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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의 훈계 (잠 15:5)

오늘 5절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었는데요. 아버지의 훈계를 잘 받아야 된다. 부모님께서 교훈하고, 교훈하고 또 자녀들에게 훈계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 자녀들은 그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을 잘 새기고 따라야 한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미 잠언서에서 이런 류의 말씀들이, 부모님의 훈계를 잘 듣고 청종하고 따라야 한다고 하는 말씀이 벌써 여러 번 나왔습니다. 이미 여러 번 나오는 가운데 설명을 많이 해드렸고, 또 오늘 나왔는데, 예전에 했으니까, 안 하고 건너뛰어도 괜찮을까요? 나온 김에 한 번 더, 한 번 반복하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반복하고 가는 게 좋습니다. 교육은 무엇인가? 배움은 무엇인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듣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들었던 말씀 또 듣고 또 듣고,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그것이 이제 겨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새겨지게 되기 때문에, 잠언서의 말씀을 우리가 살피는 가운데, 이런 말씀 이와 비슷한 말씀들이 벌써 여러 번 반복이 됐지만, 그래도 다시 나온 김에 오늘 다시 이 말씀에 대해서 묵상하고, 또 고민하면서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되려고 합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훈계를 한다면, 훈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모가 자녀에게 훈계하는 이유가 무엇이죠? 아이들 기분 나쁘라고 훈계하는 건가요? 그게 아니고 잘 되라고 하는 것이죠. 사랑하기 때문에 훈계하는 것이죠. 정말 이 아이의 좋은 성장을 위해서, 이 아이의 좋은 면을 드러내게 만들기 위해서, 이 아이가 복된 삶을 살게 만들기 위해서, 이 아이의 유익을 위해서 훈계해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훈계를 해준다고 하면, 자녀들은 그 부모님의 말을 무시해 버리거나, 귀찮게 생각하거나, 짜증을 내고 그렇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어진다고 하면, 그 말씀을 잘 새겨듣고,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깨달아서, 그래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근데 여긴 자녀들이 한 명도 안 왔네요.

우리 부모님의 자녀들에 대한 훈계는 도움이 됩니다. 왜 도움이 될까요? 왜 유익하게 될까요? 첫 번째로 그 이유는 부모님은 제삼자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보다 보다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둑을 두다 보면, 바둑을 두는 사람보다도 옆에서 훈수하는 사람이 훨씬 더 수를 더 잘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바둑은 안 두셨나요? 장기를 두든지, 바둑을 두든지, 고수가 바둑을 두고, 고수가 장기를 두는데, 그 옆에서 보고 있는 하수가 오히려 더 멋진 수들을 보는 겁니다. 내가 실제로 하는 그 장면에,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보다, 한 발짝 물러서서 옆에서 바라보게 될 때, 오히려 더 좋은 수들을 보게 되는 것이 그게 낯설지 않은 풍경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탁구 경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요. 탁구경기를 할 때도 보면, 이 탁구대회에 나가서 지금 경기를 하고 있는 선수는 어떤 선수입니까?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지금 현재 최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가 탁구대회에 나가서 탁구를 하는 거죠. 그 선수는 어쩌면 탁구 기량에 있어서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그 탁구 선수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탁구 선수가 탁구를 하다가 경기 도중에 타임을 신청하고 감독에게 갑니다. 코치에게 갑니다. 그리고 그 코치로부터 여러 가지 조언을 듣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참 신기했습니다. 도대체 이 탁구 선수가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는 선수인데, 그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는 탁구 선수에게 이 시간에 코치가 무슨 이야기를 더 해줄 수 있을까? 이 선수가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까? 이 선수에게 어떤 조언이 가능할 것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줄까?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만일 코치와 선수가 함께 경기를 한다고 하면, 코치가 이기겠습니까? 선수가 이기겠습니까? 선수가 훨씬 더 잘해요. 선수가 더 잘하니까, 대표로 나간 것이지, 코치가 잘하면 코치가 선수로 나갈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코치보다도 선수가 훨씬 더 잘해요. 훨씬 더 잘하는 선수가 나가서 경기를 하다가, 그런데 자기보다 잘 못하고 있는 그 코치에게 가서 조언을 듣는 거죠. 상대방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 상대방이 어떻게 공격할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코치의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하면, 그 타임아웃을 불렀던 것이 효과가 있어서 경기를 뒤집게 되는 경우도 많이 본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제삼자의 이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몰두해 있으면,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것만 보느라고,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한 발 물러서 있는 사람이 바라보게 된다고 하면, 바로 그 현장에 있는 사람보다 더 객관적이고 더 나은 관점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코치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해주는 그 훈계와 교훈이 유익한 이유가 무엇인가? 왜냐하면 내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이 현장에서, 이런 문제 이런 고민들 이런 상황 가운데 놓여 있을 때, 나는 어느 것 하나에 매몰되어서, 거기에 함몰되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좌절하기도 하고, 모든 것에 다 내 집 신경이 거기에 집중되는 바람에, 정말 보아야 할 것들을 못 보고 있는 그 상태에 있을 때, 부모는 그래도 한 발짝 뒤에 물러서서, 이것이 무엇인가? 전체를 조망하고, 그래서 이 아이에게 제대로 된 훈계를 해줄 수 있기 때문에, 부모님의 훈계가 아주 유익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부모님의 훈계가 유익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미 부모님들이 먼저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부모님들이 예전에 겪었던 그 일을 자녀들이 지금 겪고 있는 겁니다. 이미 겪어보아서 “이대로 행동했다가는 망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부모예요. 그 결말이 얼마나 무서울 것인가? 그 결말이 얼마나 큰 파장을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서 부모님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자녀에게 훈계를 해줄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결말을 몰라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해서, 함부로 막 행동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부모님은 어떤 사람인가? 이미 예전에 겪어보았기 때문에, 그 결말을 경험해 봤고, 그 결말을 겪지 않으라고 자녀들을 향해서 진정한 훈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선한 일을 하게 되면 선한 열매를 얻게 될 것이고, 우리가 수고하고 땀을 흘린다고 한다면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악한 일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나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고, 우리가 수고하지 않고 게으른 삶을 살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부모님께서 자녀들을 향해서 훈계해 주게 될 텐데, 그 훈계해 줄 때, 우리 자녀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잘 듣고, 그 교훈을 마음속에 새기고, 그리고 그 뜻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오. 슬기로운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선한 의도에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그 아이를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에서 해주는 훈계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의 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때로는 짜증을 부리고, 화를 내기까지 합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미련한 자라고 오늘 말씀에서 가르쳐주고 있는데요. 왜 우리 자녀들은 그런 미련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부모님의 훈계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화를 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훈계는 결코 달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굉장히 기분이 나쁘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진짜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당황스러워요. 우리가 포장되고 우리가 감추어지고, 우리가 어느 정도 덮여 있으면 안심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의 벌거벗은 몸이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고, 화가 나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향해서 그 잘못에 대해서 말해주고, 그러한 잘못에서부터 돌아오라고 말하고, 훈계를 하게 되면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당황스럽고 너무나도 화가 나서, 자신의 수치를 보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발하는 그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칭찬하고 박수를 쳐주고 격려해 준다고 한다면, 자녀들이 행복해하고 좋아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에 대해서 지적해 주고, 또한 말을 한다고 하면 그래서 너무나도 기분이 나빠서, 마치 부모님을 적으로 생각하고 죽이려고 달려들기까지 하게 되는 것이죠.

어제 안타까운 뉴스를 하나 보았는데요. 최근의 뉴스가 아니고, 아주 아주 오래된 뉴스를 이렇게 다시 분석하고 대담하는 그 프로에서 본 영상이었습니다. 우등생 아들이 엄마를 죽인 겁니다. “왜 1등을 못하느냐?”라고 하는 그 책망과 꾸지람 속에서, 화가 난 아들이 엄마를 죽이고, 10 몇 년 동안 그냥 방에 방치해 두었다가, 나중에 별거 중인 아버지가 오는 바람에 발각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그 학생이 전교 3등 한다는 학생인데, 1등이 못 된다고 하는 그 말 때문에, 그래서 엄마를 죽이기까지 했다고 하는 그 뉴스를 들으면서 얼마나 참 안타까운지 몰랐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피폐하게 만들고, 가정을 해체시키고 비인간성으로 우리를 만들어버리는 그런 모습들로 우리 가정들이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 너무나도 안타까웠는데요. 역시 훈계도 마찬가지죠. 실제로 죽이지는 않았겠지만,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부모님의 훈계를 들을 때,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해 버리고, 그냥 업신여겨버리는 그런 경우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자녀들은 부모의 그 훈계가 달지 않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이 이런 훈계를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바라보아야 하고, 그 훈계 속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 부모님의 훈계가 나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래서 그 부모님의 훈계를 내가 받아들이게 될 때, 결국 그 훈계가 나를 빚고 나를 더 성숙시키고 성장의 길로 좋은 길로 그리고 성공하는 길로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부모님의 훈계를 듣는다고 한다면, 업신여길 것이 아니라, 내가 잘 받아들이고 그것이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도록,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은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인데요. 사실 이 표현에서는 아비의 훈계를 아비의 경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버지의 훈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훈계를 다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그냥 주로 부자간의 관계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때문에, 아버지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아버지의 경계를 받는 자가 슬기를 얻는 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니까 엄마의 얘기는 안 들어도 되느냐? 그게 아니에요. 성경을 그런 식으로 읽으면 안 되는 겁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머니의 훈계도 들어야 하는 것이고, 또 누구의 훈계도 들어야 돼요? 할아버지 할머니의 훈계도 들어야 돼요. 또 누구의 훈계도 들어야 돼요? 아내의 훈계도 틀어야 돼요. 남편의 훈계도 들어야 되는 것이고, 친구의 훈계도 들어야 되는 것이고, 모든 훈계를 다 들어야 되는데, 심지어 누구의 훈계까지라도 들어야 돼요? 심지어 우리 자녀들이 나에게 하는 훈계도 들어야 되는 것이죠. 아버지의 훈계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리고 아버지가 자녀를 훈계하는 것을 가정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우리들을 위해서 해주는 그 훈계의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하고, 업신여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우리 자녀들만 들을 말씀입니까? 우리 모두가 다 들어야 될 말씀입니까? 우리 모두가 다 들어야 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의 훈계가 다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고, 특별히 자녀들은 이 말씀을 잘 기억해야 되는데요. 제가 이 말씀을 설명하면서 아버지의 훈계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훈계를 말하는 것이고, 심지어 자녀들이 부모를 향해서 해주는 훈계도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는 이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녀들의 훈계를, 자녀들의 말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자녀들이 말을 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자녀들의 말을 무시해 버리기 쉽고, 자녀들을 윽박지르기 쉽고, 그리고 하찮게 여기는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좀 잘 안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른들은 아이들을 무조건 무시했습니다. 애들은 가라. 그랬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말하면 “네가 뭘 알라?” 하면서 무시해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이 자녀들을 향해서 이렇게 무시하고 윽박지르고 업신여기게 되면, 우리 자녀들이 무엇을 배웁니까? 존중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죠. 사람들의 말은 무시해도 괜찮구나. 사람들이 말하면,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내가 마음대로 그냥 거부해 버려도 되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셈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자녀들이 나의 말을 잘 듣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우리도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돼요. 아이들이 말하고 있으면, 그 아이들의 눈높이로 내가 내려가서, 그 아이들과 그 눈높이를 맞추고, 그 아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 아이의 말을 잘 귀를 기울여서, 그리고 그 말에 응답하고 대화하고 대화를 계속해서 나가면서, 아이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 아이들의 말을 잘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줄 때, 우리 아이들도, 내가 말하는 것을 우리 부모님들이 어른들이 잘 듣는 걸 보면서, “나도 부모님이 말하면, 나도 잘 듣고, 부모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내가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야 되겠구나.”라고 하는 것을 가르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 윽박지르고 무시해 버리고,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내 말만 해버리니까, 우리 아이들이 그냥 꼰대라고 생각하고, 말은 안 통한다 생각하고, 그냥 앞에서는 웃는 척하고, 뒤에 가서는 딴짓해 버리는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훈계할 때는 어떻게 훈계해야 할까요? 그것은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자녀들을 훈계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지혜롭게 훈계하지 아니하면, 아이들이 업신여겨버리는 그런 반응을 보일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훈계라고 하는 것은 달갑지 않기 때문에, 달갑지 않은 그 훈계를 달게 만들어서 전해주어야 되는 것이죠. 약도 쓰기 때문에 약 겉 표면에 무엇을 입히죠? 설탕을 입히잖아요? 그래서 당의정(糖衣錠)이라고 하잖아요? 당, 설탕 당(糖). 의, 옷 의(衣). 설탕의 옷을 입은 약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속에 있는 쓴 약효를 우리가 잘 얻기 위해서, 그것을 먹어야 되는데, 쓰면 못 먹으니까, 겉에 당의정을 만들 듯이, 우리들의 훈계도 그냥 옳은 말이라고 막 해 버릴 것이 아니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칭찬과 격려를 활용하고, 여러 가지 것들을 활용해서, 우리 아이들이 그 훈계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혜롭게 훈계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어떻게 하지 말고?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면,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국 자녀들을 망쳐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훈계를 할 때는 어떤 방법으로 훈계를 해야 됩니까? 빌립보서 2장 1절에서부터 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라고 해 주셨습니다. 권면을 잘해야 되는데, 마치 정죄하듯이 책망하면 안 되는 거예요. 겸손하게 해야 되는 것이죠. 나도 똑같은 죄인이고 나도 게으르고 나도 충성하지 못하고, 나도 신실하지 못했고 나도 교만해질 수 있고, 나도 화를 쉽게 내고 나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똑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게 훈계를 해야 되는 것이고요. 겸손하게 할 뿐만 아니라, 분노를 일으키지 말고 싸우지 말고, 다툼으로 하지 말고, 이 아이의 마음을 잘 잘 이해하면서,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죠.

훈계가 사랑의 동기에서부터 된 것이고, 뿐만 아니라 그 훈계는 아이의 바른 성장을 위해서 해주는 것이니까, 무조건 아무렇게나 말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그 훈계가 결국에는 이 아이로 하여금 화를 나게 만들고, 결국에는 이 아이를 망칠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아무리 좋은 약도 잘못 먹으면 독약이 되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훈계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잘못된 방법으로 전달이 되면, 이 아이를 죽일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경각심을 가지고 지혜롭게 훈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버지의 훈계가 잘못된 훈계라고 하면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지 말고 아비의 경계를 잘 받아야, 슬기로운 자라고 했는데, 그런데 훈계를 해주시는 그 아버지께서 나에게 훈계를 하는 그 훈계가 좋은 훈계가 아니라, 나쁜 훈계 잘못된 훈계라고 한다면, 우리가 들어야 할까요? 그것은 듣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요? 1번 2번, 한번 질문 한번 할까요? 그래도 들어야 한다. 1번. 잘못된 건 듣지 말아야 된다. 2번. 한번 손 한번 들어봅시다. 잘못된 훈계라고 해도 그대로 들어야 된다. 1번, 손 들어주세요. 2번 잘못된 훈계는 들을 필요 없다. 2번. 2번은 몇 명 계시네요. 안 든 사람은 뭡니까? 목사님 뭘 하든 나는 신경 안 쓴다. 3번. 잘못된 훈계는 따르면 안 되죠. 우리 부모의 훈계를 잘 들어야 되는데, 그런데 그 부모님의 훈계가 잘못된 훈계라고 한다면, 나쁜 훈계라고 한다면, 따라서는 안 되는 거죠. 만일 따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망하는 거예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면,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잠언서 15장 5절에서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지 말라. 아비의 경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 이 말씀은 무조건적으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훈계라고 한다면, 무조건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버지의 훈계가 의로운 훈계, 바른 훈계, 좋은 훈계라고 하는 전제 속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아버지의 훈계가 자녀들을 위한 좋은 훈계라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서 하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 삶 속에서는 우리 부모님의 훈계가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까? 있을 수 있는 거죠. 엉터리 훈계들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어떤 식의 잘못된 훈계가 있습니까? “너는 돈을 많이 벌어야 된다. 그래서 떵떵거리면서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그런 훈계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누가 너 때리면 가서 열 대 때려줘.” 하는 훈계를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성경적인 방법과 옳지 않은 반대의 훈계를 부모님이 해줄 때가 있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분별해야 하는 것이죠. 부모님께서 해주신 이 훈계가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쁘신 뜻에 합당한 훈계인가? 아니면 사탄의 유혹에 이끌리어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서, 이 세상의 헛된 욕심에 따른 그런 잘못된 훈계인가를 분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내가 과연 이 훈계를 따라야 할지, 따르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민하는 것은 그냥 부모님의 말이 듣기 싫어서 무조건 거부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겠습니다. 가능하면 부모님의 말씀을 들어야겠고, 가능하면 부모님의 말씀이니까 순종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의 자세가 있는 상태에서, 그러나 혹시라도 잘못된 명령이라고 한다면, 그것만큼은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랴? 사람의 말에 따라 순종하리야? 내가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진실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분별해야 하는 것이고, 바른 훈계라고 한다면 따라가야 하지만, 그러나 간혹 잘못된 훈계를 한다고 하면, 그 잘못된 훈계를 따라갈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바른 훈계인데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해서 납득이 안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사실은 쉬운 게 아니죠. 신앙생활이 쉬운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분별해야 되기 때문에. 쉬운 게 아니, 한번 그림을 봤으면 좋겠는데요. 부모님이 해주는 훈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이 해주시는 말씀이 내가 이해가 안 돼요. 내가 이해가 안 돼서, 정말 이게 왜 부모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지 이해가 안 되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왜 이해가 안 돼요? 부모님이 잘못된 훈계를 하기 때문에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요. 또 하나 이해 안 되는 것이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부모님께서 바른 훈계를 하고 계시기는 한데, 부모님께서 바른 훈계를 하고 계시기는 한데, 그 바른 훈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을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내가 이해가 안 될 때는, 과연 이 부모님의 훈계가 어떤 종류의 훈계인가에 대해서 자꾸만 고민해야죠. 어떻게 고민해요?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고민해야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봐서 고민해야 되죠. 과연 이 훈계가 잘못된 훈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홍계인데,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래서 이게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것인가를 구분해야 되는 거예요. 이 구분하는 것이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그게 신앙생활이 쉬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쉽지만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데, 그 쉽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고민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성도님들이 주로 신앙생활을 고민 없이 하려고 하는 경향들이 많아요. 단순화시켜서 신앙생활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데요. 그래서 “무조건 믿어. 무조건 따라야 돼. 무조건 그냥 순종해야 돼.”라고 하는 그런 구호들이 교회 내에서 많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위험한 구호입니다. 왜냐하면 무조건 믿고 무조건 따르고 무조건 순종하면, 결국에는 영적으로 착취당하는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순화시켜 버리면, 단순화시켜 버리면 사람을 통제하기가 너무나도 쉬워져요. 그래서 단순화시키려고 합니다. 특히 어느 분야에서 단순화의 작업들이 많이 이루어지는가? 정치의 영역에서 단순화가 이루어져요. 그리고 또 하나 단순화의 영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종교의 영역에서 단순화가 이루어지는 거죠. 단순화가 뭡니까? 우리 편, 우리 편 아닌 편, 선, 저건 나쁜 놈. 이쪽은 선한 놈. 딱 물을 자르듯이 딱 잘라버려서, 선과 악으로 흑백으로 구분 지어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편해요? 정말 편해요. 왜 선으로 붙으면 무조건 옹호해 주면 되고, 악으로 판명이 되면 무조건 비난해 버리면 되고, 흑이면 버리고, 백이면 취하면 되는 것이니까, 이것처럼 단순한 게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모든 이슈들을 선악으로 단일화시켜서, 단순화시켜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을 자신들의 이득에 맞추어서, 동원시키고 움직이게 만들게 되는 것에서, 결국 그렇게 단순화된 사람들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정치인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실제적으로 그 정치인이 자기에게 유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되는 겁니다. 자신을 해롭게 할 사람인데, 그런데 전적으로 지지하는 겁니다. 왜? 선악의 이분법으로 단순화시켜서, 깊이 생각하지 말고, “우리 편인가? 우리 편이 아닌가?”로만 따져서, 무조건 지지하게 만드니까, 우리 편이 하면 똑같은 일을 해도 다 박수 쳐주고, 우리 편이 아닌 사람이 행하면 똑같은 일을 해도 비난하고 저주하고 하는, 정치인들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종교의 경우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겁니다. 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역시 신앙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옳음과 그름, 선악, 흑백이 너무나도 단순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종교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영적으로 착취당할 위험들이 많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이단들이 발생할 위험들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쉽게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단순화 작업 때문에 그래요. “아버지의 말씀은 무조건 옳아.”라고 해버리면 사실은 그게 아니잖아요? 근데 아버지니까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며 따라가다가는, 결국에는 그 아버지가 잘못된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데도, 아버지니까 옳다고 생각하고 따라가다가, 같이 소경이 소경을 이끌어서 같이 구덩이에 빠져버리는 일들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그렇게 단순화시켜서 따라가다 보면, 목사님이 하는 말은 다 옳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그 목사님에 의해서 착취를 당할 위험들이 생기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질문을 던져야 되는 거죠.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인가를 우리가 고민해야, 그래야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부모님께서 훈계를 해주신다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면서 늘 고민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 전혀 근거가 되지 못하는 이분법적인 도식, “아버지의 말씀은 무조건 따라라. 아버지의 훈계는 무조건 좋으니까 따라라.”라고 하는 그 말이 가지고 있는 그 위험성을 우리가 인식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로 빠질 위험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늘 분별해야 하는 것이죠. 때로는 내가 이해를 잘 못해서 하나님의 바른 교훈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 꼬마 아이에게, 자기 전에 이를 닦으라고 말하면 꼬마아이는 이해를 못 합니다. 왜 내가 어제 이빨 닦았는데, 왜 오늘 이빨을 또 닦아야 되냐고,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래도 우리가 따라야 되는 이유는 그것이 부모의 말씀이기 때문에 따른다기보다는, 그것이 옳기 때문에 따라야 되는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해주시는 말씀은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 용서하라고 하는 말씀들 우리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그렇게 살다가는 이 세상에서 완전 바보 취급 당하면서 살 것만 같은, 납득이 안 되는 말씀들을 해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납득이 안 되더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바른 뜻임을 알기에 순종하는 길로 나가야 되는 것이죠. 하지만 부모님이 잘못된 교훈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모님이 하셨으니까 무조건 따라야 되는 것이 아니라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쉬워요? 어려워요? 어려워요. 분별해야 되니까 어려워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저희들에게 분별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저희들의 마음 가운데 비춰주셔서,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주시는 그 선한 길을 따라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훈계는 보석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해주는 훈계는 보화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보화는 씁쓸한 그 포장을 해서 감추어져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땅에 감추인 보화와 같아서, 그 보화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땅을 사는 것처럼, 훈계는 정말 땅속에 감추어진 것처럼, 정말 싫은 모양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씁쓸하기도 하고 우리를 주눅 들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로 하여금 기운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를 밟아버리는 것처럼, 정말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팔아 훈계를 사야 합니다. 자존심 팔아버리세요. 내버리세요. 우리의 그 교만함, 다 내려버리세요. 나의 모든 그 이기적인 생각들 다 팔아버리고, 다 내버리고 나를 향해서 들려주는, 정말 씁쓸하기도 하고 정말 내 존재를 흔들어 버릴 것만 같은, 그래서 정말 기분 나쁜 것 같은, 그 훈계라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게 보화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그 훈계를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고, 더 나아가서 훈계가 없다고 한다면 훈계를 요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훈계를 청하고, 우리 주변에 스승들이 많이 있는데, 나를 도와달라고 난 좋은 조언을 해달라고,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게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훈계를 사는 것이 그것이 복된 길입니다. 보화를 알아보는 자는 보화와 같은 사람이지만, 보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화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훈계의 방법을 통하여 정금과 같이 보석으로 만들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사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그래서 좋은 믿음의 성장을 해나가도록 만들어주고 있는데, 원하기는 우리가 선한 영향력들을 끼치고, 또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한 영향을 받아서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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