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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한 사람 (잠 19:22)

오늘 우리는 잠언 19장 21절과 22절의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앞부분의 말씀과 뒷부분의 말씀이 연결된다기보다는 서로 독립적인 다른 주제의 말씀들을 이 한 절에 연결시켜 놓는 모습을 볼 수가 있겠습니다.

잠언 19장 22절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잠언 19장 22절, “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그렇게 되어 있는데요. 사람이 인자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사모함을 받는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인자한 모습을 보이면, 내가 인자를 베풀고 긍휼을 베푸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사모한다. 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 그런 의미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사람이 인자를 베풀 때, 긍휼을 베풀 때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사랑을 받고 사모함을 받는다.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오늘 우리가 잠언 19장 22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을 보면 번역이 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냐면은 “사람이 갈망하는 것은 인자함이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갈망하는 것은 인자함이다. 한국말 성경과 영어 성경이 다르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히브리어라고 하는 언어의 특징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비전교회 성도님들은 다 읽으실 줄 알죠? 히브리어, 지금 저랑 몇 년 동안 같이 했는데 못 읽어도 괜찮습니다.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 겁니다.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 건데 이 히브리어 문장이 마치 한자어랑 비슷합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동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동사가 없어요. 명사만 있습니다. 갈망, 사람, 인자, 세 단어가 있습니다. 갈망, 사람, 인자. 그 단어를 가지고 동사를 집어넣어서 해석하다 보니까 우리 한국말 성경에서는 뭐라고 번역을 했냐면 “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으로 사람들의 사모함을 받는다”라고 번역을 한 반면에, 영어 성경에서는 뭐라고 번역을 했냐면 “사람이 갈망하는 것은 인자함이다, 긍휼함이다”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을 본다고 한다면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겠는가. 사람이 갈망하는 것이 사람, ‘사람의 갈망’이라고 번역을 해야 됩니다. 갈망이라고 하는 명사 뒤에 있는 사람이 그 갈망이라고 하는 것을 수식해 주는 것이니까 사람의 갈망이 무엇이냐, 인자를 갈망한다.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는 게 뭐냐, 긍휼을 갈망한다, 인자를 갈망한다.

그런 의미의 번역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어쩌면 영어 번역이 훨씬 더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를 좀 더 가까이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냐, 긍휼함을 기대한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긍휼을 좀 베풀었으면 좋겠다, 인자하게 대해주었으면 좋겠어 했다. 사람들이 서로 그렇게 인자와 긍휼을 베푸는 모습들을 모두 다 갈망하고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한 것이라고 번역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인자함, 긍휼, 이것은 누구의 특성이죠? 사실은 하나님의 품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인자하신 하나님,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그 인자하심이 풍성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특성이 바로 인자와 긍휼을 하나님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출애굽기 34장 6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진노하시고 퍼부으시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며 인자를 베풀고 자비를 베푸시는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데요. 바로 이 하나님의 특성, 인자와 긍휼이 많으신 그 하나님의 특성이 하나님에게 있는데, 사람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서 바라는 것도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이 긍휼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인자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좀 나이스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기대하고 바란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사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품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인자와 긍휼을 기대한다고 하는데 왜 그런 것일까요? 왜냐하면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품성이 우리들에게서 나타나야 그게 정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의 품성들을 드러내야 그게 제대로 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람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인자함을 기대하고 긍휼함을 기대한다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배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실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믿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원하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자동적으로 예배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예배하느냐 예배하지 않느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무조건 예배하게 되어 있는데, 그 대상을 하나님으로 하느냐 하나님이 아닌 것을 예배하느냐로 갈라지는 것뿐이에요. 이 세상에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누구냐,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중단하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예배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우상을 예배하기 시작하는 거죠.

힘을 섬기게 되고 권력을 섬기게 되고 성공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고, 이 세상의 인정을 우리가 우상으로 섬기게 되고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아니하면 정말 이 세상에 가치 없는 것들을 예배하게 되는 것이고, 만일 이 세상에 가치 없는 것들을 예배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피폐해지고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말 잘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누구를 예배하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하시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예배하는 것을 원하신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 단순히 예배만 드리면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어떤 예배를 드려야 되는가? 참된 예배를 드려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야 하냐면 하나님을 닮아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닮아가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면 하나님을 점점점점 닮아가게 되는 것이지만, 우상을 예배하면 우상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눈이 멀고 귀가 멀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 우상들을 예배하기 시작하면 우리들의 시야가 닫혀버리고 귀가 먹어버리고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은 우상과 같은 인생들이 되어 버리는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어 있는 것.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면 하나님의 품성들이 우리들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참된 예배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인자와 긍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에 그게 참된 예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라고 하는 형식은 가지고 있지만 형식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같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 같지만 전혀 하나님을 닮지 않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담지 않아서 그냥 계속해서 악을 저지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애를 원한다. 긍휼을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호세아서 6장 6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스라엘 민족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 같았어요. 제물을 드리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실컷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해놓고 그들의 삶 가운데서는 얼마나 모질게 사람들에 대해서 갑질을 해대고 악을 행하고 나쁜 짓을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외치는 소리가 뭐냐 하면 너희는 더 이상 내게 제사를 드리지 말라. 나는 예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내게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오해하지 마세요. 그 말씀은 그러니까 예배를 안 드려도 된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참된 예배, 인자와 긍휼이 나타나는 그런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없어서 점점 냉랭해지는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는데,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되는가? 우리 성도는 어떤 성도가 되어야 되는가? 2026년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겠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우리가 닮아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인자와 긍휼을 베푸는 데 주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자해지고 긍휼을 베푸는 것을 원하시는데, 그것을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죄성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의 뿌리가 남아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인자와 긍휼이 나타나지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게 된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나 성공이나 인정받는 것이나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이 우리의 우상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한다고 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인자와 긍휼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자와 긍휼을 베푸는 것은 결국 손해 보는 것일까요? 유익일까요? 유익입니다. 손해 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점에서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첫 번째는 우리가 인자와 긍휼을 베풀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칩니다. 믿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모질게 해보세요. 기쁩니까? 안 기뻐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보세요. 기쁩니까? 안 기뻐요. 다른 사람들을 욕해 보세요. 마음속에 기쁨이 생깁니까? 안 생겨요.

언제 기쁨이 생겨요? 인자와 긍휼을 베풀 때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나게 돼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면 인자와 긍휼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인데, 하나님을 닮아가면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어요. 감사가 넘치게 되어 있어요. 행복이 넘치게 되어 있어요.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가 그렇게 질문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아가라. 하나님의 모습을 점점점점 닮아가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내가 긍휼하고 자비로우니 너희도 자비롭고 긍휼을 베풀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가 하나님을 점점점점 닮아간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처럼 행복해지는 거야. 감사가 넘치게 되는 거야.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닮아가게 될 때 우리는 우울해지고 기분이 나쁘고 좌절감에 빠지게 되고 외롭게 되는 그런 모습이 되는 것인데,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우울하게 살기를 원하신다고 한다면 인자와 긍휼을 베푸는 일들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인자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유익인 이유가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인자와 긍휼을 베풀 때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사랑을 베풀면 누가 몰려들어요?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와요. 사람들이 오늘 말씀에 무슨 말씀이 되어 있습니까? 사람들이 갈망하는 게 무엇이다고요? 긍휼을 갈망하고 있다.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어요. 누가 긍휼을 베풀어줄 사람 없는가? 누가 인자를 베풀어줄 사람이 없는가? 누가 사랑을 베풀어줄 사람이 없는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그런 갈망이 있는데 그 갈망을 채워주는 인자를 베풀어줄 때, 긍휼을 베풀어줄 때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몰려들게 되어서 그래서 행복해지는 거야. 사람들이 누구에게 모여드는가? 인자와 긍휼이 있는 사람에게로 모여든다면 이 말이에요. 외롭지 않단 말이죠. 믿습니까?

요즘 저희 집에 몰려드는 게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고양이가 몰려들고 있습니다. 저희 동네에 들고양이들이 많이 있는데 들고양이들이 이리저리 우리 집을 왔다 갔다 하는 그 모습을 보고 먹을 것을 좀 줘야 되겠다 해가지고 제 아내가 먹을 것을 좀 주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몰려오고 있습니다. 온 동네에 고양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 저 집에 가면 먹을 게 있구나. 아침 아침이 되면 아침 인사하러 옵니다. 그래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우리 집 창문 바로 옆에 이 미다지 문 바로 그 옆에 고양이들이 빼곡히 우리 안을 도대체 언제 밥을 주나 하면서 열심히 쳐다보고 있어요.

그러면 음식을 준비해가지고 주는데 요즘에 고양이 밥도 사고 츄르도 사고 이제 고양이 용품이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하는데 그 고양이들을 이렇게 계속 먹이다 보니까 고양이들이 모여드는데 고양이 모여드는 거 싫으신 분들도 있겠지만 보니까 기분이 좋아요. 고양이들이 재롱을 피우고 고양이들이 와서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마치 우리가 사파리에 와 있는 듯한 우리 돈 내고 사파리 구경 가면서 사파리 타고 다니다가 호랑이도 보고 기린도 보고 코끼리도 보고 하는 것인데 우리 자연 사파리라 이 말이야.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사파리 고양이 과연 어디까지 올지 궁금합니다. 하물며 들고양이들도 먹을 것을 주면 몰려드는데,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풀면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우리 주변으로 몰려드는 것이죠. 네 인자와 긍휼은 무엇인가? 따뜻한 말 한마디도 인자와 긍휼이에요.

손 한 번 잡아주고 너무 보기 좋다고 칭찬해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을 해주고 감사하다고 표하고 여러 가지 사랑의 이야기들을 자꾸 해줄 때 사람들이 자꾸만 모여드는 거죠. 그렇게 모여드는 것이 우리들의 복이고 행복인 거예요. 이 세상에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에요? 내가 먼저 손 내밀지 않으면서 나는 왜 외로울까? 내가 먼저 마음을 열지 않으면서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서 왜 사람들이 내게 다가오지 않는가 말하는 게 제일 어리석은 거. 기회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다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인자와 자비를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아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미소 하나 보여준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모여드는 그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우리들에게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히브리어를 봤으면 좋겠는데요. “갈망 사람의 사람의 갈망은 그의 인자함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인데, 여기서 ‘그의 인자’라고 했을 때 그는 누구일까요? 그가 누구죠? 그 하스도하스도 할 때 오가 ‘그의’라고 하는 말인데, 사람의 갈망은 사람의 갈망은 그의 인자함이라고 할 때 ‘그’에서 그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하나님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볼 수가 있나요? 그것은 바로 바로 앞에 절인 잠언 19장 21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사람의 갈망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21절과 22절이 떨어져 있는 구절이 아니라 같이 연결되어 있는 구절이라고 한다면 어떤 의미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계획을 세워도 누구의 뜻에 달렸다.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으니 우리들의 갈망이 누구에게 있는가?

“주여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주여 하나님의 자비를 저희들에게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가 계획을 세워도 우리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안 되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우리가 갈망하나이다. 그런 의미로 21절과 22절을 연결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시간에 두 가지 다 해석이 다 가능하고 두 가지 다 맞는 번역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첫 번째로 이것을 사람의 자비하심이라고 한다고 하면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려야 되겠지만, 또 한 가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우리가 갈망한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한다면, 어쩌면 우리가 2026년 한 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계획이 있을 겁니다. 금년에는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하는 그런 목표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만이 오로지 설 뿐이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달렸다고 한다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무엇이 돼야 되겠는가

“하나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하며 주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그런 모습을 보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들어가려고 하기보다는 밖에서 머뭇거리려고 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안 들어가는 걸까요? 아니면 내가 너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품지 못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세리장 삭개오도, 주님께서는 삭개오도 받아주셨고 심지어 누구도 받아주셨습니까?

십자가에 같이 달렸던 강도도 아무것도 잘한 것도 없고, 마지막에 사형 받아서 죽게 되는 그 강도마저도 “주여 저를 기억해 주옵소서” 주님의 자비를 구하고 은총을 구할 때 주님께서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받아주셔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한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와 간구에도 하나님께서 들어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금년 2026년 한 해를 살아가는 동안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잠언 19장 22절 두 번째 줄에서는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말하는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고 무엇인가 혜택을 보기 위해서 재정적인 이득, 물질적인 이득을 위해서 거짓말을 할 때가 많이 있는데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부를 얻는 것보다 그렇게 해서 위기를 모면하는 것보다 오히려 진실한 것이 훨씬 낫다. 가난하더라도 진실한 게 낫고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진실한 게 훨씬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은 우리들에게 잠깐의 이익을 줄 수 있기는 하겠지만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 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진실하게 선다면 가난하게 될 수가 있고 때로는 수치를 당할 수도 있고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 진실로 서 있는 것이 그게 은혜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서는 이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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