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버려두사 (롬 1:24-32)

하나님의 진노 (롬 1:18-23) +++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롬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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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기쁨의 소식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데요. 예수님이 왜 복음인가? 예수님이 왜 우리 모두에게 기쁜 소식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어서, 다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실 메시아가 필요한 것인데 바로 그 메시아가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서, 그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것을 지난주에 살펴보았는데요.

오늘 본문은 “어떻게 우리 인간들이 전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빠지게 되었는가?” “어떻게 우리는 이렇게 불행한 인간이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말씀입니다. 오늘 특별히 로마서 1장 24절에서부터 32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았는데요. 이 본문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어서 나오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읽으시면서, 오늘 본문을 천천히 읽어보면서 반복되는 구절을 살펴보신 분들이, 발견하신 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 반복되는 표현이 무엇이죠? “내버려 두었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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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2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 26절에서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 28절에서도 똑같은 표현이 등장하는데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악한 일을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을 보시면서 심판해 버리고,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냥 손 놓고 계셨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이 죄를 지으면, 죄를 짓는 그 일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못하도록 그렇게 방해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냥 손 놓고 계셨다는 겁니다. 죄를 지으면 죄를 짓도록 방치해 두셨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죄를 짓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다! 방치해 두셨다라고 하는 이 표현을 여러분들이 좀처럼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 납득이 되십니까? 아마 납득이 잘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같으면 우리 같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의 자녀들이 나쁜 짓을 한다면, 나쁜 아이들과 어울려서 악한 일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간다고 하면, 이 아이의 미래가 암울해질 테니까, 이 아이가 그런 길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부모라고 한다면 그 아이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겁니다. 나쁜 아이들이랑 어울린다고 한다면, 학교 전학을 가서라도 좋은 환경에 우리 아이들을 집어넣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한다면, 급기야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우리 아이들이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막으려고 하는 것이 그게 부모님의 마음일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할 때 그냥 내버려 두셨다, 방치해 두셨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과연 그렇게 방치해 두는 것, 내버려 두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도 괜찮은 것일까? 납득이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지난주에 아주 참 안타까운 뉴스를 하나 보았습니다. 간병 살인사건이라고 불리는 뉴스였습니다. 대구 수성구에 사는 22세의 젊은 청년이 있는데요. 대학을 다니다가 공익근무를 위해서 잠시 휴학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는, 그 청년에게는 56세 된 아버지가 계셨는데, 그 56세 된 아버지께서 지난 9월달에 뇌졸중이 걸리게 된 겁니다. 뇌졸중에 걸려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 혼자 밥을 떠먹지도 못하고, 대소변을 혼자 잘 가릴 수도 없는 그런 아주 심각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겁니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치료비가 만만치 않은 겁니다. 수입이 별로 없는 그 청년이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치료비가 나올 수밖에 없어서, 결국 금년 4월에 퇴원하고 말았는데요. 퇴원한 이후에 5월 1일부터 5월 8일까지 그간 일주일이 넘는 그 기간에,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에게 물도 주지 않고 음식도 주지 않고 그냥 방치시켜 놓았다가 아버지가 사망해 버렸습니다. 결국 그 청년은 존속 살해 혐의로 체포되고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 상황들이 정상 참작이 되어서 되었지만, 결국 징역 4년이라고 하는 그런 선고를 받게 되었는데, 항소심을 했지만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4년을 그대로 선고했다고 하는 뉴스를 듣게 됐습니다. 죽어가는 아버지를, 정말 힘든 상황이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안 해서 죽게 만들었다고 하는 그것이 아무리 정상 창작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건 죄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모습이 마치 그런 것 같은 겁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그래서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 될 거라고 우리는 예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아야죠. 죄를 짓지 못하도록,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할 것 같은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의 말씀은 뭐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셨다. 그냥 방치해 두셨다. 죄를 마음껏 짓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다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약간의 불편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본문을 읽으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무책임하고, 아무런 애정도 없고 감정도 없는, 그런 무뚝뚝한 정말 냉혈한과 같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할 수 있을 법한 표현을 하고 있지만, 성경의 다른 곳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정반대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히브리서 12장 5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니까 히브리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면 그냥 “될대로 돼라” 하고, 방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징계하시면서까지라도, 우리를 바른 길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때려서라도 징계해서라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는 예가 성경에 수두룩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몇 가지만 들자고 한다면, 사사기의 말씀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우상숭배하는 길로 가게 되는데요. 그렇게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여지 없이 이방 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치십니다. 압제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면,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주시는 이야기가 사사기에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 범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의 범죄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이라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징계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회개하게 만들고 돌아오게 만드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경에 어느 한 구절만 읽고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거나 속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성경의 어느 한 부분만 읽고 그 부분을 통해서 너무나도 쉽게 너무나도 빠른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고 늘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망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하나님이 결코 아닌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징계해서라도 바른 길로 가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읽은 로마서 1장의 말씀은 왜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가? 한번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1장 24절에서 26절에서 2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악을 저지르고 악을 행할 때 그냥 내버려 두셨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렇게 표현한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손 놓고 계셨다. 방치해 두셨다라고 하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원하셔서 최대한의 모든 일들을 하시는 겁니다. 탕자의 비유에 보면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아들을 기다립니까?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탕자가 돌아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뛰어나가서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겁니다. 잃은 양의 비율을 보면, 한 마리에 잃은 양이 발생했을 때 그까지 한 마리 잃은 양 상관없다라고 외면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99마리를 들판에 두고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는 목자와 같다고 하나님께 이 성경에서는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 9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왜 이렇게 악이 횡행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당장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가? 그들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면서 아직 심판하지 않는다라고 베드로 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냐면, 죄악을 저지른다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마음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징계하시기도 합니다. 징계해서 돌아오도록 그렇게 채찍질 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로마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그렇게 채찍질하지 않으실 때가 있는데, 채찍질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는데,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돌아오도록 많은 일을 하나님께서 하고 계세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우리들의 마음에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거죠. 양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거ᅟᅦᆼ요. “너, 그렇게 살면 안되잖아!” “그렇게 신앙생활 안 하며 살면 안되잖아” 우리들의 마음에 양심을 두드리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놓고 하고 계시는 것이죠.

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돼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표현을 한번 가만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잘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서 두드려요?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신다.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어떻게 하시는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강제로 뜯어버리고, 그래서 마치 쿠데타 군인들처럼 쳐들어가고, 진압군처럼 쳐들어가서, 우리들의 마음을 정복해버리고 강압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버려서 우리를 정복하시는 방법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우리들의 마음 문 밖에 서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들의 마음 문 밖에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언제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가? 문을 여는 것이 누구에게 달려 있게 만드셨어요? 우리에게 달려있게 만드셨어요. 문을 박살 내버리고, 우리의 마음속으로 쳐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문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계시면서, 우리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기를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향해서 호소하시는 겁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문을 두드리면서 문 열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내버려 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는 강압적으로 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고 계시는 걸까요? 그것은 참된 사랑은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라야만이 그것이 진짜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할 수 없이 사랑하고, 할 수 없이 순종한다고 하면, 그것은 진짜 사랑이겠습니까? 진짜 사랑이 아닌 거죠. 예를 들면 로보트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과학자가 로보트를 만들어서, 그래서 그 로버트에게 인간의 말을 다 듣도록 프로그램화시킨 로버트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로보트 청소기가 하나 있는데요. 그 로버트 청소기에게 명령을 내리면, 그 로보트 청소기는 군말 하지 않고, 예배당 바닥을 쫙쫙 다니면서 청소를 합니다. 나 청소하기 싫어! 나 청소 안 할래! 하는 말 없이, 군말하지 않고, 모든 곳을 다니면서 청소를 하는데, 참 신기해요. 근데 그게 참된 순종이고 참된 사랑이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당에서 청소하는 거냐? 아니에요. 로보트는 주인의 말을 무조건 듣습니다. 왜냐하면 거부할 자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로보트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물론 좋아하고 아낄 수는 있겠지만, 사랑의 대상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누가 사랑의 대상이에요? 내가 거부할 수 있는데,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데, 선택한 것이 사랑이고, 거부할 수 있는데 복종하는 것이 사랑인 거에요. 내가 자유함을 가지고 사랑할 때, 그게 진짜 사랑인 것이지, 나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치 꼭두각시처럼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그 꼭두각시를 움직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면, 그 꼭두각시가 하나님을 진짜로 사랑하는 거냐면, 그게 사랑하는 게 아닌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것을 다 하실 수가 있어요. 우리를 강압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하게 만들 수 있고, 프로그램화시켜서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유 의지를 주셨고, 우리들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과, 자연 만물과의 차이점입니다. 자연 만물은 그런 자유 의지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무조건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 자연 만물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람인 거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자유가 있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가 우리 인간들인데,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압적으로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거죠.

마치 이것을 비유한다고 한다면 임금님이 시녀에게 사랑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극 드라마에 보면 어느 임금님이 어느 왕자가 시녀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그런데 그 임금은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왕자는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명령하면 돼요. 자기의 신하를 시켜서 저기 보이는 저 아녀자가 누구냐? 오늘 밤 내 방에 들어와서 수청 들라 하라. 그러면 끝이에요. 그러면 찍소리 못하고 와서, 수청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권력이었습니다. 임금이었습니다. 왕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건 그렇게 명령을 받아서 할 수 없이 선택권이 없이 와서 수청 드는 것은 사랑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그 임금이, 그런데 그 왕자가, 어느 날 시녀 앞에 가서 무릎을 꿇는 겁니다.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느냐”고 내가 명령해서 나를 억지로 수청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시녀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이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느냐고 나에게 사랑해 줄 수 있느냐고 사랑을 애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들의 마음의 문 앞에서 사랑을 구하며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피 흘려 주었는데, 너희도 날 사랑해줄 수 있겠느냐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느냐라고, 이야기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 강압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정복해서 우리를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이, 오늘 로마서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강압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손 놓고 계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선지자를 보내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시고, 때로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여러 가지 징계를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도 쓰시면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그런데 우리 인류의 불행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그 참사랑을 외면해 버리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외면해 버렸기 때문에, 그냥 그 악을 계속해서 범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본문에서는 우리 인류가 어떻게 더러운 모습에 빠졌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겼다고 하는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는데,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이 아닌 것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망하게 되는 겁니다. 마치 부모님의 참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는데, 유괴범이 와서 과자를 주고, 유괴범이 와서 강아지 보러 가자고 하니까 유괴범을 따라가는 꼴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로는 동성애의 죄에 빠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의 방법대로가 아니라, 동성애에 빠져 음행의 죄를 저질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온갖 불의와 죄의 모습에 빠져들었다고 29절에서부터 31절 말씀에 열거하고 있는데요. 그 내용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죄 없다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러한 죄를 죄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1장 32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양심이 무너지게 되었고, 결국 우리가 불행한 상태가 되었고,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였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두드리시면서 기다렸지만, 결국 죄악의 길로 달려간 우리들을 향해서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 그 독생자를 우리 위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그것이 복음인 줄로 믿습니다.

지난주에 아주 참 감동적인 뉴스를 하나 듣게 됐습니다. 고양시 일산 동구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요.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게 되었습니다. 접촉사고가 나게 된 것이죠. 홍영숙 씨라고 하는 사람이 피해 차주였는데요. 차에서 내려서 사고를 낸 사람에게로 내려가는데, 젊은 엄마가 사고 난 것 때문에 두려워서 벌벌 떨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피해 차주는 그 사고를 낸 젊은 엄마에게 다가가서 사고 처리는 나중에 해도 좋으니, 일단 아기를 데리고 응급실로 가라고 말해주면서, 그 여성을 꼭 껴안아 주었다고 하는 뉴스. 그 아기 엄마는 아기가 고열이 나 응급실로 정신없이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를 내버렸는데, 그 상황에서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너무나도 어찌할 줄 몰라 울고 있는 그 젊은 여성을 보고, 피해 차주가, 이 문제 해결하고 가라고 했던 어떤 택시 운전사와는 달리, 그 사고 처리는 나중에 해도 좋으니까, 진정하고 아이를 먼저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꼭 안아주었다고 하는 것이 나중에 그 피해 사고 낸 사람의 남편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어서, 뉴스가 나게 되었는데요. 아마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바로 이 일이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같은가? 우리는 좌충우돌하면서 피해를 낸 사람과 같아요.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나쁜 길로 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을 법한 일들을 하는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 우리 위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안아주시고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그 놀라운 구원을 생각하면서 늘 감사하고 기뻐하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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