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생각

박유미 교수(안양대학교) 들어가는 말 현재 우리나라는 여성 문제가 중요한 화두 중 하나이다. 작년에 일어난 강남역 여대생 살인사건과 올해 일어난 왁싱방 여성 살인사건 등을 통해 여성이 한국 사회에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존중받지 못하고 살았으며 여성의 목소리가 얼마나 무시되어왔는지에 대해 각성하고 여성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많은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 운동이 교회의 여성들 특히 청년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에서는 여성 지도자들이 도처에서 활발하게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현 정부에서는 장관의 30%를 여성으로 하겠다는 공약을 걸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사회는 더 이상 여성이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상황이 아니며 오히려 여성 지도력의 확산을 바람직한 현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교회는 여성의 리더십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아직도 여성은 교회에서 남성의 보조자로서 사역하거나 잠잠해야하는 존재로 자리매김 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교회에서 전도사로 교사로 권사로 집사로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지만 결정적인 문제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하면 잠잠하라는 말로 여성의 의견이나 역할을 배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렇게 사회와 교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에 대한 차이를 현재 교회의 젊은 여성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면서 젊은 여자 청년들이 교회에서 점점 줄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이 시간에는 구약 여성 지도자들을 살펴봄으로서 하나님께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서 원하시는 여성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교회의 여성과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1. 종교적 영역에서의 리더십: 여선지자들 A. 미리암 선지자 : 모세의 동역자 우리는 미리암하면 모세와 아론의 누이이며 모세를 비난하여 문둥병에 걸린 비운의 여자로 오랫동안 여겨왔다. 하지만 비록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구약 본문에서 보여 지고 평가되는 미리암은 이런 평가와는 좀 거리가 있다. 미리암이란 이름은 출15:20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녀는 여선지자로 그리고 아론의 누이로 소개된다. 즉, 미리암에 대한 최초의 소개는 그녀가 여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설명이 아론의 누이이다. 아론의 누이이면 족보상 아론과 모세가 형제이기 때문에 모세의 누이가 된다. 이렇게 볼 때 그녀는 비록 이름은 여기서 처음 등장하지만 출2:4-10에서 등장하는 모세의 누이가 바로 미리암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미리암은 물에 떠내려가는 모세가 걱정되어 멀리서 동생을 지켜보고 있다가 아기가 우는 것을 본 공주가 아기를 불쌍히 여기는 기색을 알아채고는 재빠르고 대담하게 공주에게 다가가 유모를 구해오겠다고 제안을 한다. 이런 미리암의 대담하고 기지에 넘치는 행동을 모세 구원 사건의 절정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미리암은 모세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안식처인 자신의 어머니 품에서 자랄 수 있게 만든 인물로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로 준비시키는 일에 일조를 담당하였다. 이렇게 간난아이 모세를 도왔던 미리암이 출애굽시이에는 여선지자로서 모세와 함께 사역한다. 출15:20-21에서 미리암 선지자의 역할은 모든 여자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녀는 소고를 잡고 찬양을 인도하며 그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모든 여자들은 그녀의 뒤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치고 춤을 추며 함께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미리암의 노래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고 “왜냐하면”으로 그 뒤에 이유가 나오는 형식의 여호와 찬양시로 미리암은 전쟁이 끝나고 승리의 영광을 여호와께 돌리기 위해 이스라엘의 여자들을 모아 소고를 들고 춤을 추며 여호와를 찬양한 것이다. 이런 미리암의 노래는 여자들이 부른 다른 승리의 노래들과는 다른 차이점이 있다. 삿11:34에서는 입다의 딸이 아버지를 환영하고 삼상18:6이하에서는 여자들이 사울과 다윗을 환영하는데 반해 출15:20-21에서는 미리암은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고 있다. 즉,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투 대장이나 장군들을 칭송하는 다른 노래들과 달리, 미리암은 여호와만을 찬양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감 받은 선지자로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미리암으로부터 시작된 선지자적 찬양의 전통은 후에 삼상10:5과 대상25:3, 5의 예루살렘 성전 찬양제도에서 나타난다. 이렇게 미리암은 놀라운 구원 사역을 최초로 찬양한 선지자이며 백성을 이끈 지도자이며 모세의 좋은 동역자로 활동하였다. 이런 미리암 선지자가 부정적으로 해석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민12장의 사건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미리암이 이스라엘 안에서 모세의 지도력을 나누자고 요구할 만큼 큰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한 것이라고 화자는 소개한다. 그래서 미리암과 아론은 이 사건에 대해 모세를 비방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들이 모세에 대항하여 한 말은 구스여자의 결혼 문제와는 상관없는 지도력의 문제였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느냐”라고 하며 모세만 하나님의 선지자요 지도자가 아니라 자신들도 하나님의 선지자요 지도자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즉, 이들의 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오직 모세와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을 보면 대제사장인 아론과 더불어 미리암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며 한걸음 더 나아가 모세와 지도력을 나누자고 요구할 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였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직접 개입하셔서 아론과 미리암을 장막 문으로 부르신 후(5절) 그들과 모세와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신다. 일반 선지자에게는 꿈과 환상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지만 모세와는 얼굴을 대면하고 명백하게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는 일반 선지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일로 인해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그 벌로 미리암은 나병에 걸리게 된다. 그동안 미리암만 나병에 걸린 것에 대해 미리암을 매우 부정적으로 해석해 왔다. 그리고 모세를 대적한 모든 죄를 미리암에게만 돌렸다. 하지만 11절의 아론의 반응을 보면 아론은 비록 자신이 나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미리암의 나병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모세에게 중보기도를 간구하였다. 아론은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으나 청하건대 그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하면서 미리암만이 아니라 자신도 벌을 같이 받는 것으로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미리암만 나병에 걸렸을까? 그 이유는 아론이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부정의 상징인 나병에 걸릴 경우 제사를 수행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즉, 대제사장의 부정의 문제는 이스라엘 제의에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아론과 미리암을 대표하여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아론의 간곡한 요청에 모세는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하였고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에 대해 7일간 부정하니 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금지만하셨다. 이것은 모세가 기도 했을 때 하나님께서 미리암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께서 바로 나병을 치유시켜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7일 동안 진 밖에 있었던 것은 나병에 걸린 사람이 나병이 치유되었을 경우 7일 동안 장막 밖에 있어야 하는 부정의 규례를 따르기 위한 것이었다(레14:1-9). 7일간의 부정기간도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비유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훈계하는 수준에서 하나님께서 아론과 미리암의 잘못을 용서해 주셨다는 의미이다. 이들이 비록 한때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 모세에게 도전하였지만 진심으로 뉘우치는 아론의 기도를 통해 이들을 용서해 주시고 여전히 백성의 지도자로서 인정해 주신 것이다. 이렇게 미리암이 격리되어 있는 일주일 동안 백성들의 행군은 중단되었다(15절). 백성들은 미리암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15절의 행군을 중단한 주체가 백성들로 그들은 여전히 미리암을 약속의 땅에 함께 들어갈 그들의 선지자로 여기고 미리암과 동행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20:1에는 미리암의 죽음이 기록된다. 1절에서 미리암은 게데스에서 죽었고 백성들이 그녀를 장사지내주었다. 성경 본문에서 죽음과 무덤의 위치가 언급되는 것은 특별한 지위를 표시하는 것으로 민20:1의 미리암의 죽음의 기록은 공동체에서 그녀의 위상을 알려주는 것으로 미리암이 죽는 순간까지 백성들의 선지자로서 역할 하였음을 나타낸다....
직분은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이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소위 31조파)에서 최근에 여성안수를 총회에서 원칙적으로 전면적 허용하고, 개교회 차원에서 실천을 결의했다. 고신 교회는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박윤선 이후 보수적인 장로교회들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신학적 표준으로 여겨왔기에 이번 결정은 놀라운 것이다. 성장이란 프레임에 갇혀있으면서도 신학적 반성의 참조점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이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의 신학 풍토의 한 단면: 성경해석 발전의 수용 필자는 네덜란드에서 13년을 보냈다. 신학 공부도 하면서 네덜란드 신학적 풍토를 익히기도 했다. 로테르담 사랑의 교회를 목회하기 전에는 우리 가정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에 소속해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 때 한 가지 놀랬던 점이 장로들이 목사들의 설교문을 대독하고, 마지막에 축도를 하는 장면이었다. 이 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장로들이 축도를 하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해석의 발전을 교회 질서 속에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필자가 신학 부전공으로 교회 성장학을 선택해서 공부를 하는 중에 화란 자유개혁교회가 장로들의 축도를 허용한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트림프 교수의 실천신학 책 중에 교회의 직분을 논하는 자리로 기억한다. 장로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의 허순길 목사를 언급했다. 허 목사님은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 유학하면서 “장로의 완전한 권리”라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미국 남북 장로교회의 논쟁을 적으면서 하지와 쏜웰의 논쟁을 정리했고, 쏜웰의 입장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는 내용이라고 했다. 쏜웰의 입장은 우리 헌법에도 언급되었듯이 장로와 목사직의 동등이었다. 트림프 교수는 자신의 책에 허 교수의 논문이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언급하며, 허 교수의 지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트림프 교수는 장로들이 예배를 인도할 때, 십계명을 선포하는데, 이 선포가 바로 설교와 다름없다고 했다. 그래서 설교의 대독과 함께 설교자가 하는 축도의 권리가 장로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장로의 축도권이 한국교회 허순길 목사의 논문과 관련됨을 밝히면서, 바른 성경 해석의 결과를 교회 질서에서 수용하는 것이 말씀 앞에 서는 오직 성경의 태도라고 트림프 교수는 밝혔다. 트림프 교수는 이어서 장로의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 두 가지 직을 설명하는 디모데전서5:17절을 기존과 달리 해석했다.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해야 하는데, 그들은 특히 ‘말씀과 가르침’(‘복음과 교리’)으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을 함으로 장로들과 목사의 동등권이 확보되었다. 이외에도 필자가 모르는 논의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결과들이 축적되었고 그것이 주요 원인이 되어 장로의 축도권은 교회의 질서로 인정되었다. 여성 안수에 대한 해석학적 난제 극복 이제 여성 안수 결정 과정으로 가보자. 역사적인 과정은 이미 코닷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밝혔다.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서 분리가 된 교회와 합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 교회는 여성 집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합동을 위해서 신학적 연구의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남성/여성 직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미 3년 전에 보고서에서 여성 안수 허용이라는 입장을 내었지만, 저항이 거세서 결정을 미루었다. 3년 동안 위원회가 지역을 돌면서 설명회를 가지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이번 결정에 이르렀다. 이번 결정의 기초가 되는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가 있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요약 판도 나와서 그 요약 판을 검토해 보았다. 거기서의 필자의 주된 관심은 ‘성경적 난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여성 안수를 허용하게 되었는가?’ 이었다. 기본적으로 성경해석을 통해 직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 직분을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보는 관점의 변화이다. 그 결과 보고서의 제목이 함께 섬기기(Serving together)가 되었다. 이렇게 직분을 정의하면서 여성에 관련된 난해한 본문 해석을 쉽게 극복하는 길이 열렸다....
얼마 전에 화란개혁교회(해방파, 일명 31조파) 총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의 여성안수 안이 가결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총회에 참석한 유해무 교수는 자매교회와의 단절을 가져올 수 있는 이런 결의안을 부결시켜 줄 것은 간곡하게 호소했으나 결국 다수의 찬성으로 이 안이 결의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고신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이번 67회기 총회에서 31조파와의 자매결연을 해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결의가 이단적인 내용도 아닌데 서둘러 관계단절을 하기보다 진지한 연구부터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세계교회들에서 근본주의라고 비판을 받는 몇몇 교파들 외에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여성안수를 지지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믿지 않아서일까? 성경이 금한 일을 세상풍조를 따라 행하는 범죄일까? 왜 우리와 신학이 가장 가까운 31조파까지도 이를 허용하는 결의를 했을까?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근거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성경은 고전 14:34,35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과연 이 성경 말씀은 여성은 교회에서 직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는 말씀일까? 그런데 이 말씀을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일단 많은 신학자들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에게 보편적인 규칙으로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이 –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에는 여성들이 많았다 –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오용하고 공예배에서 질서 없이 행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이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냐 또한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36절)라고 책망하며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만 –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 성령을 받은 것처럼 은사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데 이런 혼란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니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명하신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바울 사도는 같은 서신에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면 기도나 예언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을 함의하는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고전 11:4-5) 이 말씀은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이미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와 예언을 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소개하면서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롬 16:3)고 하였고, 사도행전에서는 자신이 그들과 어떻게 만났으며 무슨 일을 동역했는가를 말씀하고 있다(행 2,18,26). 또 바울 사도는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5-28)고 선언했다. “하나”라고 해서 모두가 머리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가정공동체에서 남편을 머리로 세우셨다. 이는 어떤 공동체든지 질서가 있어야 함으로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이런 질서를 정해주셨다. 그리고 질서는 결코 인격적인 차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녀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동등하다. 다만 인류의 조상들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하와에게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저주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필자가 짧은 지식으로나마 여성안수 문제를 개략적으로 짚어보았다. 좀 더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혹시 여성안수 문제를 긍정적으로 거론하다가 징계를 당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염려할 교수나 목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리가 체계화되고 신학이 정립되기까지는 많은 연구가 있었고 피 흘림이 있었다. 지금은 이런 희생은 강요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여성 목사 안수에 관하여 한글 요약 2003년경부터 여자 집사를 허용하는 남아공 개혁교회(GKSA)는 2016년 1월 12일부터 열린 특별 총회에서 여성 목사 안수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올 해 6월 중순에는 화란개혁교회(해방파)가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했다.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진영에서도 여전히 논란 중인 여성 안수에 대한 올바른 결정은 교단의 전통이나 상황적 필요가 아니라, 무엇보다 성경 주석적 연구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관련 신약 본문에 대한 주석적 연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서로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자부한다. 이 글은 여성 안수에 관한 역사적 고찰, 구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를 차례로 다룬다. 이 글에서 “여성 안수는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함”을 논증할 것이다. 들어가면서 앞으로 교회 사역은 목회자(klerikos)와 일반 성도(anthropos laikos) 간의 이분법적 구도가 아닌 열린 유기적 협업, 기계적 조직화보다는 건덕과 인격적 관계의 강화, 그리고 주종관계가 아닌 종의 리더십을 통한 역동적 제자화를 요청한다.1) 이를 위해 무엇보다 여성도의 재능과 역할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2003년경부터 여자 집사를 허용하는 남아공 개혁교회(GKSA)는 2016년 1월 12일부터 열린 특별 총회에서 여성 목사 안수건(이하 ‘여성 안수’)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2)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진영에서도 여전히 논란 중인3) 여성 안수에 대한 올바른 결정은 교단의 전통이나 상황적 필요가 아니라, 무엇보다 성경 주석적 연구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4) 특히 관련 신약 본문에 대한 주석적 연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서로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자부한다. 이 글은 여성 안수에 관한 역사적 고찰, 구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를 차례로 다룬다. 이 글에서 “여성 안수는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함”을 논증할 것이다. 1. 여성 안수에 관한 역사적 고찰 유니테리언파(Unitarian)는 물론, 중앙집권화된 교회정치 체제 대신 개교회의 결정을 중요시하는 회중교회에서 여성 안수가 일찍 시행되었다.5) 20세기에 들어와서 스위스 개혁교회(1918), 프랑스 개혁교회(1949), 미국 장로교회(PCUSA, 1956), 화란 개혁교회(NHK[국가개혁교회], 1966; GKN[개혁교회], 1969; 해방파, 2017), 남아공 화란개혁교회(NHKA, 1976; NGK, 1990), 미국 기독개혁교회(CRC, 1995)6) 등 개혁파와 장로파에서도 여성 안수가 허용됐다.7) 한국의 경우 1907년 장로교 독노회가 조직될 당시 목사와 장로는 남성으로 제한됐다. 장로교 22회 총회(1933)에서 성진중앙교회 김춘배목사가 여성 안수를 청원했다가 철회한 사건이 있었다. 장로교 24회 총회에서 박형룡박사는 김춘배목사가 남성 안수를 2천 년 전의 특정 풍습으로 본 것은 잘못이며, 남성 안수는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했다.8) 1930년에 감리교회가 여성 안수를 허용한 이래, 재건교회가 최덕지 여전도사를 (명예) 목사로 인정했다(1951).9) 감리교(1930), 기장(1974), 예장 통합(1994), 예수교성결교(2003), 침례교(2013), 성공회, 루터교, 예장 대신(백석, 2009),10) 기하성(교단 설립 때부터), 하나님의 성회(순복음; 교단 설립 때부터), 구세군, 브니엘교회, 독립교회 등이 여성 안수를 시행 중이다.11) 이들 교회는 여목사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여성 총대의 비율을 높이려고 노력 중이다. 기독교연합신문의 여론조사(2016년 7월)에 의하면, 전국 신대원생 85%가 여성 안수를 지지하며, 여성 안수를 시행하지 않는 교회의 신대원생들의 찬성 비율도 과반이었다(참고. 고신대 신대원생 100%, 총신대 신대원생 52.5%, 합동신대원생 56.3%).12) 따라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교회에서 허용하는 것은 시간상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특별히 여성 안수를 불허하는 교회의 신학생들이 관련 본문에 대한 심도 깊은 주석적 연구를 접해봤는지 의문이다.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유교문화의 양존음비(陽尊陰卑)에 근거하여 가부장적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성향이 근본주의 교회에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13) 그리고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요인으로 ‘NCC여성위원회’와 같은 여권(女權)신장 단체의 활동과 더불어 WCC의 결정을 드는 경우도 있다.14) 여권신장과 상관없이, 미국의 경우 신식민지 지역에 여성의 선교 목회활동을 허락하게 된 것을 여성 안수의 계기라는 주장도 있다.15) 신앙과 세속 문화를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에 선 이들이 방어적인 전통적 신앙고백주의와 카이퍼의 반명제적(antithetical) 사상에 근거한 반(反)문화적 입장을 견지했다는 분석도 있다.16) 최근에는 여성 안수를 넘어,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LGBT)에게도 목사직을 허용한 장로교회도 있다.17) 종합하면, 여성 안수를 찬성 혹은 반대한 배경에는 유교사상, 여권신장 운동, 성경해석방법의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18) 2. 구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 창 1:26-28은 남녀의 평등성을 강조하기에 여성 안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19) 하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남녀평등이 여성 안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남녀는 동등하지만 상이한게 사실이며, 이것은 성 차별(sexism)이 아니라 성 구별이다.20) 그런데 여자가 남자의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으므로(창 2:18), 여자는 남자의 보조자 차원으로 열등하다고 볼 수 있는가? ‘돕는 자’(히. 에제르; 헬. 보에쏘스)는 이스라엘을 돕는 분이신 하나님에게도 적용되므로(참고. 출 18:4; 히 13:6), 여자의 열등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21) 여사사 드보라(삿 4-5), 여선지자 훌다(왕하 22:14), 여선지자 노아댜(느 6:14),22) 지혜로운 여인들(삼하 14:2; 20:16-22)을 통해서 볼 때, 비록 여성은 공직을 가지지 못했더라도 신적 권위와 지혜로 의미 있는 지도적 역할을 감당했다.23) 그리고 구약에서 여자는 회막에서 섬길 수 있었기에 제사장을 보조하는 역할도 감당했다(출 38:8; 삼상 2:22; 참고. 대상 25:5-6). 구약에서 여자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허용되지 않은 세 가지 이유는 짐승을 죽이고 제사를 드리는 고된 노동, 부정한 월경 기간, 그리고 이방 신전의 창기를 닮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24) 여성 안수 지지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용납하셨고(막 5:25-34), 많은 정통 유대인들은 요람에서부터 월경하는 여인처럼 부정하다고 사마리아 여인을 간주했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고(요 4:1-42), 현대 목사의 직무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수행하는 힘든 노동과 다르며, 신약에는 신전 창기(娼妓)의 문제가 사라졌기에 신약의 변화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운데 일부 특별한 경우에 여성이 활동한 것을 보편화시킬 수 없으며,25) 여성은 왕과 제사장같은 공적 사역에 종사할 수 없었다.26) 제사장은 선지자가 될 수 있었지만, 선지자는 (레위지파의)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제사장이 되려면 여성이 아니라 완전한 남성이어야 했다(레 21:17-21). 이 원칙에 근거하여 신약의 목사도 남성 가운데 선발되어야 한다고 적용하는 이가 있다.27) 이렇게 구약의 여성의 역할을 살펴본 것으로는 여성 안수의 성경적 의미를 결정하는데 여전히 역부족이다....
바울과 여성 -여성 안수문제를 중심으로- 최갑종(백석대학교 총장, 바울신학전공) 1. 서론 기독교가 태동된 주후 1세기 헬라-로마-유대사회는 남존여비사상(男尊女卑思想)이 팽배한 가부장적(家父長的) 사회였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예술, 종교, 사회의 모든 영역들을 남성이 주도하였으며, 여성들은 이들 영역들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다. 여성들은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남성들보다 하위급에 속한 자로 간주되어 성차별이 당연시되었으며, 남성이 있는 대중 앞에 나설 수도, 말할 수도 없었고, 거리를 나설 때는 얼굴조차 함부로 노출하지 않아야만 했다. 하지만 기독교운동이 시작되면서 남성위주의 헬라-로마-유대사회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는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여성들을 찾아갔고, 여성들을 만났으며, 여성들에게 이적을 베풀었고, 여성의 질병을 고쳐주셨으며, 그들을 자신의 하나님의 나라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시켰으며, 그들을 부활의 첫 증인들로 삼았다. 예수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운동을 헬라-로마사회에까지 확장시킨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적, 신분적, 성적 차별이 있을 수 없다”(갈 5:17),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는 혁명적인 선언을 하면서, 당시 사회와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을 초기 기독교운동에 적극적으로 불러들였으며, 여성들을 교회의 지도자나 자신의 동역자로 삼았다. 여성에 대한 예수와 바울의 자세와 가르침을 그 당대사회구조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놀랍고 혁명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기독교는 초기 시절부터 당대의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를 뛰어 넘어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인격으로 간주하였으며, 여성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구원의 은총과 은사와 교회의 제반사역에 있어서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남성들과 함께 성령의 은사들을 받았으며, 함께 예배를 드렸으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고, 함께 말씀을 읽고, 듣고, 그리고 말씀을 가르쳤다. 하지만, 남존여비사상과 가부장적구조가 여전히 지배적인 사회구조 안에서, 어떤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성차별의 자유를 지나치게 확대시킴으로 인해 가정과 교회에 무질서를 초래하였고, 그로 인해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와 선교의 장애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을 경우에는 그들의 자유가 일시 제재를 받기도 하였다(고전 14:34-35; 딤전 2:11-15). 그렇지만 남녀의 동등한 인격과 역할을 지향하고 있는 기독교복음자체가 축소되거나 바꾸어진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복음은 가는 곳마다 여성들에게 새로운 자기인식과 자유와 도전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오늘의 평등과 민주사회가 형성되기까지 기독교의 지대한 역할과 공헌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사회만 하더라도 일백여년 전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근세기 한국 기독교지도자들은, 당시 유교의 남존여비사상과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도, 선교사들과 함께 여성을 교회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여성을 교육시키고 개화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이화학당, 호수돈 여고, 정신여고, 배재학당 등은 여성 교육과 여성 지도자 배출의 산실이 되었다. 따라서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남녀평등과 여성들의 인권이 법으로 보장되기까지 한국 기독교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정치, 경제, 과학, 문화, 교육, 예술 등 사회전반에 걸쳐 여성들의 진출과 활동은 과히 놀랄만하다. 여성과학자, 교수, 정치인, 기업인, 기술자, 교사, 군인, 의사, 법조인 등 남성이 관여하는 모든 영역에 여성들이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여성 장관, 여성 국회의원은 물론, 여성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초기의 한국교회가, 주후 1세기의 기독교가 헬라-로마-유대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성들의 인권과 자유와 역할을 확장시키는데 있어서 사회보다 항상 앞장을 섰었던 것에 반해,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여성의 문제에 있어서 한국사회를 선도해가고 있기보다도, 오히려 사회보다 뒤떨어져 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 안수(예를 들면, 여성목사와 장로직분)를 비롯한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는 문제이다. 여성의 성직 안수문제는 이미 지난 반세기 이후부터 한국 기독교 안에서 가장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오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어떤 교단 교회들은 이 기간 동안 교단의 금기사항으로 간주되어 왔던 여성안수문제를 허용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을 적극적으로 확대한 반면에, 어떤 교단 교회들은 여성안수문제를 교단의 신학 및 정체성과 결부시켜 계속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왜 한국 개신교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 문제를 두고 이와 같은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더 심각한 문제는, 여성안수문제를 포함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더욱 확대하려는 교회나 신학교 교수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여성의 안수 문제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단코 용납될 수 없다고 하는 교회나 신학교 교수들까지도, 똑같이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초대 기독교 공동체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단이든, 찬성하는 교단이든,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단의 소속교수이든,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교단의 소속교수이든, 다 같이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자신들의 주장의 신학적 근거를 주로 바울서신에서 찾고 있다. 예를 들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수들은 고린도전서 11:3의 남자는 여자의 머리임을 가리키는 본문, 고린도전서 14:34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는 가르침, 디모데전서 2:12의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가르침 등에 근거하여, 바울은 여성의 안수를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여성의 안수를 지지하는 교수들은, 갈라디아서 3:28의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하나이라는 가르침, 고린도전서 11:1-12의 주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다는 가르침, 바울이 자신의 선교와 목회현장에 브리스길라, 뵈뵈, 순두게 등 여러 여성 사역자들을 참여시킨 점 등에 근거하여, 바울은 여성의 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 동일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나 신약성경을 두고 이처럼 서로 상반된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가? 초대 기독교 공동체나 신약성경 자체가 이중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동일한 공동체나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인가? 만일 이해와 해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주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도 바울의 교회 안에서 여성 위치와 역할에 관한 주요 가르침을 헬라-로마-유대사회의 문맥과 관련하여 살펴봄으로써, 한국 개신교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토론되어 온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 문제, 특별히 여성의 성직안수문제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데 있다. 어떠한 연구도 전제와 방법론 없이 시작할 수는 없다. 여성의 안수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접근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해석학적 전제를 가지고 접근하고자 한다. 첫째, 바울의 서신들은 모두 영감(靈感)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시대와 문화와 환경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둘째, 바울의 서신들은, 영감(靈感)된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시대와 문화와 환경에 살았던 저자가, 그 시대와 문화와 환경에 살던 사람들에게 직접 주는 독특하고 개별적인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을 향해 예배 때에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한 교훈이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한 교훈이나,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아의 집에 둔 겉옷과 가죽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는 부탁이나, 빌레몬에게 “나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라”는 부탁 등은,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살던 사람들이나 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이들 본문들은 “서로 사랑하라”, “성령의 인도를 따르라”는 본문처럼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직접 적용되어야 하는 규범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셋째, 바울 서신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해석자가 자신의 어떤 주장을 전제한 다음, 특정한 본문에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가서 그 본문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본문으로부터 저자가 그 본문을 통하여 자신의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본래 의도나 메시지를 끌어내는 것이다. 특정한 본문에 대한 해석은 그 본문의 상황적 적용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2. 바울의 콘텍스트(Con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