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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뻐하시므로 (삼하 22:8-20)

다윗은 왜 갑자기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를 꺼낼까? 다윗은 출애굽 시대를 살지도 않았으면서…

하나님은 나의 반석(삼하 22:1-7) +++ 공의를 따라 주시는 상(삼하 22:21-28)

지금 우리는 다윗의 기도이자 찬송이고 또 시가 되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22장에 기록된 이 다윗의 시는 비교적 굉장히 긴 분량의 시인데요. 우리가 이 시를 살펴볼 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쭉 한꺼번에 읽어야 그 의미가 제대로 비로소 생생하게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중간중간 나눌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를 한꺼번에 읽어야, 그 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크게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가 여러 단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시간 관계상 조금씩 의미의 단락으로 지금 나누어서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이 되어서 8절부터 20절 말씀까지 살펴보게 됐습니다.

지금 지난번에 살펴본 내용 가운데서는 이 다윗이 노래하기를, “하나님은,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요새시오. 피난처가 되시고, 나를 구원하셨다”라고 하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노래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았는데요. 오늘 8절에서부터 20절 말씀 가운데서는 어떠한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무엇이 연상이 혹시 되신 게 있습니까? 이 말씀을 읽으시는 가운데, 한번 제가 다시 한번 몇 절을 읽어드릴 텐데, 이 구절들이 무엇을 연상시키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0절 말씀에 보면,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아래는 어두 캄캄하였었도다.” 14절에서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레 소리를 내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요.” 16절과 17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기초가 나타났도다. 그가 위에서 손을 내밀어, 나를 붙드시며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지금 다윗이 묘사하고 있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혹시 연상이 되는 그림이 그려지는 장면이 혹시 있으십니까? 잘 모르실 수도 있겠는데요.

제가 볼 때는 이 장면들이 출애굽의 장면들과 비슷하고, 출애굽의 사건을 연상시키는 듯한 그런 표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특별히 16절 말씀에서는 출애굽 사건 가운데서도, 홍해 바다를 하나님께서 가르셔서, 그 물이 다 마르고, 그리고 그 물 사이로 홍해 바다 사이로 이스라엘 민족이 육지와 같이 건너갔던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10절과 14절의 말씀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았던 그때의 사건을 연상시키는 것 같은 표현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큰 우렛소리를 발하시며, 그 가운데 그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었던 그 사건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다윗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이야기를 진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가를 설명하면서 연상시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옛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땅에서부터 건져내셨던 바로 그 사건,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셨던 바로 그 사건을 연상시키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다윗은 갑자기 이 부분에서 출애굽을 연상시킬 것 같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절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듯이, 다윗이 이 시를 쓴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원수의 손에서부터 건져내셨을 때, 사울의 그 위험 가운데서부터 건져내시고, 압살롬의 그 반역과, 그리고 세바의 반역과, 그 모든 위험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 다윗을 건져내신 그 이후에, 이제는 고통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것이 사무엘하 22장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그런 자신의 구원의 사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사건을 노래하면서, 이 다윗은 7절까지 무엇을 노래했냐면, 하나님이 나의 방패시다. 하나님이 나의 요새시다.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시라고 고백하면서, 그 위험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호하시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의 구원자가 되셨는가에 대해서 7절의 말씀까지 묘사하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군인이었는데요. 하나님의 그 구원을 노래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할 때, 군인 같은 표현을 씁니다. 다윗이 쓴 시는 그 소재가 진달래 꽃이라든지, 아니면 장미꽃과 같은 그런 서정적이고 정말 아름다운 꽃 이야기 들 이야기를 하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시를 보면 군대 용어가 자꾸만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시가 군대 용어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 그의 삶 자체가 전쟁으로 일관되어 있었고 무시무시한 칼과 그리고 창 그리고 방패와 요새 같은 것들로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볼 수 있는 그것들을 사용해서 시를 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장미꽃이나 진달래꽃이나 벚꽃과 같은 것만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무기였던 것도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재료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7절까지는 지금까지 다윗이 싸웠던 여러 가지 도구들을 이용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구원해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보호해 주셨는가를 노래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제는 8절에서부터 그 분위기를 바꿔서 출애굽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출애굽 시절에는 없었던 사람입니다. 다윗보다 한참 전에 이야기가 출애굽의 사건이기 때문에 다윗은 출애굽을 경험해 본 적도 없습니다. 이미 과거의 이야기이고 한 번 더 경험해 본 것도 아니지만, 그런데 다윗은 그때 있었던 이야기들을 상상력을 동원해서 노래하면서, 그때 있었던 그 구원의 사건이 역사상 한 번 잊고 끝나버린 사건이 아니라, 그때 역사해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어려움 가운데서 인기 끌어내시고 나를 살려내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자신의 이야기를 오버랩시키면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비록 자기가 출애굽의 사건을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사건을 일으켰던 그 이야기를 대할 때에, 그냥 그 옛날 있었던 하나의 옛날이야기로만 듣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 그냥 그런 일이 있었나 보구나 하고 끝나버리지 않았어요.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때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사건을 열정적으로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서 그 사건을 마치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을 읽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것이죠. 마치 이 다윗의 관점이 무슨 관점이냐면, 정말 냉정한 신문 기자의 관점이 아니라, 축구 중계를 하고 있는 그런 아나운서와 같은 마음으로 그 출애굽의 사건을 바라보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출애굽의, 옛날 그 출애굽의 이야기를 읽고 묵상할 때, 그것이 그냥 한 날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사건인 것처럼 흥분이 돼서,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함께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축구 경기를 중계할 때는 그렇게 중계하지 않습니까? 축구경기 중계하는 아나운서가 어떻게 중계합니까? 골을 넣으면 꼴을 냈다고 골~~~~~~~~~~~~~하고 외칩니다. 골을 먹게 되면, 아이고 골이 들어갔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중계하는, 자기가 그냥 방관자로 제삼자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기에 하나가 되어서, 그 경기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으로 다윗이 출애굽의 사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운데 보니까, <뭉쳐야 쏜다>라고 하는 게 이번에 또 생겼더라고요. 보셨습니까? 네! 한 명만 나왔습니다. 그런데 허재와 현주엽이라고 하는 두 농구 거장의 팀으로 두 편을 나눠가지고, 커피 100잔 쏘기 게임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허재 팀과 현주엽 팀이 있는데 허재와 현주엽은 그날 뭘 하기로 했냐면, 아나운서를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아나운서 역할을 하다가 아나운서 역할만 하고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막 하다가 갑자기 허재가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야, 뛰어. 뛰어.” 왜? 아나운서로만 머물 수가 없어요. 자기 팀이고, 자기 팀이 이겨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그 경기 안에 몰입이 돼서, 아나운서가 그냥 냉정하게 아나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전을 지시하고 소리를 지르고, 그래서 박수도 치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하면서 그 경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감정이 없는 아나운서만 있다고 하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습니까? “아, 예, 골입니다. 우리 팀이 한 골 넣습니다. 그런데 심판이 오프사이드라고 해서 골이 취소됐군요. 골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옛날 베풀어 주셨던 그 출애굽의 이야기를 다윗이 묵상할 때, 그냥 나와 상관이 없는 먼 옛날에 한 이야기를 내가 들었고 내가 읽었다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대입해서, 그때 역사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나도 구원해 주시고, 내 인생의 역전을 일으키시고, 그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감격 가운데, 그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에 다윗은 이 시를 써가면서 자신의 이야기 가운데 출애굽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출애굽의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그 가운데 내가 들어가 있고 거기서 감격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는 그 하나님을 보면서 출애굽 사건을 연상하는 것이고, 출애굽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울의 손에서도 건져주셨고, 이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주셨구나라고 하는 그런 감정으로 이 말씀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독자의 지평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성경의 본문과 성경 본문의 지평과 내 독자의 지평이 하나로 만나서,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되는 그 이야기가 오늘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출애굽의 사건을 읽으면서, 그 옛날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있었던 하나의 옛날이야기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그때 이스라엘 민족을 그 위험 가운데서 건져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를 그 위험과 그 곤란한 상황 가운데서 건져주신 구원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레 소리를 발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그 물이 마르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거기서 건져 나오게 만들어주신다고 하는 그 감격과 기쁨으로 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또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감사의 찬송을 올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다윗은 홍해의 바다를 가르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여호와의 콧김으로 이루어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날 16절 말씀인데요. “여호와께서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밑이 드러나게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콧김으로 그 홍해 바다의 물을 마르게 하시고, 그래서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고 하는 이 표현이 이것이 시적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도 우리들처럼 코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상이 없으신 것이고, 육체가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처럼 눈 코 입기 손발 이런 육체를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러한 코와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코, 그리고 그 코에서부터 나오는 콧김이라고 하는 표현을 써서, 하나님의 콧김이 그 물을 마르게 해 버리고 그래서 육지로 건너게 해 주셨다고 하는 그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렇게 시적인 표현을 하는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콧김이라고 하는 말을 쓴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면, 그것은 정말 미약하고 미약한 세기의 바람을 의미할 때 콧김이라고 말합니다.

제일 센 바람은 뭡니까? 태풍이 부는 거죠. 태풍이 부는 것은 엄청난 바람이죠.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미약한 바람이 뭡니까? 그건 콧바람이요. 콧바람으로 뭘 할 수 있겠어요? 콧바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죠. 만일 우리가 딱지 치기를 한다고 하면, 콧김으로 딱지를 넘길 수 있습니까? 못 넘겨요. 그럴 힘이 없는 게 콧김이에요. 우리가 무엇인가 한다면 바람을 불어서 먼지를 다 쓸어버리고, 잔디를 깎은 다음에 그 잔디 깎은 것들을 다 치워버리기 위해서 바람을 불어서 치워버린다고 한다면, 강력한 바람을 쐐서 지워버려야 지워지는 것이지, 콧김으로 지울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지금 다윗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그런데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어떻게 가르시고, 그 물들을 마르게 하셔서, 뭍이 드러나게 만드셨는가? 하나님이 무엇으로 그렇게 하셨는가? 콧김으로 하셨다는 거예요. 가장 하나님께서 힘도 안 들이고, 너무나도 하나님의 가장 미약한 그것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결과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콧김이 바닷물을 가르고, 물을 마르게 하고 육지가 드러나게 하셨다고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콧김으로 물밑이 드러나게 하고 세상의 기초가 드러나게 했다고 하는 이 표현을, 우리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물을 마르게 하고 갈라지게 하는 것을 식은 죽 먹기처럼 했다. 또 뭐라고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워서 떡 먹기처럼 했다. 우리나라는 표현을 먹는 걸로 표현을 해야 돼요. 한참 못 먹었던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지고, 모든 표현들이 먹는 걸로 표현해요. 그래서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거,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운 거.

여담인데요. 옛날에 미국에서 우리가 살 때, 우리 꼬마 아이들하고 우리 네 식구가 농구 농구 경기를 했어요. 농구 경기를 하면서, “얘들아, 우리 엄마 편, 아빠 편 편을 짜서, 농구 경기를 하자.” 해서, 큰 딸한테 “너는 엄마랑 먹고” 둘째 딸은 “너는 아빠랑 먹고.” 같은 편 먹는 거, 같은 편 한다는 것도 먹는 걸로 표현하잖아요? 우리나라만 “그렇게 하자” 그랬더니 우리 둘째 아이가, “알았어” 그러면서, 빨리 어디 가더니만 먹을 걸 가지고 오더라고요. 왜 먹을 걸 갖고 왔냐니까, “둘이 같이 먹자며?” 하나님의 콧김으로, 가장 미약한 바람으로,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버리셨다는 거죠. 그게 하나님의 능력인 거죠.

성경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고린도전서 1장 25절의 말씀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의 사람보다 강하니라.” 우리 하나님의 그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미련함이 없죠. 하나님의 약하심이 없죠. 아무튼, 그러나 그 하나님의 능력이 너무나도 크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장 약한 것을 통해서도 이런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다윗이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할 수 없는 것이 많고, 우리 인생은 능력이 없어서, 모든 계획을 세워놔도 늘 좌절할 수밖에 없고,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그것이 우리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제약이 없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가운데서 고기를 먹지 못해서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원망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내가 너희가 고기를 제공해 주겠다. 광야에서 고기를 먹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고기를 제공해 주는데 하루치만 주는 것도 아니고, 닷새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을 먹을 그런 고기를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너희가 냄새를, 그 고기 냄새를 실증 낼 정도까지 내가 계속해서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모세가 계산을 해봅니다. 60만 대군 남자 장정들만 해서 60만인데, 그 60만 대군을 30일 동안 아침 점심 저녁으로 그렇게 고기를 잔뜩 먹이려고 한다면 어떻게 말합니까?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60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를 잡은 들 되겠습니까? 소떼를 잡은 들 가능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그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내가 이제 내 말이 내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말씀해 주시면서, 저 메추라기를 동원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먹이셨던 그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해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콧김을 사용하여 바다를 가르시고 뿐만 아니라, 사실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시라고 한다고 하면, 그 하나님이 그 옛날 과거에만 있었던 하나님이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고 다윗의 환란 가운데 그 다윗을 건져내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찬양하고 있는 이 모습을 보면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의 고백도 그 하나님이 그 옛날 그 소수에게만 있었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이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내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도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할 텐데요. 다윗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냥 한탄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억울할 때 울부짖었고, 위급할 때 울부짖었고, 힘들 때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응답하시고 놀라운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울부짖은 사람이 다윗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다 울부짖습니다. 누구도 울부짖었습니까? 사울도 울부짖었어요. 전쟁에 나갈 때 사울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울부짖었어요. 블레의 민족에게 쳐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면서, 우리를 저 블레셋 민족에서 구원해달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궤를 끌고 나갔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아니하셨고, 사울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 도와달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큰 차이가 어디에서 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인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줄 수 있는 그 효용 가치만을 바라보면서 그 효용 가치가 너무나도 좋아서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은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제사를 한 게 아니에요. 번제를 드렸지만 그 번제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내가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사울의 마음의 일 가운데 무엇이냐면 전쟁을 승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내가 이 정도 했으면 하나님 도와줘야 되지 않느냐라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는 거죠.

언약궤를 끌고 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를 통해서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갔는가를 계속해서 살펴봤는데, 하나님께서 그 다윗에게 왜 응답해 주실 수가 있었는가? 다윗은 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다윗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면,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예요. 그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은 과연 이 전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가야 합니까? 가지 말아야 합니까?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결정해 놓고, 내가 이 전쟁에서 이겨야 되겠다고 하는 목표를 정해놓고, “하나님,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들어주세요”가 아니라,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겁니다.

“내가 성전을 지을 테니까, 하나님, 성전 짓는 거, 잘 짓게 도와주세요.” 그렇게 해서 내 뜻이 먼저 앞장서고, 하나님이 내 뜻에 복종하는 그런 관계로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내가 성전을 짓고 싶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짓고 싶어 했는데, 하나님께서 “짖지 마라.” 그때 다윗은 짓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100퍼센트 순종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듣고 순종하는 것, 그래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썼던 글 가운데 했던 표현이 무엇이냐면, 다윗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는가? 행동하지 않기로 결단한 그 행동, 내가 내 마음대로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그 결단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복하고, 순종한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던 그것이 다윗의 인생 가운데서 가장 잘한 행동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편하게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은행 정도로만 간주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필요하지 않을 때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가, 필요할 때만 가서 돈을 좀 내놓으라고, 내가 이만큼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은행처럼 하나님을 찾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아버지예요. 나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내 속상한 것도 이야기하고, 나의 아픔도 이야기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감사하고, 그러나 때때로 나를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로 집어넣어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쁜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고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시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가게 하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나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통과하여 결국은 쉴만한 물가로, 결국은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믿고, 그 앞에서 순종하며 나아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날마다 날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그리고 그 옛날 놀라운 역사를 베푸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님의 부르짖음에 외면하시는 것 같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외면하시는 상황 가운데서 절망해 버리거나 낙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결국 3일 후에 다시 살리실 것을 믿고, 그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지금 당장 힘들고 힘들다 하더라도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하나님이 우리의 그 옛날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해 주시고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주실지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그 존전 앞에 나아가서 그 마음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안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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