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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여서 받은 축복 (창 27:22-29)

지난 주일에 우리는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샀다고 하는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동생 야곱은 형이 가지고 있는 그 에서의 장자권을 탐냈고, 욕심을 부리면서, 그래서 어떻게 하면 차지할까 기회를 보다가, 장자권을 음식을 제공하고 차지했다고 하는 이야기였는데요. 야곱의 욕심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제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하는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의 축복을 빼앗아 가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면서,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았던 이삭이 자기가 죽기 전에 에서를 향해서 마음껏 축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를 불러서 이야기를 하는 거죠.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사냥을 다녀와서, 고기를 잡아 내게 요리를 해 온다고 한다면, 내가 그것을 먹고 내게 축복해 주겠다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래서 에서는 그 아버지의 말을 듣고 밖에 사냥을 하러 나간 그 사이에, 그 이야기를 들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동생 야곱을 불러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줄 테니, 네가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대접을 하고, 네가 마치 에서인 것처럼 변장을 해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인 것이죠.


아버지를 속이고, 마치 자기가 에서인 것처럼, 자기가 형인 것처럼, 아버지에게 들아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라고 하는 어머니의 제안에 야곱은 망설여졌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서 잘 분간하지 못하고,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러나 형과 동생은 너무나도 뚜렷하게 차이가 있는 것이죠. 아무리 눈이 어둡다고 할지라도, 동생 야곱이라고 하는 것이 발각된다고 한다면,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을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그런 일이었기 때문에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리브가가 계속 강권하는 겁니다. “아니다. 네가 가지고 가라”라고 이야기를 한 거죠.


그래서 에서처럼 변장을 합니다. 야곱은 매끈매끈한 사람인데, 마치 털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양털 가죽을 목에 두르고, 또 팔에 붙이고 해서, 그래서 음식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들어가서 에서가 왔다고 속이고 축복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죠. 그 이야기를 들은 이삭은 긴가민가 하죠.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에서의 목소리가 아니에요. 에서의 목소리가 아닌데, 그런데 손을 만져보니 털이 있고, 목을 만져보니 털이 있고, 목소리는 분명 에서의 목소리가 아닌데, 옷을 옷의 향취를 맡아보면 에서의 모습인 것 같아서, 내가 늙어서 이게 사람도 잘 못 알아보나 하면서, 결국에는 야곱에게 축복해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창세기 27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 축복을 받아가지고 야곱이 떠나가 버렸을 때, 나중에 에서가 음식을 만들어서,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잔뜩 기대에 차서, 에서가 아버지에게 말을 하는 거죠. 아버지 사냥을 해 왔어요.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왔으니까, 드시고 제게 축복해 달라고 하니까, 이삭이 깜짝 놀랍니다. 네가 누구냐? 조금 전에 내가 에서에게 축복해 주었는데, 너는 누구냐라고 이야기할 때, 에서가 그때서야 깨닫게 됩니다. 그게 내가 아니고, 야곱이 속였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인 겁니다. 아버지, 이것은 엉터리입니다. 제게 축복해 달라고 하는 것이죠.

놀랍게도 이삭은 그 에서를 향해서 내가 이미 동생에게 축복해 주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너에게 해줄 축복이 없다고 하면서 망설입니다. 그때 계속해서 조르죠. 아버지, 동생에게 해준 축복, 저에게 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해줄 축복이 없습니까? 하면서, 그래도 나에게 축복을 해달라고 조르니까, 울고 불고 떼를 쓰니까, 그때 아버지가 에서를 향해서 축복을 해주는데, 이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기도를 해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에서에게 어떤 기도를 해주었나요? 어떤 축복을 해주었나요? 창세기 27장 오늘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마는 39절에서부터 40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소는 땅에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내 아우를 섬길 것이며, 내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내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하였더라.” 이미 동생에게 많은 축복을 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형을 위해서 해줄 축복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형을 위해서 축복을 한다고 하는 것이 축복도 아닌 축복, 마치 저주 같은 축복을, 형 에서에게 해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창세기 27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오르게 될 겁니다. 야곱에게 축복했다고 해서, 에서에게 축복을 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저 같으면 다 축복할 것 같아요. 동생에게도 축복하고, 형에게도 축복하고, 아무리 동생을 위해서 많은 축복을 해주었다고 할지라도, 형에게 더 큰 축복을 내리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축복을 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야곱이 속여서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게 유효한가요? 우리 계약에서도, 기망에 의해서, 속여서 계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그 계약이 인정되지 않는 것처럼, 야곱이 형이라고 속여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면, 아버지가 나중에, “아, 그거 무효다. 내가 잘못 축복한 거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니까, 무효라고 선언해 버리고, 형을 위해서 축복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심각한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이러한 야곱의 속이는 행위가 정당한 행위였을까?”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야곱이 거짓말을 했고, 속임수를 썼고, 그래서 축복을 받았는데, 그런 축복 기도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이 과연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왜 베풀어 주시는가?”라고 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질문들을 우리가 던지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분명하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야곱과 리브가가 공모를 해서 아버지를 속인 행위는 잘한 걸까요? 잘못된 행위일까요? 잘못된 행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요.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면서 축복을 받겠다고 했던 이 행위는 결코 정당한 행위라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행위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 일을 리브가는 야곱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결국 이 일을 만들었던, 이런 일을 벌이게 만든 그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요? 어머니 리브가는 왜 야곱을 이렇게 편애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좀 살펴보았으면 좋겠는데, 창세기 앞에 보면 하나님께서 리브가를 향해서 들려주신 어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리브가가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는데, 뱃속에서 쌍둥이 아이가 있는 겁니다. 쌍둥이 아이가 있는데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우는 거예요. 뱃속에서부터 뱃속에서 자꾸 이렇게 아이들이 싸우고 있을 때, 리브가가 도대체 이 아이들이 뱃속에서 왜 이렇게 싸우는가 하고 있을 때,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창세기 25장 23절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내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내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리브가를 향해서 들려주신 말씀이 있는데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네가 아들을 낳게 될 텐데, 쌍둥이를 낳게 될 텐데, 동생이 더 크게 될 것이고, 형이 오히려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놀라운 말씀을 리브가가 듣게 된 것이죠. 리브가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그 말씀을 늘 마음속에 새기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동생을 들어 쓰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죠.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 그것이 이삭에게 이어졌는데, 그 이삭에게 이어진 하나님의 축복이 누구를 통해서 연결이 되는가? 장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둘째 아들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이어질 거라고 하는 그 예언을, 리브가가 그 아이들을 이미 잉태하고 있을 그때부터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야곱에게 축복을 내렸으면 좋겠고, 야곱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모든 일을 잘 감당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삭은 그런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행동을 한 것이죠. 이삭은 누구를 좋아했습니까? 큰아들 에서를 더 좋아했던 것이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장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런 문화가 그 당시에 있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삭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에도 불구하고, 에서를 더 편애하고, 큰아들에게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이삭의 마음 가운데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미 그 동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겠다고 하는 그런 예언을 해 주셨지만, 이삭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큰아들 에서를 편애하고 에서에게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이삭의 마음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죽어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얼마 죽음이 남지 아니한 순간에, 이삭은 다시 그 에서에게 축복하고, 그리고 이 생을 마감하려고 했던 그 순간에 리브가는 당황스러웠던 것이죠. 하나님의 뜻이 그게 아닌데, 하나님은 오히려 동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리브가는 당황스러웠던 거예요. 그래서 속임수를 통해서라도 동생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동생을 부추겨서 속여서 그래서 이삭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할지라도 리브가가 했던 행동, 야곱이 했던 행동이 정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이삭이 큰 아들에게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이삭의 모습을 보면서, 리브가는 어떻게 행동을 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삭이 완고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야곱이 아니라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저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만들 것인가? 야곱이 축복을 어떻게 받아 만들게 할 것인가? 하면서, 속이면서 이삭에게 억지로 축복을 받아내는 것이, 그게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돼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성취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며 기다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만일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기다렸다고 한다면,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고 그래서 모든 것이 에서에게 넘어가는 걸로 끝이 났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인 것이죠. 에서가 사냥을 하러 갔는데, 사냥이 안 돼가지고 그래서 음식을 만들 수 없게 만드실 수도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삭이 축복하려고 했는데, 이삭이 축복하려고 하는 그 순간에 말이 꼬여서 축복하지 못하게 하실 수도 있어요. 아니면 이삭을 축복하려고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이삭을 꾸중하시면서, 네가 야곱에게 축복해야, 내가 야곱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겠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너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그 에서에게 축복하려 하느냐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 이삭을 막으실 수도 있는 것이죠.


야곱이 속이면서 아버지의 축복을 쟁취해 내야만,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믿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리브가와 야곱의 행동은 믿음이 있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한번 비교를 해봤으면 좋겠는데요. 이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했던 다른 성경의 한 인물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다윗을 불러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양을 치고 있던 이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시면서 다윗에게 해주셨던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버리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두 번째 왕으로 다윗을 세우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해 주신 것이죠.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구나. 사울을 하나님께서 버리셨고, 나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러하기 때문에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 사울 왕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사울 왕이 죽이려고 달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삶은 그 이후로부터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 것이죠. 도망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울 왕이 쫓아다니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에 사울 왕의 손에 잡혀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런 불안한 상태 속에서 다윗이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마음 가운데 어떤 불안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왕으로 만들어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러다가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이러다가 사울 왕에 잡혀서, 내가 완전히 꿈도 이루지 못한 채,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하는 그런 불안한 상태 속에서 계속해서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 바로 다윗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두 번씩이나 있었던 것이 어느 날 사울 왕이 동굴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다른 병사들이 아무도 없이 사울왕 혼자 다윗과 그 부하들이 숨어 있던 그 동굴 속으로 비무장한 채 사울 왕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 그 순간에 다윗의 그 부하들이 달려가서, 사울 왕을 잡아 죽이면, 정말 꼼짝도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절호의 찬스가 오게 된 것이죠. 그때 다윗의 부하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대장님, 이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호의 찬스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장님을 이스라엘 나라로 왕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사울 왕을 죽이고 이제 이 고생을 다 끝내버리고 왕으로 등극할 수 있는 그런 절호의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니 사울 왕을 죽이자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하지만 그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한 겁 죽이지 않았어요. 또 한 번 있습니다. 들판에서 모두가 다 잠을 자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보초도 없이 아무런 대비 태세도 없이 들판에서 잠을 자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 다윗과 부하들이 그 진영 안에 들어가서 사울 왕을 그냥 죽일 수 있는 그런 절호의 찬스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다윗은 그 순간에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세워줄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실패했습니까? 실패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사울 왕을 물리치게 만드시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야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야곱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그런 꿈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 거예요. 아마 리브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셨던 그 예언의 말씀을 야곱이 늘 기억하며 살았을 겁니다. 얘야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단다. 형이 아니라, 너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만드실 것이고, 큰 민족을 이룰 것이고,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이삭 아버지와 그 모든 언약의 축복들이 너를 통해서 이루어질 거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들었을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래,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지만, 그런데 그 이삭의 야곱의 마음에 리브가의 마음에 조바심이 생기게 된 것이죠.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그 에서를 향해서 축복하려고 하는 그 순간에, 내가 달려가서 그 축복을 쟁취하고,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 내가 성공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으로 아버지를 속이게 되었는데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본받아야 될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는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읽을 때 조심해야 될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경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다 따라야만 하는 모범적인 이야기로 기록된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어떤 내용인가?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가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이야기인 것이고요. 바로 이 야곱의 모습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연약함, 인간의 부족함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성경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성경 전체의 교훈에 비추어 보아서 이 이야기를 평가해 보고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그 교훈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야곱의 행위는 아쉬운 행동이었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행동이 아니라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 뜻을 앞질러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무조건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안 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그냥 기다리기만 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을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마치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그냥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질 때를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정반대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어떤 가르침입니까? 우리가 기도도 하되, 기도하되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해야 되는 거예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며 나가야 추수할 곡식을 얻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만 하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땀을 흘리며 수고하며 애써야, 무엇인가를 얻게 되는 것이죠. 우리 가정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최선의 일들을 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 비즈니스가 잘 되려고 한다면 하나님 우리 비즈니스를 잘 되게 해 주세요. 기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어 있을 것인가 늘 연구하면서, 최선을 다하면서, 부지런하게 그 비즈니스를 잘 이끌어나가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가 승진하기 위해서 우리가 또한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고 한다면, 기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시간에 이 야곱이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했다고 하는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배치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행동이 아닌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결론이 어떻게 나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심판하든지 저주를 받든 지 해야 당연한 것이죠. 왜냐하면 잘못된 행동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삭은 야곱을 위해서 해주었던 그 축복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삭은 자기가 야곱에게 내렸던 그 축복이 잘못된 속여서 축복을 해준 거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것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번복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이 야곱을 저주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때서야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그때 깨달은 것 같아요. 창세기 27장 33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이삭이 자기가 속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심히 떨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심히 떨었을까요? 이삭은 그 순간에 비로소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아마 심이 떨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리브가에게 해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이삭에게는 마음이 안 드는 거예요. 장자를 더 대우하고 싶고, 장자를 더 선호하고 싶은, 하나님 뜻과는 정반대로 계속해서 장자를 선호하던, 그 이삭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그런 일들을 계속했던 그 이삭이, 내 뜻과는 달리 야곱이 이렇게 와서 내 축복을 받아버렸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 떨었을 뿐만 아니라, 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이삭은 그 순간에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히브리서 11장 20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사실 이삭은 믿음으로 축복했습니까? 속아서 축복했습니까? 속아서 축복했어요.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이 이야기를 창세기에서 있었던 그 이야기를, 맨 마지막에 히브리서에서 다시 요약하고 평가하면서, 이삭은 어떻게 자녀들을 축복했는가? 뭐라고 표현하냐면 믿음으로 한 일이었다. 그것은 이삭이 처음부터 믿음으로 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이삭에는 이삭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해보려고 했으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은 후에, 취소해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래서 축복해 주고 결국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이죠.


야곱이라고 하는 사람을 보면 속임수도 쓰고 여러 가지 면에서 어 부족한 사람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야곱을 축복하시고 이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원하신 것이죠.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된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이죠. 자격이 없고 속임수를 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격이 없는 야곱을 사랑하시고 용납하시고 그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 우리가 소망을 갖게 되는 거예요. 왜? 만일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 완벽한 사람, 아무 실수가 없는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 모습을 살펴봐도 그래요. 제 모습을 지난 한 주간 동안 살펴보면서, 왜 이렇게 참 부족할까? 왜 이렇게 사랑이 없을까? 왜 이렇게 연약할까? 정말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없는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감히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만일 하나님께서 완벽한 사람만 찾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만일 정말 최고의 사람들만 찾는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인가요? 속임수를 쓰고 잘못한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받아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속여서 받은 축복이라고 잡았는데, 사실 그 표현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속여서 받은 축복”이 아니라 “속였음에도 불구하고 받은 축복”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연약한 모습들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신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막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늘 우리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는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늘 조롱하면서 더 죄악을 저지르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런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주님을 기억하며, 오늘 또다시 일어서고, 주님의 자녀로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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