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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데나리온과 은 30 (마 26:6-16)

제 아내가 당근을 좋아하는데요. 당근이 뭐죠? 물물 교환 아 플랫폼인데요. 내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 쓸모없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유익한 것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필요 없는 것이 내게는 유익한 것이 될 수 있어서, 당근이 잘 활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당근을 하다가 우리 교인하고도 물물 교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치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절대적인 것이기도 하지만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더 가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치가 없는 것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성경 연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서가 하나 있는데요. 사해 바다 근처에 있는 동굴에서 나온 쿰란 문서라고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서입니다. 이번에 성지 순례를 지난번에 다녀왔을 때 그 금란 동굴을 한번 가본 적이 있어서 참 감격 가운데 거기를 구경하고 온 적이 있는데요. 목동돌이 지나가다가 돌을 던졌는데, 그 돌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소리를 내는데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갔다가 발견하게 된 것이 무려 2천 년 전에 고대 문서가 항아리 안에 담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됐는데, 목동들은 그게 얼마나 가치 있는 건지 몰라가지고 엿 바꾸어 먹었어요. 엿이 아니라, 아무튼 돈 주고 바꿨겠죠. 그런데 이것이 알고 보니까 2천 년 전에 고대 문서였고 아주 오래된 성경 아주 오래된 성경에 대한 해설들이 있어서 성경 연구에 아주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어떤 같은 물건인데도 같은 것인데도 어떤 사람에게는 별 소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에서와 야곱 사이에 있었던 거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에서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작권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동생 야곱이 장자권을 내게 팔라고 했을 때, 그까짓 장작권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음식을 달라 음식을 먹고 싶다. 그래서 음식을 받고 장자권을 그냥 소홀히 여겨버린 이야기가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이렇게 사람들은 가치 있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리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포기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여기에 어떤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 나와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소중한 것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은 그런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향류의 가치가 얼마의 가치가 있었는가? 300 데나리온이나 됐다고 해요. 한 데나리온의 가치가 하루 종일 일해서 얻을 수 있는, 일당에 해당하는 가치라고 하니까, 300 데나리온이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이죠? 1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향유래요. 좀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잘 안 돼요. 그럼 정말 그렇게 비싼 향유가 있었을까? 저처럼 서민에게는 그런 걸 상상할 수가 없는데, 그렇게 큰 가치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에게 아끼지 않고 부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왜 예수님에게 이런 향유를 부었을까요? 왜 이 여인은 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가치 있는 정말 값비싼 향유를 전혀 아깝지 않게 부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이 여인이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일 거예요.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받은 여인으로서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하고 주님만 생각하면 너무나도 행복하고 주님이라고 한다면 아무것도 아깝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에게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이 여인의 마음 가운데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 여인이 누굴까요?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데 정확하게 마태복음은 밝혀져 있지 않은데 찬송가에 보면 막 달라 마리아라고 되어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아닐 수 있겠다고 하는 얘기가 있어요. 요한복음에 보면 그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일 거라고 해요. 요한복음 12장 3절 한번 보면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붙고 자기의 머리탈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했는데, 이 요한복음 12장의 이야기가 어디서 일어난 일이냐 하면 바로 나사로의 누이들의 집에서 누이들이 한 일이기 때문에 나사로의 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아무튼 이 여인이 구체적으로 누군지 정확하게 잘 알 수는 없겠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고 많은 사랑을 입고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이 향유도 전혀 아깝지 않게 이렇게 받칠 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화가 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분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8절에서 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어떻게 하여 분개하여 화를 냈어요.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낭비하느냐? 왜 함부로 버리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어쩌면 이것이 참 이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보여야 할 정상적인 반응, 바른 반응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바른 반응이라고 하면 무엇이 바른 반응일까요? 이 여인이 헌신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가져야 될 바른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반응일까요? 박수를 치는 게 맞겠죠. 그죠? 정말 이렇게 좋은 헌신을 보이고 있구나 하는 걸 보고 정말 잘했다. 정말 잘하고 있구나 박수 치고 칭찬하는 것이 바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될까요?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하고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부끄러운 마음을 갖는 것이 어쩌면 그게 바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놀랍게도 누가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분개하면서, “왜 이것을 허비하느냐? 왜 이것을 낭비하느냐?”라고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반응들이 낯설지가 않아요. 어디서 주로 일어나죠?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서 감사한데요. 오늘날에도 수많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이냐 하면 누군가 헌신하게 되면 잘한다고 박수 쳐주고, 잘했다고 박수 쳐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비아냥거리고 욕하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런 반응이 나오면 안 되는 것이죠. 다른 사람이 헌신하지 못하게 막고 나 자신도 헌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헌신도 막아버리는 그러한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그런 일을 지금 누가 하고 있는가 제자들이 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 보면 그 사람이 누구였는가 가롯 유다가 그랬다고 하는 것이죠.


이 가롯 유다가 하는 말, 제자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어쩌면 보면 액면으로 따지고 보면 맞는 말 같아요. 왜냐하면 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준다고 하는 것 이게 나쁜 건가요? 좋은 건가요? 좋은 거예요. 누가 말씀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뭐라고 가르치셨냐면 내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강도 만난 자가 있으면 외면하고 지나갈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가서 도와줘라. 심지어 누구라도 도와줘라. 원수라도 원수라고 할지라도 도와줘라.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서로 반목이 있고 갈등이 있고 서로 미워하는 원수지간이었는데, 그런데 유대인이 쓰러졌을 때 사마리아인이 가서 도와준 것처럼 너희도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 너희들에게 무난한 사람, 너희 가족들에게만 잘해주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다. 진짜 사랑은 어떤 것이 진짜 사랑이에요?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까지 나의 원수까지 그 사랑해 주는 사랑을 베풀려고 하는 것이 그게 예수님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이 제자들이 하는 말이 맞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해주신 그 비유에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었는데요. 그 양과 염소에 비유해 보면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무엇으로 심판하신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이 세상에 감옥에 갇힌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오. 그들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우리가 대했느냐, 불쌍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에게 대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사실 액면 그대로 본다고 한다면 제자들의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제자들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니들이 하는 말이 맞다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여인을 두둔하시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까? 마태복음 26장 10절에서 12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무엇을 위하여? 내 장례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두 가지로 말씀해 주신 겁니다. 이 여인이 한 일이 무슨 일이다 좋은 일이다. 정말 좋은 일을 한 것이다. 비난받을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한 것이고, 칭찬받을 만한 일, 좋은 일을 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무슨 일을 한 것이다. 내 장례를 위해서 예수님이 이제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될 텐데 그 장례를 미리 예언해여서 미리 그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정말 이 여인은 제자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거라고 하는 것을 이 여인이 알고서 기름을 부었던 것일까요? 아닐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학자의 글을 보니까 뭐라고 써놨냐면 이 여인이 한 행동은 선지자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예언자적인 행동을 한 것이라고 설명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옛날 선지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예언을 할 때 퍼포먼스를 하면서 예언을 했습니다. 자신이 전파할 예언의 말씀을 보여주는 행동들을 하면서 예언을 했거든요.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 전하기 위해서 고멜과 같은 여인과 결혼하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예언을 했고, 어떤 선지자는 허리띠를 가져다가 땅에 묻어놓고 그것이 썩는 것을 보면서 그래서 그걸 가지고 예언하는 그런 행동을 했듯이 이 여인이 한 행동이 무엇인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부을 수 있었는데 그 옥합을 어떻게 해요? 깨뜨려버리는 깨뜨려서 붓는 그 퍼포먼스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도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실 거라고 하는 것을 예언하는 그런 예언적인 의미에서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에게 부었다고 그렇게 설명해 놓는 분도 봤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이 여인이 그렇게 알고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이 여인은 그저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당시에는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발을 씻기고 기름을 붓고 하는 그런 풍습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가장 좋은 대접을 하기 위해서 기름을 부었지만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행위의 의미를 더 승화시켜서 이 여인이 곧 나의 장사를 위해서 준비하신 것이라고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또 무슨 말씀을 해 주셨습니까? 마태복음 26장 1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 여인의 이야기도 함께 전해줘라. 이 여인도 참된 믿음의 표본으로 너희들이 전하라.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이 여인이 여인의 이야기를 함께 전하라고 말한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여인의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될 그런 참된 믿음의 표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도대체 이 여인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의 모습을 칭찬하신 것이고, 왜 이것을 자꾸 전하라고 말씀하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다음에 나오는 가롯 유다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더욱더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게 훨씬 낫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말은 정말 멋있는 말이고 괜찮은 말 같았어요. 그런데 그게 진실이었느냐 하면 진실이 아니었어요. 거짓말이었어요. 요한복음 12장 6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오. 그는” 무엇이라?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라.” 말로는 선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말로는 옳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다 좋은 말만 해요. 하지만 행동은 어떻습니까? 악한 일을 하는 것이 가롯유다의 마음 가운데는 주님이 최고가 아니라 돈이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목적으로 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죠.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조심해야만 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선한 일을 표방하고 좋은 일을 내세웁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도와야 준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된다 말하기도 하고, 선교사로서 선교 사역을 해야 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온갖 좋은 이야기들을 다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뒤로 착복하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고, 그런 일들을 우리가 종종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사실 가롯 유다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가롯 유다의 삶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돈이었어요. 그래서 그 돈을 얻고 돈을 목적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다음에 바로 그 뒤에 14절에서부터 16절에 보면 가롯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아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롯 유다는 몰래 대제사장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테니 돈을 얼마나 주겠느냐 흥정을 합니다. 그래서 은 30을 받았네요. 놀랍게도 이 이야기를 마태복음에서는 이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 바로 다음에다가 붙여놨어요. 그렇게 붙여놓은 이유가 뭐겠어요?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비교해 보라고 붙여놓은 것이 한 여인은 주님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면서도 기쁨과 행복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가롯 유다는 주님을 따른다고 명목적으로는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돈을 향해서 걸어갔던 돈이 우상이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진지하게 아니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어느 순간순간마다 가롯유다의 마음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 것이죠.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돈이 주인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아닌 것이 우리의 우상이 되는 경우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는 가롯유다처럼 변해버리고 가롯유다와 같이 행동하는 경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마다 내가 정말 가롯 유다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이 여인처럼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지 우리 자신을 늘 돌아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언제 그렇게 되는가요? 언제 가롯 유다처럼 됩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주님보다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때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을까요? 때로는 돈이 더 중요할 수 있어요. 때로는 무엇이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까? 명예가 더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어요. 사람들이 내게 박수 쳐주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될 수가 있어요. 때로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될 수가 있어요. 때로는 자녀가 나의 우상이 될 수가 있어요. 때로는 돈이 나의 우상이 될 수가 있어요. 사람들 앞에서 박수받는 것들 정말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이 나의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자녀가 우상이 되어버린 경우가 너무나도 많고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돈이 우상인 경우도 너무나도 많고 정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박수 쳐주고 인정함을 받는 것이 우상인 경우도 너무나도 많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가롯 유다와 같이 그런 모습이 되지 않을지 우리 자신을 날마다 날마다 살펴보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어요.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가롯 유다는 돈을 향해서 찾아갔지만 돈을 쫓아가면서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그래도 베드로는 주님을 끝까지 따르고 싶어 했고, 주님을 끝까지 따른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베드로는 참된 제자인 것처럼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주님보다도 더 우선시되는 것이 드러난 때가 있었습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심판정 앞에 가서 어떤 여종이 쫓아 나와서 너도 예수와 한 패 아니냐 너도 갈릴리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았느냐라고 물어볼 때, 베드로는 그 순간에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했던 거예요. 내가 목숨을 잃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그렇게 부인하고 만 것이죠. 내가 예수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내 목숨이 더 소중하게 여겨져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그렇게 부인하게 되는 그런 모습들이 우리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 정말 나의 믿음이 무엇인가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 여인의 믿음을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왜 이 여인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헌신을 막 빼앗아 가버리기 위해서 우리의 것들을 다 받치라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아니요. 우리들을 위해서 이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을 최고로 여기고 사랑한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치게 되고 감사가 넘치게 되고 행복하게 될 것이지만 주님이 아닌 것들이 우리들의 마음에 우상이 되어 버린다고 한다면 그러면 결국 우리는 절망하게 될 거예요. 이 세상에 썩어질 것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면 결국 배신을 당하게 될까요? 돈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망하게 될 거예요. 명예가 자존심이 나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들의 우상이 된다고 한다면 결국 화가 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결과를 맞이하게 될까요? 우리를 위해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요구하시는 우리 주님께서 사실은 저와 여러분들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계셔요. 우리 옆 사람 보시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주님께서 우리 집사님 가장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정말이에요 정말이에요. 이번에 보았던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를 봤는데요. 많이들 보셨더라고요. 거기에 보면 어 양관식 오애순 부부가 자신들이 살고 있던 집을 팔아버려요. 팔아버리고 어디로 이사 가요? 조그마한 아파트로 이사 갑니다. 왜 그랬냐? 사랑하는 딸의 유학 자금을 만들기 위해서 집을 포기해 버리고 큰 집 포기해 버리고 작은 집으로 가는 거예요. 또 이 이 두 사람이 배를 팔아버렸어요. 왜? 사랑하는 아들, 말썽꾸러기의 아들 그 아들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그 아들 빼내기 위해서 삶의 수단이 되어 왔고, 지금까지 동고동락했던 그 배를 팔아버리고 좌판으로 나가는 왜 자기의 아들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 그 어떤 것도 더 소중하지 않다고 해서 팔아버린 거죠. 심지어 그 학씨 아저씨도 자기 딸에게 아무것도 안 주는 것 같았지만 사위를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누구를 주셨으니?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죽고 멸망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향유 300 데나리온 정도만 우리를 위해서 부어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모든 피를 다 쏟아내 주셨어요.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내어주셨어요.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절망하지 마세요.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외톨이로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고, 또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주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모시는 것이 주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그게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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