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부활이 있는가? (고전 15:12-19)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전체 다 읽지 않고, 그중에 일부를 읽었는데 15장의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절에서부터 11절 말씀까지는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수많은 증인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오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잠을 자게 되면 그다음 날 일어나게 되는 것처럼 죽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 부활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것은 마치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썩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땅에 떨어져 그리고 그 씨앗이 썩어지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래서 싹이 나고 그리고 잘하고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결론이 무엇이냐면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게 서서 항상 주의 일을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가 지금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면서 이 15장의 말씀을 쓰고 있는데요. 이렇게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왜 이 말을 고린도 교회에 전해 주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사이에 부활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져 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부활에 대한 소망들이 점점 희미해지는 겁니다. 부활이 없지 않은가? 부활이 없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다가 끝나는 거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고린도 교회의 마음 가운데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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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부활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기대하기는 곧 죽은 자가 살아날 거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할 거라고 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던 이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한 명씩 두 명씩 죽어가는 겁니다. 특별히 초대교회의 박해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 그것이 아니더라도 자연으로 죽게 된 사람 등등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게 되고 어머니를 잃게 되고, 때로는 배우자나 또는 자녀들을 잃게 되는 그런 슬픈 일들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는데요. 그럴 때 이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그러나 부활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다시 산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면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부활이 있겠지 다시 살아나겠지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안 살아나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살아났으면 좋겠는데, 안 살아나는 겁니다. 사랑하는 자가 죽었는데,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날 날을 고대하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살아나는 경우가 단 한 번도 없는 겁니다. 그럴 때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절망감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이 없는 거 아닐까? 아무리 기다려봤자,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이야기는 “허망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스며들기 시작할 때, 바울 사도는 이 편지를 써서 그래서 부활이 확실하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질 것을 권면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12절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복음을 전했을 때 우리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를 비롯해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나왔던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그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그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왜 우리들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하느냐라고 하는 그런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살아나셨는지 살아나지 않았는지 우리가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목격한 사람 계신가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2천년 전 일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리고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는 목격자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 당시에는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살고 있던 이 당시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좀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나갈 필요가 있겠는데요. 지금 고린도 전사가 쓰여진 이 시기가 언제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나서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쓰여진 책이 쓰여진 편지가 바로 고린도 전서 고린도후서입니다. 시간적으로 따지면 한 15년 길게 잡아봤자 20년 이후에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목격한 사람들이 아직도 태반이나 살아 있을 때, 지금 이 고린도 전서에 쓰여진 말씀들, 그리고 성경에 쓰여진 이 말씀들이 진짜냐 가짜냐를 확인할 수 있는 그 시점에 쓰여진 책들이 쓰여진 편지들이 바로 우리가 읽고 있는 이 편지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엄청난 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대부분의 다른 모든 종교는 교주에 관한 이야기들이 쓰여진 책이 언제 나오냐면 300년 400년 500년 혹은 심지어 1천 년 뒤에 쓴 책들을 보고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불교의 경우에 석가모니가 활동한 것은 주전 600년 경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때 쓰여진 책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300년 400년 500년 뒤에 쓰여진 책에 의해서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그것을 이야기를 듣고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고, 마흐메트가 죽은 지 몇백 년 뒤에 쓰여진 책에 의해서 이슬람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복음서의 글들과 선지서의 글들이 언제 나왔냐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불과 얼마 되지 않을 때, 쓰여진 편지들이 바로 이것이고,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해서 증명해 줄 수 있는 목격자들이 아직도 살아 있어서, 찾아가서 만나서 물어보면 알 수 있는 그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가운데서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하는 사실을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다녔습니다.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말을 믿는 게 맞은가요? 의심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좀 질문이 애매합니까? 만일 누군가 말하면서, 나는 죽었었는데, 죽어서 내가 천국도 보았고 지옥도 보았고 그런데 내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라고 누군가 이야기하면, 그 사람의 말을 믿어주는 것이 맞습니까? 의심하는 것이 맞습니까? 의심하는 게 맞아요. 누가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고 말하면, “아, 죽었다 살았났나 보다”라고 믿어주는 게 맞습니까? “에이, 그럴 리가?” 의심하는 게 맞습니까? 의심하는 게 맞아요. 왜 그렇죠? 우리의 상식에 반하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학적인 진리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의심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목사님이 말하면 무조건 믿어줘야 합니까? 아니요.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잘 할 줄 모르는 순수한 어린아이가 말을 하면 믿어줘야 합니까? 아니요. 누가 말해도, 누가 말해도 그것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믿지 못할 것인지 우리가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선한 사람이 이야기해도 가짜 뉴스는 가짜 뉴스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 도둑놈이 이야기를 해도 그 사람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진리는 진리인 것이지,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서 가짜 뉴스가 진실이 될 수가 없고, 진실이 가짜 뉴스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그래서 내가 죽었을 때 천국도 보았고 지옥도 보았다고 말하면, 일단은 의심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과는 어긋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과학적인 진리와는 정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 진리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미개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죽으면 슬퍼요. 죽으면 절망적이에요. 죽으면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이에요. 왜?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의심 많았던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의 몸에 옆구리에 나 있는 그 상처에 손을 넣어보고 예수님의 손에 나 있는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내가 믿지 못하겠다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은 도마가 아주 의심이 많은 아주 믿음이 연약한 정말 별 볼 일 없는 그런 하찮은 존재였다고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겁니다. 우리 누구든지 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단순히 그 사람의 주장만을 들을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연예인이 cf 광고를 찍으면서 라면을 맛있게 먹습니다. 라면을 맛있게 먹으면서, 이 라면이야말로 정말 맛있다고 후룩후룩 마시면서, 그 라면 광고를 하게 되면 우리가 그 cf 광고를 보면서 “이야, 라면 먹고 싶다. 저 연예인이 선전하는 저 라면을 먹고 싶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연예인이 그 라면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배고플 때는 타사 제품을 애용하고 있다면, 그 광고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못 믿는 거죠. 말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이비 종파의 교주가 어느 달, 며칠 날,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라고 주장하면서 이제 곧 세상이 망하게 된다고 이야기하면 그냥 믿어야 됩니까? 아니요. 과연 그 사이비 종파가 종파의 교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봐야 하는 것이죠. 내일 모레 이제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열심히 말하고 있는 그 사이비 종파의 교주가, 알고 보면 성도들로부터 많은 헌금을 거두어서 땅을 사 모으고 있다고 한다면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었으나 부활했다고 증언한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그 사람들은 말로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이야기한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그 제자들은 모든 소망을 내려놓고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도망갔던 제자들이 며칠 뒤에 다시 돌아와서 하는 말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말함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내놓았어요. 사람들이 칼을 들이밀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목숨 앞에서 그 위험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전파하다가 기꺼이 죽임을 당하고, 기꺼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그런 제자들로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강력한 부활에 대한 증거가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원래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핍박할 수밖에 없었죠. 왜냐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자들이 하고 다니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교회가 주장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각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던 그 바울 사도가 하루아침에 변화가 되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증거하고 다니고, 그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던 것이죠.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권력을 잡을 수 있고, 가만히 있어도 부를 유지 할 수 있었고, 가만히 있어도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로마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던 그가 모든 것들을 다 내어버리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시라고 증거하면서, 그러면서 그가 얻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그 기득권을 다 내려놓았고, 부와 명예를 내려놓고 그리고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결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온 세상을 다니면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그는 가정을 꾸릴 수가 없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혼자 살면서 복음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모든 길들을 다 내어버리고, 그리고 오로지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가 얻은 것은 병을 얻었고, 고통과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당한 고난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부터 27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걸 어떻게 다 일일이 세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바울 사도가 얻은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은, 다 고난을 당하는 것밖에 없었고, 죽임을 당할 그 위협 가운데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잘 나가던 이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화되어서,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결국 순교하기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둘 중에 하나예요. 둘 중에 하난데, 하나는 정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고, 또 하나의 가능성은 무엇입니까? 미친 거죠.

그래서 바울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니가 미쳤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더니 니가 미쳤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 우리에게 100만 달러를 준다고 한들, 우리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바울 사도는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다녔습니까? 왜냐하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일어날 수 없는 그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확실한 사건에 근거하여, 오늘 우리들도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어느 한 나무가 있어서 그 나무에 무슨 열매가 맺힐까 궁금했는데, 그 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기 시작하면 앞으로 계속해서 어떤 열매가 맺히게 될까요? 사과가 열릴 것이 분명한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저와 여러분들이 다시 부활할 것을 약속해 주고 확신하게 해주는 첫 열매가 되는 사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다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는 마지막에 부활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부활도 없고 천국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삶은 둘 중에 하나로 빠지게 될 겁니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며 살다가 죽자고 하는 쾌락주의나, 미래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절망하며 비관하는 비관주의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오늘 우리는 이 순간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누군가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일 사과 나무를 심겠다고 말을 했는데요. 만일 우리의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을까요? 못 심는 거죠.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부활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마무리하면서 58절 말씀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믿습니까?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흘린 눈물 한 방울이 허무한 것이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있는 그것이 허무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에 거품에 휘말려버리고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허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믿음으로 담대하게 설 그 날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오늘 하루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걸어가는 귀하고 복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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