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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바쳐진 사람 (삿 13:1-7)

사사기 강해 목록으로

머리가 길었을 때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지만, 머리가 잘려버린 후에는 일반 보통 사람처럼 힘이 없어져 버린 사람 삼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괴력을 지녔지만, 여인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 사람이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삼손의 이야기는 밀턴의 서사시의 주제에서도 등장하고, 생상의 오페라 주제로도 사용이 될 만큼, 세상 사람들에게도 아주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삼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사기 13장의 말씀을 읽었는데, 이 말씀은 그 삼손이 태어나게 된,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는 다루어 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태어나게 된 그 당시의 상황이 어떠한 상황이었으며, 어느 가정에,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삼손이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1절부터 가만히 살펴보면, 언제 태어나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다고 하는 표현부터 시작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악을 행한 것이죠. 그렇게 악을 행했다고 하는 것이 새삼스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툭하면 하나님에게서 떠나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해 버린 전력이 있기 때문인 것이죠. 사사기의 말씀을 읽어보면 그러한 사이클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길로 나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징계하셨습니다. 이방 민족을 들어서 징계하셨는데, 그 이방 민족들의 악재 속에서 고통스러워할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면 행복한 줄 알았는데, 그 우상을 섬기면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것을 체험하고 나서야, 그때서야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는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사를 세워주셔서 그 사사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는 이야기가 나오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 그 사사 밑에서 잘 지내다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금세 또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에게서부터 또 떠나버립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과 마찬가지죠. 우리들도 힘든 일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망가졌을 때는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가 너무나도 많고, 평안할 때면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냥 세상의 길로 나아가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데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민족을 징계하셨습니다. 이방 민족을 들어서 또 징계하시면 그때 다시 또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 그래서 어느 정도 괜찮아지면 또 타락하게 되고, 그러면 또 징계하고 이러한 일들이 계속 반복되어 왔는데, 오늘 13장 1절에서의 이 말씀도 역시 똑같은 말씀으로 시작되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하나님 앞에 범죄 했다고 하는 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했을까요? 만일 우리들에게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반응했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우리는 더 이상 용서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를 겁니다. 우리 가게에 종업원이 필요해서 종업원 한 명을 알바로 데려다 놨는데, 그 알바가 열심히 일하기는커녕, 게으르고 손님들과는 다투고 말다툼을 하고 불친절하게 하면서 손님을 쫓아내 버리는 그런 종업원이 있다고 한다면, 한두 번 경고를 할 겁니다. 그러지 말라고. 그런데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여러분 아마 해고시키고 말 겁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고해 버리고 끝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구원자를 베풀어 주시고, 그리고 구원해 주시고 다시 보듬어주십니다. 그러다가 또 이스라엘 민족이 또 죄악을 저지르고 나가면 또 징계하시는데, 그들이 또 울부짖으면, 또 보듬어주셔 또 참고 또 참고 또 보듬어주시는 일을 계속해서 반복해 주고 계시는데, 오늘 이 사사기 13장의 말씀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의 민족 가운데 40년 동안 고통을 당하다가 하나님 앞에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 이스라엘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래서 삼손을 아기로 태어나게 해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또 용서해 주고 또 용서해 주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순히 사장님이 아니라, 단순히 어떤 주인이 아니라,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아버지는 누굽니까? 자기 자식이 아무리 못나고 자기 자식이 아무리 잘못된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면서까지 끝까지 사랑해 주는 거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그 우리들을 죄 가운데 간다고 할지라도, 또 회복시키기를 원하시고, 또 구원해 주시는 그런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시편 145편 8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는 어떤 분이십니까?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인자하심이 커서 그 어떠한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죠.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재능에 달린 것이 아니고, 내가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해낼 수 있어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늘 실패하고 넘어지는 거죠. 우리는 마음을 대단하게 먹지만, 그 마음대로 살 수가 없는 게 우리들의 마음이에요. 실패하고 나서 그 실패를 지나간 뒤에는, 이제는 내가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데 다짐뿐이에요. 그다음에 또 넘어지는 게 우리들의 모습인 거죠. 그런 우리들에게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와 같은 그런 연약한 자들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하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하고 타락했지만, 다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한 아이 삼손을 준비해 주신 과정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한 가정이 어떤 과정이냐면, 12지파 가운데서 단 지파에 속하는 마노아라고 하는 사람의 가정에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마노아의 가정은 어떤 가정이었나요? 이 마노아의 가정은 안타깝게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에야 아기가 없다고 하는 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기를 주시면 주신 것이고, 안 주시면 안 주신 것이고,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이죠. 필요하다면, 또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입양할 수도 있고, 입양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냥 부부끼리 행복하게 잘 살아도 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가정들 가운데, 미국에서 교제했던 목사님들 중에 아이가 없는 가정이 있는 목사님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가정은 결혼하고 한 10 몇 년 지나서 겨우 아기를 가진 가정도 있고, 그런데 어떤 필라델피아에 있는, 저보다 좀 연배가 많으신 목사님은 아이가 없어요. 그래서 아이가 없어서, 그냥 두 분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래도 행복하게 잘 살아가면서, 또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면서 살고 있는 그런 목사님이 계셨어요. 또 워싱턴에도 제 후배 목사님이 계신데, 그 목사님도 정말 큰 교회를 하시는 목사님인데, 그분에게도 아이가 없었어요. 지금도 아이가 없고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있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가지고 기쁨으로 잘 사역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별 문제가 될 것이 아니지만,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는 그렇지 않았었던 시기였습니다. 아이가 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어 보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는, 정말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야만 했던 가정이 바로 마노아의 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가정 가운데 아이를 하나 주신 것이죠. 그런데 이 가정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 마치 이스라엘의 상태와 똑같아 보여요.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는 어떤 상태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 민족에 의해서 악재를 당해서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과 똑같이, 지금 이 마노아의 가정도 정말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그 가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아기를 주셔서 기쁨을 얻게 하신 것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구원의 기쁨을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그 가정을 선택해 주셔서 삼손을 내어주신 것이죠.

어느 날 갑자기 그 소망이 없어 보였던 마노아의 가정에 천사가 나타나서 놀라운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면서, 그러니까 아이를 낳게 될 거라고 하면서, 이 아이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라 몇 가지 특별한 지시한 내용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마라. 말씀해 주셨고, 두 번째는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특별한 아기, 하나님에게 바쳐져서 엄청난 사명을 이루어야 될 그 아이를 얻기 위해서 이러한 명령을 주셨던 건데요.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뭘 먹지 말라고 하는 거죠? 구약 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동물들을 부정한 것과 정한 것으로 나누어 놓고 있는데, 돼지라든가, 이런 것처럼 부정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신 것들, 또 비늘이 없는 장어와 같은 물고기처럼, 그러한 것들은 부정하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먹지 말고 하나님 앞에 정결한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은 다 이런 법칙을 지키고 있었지만, 특별히 아이를 임신하는 가운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서, 거룩하게 자신의 삶을 유지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마노아의 아내에게, 그리고 삼손의 어머니가 될 여인에게 이 명령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어떻게 기를 것인가?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나실인으로 기르라고 명령해 주셨습니다. 머리를 깎지도 말고 포도주와 독주를 먹지 말게 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데요. 나실인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마는 옛날 구약시대 때 사람들이 살아가다가, 내가 하나님 앞에 좀 더 경건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고 하면, 그 기간 동안에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여러 가지 금기 사항들을 지켜 나가는 일들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나실인의 규례가 민수기 6장 2절에서부터 7절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 것이요. 그의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의 머리에 있음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나실인으로 서원을 하게 되면 무엇을 해야 되는가? 음식을 아무거나 먹지 말라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포도주, 독주 그런 건 아예 먹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라. 심지어 포도 씨나 껍질도 먹지 말라. 아무튼 내가 단정한 삶을 살아야지, 포도주와 독주에 취해서 살면 안 된다고 그렇게 강하게 말씀해 주고 계시는 거고요. 쾌락을 즐기며 살기보다는 내가 하나님 앞에 단정한 삶을 살도록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머리를 깎지 말라. 또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라.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시체라고 하는 것은 당시 부정하게 여겨졌는데, 그것을 만짐으로 말미암아 내가 부정하게 되기보다는, 내가 그런 부정한 것에서부터 좀 멀리해서 자신을 더럽히지 말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서라고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머리를 깎지 말라고 한 이유는 왜 그랬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다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무튼 머리를 깎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하게 잘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이 나실인의 규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떤 것이었는가? 보통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특별하게 살라는 거예요. 보통 사람들처럼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하나님께 바쳐진 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살라고 하는 것이 나실인의 규례인 것이죠.

그 옛날 우리나라 아주 옛날에는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시대 때, 양반들은 어떻게 행동을 했습니까? 걸어갈 때 손을 뒷짐을 지고, 팔자걸음을 하면서, 어슬렁어슬렁 천천히 걸어갔어요. 불이 나도, 어떻게 해요? 불이 나도 안 뛰어가요. 천천히. 이거를. 왜요? “쌍것들하고는 우리는 다르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거죠. 이게 뭐 좋은 것은 아니죠.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유교 시대 때 그것이 유교가 지배하던 그 시절에 우리나라 양반들은 우리가 저 배우지 못한 사람들, 근본이 없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특수한 존재들이고, 우리는 무언가 선택받은 대단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급해도 뛰지 않았던 거죠. 천천히 걸었던 거죠. 그걸 통해서 우리가 다르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나실인의 서원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많은 사람들이 술을 즐기면서 흥청망청거리고 있을 때, “나는 하나님 앞에 단정하게 서겠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시체를 만질 때, 나는 그것을 멀리하면서, 내 몸은 하나님께 바쳐진 몸이라고 하는 그런 의식으로, 다른 사람들은 머리를 막 잘라버리고, 마음대로 멋을 내고 있을 때, 나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것인데, 다시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라”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보통 이런 나실인의 규례는 일정 기간 동안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하다가 내가 하나님 앞에 특별히 나 자신을 드리고 싶은 기간을 정해놓고, “하나님, 내가 이때부터 이때까지 며칠 동안은 나실인처럼 살겠습니다.” 하면서 나실인의 규례를 행하고, 그 기간이 지나면 머리도 깎고, 아무튼 그때부터는 해제가 되는 단기간에 실천하는 것이 나실인의 규례였었는데, 삼손에게는 뭘 말씀하시냐면, 삼손은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라. 평생 머리도 깎지 말고 평생 하나님께 바쳐져서, 하나님께 바쳐진 삶을 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 시키는 그 구원의 일을 이루라고 말씀하신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하나님에게 선택이 되고 구별된 삶을 살아서 결국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삼손이 이러한 것을 끝까지 잘 지켰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실패했어요. 적어도 두 가지에서 실패를 했는데, 첫째는 시체를 만졌어요. 물론 사람의 시체는 아니지만 사자의 시체를 만지고, 그리고 거기서 나는 꿀을 따는 하나님의 지시를 거역하고, 자신이 나실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망각한 행동을 했던 것이 시체를 만졌던 것이고요. 또 하나의 실패는 어디에 있습니까? 머리를 자른 것이죠. 아내의 꾐에, 아내의 말에 속아서, 결국 머리가 잘려 버리는 그래서 불완전한 사사가 되고 말았고 불완전한 구원자가 되고 만 것이죠. 이 삼손의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에는 제대로 된 구원자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서 어디 좋은 사람 없을까? 우리에게 좋은 지도자가 없을까? 많은 사람들이 갈망을 하고 있는데, 삼손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고, 블레셋의 압제에서부터 건져내고, 블레셋을 박살내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정말 삼손이 우리들의 구원자일까 했는데, 삼손은 그런 구원자의 모습에서 한참 모자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구약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어떠한 갈망을 보여줬었냐면, 우리를 위한 진정한 구원자가 오기를 갈망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게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실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더러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과는 다른 거룩한 삶을 사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순종하면서 끝까지 순종의 길을 가게 되었는데, 특별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라고 하는 그 말씀에까지 전적으로 온전히 순종하시면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다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결국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부터 구원해 주신 참된 구원자가 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 삼손은 너무나도 나약한 구원자이기는 했는데, 사실 이 말씀은 삼손에게만 주어진 말씀이라기보다는 오늘날 21세기에 이 말씀을 읽는 저와 여러분들도 함께 묵상하며 생각해 보아야 될 그런 말씀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은 삼손만이 아니라, 사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 가운데 이 세상을 보내시고,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어쩌다 보니까 그냥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획하시는 가운데 특별하게 이 가정에 보내주신 거예요. 특별하게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보다 바로 나를 선택해서 이 가정의 이 환경 가운데 보내주신 것이죠. 그 옛날 삼손이라고 하는 사람을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태어나게 해 주시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셨는데, 물론 그 사명의 크기와 현장은 다 다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구원하라고 하는 그런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지만, 우리가 태어난 그 영역은 어느 곳입니까? 사람들마다 다 다른 것이죠. 가장 작게는 우리의 가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것이죠. 우리가 일하는 일터로 우리를 보내어 주신 것이죠. 우리가 교회로 보내어 주신 것이고, 우리의 사명의 현장으로 보내어 주신 것이고, 우리가 활동하는 그 모든 분야가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역하라고 하시고 구원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하는 그런 사명을 가지고 우리 모두를 보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 민족의 압제 밑에서 고통을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죄의 압제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것이죠. 이 세상에 우상의 압제 밑에서, 탐욕의 그 그늘 가운데서, 여러 가지 잘못된 욕망의 그 피해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다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한 현장 가운데 있는 우리를 보내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도 그곳에 가서 삼손이 블레셋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낸 것처럼, 우리도 그곳에서 우리 아이들을 살려내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려내고, 우리가 맡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살려내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리가 처한 곳에서 다 하나님의 구원자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저와 여러분들을 불러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사명이 누구에게 있는가? 목회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교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읽은 종교개혁자들은 만인제사장이라고 그랬어요. 옛날에는 성직자들만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줄 알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는데, 종교 개혁을 했던 그 선배들이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이 무엇이냐면, 성직자들만 제사장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제사장이다. 만인 제사장이라고 하는 결론에 내리게 된 것이죠. 이 만인 제사장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아무나 성직의 일을 감당해도 된다 설교를 해도 된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다는 거예요. 굳이 성직자를 통하지 않아도 내가 직접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만인 제사장의 의미이고, 또 하나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우리가 일하는 그곳이 세속적인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곳에서 사명을 가지고 일을 하라고 만들어주신 사명의 현장이고, 우리가 그 사명의 현장 가운데 성직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가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직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직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직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우리가 가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우리의 사명의 현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한국 드라마에 보면, 흔히 나오는 늘 사용되는 주제가 하나 있는데 팀이 하나 있는데 출생의 비밀을 알고 깜짝 놀라는 스토리입니다. 늘 나오는데 또 늘 재밌어요. 어느 날 자기가 주인공이 자기가 엄마 아빠의 아들이 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엄마 아빠의 아들 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엉뚱한 사람의 아들 딸이 그걸 받고 충격을 받고, 그런 드라마가 많이 나오는데,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의 출생의 비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출생의 비밀이 뭡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예요.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우리가 그냥 힘없이 실패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면서,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이 꼴인가? 나는 왜 이런 성공이 없는가? 나는 왜 이 일들 실패뿐인가? 나의 삶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절망하고 살았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부모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 옛날 삼손을 이 가정에 보내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우리의 사명의 현장 가운데 보내주고 계시는 것이죠.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명을 우리가 깨닫고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곳에 보내어 주셨는가? 우리의 역할이 있을 분야는 다 사람들마다 다 다르지만,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삼성과 같은 사명자요, 우리에게 주어진 그 놀라운 구원의 역할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오 왕 같은 제사장들이오,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나가는 거지가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아무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이오, 소유된 백성이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그 옛날 삼손이 이 사명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냈던 것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그 분야가 적든 크든 그 분야에서 나실인 내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했었던 삼손처럼 거룩한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머리 안 깎고 지내야 될까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우리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까? 로마서 12장 1절, 2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 옛날 삼손을 향해서는 포도주 마시지 말면서, 머리 깎지 않으면서, 시체 만지지 않으면서, 이 세상 사람들과 네가 다르다고 하는 것을 구분하면서 살았던 것을 명령해 주셨는데,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다른 모습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모습을 가지고 우리의 사명의 현장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으로 이 세상을 영적으로 구원해 내는 그런 구원자의 역할들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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