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죠. 그러니까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친밀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과는 갈등이 일어날 일이 없는 겁니다. 적어도,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의 연관이라도 있어야, 최소한의 관계가 있어야, 거기서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지나가다 마주치는 그런 만남이라든지, 아니면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먹게 되는 그런 주인과 손님의 관객이든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어야, 갈등이 발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서는 갈등이 일어날 이유도 없습니다. 저 미국에 가면 캘리포니아라고 하는 곳에 랜스 크린스텐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신 분 계십니까?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시겠죠? 저 아프리카에 이디 아민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나랑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갈등의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갈등이 전혀 없는 게 좋을까요? 과연 갈등이 아예 없이, 갈등이 전혀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갈등이 없다면 좋겠지만, 갈등이 없는 것이 좋아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게 제일 좋은 상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갈등이 없으려면,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인연을 다 끊어버리고, 나 혼자 산속에 들어가서, 자연과 벗을 하며, 사람들과는 전혀 얽매이지 않고, 외로이 혼자 살아간다면, 그러면 갈등이 전혀 없겠지만, 과연 그게 정말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갈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 그게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며, 사실은 절망적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갈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 만났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내가 이 사람과 맞지 않는가?” “이 사람과 만나지 말았어야 되는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각이 솟아오르게 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결론입니다. 갈등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과 잘못된 만남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사실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랑해야 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은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고 움직이고 살아가는 가운데, 언제나 의견이 대립되고, 생각이 다르고, 방식이 달라서, 늘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갈등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숨이 멈추어서,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때, 우리가 죽게 된다고 한다면, 더 이상의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갈등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하는 증거이기도 하겠고요. 갈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해야 될 사람과 함께 있다고 하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죠.
오늘 우리는 창세기 13장의 말씀을 통해서, 아브람(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 사이에 있었던 갈등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 사이는 정말 서로가 아껴주고 돌보고, 그리고 함께 힘을 합쳐야 될 좋은 관계여야만 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갈등이 생기고 만 것이죠.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들 사이를 갈라놓고, 그들 사이에 마음이 아프게 만든 그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날로 말하자면 한마디로 말하면 “돈의 문제”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서로 양을 치는데, 서로 자기들의 양에게 먼저 풀을 뜯기고, 자기들의 양에게 먼저 물을 먹이겠다고 하면서, 서로 다투고 싸우게 되는 겁니다.
도대체 양이 얼마나 많길래 이렇게 싸울 정도가 되었을까요? 같이 이렇게 어울리면서, 같이 나누면서 행복하게 살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싸우면서까지, 갈등을 일으키면서까지, 양이 많아서 싸웠다고 하는 게, 사실은 제가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제가 이스라엘에 가서 이스라엘 땅을 보는 순간, “아, 싸울 만도 했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영상을 한번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이 영상은 제가 지난번에 이스라엘에 갔을 때,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그 모습을 제가 핸드폰으로 촬영한 영상 가운데 일부입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양들이 돌아다니면서 풀을 뜯고 있는데, 이 풀이 많냐면, 많지가 않아요. 별로 그렇게 많은 풀이 있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곳은 정말 풀이 많은 곳이었고, (이제는 치워도 됩니다.) 그다음에 그 많은 곳을 갔더니, 황량하기 그지없는 거예요. 풀 한 포기가 나 있지 않는 거예요. 물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양치는 곳을 봤더니, 풀이 없는 곳에서 양을 치면서, 풀을 찾기 위해서 이동해서 저쪽에 가서, 풀을 찾아 뜯어 먹이게 하고, 그리고 그것이 없어지면 또 다른 곳으로 한참 이동을 해서, 또 풀을 찾아 먹이기도 하는, 그런 황량한 땅이 어디였는가? 이스라엘 땅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종종 이런 상황들이 발생할 때 종교에서는, 수많은 종교는, 그러니까 돈이 문제니까, 돈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물질이 너를 괴롭게 하고, 소유(所有)가 너를 괴롭게 하니까, 차라리 무소유로 살아라.”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아라.” 그러면 고통이 없어질 것이고, 갈등이 없어질 것이고, 마음이 평안할 거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가르친 사람들이, 뒤로는 많은 재물을 축적했다고 해서, 그것이 들키게 돼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그건 성경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잠언서 14장 4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서 14장 4절 말씀에 한번 보여주면 좋겠는데요. 예.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소를 데리고 있으면, 무엇이 있다는 거예요? 구유가 더러워진다는 거예요. 사람들을 함께 같이 지내면, 갈등이 생긴다는 거예요. 어려움이 생긴다는 거예요. 힘든 일들이 자꾸만 생겨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갈등이 너무나도 싫어서, 그래서 소를 치워버리면, 구유는 깨끗해지겠지만, 그러나 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그 수많은 이익들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사탄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그 소 중에서, 소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바라보게 하기보다는, 소가 더럽히는 그 구유의 더러움만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갈등을 주목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단점을 주목하게 만들고, 잘못한 것을 주목하게 만들어서, 그 사람과는 관계도 하지 않고 끊어버리고, 아예 그 관계를 정리해 버리게 만들려고,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관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구유가 더러워진 게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 사람의 단점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좋은 유익들이 있는가? 얼마나 좋은 혜택이 있는가? 그 좋은 모습을 보아라 이 말이에요. 99%가 좋은 것인데, 단점 하나, 일(1), 그 단점을 바라보면서, 미워하고 시기하고 때려치워 버리고, 그것을 내쫓아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어리석은 선택을 할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돈에 있지 않는 겁니다. 수많은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무소유가 해법이 아니라, 사실은 돈 자체를 없앤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문제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우리들의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죠. 돈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우상으로 바라보는 데, 우리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갈등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상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세우기 시작할 때,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죠. 만일 성공이 우리의 우상이 된다면, 만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우리들의 우상이 된다면, 만일 돈이 우리의 우상이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결국 갈등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들지만, 참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우리가 섬기게 된다고 한다면, 그 우상은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망가뜨려버리고, 우리를 파멸시켜 버리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우리에게 이 세상에 좋은 모든 것들이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우상을 만들어버리고 난다면, 자존심이 우리의 우상이 되고, 명예가 우상이 되고, 돈이 우상이 되고, 쾌락이 우상이 되고, 인정받는 것이 우상이 되고, 우리들의 자녀가 우상이 돼버리면,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어 버린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제를 잘 살펴보면서 우리는 갈등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극약 처방을 내릴 것이 아닙니다. 단절이라고 하는 극약 처방을 내리는 것은 사탄이 우리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순간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을까요?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서로 싸우고 있을 때, 이들이 싸우고 갈등을 벌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들의 마음 가운데 돈이 우상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공이 우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어떻게 하면 우리 양을 잘 먹일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양을 잘 돌볼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이 성공적으로 이 일을 수행해 낼 수 있을까? 이것이 우상이 될 때, 그 우상의, 우상을 섬기는 것을 방해하는 것 같은, 다른 목자들은 미워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다른 목자들에 대해서는 시기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순간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 문제를 풀었는가?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놀라운 제안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13장 8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우리는 한 친족이라. 가족이라.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될 사람이라. 우리는 함께 돌봐야 될 사람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내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내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내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야기한 것이죠. 아브라함은 이 순간에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더 좋은 땅을 차지하고, 자신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더 좋은 목초지를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놓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최우선순위는 무엇이냐 하면, 조카 롯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조카에게 우선권을 양보한 것이죠. 우리 앞에 땅이 놓여 있는데, 네가 선택해라. 네가 좋은 곳을 선택해라. 그러면 남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남는 것을 내가 갖겠다. 네가 우선 선택하면, 남는 것을 내가 선택하겠다고 하는 놀라운 제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은 돈 성공을 우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먹여 살리시는 것이고,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아끼시고,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니,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겨야겠다고 하는, 그런 결심으로, 돈이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 땅을 양보하게 된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돈보다 성공보다, “가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돈을 얻기 위해서 가족을 버린 것이 아니라, 가족을 얻기 위해서, 돈을 버리고 성공을 버리겠다고 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읽으면서, “맞아. 갈등이 생기면, 잠시 떨어져야 돼,” “갈등이 생기면, 서로 안 보는 게 좋아.”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창세기 13장의 말씀은, 그러니까, 갈등이 있었을 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헤어졌다고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헤어졌습니까? 약간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헤어진 게 아니라, 롯이 힘들 때마다, 아브라함은 늘 찾아가서 도와줬었어요. 전쟁이 일어나서 롯이 잡혀가게 되고, 재산을 다 빼앗겨버렸을 때, 아브라함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그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롯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것이죠. 그래서 롯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롯을 버린 게 아니에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저 소돔과 고모라 땅을 하나님께서 유황 불로 파멸시키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간청하는 겁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그 땅에 의인이 있어도 멸망하시겠습니까? 하나님 그 땅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가면서 그런 의인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해도 그 성을 멸하시겠습니까? 그 땅을 위해서, 롯이 살고 있는 그 소돔과 고모라 땅을 위해서 눈물로 간청했던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아브라함의 모습이었던 것이죠.
아브라함은 이 순간에 이 갈등 관계에 있을 때, 그러니까 너는 더 이상 못 보겠다고 하면서, 롯과 관계를 단절해 버린 것이 아니라, 그리고 롯과의 경쟁을 통해서, 내가 가장 좋은 것을 얻고, 내가 가장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투쟁하고, 법정 투쟁하고, 그래서 싸운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였습니다. 차라리 손해 보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죠. 왜? 돈이 나를 먹이고 살리는 게 아니라, 나를 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이 깨닫게 하기를 원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살아가고 이동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주셨는데, 그렇게 먹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명기 8장 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요,” 떡이 나를 먹여 살리는 게 아니요, 성공이, 물질이 나를 먹여 살리는 게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 달려 있는가? 돈에 달려 있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 달려 있는가? 우리의 명예에 달려 있지 않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 쳐주는 데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 달려 있는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이죠.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돈이 많아서 사는 게 아니라, 사업이 성공했기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산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갈등의 순간에, 내가 승리하는 선택이 아닌, 조카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선택을 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만일 돈을 우상으로 섬기게 된다면, 성공을 우상으로 섬기게 된다고 한다면, 이 순간에 포기할 수 없을 겁니다. 돈이 없어지는 걸 견딜 수 없기 때문이죠. 우리 양들을 먹여야 되는데, 좋은 땅을 다 잃어버리면 어떻게 살아가란 말입니까?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두려운 마음이 들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돈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자기 조카와의 관계의 회복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내가 많은 돈을 얻고 성공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조카 롯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것을 기뻐하실 것을 알았던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이 쉬웠을까요? 어려웠을까요? 어려웠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 척박한 이스라엘 땅에서, 가나안 땅에서, 만일 롯이 좋은 땅을 차지해 버리고, 나는 척박한 땅을 차지해 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양을 키워요? 어떻게 양을 먹여 살려요? 과연 우리 식솔들은 내가 어떻게 먹여 살려요? 당장 내 눈앞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고, 당장 내 눈앞에 어려운 일들이 닥칠 거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땅을 포기하는 것은 사실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러다가 망하는 거 아닌가? 이러다가 완전히 박살 나버리는 것이 아닐까?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했더니 그랬더니, 롯 조카가 어디를 선택해 버렸습니까? 가장 좋은 땅을 선점한 것이죠. 양을 먹이기에 가장 좋은 땅, 그 땅을 먼저 선점해 버린 거예요. 내가 양보하면, 조카도 “아니야, 삼촌” 하면서 양보해 주면 좋을 텐데, 우리의 인생이 늘 그렇잖아요? 내가 양보하면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 일이 발생한 겁니다. 창세기 13장 10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양들을 먹일 수 있는 물이 있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그곳이 어떤 곳과 같았는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흉년이 없는 저 애굽 땅과 같이, 정말 풍성한 그 옥토와 같은 땅, 양을 먹이기에 너무나도 그 좋은 땅을 롯이 차지해 버리고 만 겁니다.
남아있는 땅은 어떤 땅만 남았어요? 척박한 땅만 남은 것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망했을까요? 망했나요? (오히려) 롯이 좋은 땅이라고 생각해서 찾아간 그 땅에 전쟁이 일어난 겁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침략을 당해서, 모든 재산 다 빼앗겨버리고, 자기 자신도 노예로 끌려가게 되는 그런 비참한 일을 롯이 겪게 됐습니다. 그 이야기가 창세기 14장, 우리가 13장을 읽었는데, 바로 14장에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거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셔서, 그곳에 유황 불을 쏟아부으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창세기 몇 장? 19장에 나오는 거죠. 롯이 좋은 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롯은 고통의 땅을 선택하고 만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그 남겨진 땅에서, 그 정말 마음이 답답할 때,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해주셨던 말씀이, 창세기 13장 14절에서부터 17절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내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에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이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황으로 두루 다녀보라. 내가 그것을 내게 주리라.” 망할 것 같은 그 땅 앞에 서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망하는 게 아니라, 네 자손이 엄청나게 많아질 거다. 이 땅에 모래알을 셀 수 없잖냐? 그렇게 셀 수 없을 만큼, 네 자녀들이 그렇게 엄청나게 많아질 거야. 망한 게 아니라, 성공할 거다. 죽는 게 아니라 살아날 거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시며 그 약속이 끝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만일 이 순간에 아브라함이 롯과 싸우겠다고 결정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 판 붙어볼까? 내 힘으로 한번 조카를 눌러볼까? 우리 집에서 기른 그 군인들을 데리고, 이 조카들과 조카와 싸워서, 우리가 이 좋은 땅을 한번 차지해 볼까? “결정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브라함이 승리했을까요? 롯이 승리했을까요? 결론은 모르죠. 안 했으니까. 하지만 갈라디아서 5장 15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서로 울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롯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품어야 될 사랑의 대상입니다. 99%의 좋은 게 있는데 1%의 단점, 1%의 갈등을 보고 헤어지자 못 산다. 너 같은 사람과는 같이 갈 수 없다. 서로 싸우고 다투면, 그걸로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도 망하고, 함께 망하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생각하는 게 다르고 행동 방식이 다르고 모든 게 달라요.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이 다르고, 서로 좋아하는 게 서로 달라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갈등이 있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갈등이 있고, 같은 직장 안에서도 갈등이 있고, 서로가 사랑해야 될 교회 안에서도 갈등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우리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바꿀 수 없어요.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내가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근데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누구죠? 나는 바꿀 수 있어요. 내 남편도 못 바꿔요. 우리 새끼도 못 바꿔요. 그 누구도 못 바꿔요. 그런데 나는 바꿀 수 있어요. 그래서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되는 것이, 혹시 내 마음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가? 나는 돈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가? 사람들로부터 박수받는 것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가 우리 자식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가 그 어떤 것을 우상으로 만들 수 있는가?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서,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 그 우상을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내려놓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 대신에,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진정으로 예배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선택을 하지 못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선택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를 충동질하는 대로 이끌려갈 때가 너무나도 많아요.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저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우상을 내려놓게 하시고, 주님을 하나님으로 참되신 하나님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람의 단점, 그 사람의 실수, 그 사람의 추악한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욕하고 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해 주시고, 장점을 바라보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그런 회복의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아브라함과 같은 선택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같은 선택을 하셨어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하나님과의 갈등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땅만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포기하셨어요.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같이 살아가기 위하여, “나와 함께 하자,” “나와 함께 같이 지내자”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위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12월 우리 성탄의 그 의미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지 아니하시고 적대시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신 기간입니다. 원하기는 이 성탄의 기간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우리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우리도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도와주세요. 저희들의 완고한 마음을 녹여주세요. 나쁜 것만 바라보고, 실수만 바라보고, 단점만 바라보고 비난하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려고 하는,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세요. 주님께서 저희들의 그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셨던 것처럼, 주님의 사랑의 눈으로 우리 자녀를 보게 해 주옵소서, 우리 부모를 보게 해 주옵소서. 여러 가지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아내를 바라보고,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남편을 바라보고, 힘들고 어려운 갈등 가운데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주님 저희들의 마음 가운데 우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회개하며, 하나님의 회복케 하심에 그 은총을 체험케 해 주옵소서. 오늘 이 시간 기도하며 나아가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