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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가는 역사 (행 9:13-19)

우리 예수비전교회가 첫 예배를 드린 지 11주년이 되는 주일이어서, 11주년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요. 그 첫 예배 때부터 함께하셨던 분들은, 아마도 그때의 기억이 아주 생생 하게 날 것 같습니다. 우리 장로님 기도하시는 것을 보니까, 그때 기억들 많이 기억이 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을 걸어오는 과정 가운데, 때로는 당혹스러운 적도 많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던 방향으로, 우리가 계획하던 방향으로,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정반대로 모든 일들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람이 계획을 세우지만, 그러나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실수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하신 길로 우리를 훈련시키기도 하고, 우리를 인내하게 만들기도 하시고, 또한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게 만들기도 하시고,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게도 만드시는 그런 훈련의 과정이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11년이 지난 이 시점에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인정할 수가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11주년을 기념하면서 많은 분들이 참 여러 가지 감격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때 처음 힘들었던 때에 비해서 하나님의 그 인도하심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면서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이 충분히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그 당시 첫 예배에 함께하셨던 분들만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나중에 우리 교회에 등록하고, 우리 교회와 함께 신앙생활하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저도 그중에 한 사람입니다. 저도 일련의 소용돌이가 다 지난 다음에, 예수비전교회에 조인하게 되어서, 여러분들과 함께 같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요. 어떻게 보면 이렇게 나중에 우리 교회에 참여하신 분들에게는, 설립 기념일이 이렇게 크게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어떤 목사님 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 목사님은 자기 교회 설립 기념일을 없앴대요. 없앴다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기념하지 않는다고 그래요. 그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날에 특별히 기념하거나 그러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10월 마지막 주일인 종교 개혁주일, 그날을 오히려 더 기념하고, 그것이 우리 교회 탄생일이니까, 종교 개혁주일을 더 크게 기념하면서 지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매년 설립 기념일이 되면, 설립 당시에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감격이 있고, 그리고 기쁘고 또 여러 가지 감상에도 젖을 수 있지만, 그 이후에 오셨던 분들은 갑자기 소외를 당하는 느낌을 받는데요. 나는 뭐지? 지금까지 내가 이 교회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이 교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1년 내내 신앙생활하다가도, 설립 기념일만 되면, 왠지 모르게 갑자기 손님이 되어버리는 듯한, 그런 기분을 받기 때문에, 그래서 요즘에는 설립 당시의 사람들은 몇 명 남지 않고, 대부분 그 이후에 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그런 교회이기 때문에, 설립 기념일을 이렇게 기념하기보다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생뚱맞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아예 지키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첫 예배 때부터 계시면서 눈물과 기도로 그렇게 수고하면서 달려왔던 분들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감격을 하게 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에는 그 이후에 오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꽤 있습니다. 그런 우리 교회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 채, 이후에 와서 등록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11주년을 맞이하면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요. 그건 무엇일까 하면, 바로 “역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겁니다. 역사가 무엇일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역사라고 하는 것은 과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물론 과거의 경험, 과거의 사건, 그런 것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시작되게 되겠지만, 우리의 삶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고 한다면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죠. 과거에만 머무르게 되면, 과거에 있었던 영화, 과거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 그리고 그 과거에만, 우리가 그 감옥 속에 갇혀 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앞으로 새 시대를 만들어 나가고, 발전해 나가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기 때문에, 과거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전향적으로 나아가는 그런 열린 마음의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의 관계도 과거적인 것이기보다는 미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물론 과거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장점입니다. 여러분도 누구를 만났을 때 마음이 편하고 즐겁고 그런가요? 옛날 어렸을 때 친구들 만나면 정말 재미있죠. 저도 옛날 젊었을 때, 아무런 철도 없을 때 같이 공부했고, 같이 놀던 친구들을 만나면 마음이 너무 편해요. 그래서 동창회에 가면, 그냥 제 마음이 그냥 그렇게 편하다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제 아내의 동창들이 와 가지고, 막 노는 거 보면, 세상에 50~60대 되는 이 사람들이, 마치 초등학생들처럼 노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저렇게 좋을까? 예전에 그 어렸을 때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좋을까? 그러면서 참 이 “동창이라고 하는 것이 참 편한 관계구나”라고 하는 것을 종종 많이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도 역시 과거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것이죠.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관계도 미래적인 것이 돼야 되는 거죠.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되고 확장해 나가야 되고 열려져야 하는 그런 것이 되는 것이죠. 종종 우리 교회에서 사역했던 목사님들 중에 다른 교회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이 지나가다가 우리 교회를 방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님 지나가는 길인데, 잠깐 들러서 밥이나 같이 합시다 하면서, 저한테 연락이 와요. 그러면 정말 좋아요. 예전에 같이 사역했던 분이 돌아오셔서, 같이 밥을 먹자고 하니까 너무 기분이 좋죠. 저하고 우리 심혜경 전도사님 하고는 그분이 온다고 하는 소식에 너무 좋아요. 근데 뻘쭘해지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누굴까요? 임형섭 목사님이에요. 이분은 새로 오셔가지고 그분 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근데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갑시다 하는데, 임형섭 목사님은 혼자 놔두고 우리끼리 갈 수 없어서, 목사님 같이 갑시다 그러면, 제가 껴도 되나요? 제가 저는 그분을 모르는데, 껴도 되나요? 하고 물어봐요. 그러면 제가 무슨 얘기를 하냐면 괜찮다고, 관계라고 하는 것은 과거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알아가고 지금부터 교제하고 지금부터 사귀면, 앞으로 좋은 동역자가 되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서 그래서 아주 좋다고 하면서 그래서 데리고 가서 같이 식사를 하곤 합니다.

지난번에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해주신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임흥섭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오셨는데요. 미국에서 사역하시는 이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수요일날 와서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그분이 어떻게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가? 저랑 친분이 아주 깊은 목사님이었을까요? 그렇게 보였을까요? 아니요. 사실은 그분 하고 저하고 어떤 관계냐 하면은 그냥 페이스북 친구예요. 페이스북으로만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있었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다녔고 하는, 그런 공통점이 있지만, 그러나 제가 어떤 그분 하고 예전에 어떤 깊은 교제를 나눈 적이 있느냐 하면, 한 번도 나눈 적이 없어요. 그래서 어느 날 페이스북을 하고 있는데, 그분이 저한테 연락을 해서, 목사님, 제가 미국에서 잠깐 나왔는데 목사님을 꼭 만나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갑자기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분을 내가 어떻게 알지? 나랑 무슨 관계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겁니다. 이분하고 내가 어떤 관계를 해왔던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아요. 그렇지만 제가 거절한 것이 아니라, 목사님 오세요. 그분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분이 나쁜 목사님이 아니고, 좋은 목사님이라고 하는 것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시라고 이야기했고, 기왕 오시는 김에 우리 교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해 드렸습니다.


전주역에서 제가 모시고 오면서 물어봤어요. 그런데 우리가 언제 만났죠? 그래서 날짜를 얘기해 보니까 저랑 겹친 기간이 별로 없어요. 잠깐 그 겹치는 기간이 조금 있는데, 그런데 과거에 아무런 경험도 공유한 경험도 아무것도 없지만, 그 순간부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번 코스타 부산 집회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하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쭉 나누는 가운데 많은 교제를 하게 됐습니다. 그분 모셔서 극진히 식사도 대접하고, 또 호텔도 잡아드리고, 한옥마을 구경도 시켜드리고 하면서 많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는데요. 그러면서 그분과 교제를 통해서 좋은 인사이트도 얻게 되었고,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떤 사역을 같이 해나갈 수 있을지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새로운 좋은 분을 만났구나. 관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가 아니라 미래적인 것이고, 과거에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나갈까가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 11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 이 점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번에 11주년 말씀 사경회를 계획하게 되면서, 세 분의 강사 목사님이 오시게 됐는데, 이 세 분의 강사 목사님 가운데 한 분은 저랑 정말 친하신 분입니다. 필라델피아에 있을 때, 같이 같은 노회에서 활동하면서, 늘 고민이 있으면 이야기를 나누고, 밥도 같이 먹고 같이 많은 교제를 나누었던 분이기 때문에 저랑 너무 친한 분이에요. 그분이 이번에 강사로 한 분 오시고, 그리고 나머지 두 분이 오시는데, 이 두 분은 누군가? 제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이번에 오시면 처음 만나는 거예요. 한 번도 그전에 교제를 해본 적이 없어요. 다만 그분들이 어떤 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만 들었고,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하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그러나 이분들을 초대하면서, 또 말씀을 듣기도 하고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갈 걸 생각하니까 마음속에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11주년을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여기에는 초창기부터 정말 눈물 흘리면서 때로는 속상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즐거움을 같이 누리기도 하고 하면서 많은 애정을 누리면서 같이 11년 동안 걸어온 믿음의 동지들이 여기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 우리 교우들 가운데는 그 이후에 오신 분들도 많아요. 그래서 우리 교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그냥 여기에 교회가 있으니까 나오기 시작하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이 시간 11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11주년에 대한 감사 예배가 초창기 멤버들만을 위한 그런 기념행사가 될 것인가? 그게 아니고 우리가 이 시점에 한번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억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 과거가 우리들의 발목을 잡아버려서는 안 되고,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좋은 하나님의 교회로 바꾸어져 나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만들어져 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말 좋은 교회로 만들어갈 것인가?”라고 하는 미래지향적인 관점을 가지고 우리 교회가 나아갈 바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있던 그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주인이 되고,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함께 같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그러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수많은 교회에 가보면 교회 안에 텃세를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오래된 신자가 새로운 교우들이 오면 자꾸만 쫓아내는 교회들이 있어요. 의도적으로 쫓아내지는 않지만, 자신들이 알게 모르게 주인 행세를 하고 텃세를 부리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은근히 풍겨서, 그것을 캐치한 사람들이 “나는 여기에 올 사람이 아니구나” 하면서, 그렇게 쫓겨나가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는 것이죠.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는 그런 교회는 아니죠? 확실합니까? 맞아요. 우리 교회는 얼마나 열린 교회인지 몰라요. 새로운 사람이 오면 그분들이 우리 교회에 전면에 나서는 것을 환영하고 좋아해 주고 박수 쳐주고, 처음 본 사람인데 그 사람을 환영해 주고 기뻐하고, 또 그분들이 나가서, 또 사역을 하고 열심히 일하는 거 보면, 너무 좋아해 주고 함께 기뻐하며 우리가, 과거에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는가? 과거에 발목이 잡힌 교회가 아니라, 누가 오든지 간에 마음으로 환영하면서,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그런 미래지향적인 교회가 되고 있다고 하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 11주년을 맞이하면서 더욱더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미래지향적인 교회가 되는 것을 우리가 결심하고 다짐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서론이 꽤 길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도행전 9장의 말씀을 한번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회심하게 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울 사도 다시 말하자면 사울이라고 하는 이 청년이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면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요. 사울의 손에 의해서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도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교회에 다니고 있는 신앙생활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서 감옥에 집어넣고 수많은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람이 바로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이제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날뛰고 있는데, 저 다메섹이라고 하는 지방에도 크리스천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대제사장들로부터 위임을 받아서 그래서 다메섹에 있는 교인들을 체포해 가기 위해서 가는 길에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신 것이죠. 그리고 사울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내가 나를 핍박하느냐?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 그 사울을 향해서, 왜 나를 핍박하느냐? 교회를 핍박한 게 아니라, 주님을 핍박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사울에게 나타나 주었을 때, 그 순간 사울이 변화하고 회심하면서 이제 완전히 인생이 180도로 바뀌게 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울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어느 날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나니아야, 네가 저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에게로 가서 안수하여 기도해 주고, 그 사람을 잘 인도하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그때 이 아나니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했던 대답이 사도행전 9장 13절 14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 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아나니아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주님, 이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잡으려고 지금 오고 있는 이 청년인데 우리 이 청년에게 왜 내가 가야 합니까? 갈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과거에, 과거 사울이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그 과거의 이야기에 갇혀 있었던 이 아나니아는, 마음이 선뜻 사울에게로 갈 수가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주님께서 놀라운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16절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말씀하신 것이죠. 아나니아는 사울의 과거를 보면서, 그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그로 인해서 엄청난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울의 과거사만을 보면서, 그 과거 때문에 사울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죠.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사울의 미래를 보여준 겁니다. 사울이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 이 사람은 나를 위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나의 그릇이다.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이 서울을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한 것이고, 놀랍게도 아나니아는 이 대답에 이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사울을 인도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사울이 전 세계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 사도 바울로 변하게 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된 줄로 믿습니다. 만일 아나니아가 과거에만 머물러 있고, 과거에 감옥 속에만 갇혀 있었다고 한다면,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죠.

예루살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러 다닌다고 하는 그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도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핍박하던 사람이 이제는 복음을 전하고 다닌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예루살렘 성도들이 들었는데, 그 예루살렘 성도들이 너무나도 좋아했을까요? 의심하면서 거부했을까요? 의심하면서 거부한 것이죠. 사도행전 9장 26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사울이 지금 예루살렘 교회 안에 들어와서 나도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여러분과 교제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니까, 그 예루살렘에 있는 교인들이 “아이고, 형제님” 하면서 반갑게 맞이해 준 것이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 거예요. 무슨 의심의 눈초리? 혹시 저 사람이 프락치가 아닐까? 우리 안에 들어와서 정보를 다 캐내가지고, 그래서 우리를 다 잡아가기 위해서 위장 전향한 것이 아닌가? 모두가 다 의심할 수 있는데, 그렇게 의심하는 것이 가능해요? 불가능합니까? 가능한 일이에요. 혹시 그럴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모두 다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죠. 과거에 그 사울이 무엇을 했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자리에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7절에서부터 2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미에게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썼다.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옛날만 생각하면 함께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미래의 도구로 삼아주신 것이죠.

오늘 우리 예수비전교회가 나아가야 될 방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과거의 경험, 과거의 역사 그 옛날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11주년은 과거를 바라보는 그런 기념하는 날이 것을 더 넘어서서, 미래를 바라보고, 함께 손을 붙들고, 하나님의 교회를 만들어가는 그런 계기가 되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교회들이 과거 속에 사는 것이죠. 역사가 길면 길수록 그럴 가능성이 많아요. 예전에 우리가 이런 일을 했고 우리가 최초로 무엇을 했고 우리가 이 세상 정말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과거에 그 감옥 속에 들어가 있는 교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과거의 성공이 우리의 미래의 성공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전에 성공했던 그 경험이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는 데 방해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거든요.

예를 들어서 이 사울 왕이 다윗을 만났을 때 사울 왕은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을 벗어서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 갑옷을 입고 그 칼을 차고 블레셋과 싸워서 이겼거든요. 수많은 화살이 날아오는 가운데 그 갑옷이 자기를 지켜줬거든요. 그러니까 전쟁하러 간다고 한다면 내 갑옷을 입고 내 칼을 차고 나간다고 한다면, 그래야 안전하고 그래야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과 칼을 준 겁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전쟁 가운데서 승리하게 해 줬던 그 갑옷과 칼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 갑옷을 입으니까, 안 맞아요. 칼을 드니까 안 돼요. 다윗은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물멧돌 들고 그냥 달려 나가서, 골리앗과 1대 1로 마주치는 게 그게 더 그게 다윗에게 필요한 것이었던 것이죠.

안타깝게도 수많은 교회가 과거의 그 경험 속에 가로막혀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주저하고 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새로운 사람도 거부하고 새로운 방식도 거부하고, 그래서 늘 도태되어 가는 그런 교회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 우리 예수비전교회는 해를 거듭해 가면 갈수록, 과거에 그 감옥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수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11년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앞으로 어떤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인가? 탕자에 비유해 보면 형은 그 탕자가 저질렀던 과거를 보면서 그 동생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탕자가 저질렀던 모든 과거는 다 잊어버리고 이제 새롭게 받아들이고 나아가자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우리들의 삶의 인간관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에서도 어쩌면 우리의 가정 가운데 수많은 과거의 그 경험들이 우리들의 발목을 꽉 붙들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실수들을 했어요. 우리 아빠가 엄마가 아이들을 향해서 소리 질렀고 야단쳤고 이해해주지 못하고, 그래서 그런 경험들이 쌓여서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담이 크게 가로막혀 있는 거,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섭섭하게 했던 것들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담장이 세워지게 만들어버린 것이죠. 그러한 잘못들이 과거에 실수한 것들이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더 이상 좋은 관계로 나아갈 수 없는 그런 삭막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그럴 때 그런 과거의 감옥 속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감옥에서 탈출해 나와야 되는 것이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그리고 교우들과 교우들 사이에, 이웃들 사이에 과거에 잘못했던 것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감옥에서 과거에 감옥에서부터 뛰어나와 이제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만들어 나가요? 용서는 과거의 감옥에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내게 잘못했던 사람들을 향해서 용서하고 과거에 잘못했던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그것을 뛰어넘고 이제는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면 되는 거예요. 예전엔 잘못했어도 이제는 새롭게 쌓아가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나도 내가 잘못했던 것들을 인정하고, 내가 그 예전에 실수했다고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하며, 과거의 것들은 다 털어내며, 이제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우리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우리들의 모든 영역 가운데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게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악을 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의 죄들을 보고 우리를 심판해 버리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눈과 같이 희게 씻으시고, 양털과 같이 말갛게 만들어 주셔서 저와 여러분들로 하여금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다시 시작하자 말씀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았으니, 우리의 삶 가운데서 과거에 발목이 붙잡힌 삶이 아니라 지금부터 새롭게 새롭게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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