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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여섯(6) 가지 언어

(우리 가족을 살린 웃음의 기적)

개리 채프먼(Gary Chapman)은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라는 책에서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줄 수 있는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긍정의 말(words of affirmation)이다. 부모로부터 화를 내거나 책망하는 소리를 자녀들이 듣게 되면,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아내나 남편으로부터 짜증 섞인 말과 불평하는 말을 듣게 되면, 배우자로부터 아무런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반면에 칭찬을 듣고 위로의 말과 격려의 말을 듣는다면,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둘째는 의미 있는 시간(quality time)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같이 있고 싶어 할 것이다. 같이 있어 주어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될 것이다. 사랑한다고 하는데, 정작 함께할 시간을 내줄 수 없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자녀들은 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바쁘다고 하면서 저리 가라고 내밀어버리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선물을 받는 것(receiving gifts)이다. 사랑은 단순히 감정으로만 가지고 있을 수 없다.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작은 선물이라도 해주어야 사랑받는다고 느낄 것이다. 여러 아이가 있다면 똑같은 선물을 일률적으로 주는 것보다, 그 아이에게 꼭 필요한 적합한 선물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는 필요한 순간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것(acts of service)이다. 배려해주고 도와주면, 내가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다섯째는 신체적인 터치(physical touch)이다. 손을 잡아주고 등을 두드려주고 안아주는 등 가벼운 신체적 교감은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는 우리에게 필요하다. 정작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이러한 언어로 표현하지 않을 때, 사랑받지 못한다고 오해하고, 결국 많은 어려움이 발생한다. 이 세상에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부모라면 정말 사랑할 것이다. 역으로 이 세상의 그 어느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지 않겠는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아내가 없을 것이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선택한 배우자가 아니던가? 문제는 그 사랑이 마음속에서만 있고,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특히 유교적 문화 속에서 자라온 우리는 표현하는 데 서툴고, 때로는 마치 미워하는 것인 양 행동할 때가 많다. 그래서 이러한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잘 배우고 표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런데 개리 채프먼은 정말 중요한 사랑의 언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밝게 웃는 것(smiling)이다. 이것은 여섯 번째 언어라기보다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 사랑의 언어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화가 난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짜증 섞인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지친 모습이다.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거부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녀들은 엄마의 사랑을 갈망한다. 때로는 충분하게 사랑을 보여준 것 같은데도, 더 많은 엄마의 사랑을 요구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얻기 위하여 때때로 삐딱한 일을 하곤 한다. 내가 나쁜 짓을 하면 할수록 엄마의 관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 엄마는 그 아이에게 집중하고 최선을 다해 돌본다. 그런데 그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진 지 오래다. 도대체 우리 아이가 왜 이렇게 삐딱하게 나가는가? 왜 잘못된 길로 가는가? 근심과 염려 때문에 아이들을 대할 때, 얼굴은 근심과 수심이 가득하다. 그래서 자녀들은 여전히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한때 우리 집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가 아주 심각한 위기의 순간 가운데 있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모든 것에 불만을 표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런 아주 어려운 일을 겪은 때가 내가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공부하고 있던 때이었고, 아내와 딸은 한국에 잠시 나와 있을 때였다. 그때 아내는 내게 긴급하게 아이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 아이를 어떻게 할지 물었다. 주변 지인들의 권유처럼 기도원에라도 데리고 가서 매달려볼까? 물었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그랬다. 물론 기도를 하면서 매어 달리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것은 부모가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 아이를 기도원에 넣어서, 그 아이에게 “너는 문제아야. 그래서 이 기도원에 데리고 온 거야” 그런 메시지를 주입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아이의 상태를 돕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밤마다 전문서적과 자료들을 정독하며 연구했다. 아이의 생사가 걸린 일이기에 아내는 그 어떤 때보다도 희생과 수고를 마다치 않았다. 그러면서 아내는 아이 앞에서 밝게 웃으며 대하기로 했다. “너 때문에 내가 근심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너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 죽겠다.”라는 메시지를 절대로 보여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아이와 함께 웃고 즐기기 시작했다. 비록 엄마의 마음속은 피눈물을 쏟고 있을지언정 겉으로라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밝은 모습으로 대하는 게, 그게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펑펑 울었다. 감사한 것은 그 기간이 짧게 끝났다.

웃는 모습으로 밝게 행복하게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방법이다. 웃는 모습으로 아내와 남편에게 서로 대하는 것이 서로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다. 그 어떤 사랑의 언어보다 웃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마도 개리 채프먼이 이런 이야기를 써넣지 않은 이유는 대체로 미국 사람들은 밝게 웃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웃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짜증 난 얼굴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해야 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사랑의 언어는 웃어주는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일 수록 더 웃는 얼굴로 대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남편, 아내일수록 웃는 모습으로 대해야 한다. “웃으면 복이 온다” 잖아요? (요즘엔 이 코메디 프로가 없어져서 다들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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