부터 과연 사도 바울이 여성안수를 반대하였다든지, 아니면 찬성하였다든지 하는 주장을 끄집어낼 수 있는가?

2.1. 고린도전서 11:2-16

고린도전서 11:2-16의 본문이 공(公) 예배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차이가 있다거나, 교회 안에서 남자는 여자보다 상위 계급에 속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은 남자나 여자가 예배에 참여하여 다 같이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지만(14:23, 26, 29 참조)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당대 사회나 문화에 비추어 수치스럽지 않는 적절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참석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즉 여자는 당대의 관습에 따라 긴 머리를, 반면에 남자는 짧은 머리 스타일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 중에 나타나고 있는 남자는 여자의 “머리”(κεφαλή)라는 말이 남자는 여자의 지배자(“ruler”)라는 것을 뜻하는지, 남자는 여자의 근원(“source”)임을 뜻하는지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 안수 반대자들은 전자를, 여성 안수 지지자들은 후자를 지지하고 있지만, 본문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가부장적(家父長的) 종속관계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머리”라는 말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사용되고 있고, 남녀가 다 같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고, 주안에서 남자나 여자는 서로 동등하다는 것과, 다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근원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나 있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말로부터 여자에 대한 남자의 우선권이나 지배권을 찾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렇게 할 경우 당장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란 구절도 동일하게 보아야하고, 그렇게 될 경우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종속되어 삼위 하나님 교리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바울이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 안에서 남녀가 아무런 차별 없이 똑같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해서, 여자 교우들이 당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에서 정숙한 여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헤어스타일까지도 포기하고, 남자와 같은 짧은 헤어스타일을 가져 여자의 신분을 떠나 남성화함으로써, 예배의 정숙성과 질서를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 스타일, 복장문제 등으로 인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예배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 전체가 지역사회로부터 부끄러움과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이 무엇 때문에 공예배시에 남자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기도나 예언에 참여하려고 하였는가?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기 전까지 바울 당대 헬라-로마 사회의 이원론적인 여성관의 영향 아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당시의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 남성들에 의해 지배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의 열등한 신분을 벗어나서 남성처럼 독립적이고, 합리적이고, 영적인 신분에 도달하는 것을 이상(理想)으로 제시하고 있는 플라톤의 사상도 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또한 고린도여성들 중에 신전에 헌신한 여자들은 남성화된 것으로 간주되어, 남자들처럼 얼굴을 가리는 수건을 쓰지 않아도 되는 관습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다수(多數)를 접하고 있었던 이들 여 성도들이,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성차별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인종적인 차이도, 종과 자유인의 신분상의 차이도 없이 모두 한 형제자매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신분을 가지게 된다는 자유의 복음을 받았을 때(갈 3:28; 4:4-7; 고전 12:13; 고후 5:17), 그리고 그 복음과 함께 성령을 선물로 받았을 때,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살고 있던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 구조를 뛰어넘어 모든 면에서 남자와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즉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통해 헬라 여인들의 최고 이상인 남성과 같은 영적인 존재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공예배시에 여성들의 표시인 긴 머리나, 머리에 수건 쓰는 것을 거부하고, 남자들과 꼭 같이 짧은 머리나,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기도와 예언을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고린도교회 여성들이 바울의 복음과 성령 체험을 헬라의 플라톤적 이원론의 구조에 따라 잘못 이해하고 행동하려 할 때, 그래서 그들의 행동이 당시의 사회구조나 문화에서 부끄러움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16을 통해 이를 시정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바울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고린도 여성교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 그 자체보다도, 오히려 그들의 행동 배후에 있는 동기일 것이다. 즉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문화와 역사를 초월하여 지켜져야 할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라기보다도, 오히려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주신 여자의 신분 그 자체를 외면하고 남자와 같이 되려고 하는 비복음적인 동기와 그로 인한 교회공동체의 수치와 선교장애 때문일 것이다.

2.2. 고린도전서 14:34-35

바울은 고린도전서 14:34-35의 핵심부분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안수를 반대하는 자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성경구절로 제시한다. 반면에 여성의 성직안수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설명하는데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 2004년 『목회와 신학』지에 여성안수문제와 관련된 글이 여러 차례에 걸쳐 실렸었는데, 고린도전서 14:34-35의 해석문제는 늘 논쟁의 한 축을 차지했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인권확대와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미국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는 같은 책 5월호에 실린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pp. 56-71)와 11월호에 실린 “서창원 목사의 ‘여성안수 허용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에 답함”(pp. 186-199)에서 사본학적인 이유를 들어 고린도전서 14:34-35을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본문으로 단정함으로써 아킬레스건을 피해갔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34-35이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사본학적인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들을 볼 때 그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사본학적인 증거들은 34-35절이 본문의 진정성(眞正性)을 옹호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에서 여자들이 설교나 가르치는 것은 할 수 없고, 그 대신 예언, 방언, 기도 및 찬송 등은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무런 조건을 제시함 없이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을 통해 바울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서 일체 말하지 말고 잠잠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이 본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이 본문은, 바울이 이미 고린도전서 11장 5절과 39절에서 여자들이 예배시에 남자와 마찬가지로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과 정면적으로 대립될 뿐만 아니라, 바울과 함께 사역한 여러 여성 지도자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브리스가, 뵈뵈, 순두게, 유니아, 눔바 등 여러 여성사역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체 말하지 않아야 했다면 그들이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구절을 통해서 바울이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교회에서 일체 말하지 말고 잠잠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는 식으로 쉽게 결론을 내려서는 아니 된다. 또한 이 구절로부터 바울이 어떤 것은 말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말할 수 없다는 식의 인위적인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보아서도 아니 된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어떠한 인위적인 선을 긋거나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조건 없이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서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 여자들을 향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바울이 이 구절에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를, 여 성도들, 특별히 가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으킨 분쟁과 예배시의 무질서를 경계하고 예방하기 위함으로 보고자 한다. 바울이 여기서 여성 일반 전체를 두고 말하고 있기보다 남편이 있는 기혼 여성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지역에 복음을 전할 당시 헬라-로마-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며, 남자들이 있는 공중 장소에서 여자들이 함부로 나서거나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의 활동영역은 가정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갈라디아 3:28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의 차별이 철폐되고 동등하다는 바울의 복음이 고린도지역에 선포되었을 때, 이와 같은 바울의 복음은 특히 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가져다주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이 사도 바울로부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자신들의 사회와 가정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 곧 남녀가 동등하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고, 방언, 예언 등 성령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고, 부부생활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다는 가르침을 받았을 때(고전 7:2-6), 그들 중에 일부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남녀의 동등권을 남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세우신 남여의 차이는 물론 결혼과 부부생활까지 거부하고, 심지어 가정과 교회를 혼동하여 교회 안에서까지 남자와 꼭 같이 행동하려는 극단적인 상황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즉 그들에 의해 가정과 교회에서, 특별히 가정 교회의 공예배 때에 당시 사회에서 금기로 여겨지고 있는 통념을 깨고,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바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에게 여자들은 자기 남편들이 함께 있는 교회의 모임 중에는 다른 남자들에게 말하지 말고, 잠잠하고, 오히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으라는 특수한 교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1:34-35의 본문을, 바울이 모든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 와서 집으로 떠날 때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규범적인 명령으로 주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머리 문제나 입맞춤의 문제처럼 특수한 문화적, 사회적 상황과 관련하여 교회 예배 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교회 몇몇 기혼 여성도들에게 주는 특수한 명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이 전후 문맥에서 계속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교회 예배의 질서이다. 그는 14:34-35의 본문 앞에 예배 질서에 대한 교훈을 주는 문단을 두고 있다. 즉 문단이 시작하는 14:26에서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문단이 끝나는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라고 말하면서, 교회의 예배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아무리 예배시에 어떤 개인에게 찬송과 말씀과 계시와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교회 회중에게 덕이 되지 않으면 그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할 때도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으며(14:27-28), 자신에게 계시가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주어졌으면 그는 잠잠하여야 한다고 말한다(14:30). 그런 다음 그 구체적인 실례로써 교회에서 여자들이 잠잠하여야 할 교훈을 주고 있다. 그리고 40절에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하면서 14장을 종결한다.

바울이 14:34-35에서 교회에서 여 성도들, 특별히 결혼한 여 성도들은 공예배시에 잠잠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여자로서 할 수 없는 방언과 예언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서 공예배의 질서는 물론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는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여성들은 자신들의 성령 체험을 통해서 자신들은 이미 모든 영역에서 남녀의 역할과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자들로 자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고린도교인들이 교회 공예배시에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았다고 한다면, 바울은 이러한 교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교회나 갈라디아교회나 그밖에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 동일한 교훈을 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이 공예배시에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한다면 교회와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 성도들이 전혀 교회 질서를 혼란하게 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그들을 향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4:34-35절에서 바울이 마치 시대와 장소와 여건을 초월하여 여자들은 교회에서 무조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14:35에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라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부터, 공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가 결혼한 여 성도들이라는 것과, 이들이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놓고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남자 교우들)에게 질문을 제기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집에서 자기 남편과 더불어 사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것을, 교회에서 다른 남자들로부터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교회와 자신의 남편을 다 같이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본문에서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관하여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있다. 선행 문단이 방언과 예언과 계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점을 보아 아마도 교회 예배 중에 방언과 예언 혹은 계시, 혹은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을 때 이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 소란을 피우면서 질문들을 던진 것 같다. 바울이 여성도들이 제기한 질문은 자신들의 남편들에게 물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을 보아 방언, 예언, 계시보다도 오히려 말씀에 대한 가르침일 가능성이 크다. 만일 그렇다면 여인들의 질문은,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예배 중에 말씀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어떤 무식한 여교우가 주제 넘는 질문을 던져 예배를 방해하는 일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하여야 할 것은 예배 중에, 왜 남자들이 아닌, 여인들이 질문을 제기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울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수 있다고 한 점을 보아, 우리는 적어도 이들 여교우들의 남편들은 자신들의 아내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는데, 여인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그와 같은 질문을 제기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바울 당대 헬라, 로마 유대여인들은 남자들보다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거나, 제한되어 있었다. 유대 여인들은 회당이나 학교에서 율법을 배우는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헬라 로마 사회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공교육의 내용인 수사학의 교육도 일반적으로 여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고대 헬라, 로마, 유대 사회에서 여자들은 오늘 현대사회의 여성들과 달리 남자들에 비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대체로 남자들에 비해 이해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이나 능력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 성도들이 예배 중에 터무니없는 질문도 제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여자들은 본성적으로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과 능력이 뒤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그 당대의 사회와 문화적 관습 아래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의 여인들이 대부분의 정보와 지식을 가정에서 자신들의 남편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의 여 성도들도 교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는 가정에 돌아가서 자신들의 남편에게 물으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하는 당대의 사회적 문화적 규범에서 볼 때, 교회 여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일종의 성적 유혹으로 간주될 만큼 자신은 물론 자기 남편에게도 대단히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에 호소하여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유지되어야 할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여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교회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추어져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한편으로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남녀의 동등성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 자유가 신자들이 살고 있는 당대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서 부도덕한 일로 간주될 때는, 그래서 가정과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될 때는 그 자유의 사용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안수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2.3. 디모데전서 2:12-15

바울은 디모데전서 2:12-15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 문제가 되고 있는 12절의 “여자가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의 정확한 문법적인 의미는 바울이 언제 어디서든 항구적으로 여자가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보다,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리킨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여성 일반 전체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가정을 가지고 있는 특수한 기혼여성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문에서 여성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헬라어 단어, “구내”(γυνὴ)가 일반적으로 기혼여성을 가리키고 있으며(딛 1:6; 딤전 3:2,12; 5:19), 서로 부부관계에 있었던 아담과 이브를 등장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혼여성에게 직접 관련된 해산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왜 에베소교회의 기혼여성들에게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울 것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가? 본문에 대한 일종의 거울독법(Mirror-Reading)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에서처럼 에베소교회 여 성도들에게도 어떤 문제들이 있었으며, 그래서 바울이 이와 같은 교훈을 줄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에베소교회 여성도들에게 있었던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임을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여성도들로 하여금 일절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우도록 할 것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에베소교회의 여성들 가운데 거짓된 교훈에 빠져 교회 안에서까지 남자를 잘 못 가르치려고 하거나 남자를 주관하려는 자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디모데전서에 거짓된 교훈에 대한 경계가 많이 나타나고 있고(딤전 1:3-7, 19-20; 4:1-3; 6:3-5,20), 그리고 여자에 대한 교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이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사도행전 19:28-37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에베소 지역의 여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여신 아데미 제식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위를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 할 때, 에베소교회의 기혼 여성들이 이러한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여기서 여자는 일절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울 것과 남자를 가르치는 일과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사실이, 여자가 남자 일반 전체에게 일절 순종하여야 하는 것과 남자를 일체 가르치거나 주관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아니면 결혼한 여성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일절 순종하고 남편을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일을 금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러한 교훈의 근거로서 서로 부부관계에 있었던 아담과 이브를 실례로 들고, 해산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직접적인 대상이 일반여성 전체나 일반남성 전체를 가리키기보다, 오히려 결혼한 여성, 혹은 과부가 된 여성이, 마치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아 그릇되게 아담을 인도한 것처럼, 잘못된 교훈을 가지고 자신의 남편이나 다른 남자를 가르치려고 하거나 주관하려고 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바울이 여기서 여자들은 남자에게 일절 순종하고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고린도교회에서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가르친 경우에서처럼,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남자를 가르치고 지도한 적지 않은 여성 사역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정면적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에베소교회 여 성도들 중에, 고린도교회의 여 성도들처럼, 복음이 가져다 준 자유를 남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세운 부부관계의 질서까지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자들이 있었던 것과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정과 교회 예배의 질서가 무너져 혼란이 일어났고, 급기야 이 문제는 교회의 당면 문제로 부각되었던 것 같다.

바울이 볼 때 이들 여 성도들이 가르치려고 하는 내용들이 분명히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남편이나 다른 남자들을 잘못 가르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자기 남편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고, 남편보다 이해력과 판단력이 더 정확하였으며, 그래서 선한 목적으로 자기 남편이나 다른 남자의 이해를 도와주려고 시도하였다고 한다면, 그럴 경우에도 바울이 이들의 행동을 잘못된 행동으로 금지하였을까? 바울이 12절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한 다음, 13절 이하에서 이유 접속사와 함께 구약 창세기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담이 아닌 여자 이브가 꾀임을 받고 죄에 빠진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당시 에베소교회 여 성도들이, 마치 이브가 아담을 가르칠 위치와 능력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먼저 유혹을 받아 아담을 죄에 빠지게 한 것처럼, 남편이나 다른 남자를 가르칠 위치와 능력도 받지 못했으면서도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이처럼 본문이 에베소교회 여성도들 중에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질 수 있는 교육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잘못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남편이나 다른 남자를 그릇된 길로 오도하려고 하는 여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디모데전서 2:12-15의 본문을 에베소교회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있는 여성도들에게도 바울이 그와 꼭 같이 적용을 시켜서, 여자는 무조건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아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바울이 브리스길라로 하여 아볼로를 가르칠 수 있도록 한 사실(행 19:24-26)과 관련해서 볼 때 스스로 자기 모순을 범하고 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

2.4. 갈라디아서 3:28

바울은 갈라디아서 3:28에서 바울 당대 고대 헬라-로마-유대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세 가지 장벽, 곧 인종적, 신분적, 성적 장벽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별이 무너졌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해소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동등권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창조(갈 6:15; 고후 5:17)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사실상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옛 사회나 문화의 구조에서 서로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의 구조(갈 6:15절, 고후 5:17)에서 서로를 새롭게 보아야 할 것을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

여성안수 반대자들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 구절이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종의 관계를 포함하여 남녀의 신분과 사역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가져다주는 본문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구원문제에 있어서 바울이 인종적, 신분적, 성적 장벽과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려고 한다. 물론 구원문제가 이 본문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새로운 수직적 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새로운 수평적 관계까지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영혼 구원문제를 포함하여 인간의 신분과 삶의 모든 영역을 새롭게 하는 전인적인 것이다. 사실상 갈라디아교회의 근본 문제는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의 삶의 정체성과 삶의 스타일인 율법, 할례, 유대인의 절기, 음식법 등을 따를 것을 요구한 데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요구를 인종적, 신분적, 성적 차별과 장벽을 철폐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 단적인 예가 갈라디아서 2:11-21에 나타나 있는 안디옥사건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합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에서 베드로가 처음에는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음식 먹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것을 대수롭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위선적인 행위로 간주하여 공중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안디옥 사건은, 복음은 인간의 삶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남녀의 문제와 관련하여 말한다면,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차원에서만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데 한정되지 않고, 남녀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제거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소한 음식 먹는 문제를 포함하여, 이방인에게 그 어떤 불리한 조건을 가져다주는 일체의 차별을 없애는 전반적인 전환을 가져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녀의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복음은 여성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여하한 차별도 배제하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가져다주는 복음의 축복과 은사들을 남녀가 똑같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2.5.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여성 사역자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 여성 사역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로마서 16:1-2에서 그는 겐거리아교회의 일꾼 뵈뵈를 로마교회에 천거하면서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뵈뵈가 여성인 점은 뵈뵈를 가리켜 “우리 자매”라고 부르고 이는 점에서 분명하다. 우리말로 뵈뵈에게 붙여진 “겐거리아 교회의 일꾼”이란 호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기 일꾼으로 번역된 헬라말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는 일꾼(servant), 조력자(helper), 집사(deacon), 사역자(minister)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디아코노스”라는 호칭을 “사역자”가 아닌 “집사”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 집사는 오늘 우리 교회에서 통용되는 집사는 아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일곱 집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데반, 빌립 등 일곱 집사들은, 헬라인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단순히 봉사의 직무만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도직 사역도 하였다. 바울은 이 말을 자신의 호칭으로도 사용하고 있다(고전 3:5; 고후 3:6; 6:4; 11:23; 엡 3:7; 골 1:23-25). 뵈뵈가 일반인이 아닌 바울과 같은 목회자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 말 성경에 “일꾼”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노스”가 본문에서 여성명사가 아닌 특수한 사역자를 지칭하는 남성명사로 사용된 점에서도 확인된다. 실제로 1세기 말엽에 익나티우스(Ignatius) 감독은 그의 필라델피아 서신에서 이 말을 교회의 대표자를 가리키는데 사용하고 있다(10:1; 11:1). 따라서 뵈뵈를 동일한 명칭이 붙여진 남성사역자들과 구별하여야 할 언어학적, 신학적 이유가 없다. 이점을 감안한다면, 뵈뵈를 겐거리아 교회의 대표자나 목회자로 간주해도 결코 무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더구나 고대 사회에서 편지의 전달자는, 때때로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발신자를 대신하여 편지의 내용까지 설명해 주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바울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편지 중의 하나인 로마서를 보낼 때 뵈뵈를 자신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 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자로 선정하였다고 하는 것은, 뵈뵈가 로마서를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신학적 목회적 훈련을 받았거나 아니면 바울의 스페인 선교를 준비하는 특별한 사명을 맡겼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바울은 로마서 16:3-5에서 브리스가와 그녀의 남편 아굴라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브리스가를 그녀의 남편보다 먼저 말하고 있다. 이것은 브리스가가 자기 남편인 아굴라보다도 더 적극적인 혹은 더 중요한 사역을 하였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바울이 브리스가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가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와(롬 16:20), 디도(고후 8:23)에게 동일한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브리스가가 사실상 바울과 함께 전도, 가르침, 설교, 예언 등의 복음 사역자로 일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그들의 가정에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하는 점은(롬 16:5; 고전 16:19) 사실상 브리스가가 목회사역을 하였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누가가 사도행전 18:26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로가 아블로를 데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가르쳤다고 하는 사실도 브리스가가 복음전파 및 목회사역을 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바울은 로마서 16:7에서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친척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두 사람이 서로 부부관계에 있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들 부부가 다 같이 “사도”로 호칭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말 개역판 성경은 “저희는 사도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이들 부부가 사도가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헬라어 본문은 분명히 이들이 사도들 중에 탁월한 자들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KJV, NIV, NRSV등 여러 영어 번역도 이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우리가 이들 부부를 사도로 보아야 한다는 점은 바울이 바로 이어 이들이 자신보다 먼저 예수를 믿었던 자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아마도 그들은 12사도 반열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사도급 인물이겠다. 그들은 본래 사도들처럼 많은 교회에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여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우리가 바울의 회심 연대를 주후 32-34년경으로 잡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들은 이미 예수 생전에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며, 오순절의 성령강림에 참여한 120명의 성도들 중에 포함되었거나,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500여 성도들 중에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물론 여기서 바울이 말한 사도라는 말이 열두 사도보다 포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행 14:4,14; 고전 12:28; 엡 4:11; 살전 2:7). 그렇다고 해서 이 사도라는 호칭은 일반 신자들에게 붙여질 수 있는 호칭은 결코 아니다. 적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복음전파 사역에 동참하는 전문적인 사역자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여성인 유니아가 평신도가 아닌 사도라는 특별한 직책을 가진 자로 불리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비록 이 구절이 여성의 안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고 하더라도, 초대교회 안에 이미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을 한 사도급의 여성 사역자가 있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바울 당대 헬라-로마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접촉하기가 힘들었던 사회적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부부선교사는 때때로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3. 주석의 적용과 나가는 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의 서신에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위치와 관련하여 소극적인 교훈과 적극적인 교훈 등 양면의 교훈이 있다. 그렇지만 여성의 성직 안수를 직접적으로 부인하거나 찬성하고 있는 본문은 없다. 그러므로 여성의 성직안수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대하든, 찬송하든, 그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그것은 성경의 직접적인 교훈에 근거하기보다 여러 성경 구절로부터 유추해 낸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의 해석학적인 귀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해석학적 귀결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 신약성경은 어느 쪽을 더 지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는가?

필자는 관련된 본문의 주석에 근거하여 여성의 성직안수를 반대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성경해석이 여성의 성직안수를 지지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성경해석보다 설득력이 약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지만, 여성 안수를 비성경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성경 본문들, 이를테면 고린도전서 11:2-15, 고전 14:34-36, 디모데전서 2:8-15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가 여성의 성직안수를 반대하는 가르침을 주지 않고 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고,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교훈으로부터 바울이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있다는 결론을 유추해 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에게 예배에서 이미 기도나 예언에 참예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바울의 선교사역에 여러 여성사역자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정면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면서 어떻게 교회에서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으며, 바울과 함께 복음의 동역자가 되거나 교회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고전 11:2-15, 고전 14:34-36, 딤전 2:8-15의 본문들을 여성안수 금지를 위한 규범적인 본문으로 활용할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의 여성도들 중에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거나 곡해하여 남자와 여자의 구분, 남편과 아내의 질서까지 부정하여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함은 물론, 선교의 문까지 닫게 하는 위험을 가져오고 있는 자들에게 준 바울의 특별한 교훈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들 구절들을, 예배시에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이나, 혹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권면처럼(롬 16:16; 고전 16:20),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정황에 비추어 해석하여 그 의미와 메시지를 오늘날 적용시키려하지 않고,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구절들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사실상 오늘 교회 안에서 여성이 가르치고 말하는 모든 행위들은 일체 중지되어야 한다. 교회는 여성가대원, 여주일학교교사, 여전도사들을 일체 세우지 않아야 할 것이며, 신학교는 여신학도를 입학시키지 않아야 함은 물론, 목사 후보생을 가르쳐야 하는 여성신학교수들을 세워서도 아니 된다. 여성들은 교회에 올 때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당부하여야 하며, 교회 안에서 여성도들은 어떤 경우에서든 말하지 말고 잠잠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교훈을, ‘여자들은 예배시 머리에 수건을 쓰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바울의 권면처럼, 오늘우리 교회 안에서 그대로 적용시켜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마치 필자가 이들 구절들을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 구절들을 통해서도 모든 시대에 적용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으로부터 예배시에 여자가 갖추어야 할 마땅한 태도에 대한 메시지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권면으로부터 성도간의 우의와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모든 여성도들이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고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교훈으로부터도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선포되는 남녀의 구분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 지켜져야 할 남녀의 질서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필자의 주장은, 마치 우리가 어떤 성경구절은 시대와 문화에 매여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곡해해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성경 구절을 문화-사회학적으로, 혹은 역사-문학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도전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마치 예수의 인성에 대한 강조를 신성에 대한 도전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잘못된 것이다. 예수의 인성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예수의 메시야적 인격과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성경에 대한 역사-문화적, 문화-사회학적 접근 없이는 성경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해석학적인 관점과 함께 우리가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울의 어떤 특수한 서신의 구절들을 해석할 때, 이 구절들을 바울의 일반적이고 통일성 있는 교훈과 연관시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교훈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바울은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는 비논리적이고 비체계적인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느끼는 모순과 비일관성은 어떤 점에서는 바울의 문제이라기보다도, 접근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필자는 바울신학을 제시하면서 전체 바울신학을 묶는 어떤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중심 사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은 “창조”, “타락”, “구속”, “재창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입각한 종말론과, 이 종말론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그의 기독론과 성령론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인간과 세계 역사의 모든 문제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고 있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 문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남녀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사회의 문제들이 아담의 범죄로 타락하였고, 죄로 오염되었으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속되었으며,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는 새 창조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새 창조는 단순히 아담의 타락이전으로 복귀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락이전보다 더 고차원적인 새로운 창조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원문의 뜻은 ‘새로운 창조’)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할 때, 이것은 그야말로 옛 창조와 대비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6:15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원문의 뜻은 ‘새 창조’) 만이 중요하니라”라고 선언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이 새 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을 갈라디아서 3: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라고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 문제를 첫 창조나 구약시대의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여성의 역할 문제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보아야할 것을 가르쳐준다. 사실상 바울은 그의 목회와 선교사역에 있어서 그가 살고 있던 헬라와 로마와 유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위주의 문화를 뛰어넘어 적지 않은 여성사역자들을 동참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 창조를 이미 부분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이 새 창조는 “아직” 기다리고만 있어야하는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 비록 그 완성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겠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오심으로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옛 창조의 관점이 아닌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보았던 것은 비단 사도 바울만이 아니다. 베드로전서 저자와 계시록저자와 히브리서저자로부터도 동일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구약에서는 모든 제사직분이 남성인 제사장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제사직분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남자나 여자의 구분 없이 이제 모든 사람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히 10:19)고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저자도 “우리[남자와 여자를 다 포함하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았다”(계 1:5, 5:10),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었다”(계 20:6)라고 말하고 있으며, 역시 베드로전서 저자도 “너희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 12: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할 때도 모든 신자가 제사장임을 전제하고 있다. 루터를 위시하여 종교개혁자들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강한 부정적인 교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 역시 바울의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새 창조를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옛 세계와 함께 공존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새 창조세계)와 “아직”(옛 창조세계)이 함께 공존한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비록 어떤 것이 “이미”의 관점에서 보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아직”이라는 세계와 문화와 역사의 구조를 함부로 뛰어넘을 수는 없을뿐더러 오히려 때때로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고린도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교우들 중에 적지 않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성령 체험을 통하여 자신들이 마치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면서 부부생활과 결혼까지 거부하고, 교회 안에서 당시 고린도교회가 처해 있었던 문화와 사회적 정황을 혁명적으로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구조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것은 결국 가정의 파괴와 교회의 무질서는 물론 교회의 선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여성교우들에게 특수한 교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원리적으로 여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차별 없이 동등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자들이 누릴 수 있는 원리적 자유 됨이 특수한 교회의 상황에서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경우, 그것은 유보되거나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에 관한 바울의 “이미”와 관련된 교훈과 “아직”과 관련된 교훈이 서로 상치가 될 때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훈을 우선시하여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와 교단과 그리고 교단이 서 있는 시대적 정황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아직”에 대한 교훈을 “이미”에 대한 교훈의 빛 아래서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12장, 14장,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여성의 역할과 위치에 관한 부정적 교훈은 갈라디아서 3:28, 고후 5:17, 고린도전서 12:13의 긍정적 본문에 비추어 해석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옛 창조가 새 창조의 빛 아래서, 특수적 교훈이 보편적 교훈 아래서, 과거가 미래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른편으로 돌아가는 시계가 왼편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처럼, 옛 창조는 새 창조를 향해, 아직은 이미를 향해 가고 있지 그 반대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후 1세기의 헬라-로마-유대의 남존여비와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여성의 문제에 관하여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미” 앞서 나갔다고 한다면, 이미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일반사회보다 “아직” 뒤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부록≫

여성안수문제와 관련하여 여성안수반대자를로부터 종종 제기되는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질문 1. 구약에서 제사장은 오직 남자에게만 주어졌고, 목사는 어떤 의미에서 구약의 제사장직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여성이 제사장직인 목사가 될 수 있는가?

답변: 구약에서 선지자가 이스라엘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변자이라고 한다면,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백서들의 대변자였다. 그들의 주된 사역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중보자적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약의 중보자적 제사장 사역은, 마치 구약의 모든 속죄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화목적, 속죄적 죽음을 예표하였던 것처럼, 장차 이스라엘백성은 물론, 전 인류를 대변하는 대제사장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 잠정적 사역이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장은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직을 완전히 수행함으로써 사실상 성취되고 종결되었다.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계시고 있으며, 우리는 누구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인종과 신분과 성별을 초월하여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히 10:19-22). 그래서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을 가리켜 “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계 1:6; 5:10; 벧전 2:9). 종교개혁자들이 로마캐톨릭 교회의 사제직을 반대하여 “만인제사장직”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남성목회자만이 제사장직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이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질문 2. 예수 그리스도는 공사역기간 동안 남자만이 12제자로 선발하였으며, 이들이 나중에 신약교회의 기초를 딲는 “사도들”이 되었기 때문에, 사도직을 계승하고 있는 목사는 당연히 남자만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답변: 예수 그리스도가 왜 남자만을 12제자로 뽑았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신약성경은 이점과 관련하여 어느 곳에서도 명쾌하게 답을 주지 않는다. 예수님 자신이 남자이므로 3년 동안 늘 함께 동거동락하며 순회전도사역을 감당하여야 할 제자 중에 여성을 포함시킬 경우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당대의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상황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정확하게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성들도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였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처형을 당할 때 남성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지만 몇몇 여성들이 십자가의 현장을 끝까지 지켰으며, 예수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도 여성들이었고, 부활한 예수님을 제일 먼저 목도한 자도 여성이었고,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워진 자들도 여성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의 목격자와 증인으로 세워진 사도직은 그 후대에 계승되지 않고, 제일 마지막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로 종결되었다(고전 15:8-9). 그럼으로 예수님 당시 사도직은 오직 남자에게만 주어졌고, 목사가 사도직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만이 목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정당한 주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질문 3. 남자인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여자인 이브가 나중에 아담의 배필로 지음을 받았으며, 여자가 먼저 뱀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지었기 때문에,이브의 후손인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은 부당하지 않느냐?

답변: 창세기 2장에 따르면 이브가 아담을 통해 배필로 지음을 받은 것이 분명하고,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이브가 먼저 뱀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창세기 1:26-28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똑같은 권한과 사명을 받았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이새의 아들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먼저 난 것이 필연적으로 축복의 우선권과 지배권을 가지지 않았다. 또한 여자가 남자의 “배필”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남자에 대한 여자의 피종속권(被從屬權)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은 종종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배필”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49:25; 출 18:4; 신 33:7,26,29). 그리고 창세기 3장에 나타나 있는 여자에 대한 뱀의 유혹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남자인 아담의 권위에 대한 유혹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유혹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타락이전에는 이브가 아담에게 종속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타락이 아담과 이브 사이에 있었던 사랑과 조화의 관계를 갈등과 불평등의 종속관계로 바꾸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이브를 가리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하였지만, 범죄한 이후에는 선악과를 먹게 된 책임을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한 여자”(창 3:12)에게 돌렸다. 이브는 “남편을 지배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남편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게 되었고”, 거기에다 더 많은 해산의 고통을 지게 되었다(창 3:16). 이처럼 아담과 이브,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불평등과 갈등 및 종속관계는 하나님이 세우신 본래의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인간의 타락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 이것은 아담과 이브, 남자와 여자 사이의 갈등과 종속관계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타락의 문제가 해결될 경우 언제든지 해소될 수 있는 잠정적인 것을 뜻한다. 그럼으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 여자의 차별 없이 “새로운 창조”가 되었고(고후 5:17), 인종과 신분과 성별의 차이가 없는 새 창조시대, 새 언약시대가 도래한 상황에서, 여전히 옛 창조 시대에 타락을 통하여 주어진 것을 근거로 하여 여성의 사역을 제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질문 4.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인간을 남녀로 창조하심으로써, 설사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 본질과 신분에 있어서 남녀가 서로 동등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기능에 있어서는 이미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가? 따라서 남자에게 주어지는 목사의 역할을 여자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다고 말할 수 없지 않느냐?

답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남자가 여자가 되려고 하거나, 여자가 남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창조질서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목사의 직분이 남자에게만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 옛 창조질서에서는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질서에서 정당화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목사의 주된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와 교회의 권징과 성찬의 집례 및 봉사와 선교와 교육 등이라고 할 때, 이들이 남자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창조질서에 속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본질(신분)과 직능은, 나무와 열매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엄격하게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신분과 대통령의 직능이 어떻게 서로 나누어질 수 있는가? 대통령의 신분이 없으면 대통령의 직능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한편으로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의 신분으로 창조되었음을 인정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어떤 직능은 남자에게만 주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결국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여자의 신분을 제한하거나 차별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신약성경은 오순절 성령이 남녀의 구분 없이 꼭 같이 주어졌고, 남녀가 꼭 같이 예언하고, 기도하고, 꼭 같이 복음전파사역에 참여하였다고 말함으로써, 근본적으로 남녀의 직능상의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오늘 교회 밖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과학, 군사 등 모든 영역에 있어서 남녀의 직능상의 차별을 철폐하고 있다. 그런데 남녀의 차별을 철폐하는데 사회보다 더 앞장을 서서 선도해 나가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성경이 분명히 말하지도 않는 성직에 있어서 남녀의 직능상의 차별을 계속 두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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