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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구유 (잠 14:2-4)

잠언서 14장 2절에서부터 4절까지 석절의 말씀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먼저 잠언서 14장 2절 말씀을 보면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역이 약간 뉘앙스가 아쉽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요.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정직하게 행하는 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며, 패역하게 행하는 자가 여호와를 경멸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어” 다르고, “아” 다르다고 하는 그런 말이 실감이 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오늘 우리 개역개정 성경처럼 이렇게 번역을 해놓으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이것을 약간 제대로 번역을 한다고 한다면,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이라고 하기보다는 “정직하게 행하는 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하는 것, “패역하게 행하는 자가 여호와를 경멸하는 자”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누군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멸하는 사람이 누군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이 대답을 해주고 있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가? 지혜 있는 사람이 누군가? 그 지혜 있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잠언서 14장 2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눈에 보인다고 한다면,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대면해서 우리가 어떤 관계를 할 수 있는 그런 실체를, 우리가 직접 접할 수 있는 분이라고 한다면, 이런 질문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행동 가운데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함께 같이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 행동들을 통해서, “아, 저 사람이 나를 존중하고 있구나.”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고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행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 저분을 내가, 아주 존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인지, 아니면 저 사람을 무시하면서 나오는 행동인지가 구분이 되기 때문에, 사람일 경우에는,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사람인 경우에는, 누가 존중하는 사람이고, 누가 멸시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이 아마도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제로 대면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그렇게 추상적인, 영적인 그런 분이신데,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경외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멸시하는가?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 말씀인데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은, 정직하게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만일 악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면, 패역한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사람들을 어떻게 심판하시는가에 대한 비유가 양과 염소의 비유인데요.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임금이, 다시 말하자면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가? 마태복음 25장 40절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마태복음 25장 45절의 말씀에서도 역시 똑같은 말씀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존중할 수 있는가? 그것은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시 오늘 읽은 잠언서 14장 2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난다고요? 우리 한국 성도들이 오해하느냐면, 거룩한 폼을 재고 있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걸로 생각해요. 옷을 경건하게 입고, 단정하게 입고, 성경책을 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의 가르침은 그런 가르침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 “정직하게 행할 때” 정직하는 하는 모습이 보이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은 바른 길로 가는 것이고, 바른 길로 가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바른 길로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만일 우리가 잘못된 길로 걸어간다고 한다면,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을 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거역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 하나님을 경멸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짝을 이루어서 나오는 표현들이 여럿이 있는데요. 짝을 이루어서 자주 반복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사랑”과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기 20장 6절 말씀에 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라고 십계명 가운데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요. 하나님께서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되나요? 즉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조건과 두 번째로 계명을 지키는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나님께서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곧 계명을 지키는 거예요. 나를 사랑하는 자, 그가 곧 계명을 지키는 자인 것인데,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느헤미야서 1장 5절의 표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여기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주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킨다고 하는 이야기는,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 두 개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곧 계명을 지키는 자고, 계명을 지키는 자가 바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 4절도 역시 마찬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사랑하는 것이 곧 계명을 지키는 것인 것이죠.

신명기 7장 9절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22장 5절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게 뭐냐? 계명을 지키는 거예요.

신약 성경에서도 역시 똑같은 표현들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의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냥 내 내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고, 주님을 좋아한다고 하는 그런 따뜻한 마음이 있으면, 사랑하는 게 아니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켜야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0절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켜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것을 예로 들면서, “너희도 계명을 지켜서 나의 사랑 가운데 있으라”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요한일서 5장 2절에서부터 3절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이서 1장 6절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한다고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그리고 성경책을 끼고 있고, 단정히 하고 있고, 이렇게 우리의 몸, 종교적인 열정을 보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물론 그런 면도 나타나야 하겠지만,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입니까?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른 길로 정직하게 가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종 교회 내에서 분란이 일어나게 되면,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버리고 떠나는 일들이 생깁니다.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아픔이 있고 분란이 있으면, 양쪽으로 나누어져서 싸우게 되면, 그것 때문에 믿음을 저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죠. 그렇게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의 믿음이 연약해서일까요? 그들은 믿음이 너무나도 없어서일 것인가요?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믿음이 연약해서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사람들이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 모순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이웃들을 사랑해야 맞는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바른 길로 가는 것이 맞는데,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요. 말로는 주님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하나님을 경멸하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니까,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모순과 위선을 보면서, 그들은 “아, 이거, 저들이 말하는 말은 전부 엉터리다. 거짓말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럴 수 없잖아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한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확신하니까,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러나 행동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안 계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해도,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나를 책망하지 않는,” 이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그런 확신 가운데,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하는 것을 행동으로 강하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옆에서, “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있구나”라고 느끼고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는가?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존중하는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정직하게 바른 길로 가는 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경외하는 것이요. 그게 지혜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서 14장 3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가지고 계신 성경책을 가만히 읽어보시면, “자청하고”라고 하는 글자가 조그마한 글씨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나요? 똑같은 글씨로 되어 있나요? 조금 작게 표현이 되어 있나요? 작게 표현되어 있는 성경이 성경 판본이 잘 표현한 겁니다. 그 작게 표현한 것을 무시해 버리고 똑같은 글자로 표현한 성경은 좀 실수를 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작은 글씨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성경 원본에 그 말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 원문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동사가 없습니다. 동사가 없고, 그냥 명사만 있습니다. 미련한 자의 입, 매, 교만이라고 하는 세 단어만 있을 뿐이지, 미련한 자의 입은 교만하여 매를 자청하느니라. 자청한다고 하는 그런 동사가 원문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동사가 없다고 해서, 문장이 안 되는 게 아니고, 우리나라 말은 동사가 거의 대부분 있어야만 문장이 되겠지만,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그리고 서구 언어 같은 경우에는 종종 동사들이 생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략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문맥으로 보면 거기에 어떤 의미의 동사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경우에, 그런 동사를 쓰지 생략하게 되는 것인데요. 다행히 그것을 알고서, 번역을 잘해놓았습니다. 위 단어들을 이 세 개의 단어들을 적절하게 배열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미련한 자의 입은 교만하여, 매를 부른다, 매를 자청한다, 매를 가져온다 등등 그런 동사를 넣어서 번역해 주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미련함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교만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미련한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이거든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왜 경외하지 않습니까? 교만하기 때문에 경외하지 않는 것이죠. 따라서 모든 죄의 모든 미련함에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근본, 그 기저에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복종하는 겸손함의 자세가 있었다고 한다면, 죄를 짓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먹지 말라. 먹으면 죽을 거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지만, “먹어도 안 죽을지도 몰라. 먹으면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처럼 될 수도 있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신뢰를 보이면서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 버리고,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내 마음대로 판단해 버리는, 그런 교만함이 아담과 하와의 죄의 그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교만하게 되면 결국 우리가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겁니다. 매를 자청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똑똑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갈 수가 없고, 우리의 생각은 아무리 뛰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우리 인간의 지혜로움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것인데, 우리가 아무리 지혜로워 봤자, 하나님의 어리석음만 못한 것이 우리들의 인생인데, 우리가 하나님보다도 더 지혜롭다고 교만하게 생각해서, 우리가 마음대로 행동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고 했는데, 소경 된 우리가 그런 소경 된 그 판단에 따라서, 우리 자신을 이끌게 되면, 결국 파멸로 이끌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그런 것이 지혜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여기서는 입과 입술에 대해서 말을 해 주고 있는 것인데요. 미련한 자는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존한다고, 입과 입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입과 입술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망할 수도 있고, 우리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보존할 수도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 말과 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신체의 일부 기능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말할 수 있는 것이 말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가 반영되는 것이 우리 됨을 나타내는 것이죠.

마태복음 12장 35절의 말씀에 보면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라고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고, 지혜로운 자는 지혜로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우리가 어리석은 자가 된다고 한다면, 어리석은 말을 하고 결국은 망하는 길로 간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정말 지혜로운 그런 말을 할 수 있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해야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죠.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그 가르쳐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이, 그것이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한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14장 4절 말씀 보겠습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격언이요, 잠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소가 있어야 농사를 짓잖아요? 소가 있어야 물건도 나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소는 정말 유용한 짐승입니다. 하지만 그 소를 가지고 있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아주 귀찮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무엇이 귀찮죠? 냄새나잖아요? 여물을 먹여줘야 되고요. 또 여러 가지 더럽히는 것들, 변 같은 것들 다 치워줘야 되고요. 사실 소를 기르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냄새도 나고, 지저분하고 해야 될 일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소를 기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수고와 여러 가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많기 때문일 것이죠.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단점을 보고 구유가 더럽혀진다. 저 소가 자꾸만 더럽히니까, 저 소를 없애버려야 되겠다. 그래 버리면 결국에는 유익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가 무엇일까요? 소가 무엇이죠? 모든 것을 다 가리키는 거죠. 다 가리킵니다. 우리에게 좀 불편한, 그 모든 것들을 다 이야기하는 것이죠. 어떤 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공동체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성격이 모가 나 있어요. 어떤 사람은 나와 성격이 맞지 않아요. 그래서 불편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보자고 한다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예수님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근데 예수님 같지가 않아요. 다 한 성질 하잖아요. 그런데 그 한 성질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 그 한 성질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니꼽고 보기 싫고 맘에 안 든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할렐루야! 있을 수 있어요. 근데 저 사람 굉장히 눈에 거슬리네 하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 빼놓고, 그 사람 없이 맘 맞는 사람들끼리만 교회를 만들자. 그러면 맘에 드는 사람들끼리만 교회를 하면 좋을 것 같죠? 좋지 않아요. 속 썩이고 힘들게 하고, 정말 어렵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아이고 저 꼴 보기 싫은 사람, 저 사람 제거해 버리고, 그냥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한번 좋은 교회 만들어보자. 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단점도 있는가 하면, 그 사람으로 인한 장점도 있다는 거예요. 유익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단점만 바라보고 쳐낼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다고 그냥 쫓아낼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품고 안아주고 해서, 그 함께 그 장점들이 다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많다 하는 게, 오늘 잠언서 14장 4절의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실생활 가운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 가지를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가 은행에서 돈을 빌리게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무슨 단점이 있습니까? 이자 부담을 해야 된다고 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안 빌리는 게 제일 좋을까요? 대출은 빨리 없애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일까요?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는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세계적인 모든 큰 회사들은 대출이 다 있습니다. 대출을 일부러 받습니다. 우리가 집을 살 때 대출을 받습니다. 그리고 평생 갚아 나갑니다. 대출 원금을 다 없애버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해요? 대출을 받았을 때, 그 대출을 받아서 무엇을, 유익을 얻습니까? 회사 같은 경우는 사업을 더 확장하고, 더 많이 하는, 그런, 그래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죠. 비록 이자를 갚아나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 마치 구유가 더러워지는 것처럼 불편한 일이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 불편한 것만 보면 안 받아버리면 끝이잖아요? 제일 편한 게 뭐예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편한 것이죠.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해서는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는 것인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대출을 받아서라도 사업을 하는 거예요. 계속 빚이 있으면서, 사업을 하는 거예요. 왜? 대출을 안 받고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있는 것보다, 대출을 받아서 사업을 해서, 그래서 돈을 벌어가고 갚아 나가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죠.

사람을 쓰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 가게에서 사람을 쓰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겨요? 인건비를 지불해야 된다고 하는 어려움이 있어요. 더군다나 인건비는 자꾸자꾸 올라요. 이것도 해줘야 되고, 저것도 해줘야 되고, 많이 해줘요. 그러니까 사람을 안 쓰는 게 제일 좋죠? 아니요! 인건비를 지불해도 그 사람이 있음으로써 얻는 유익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쓰는 겁니다.

누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유익을 보지 않고, 손해만 보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인 거예요. 소를 보면, 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소에는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는 거예요. 소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유익이죠. 유익! 소의 단점은 무엇입니까? 구유가 더러워진다는 게 단점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무엇을 봐야 됩니까? 이익을 봐야죠. 그래서 소를 길러야죠. 냄새가 나고 구유가 더러워져도, 소를 가지고 와서, 그래서 일을 시키고 농사도 짓고 짐도 날라야 그래야 유익을 얻는 것이죠.

제 아내는 어깨 회전근개파열이 있어가지고요. 그래서 팔을 한동안 굉장히 못 썼어요. 뭐 물건 하나 들지를 못해요. 팔을 들지를 못해요. 파열이 와서, 그래서 너무 아프니까, “여보, 저것 좀 해줘” 하면, 내가 가서 다 해줬어요. 그래서 이번에 병원에 갔더니, 회전근개가 파열됐다고 하면서, 주사를 놓고 그리고 약을 줬습니다. 약을 줘서 그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많이 나왔어요. 많이 나아졌어요. 어깨가 아프니까, 잠도 못 자고, 아무튼 엄청 고생을 했어요. 근데 조금 나았어요. 조금 나았는데, 그래서 약도 먹고 그랬는데, 근데 그 약에 뭐가 있냐면, 부작용이 있는 거예요. 부작용 영어로 side effects이라고 하죠? 부작용, 동반해서 나타나는 현상들이죠. 부작용이 무슨 부작용이 있냐면, 얼굴 홍조가 생기는 겁니다. 얼굴이 빨개져요. 빨개지니까, 저는 예쁜데, 본인은 굉장히 힘들다고 그래요. 그리고 또 하나가 뭐가 있냐면, 알러지가 생기는 거예요.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서, 그래서 막 손에 뭐가 생기고, 막 몸에, 온몸에 뭐가, 알러지 반응이 나타나는 거예요.

이 약을 먹어야 될까요? 먹지 말아야 할까요? 여러분들이 결정해 주십시오. 약을 먹어야 합니까? 먹지 말아야 합니까? 먹어야 돼요? 약을 바꿔야 돼? 최고의 지혜입니다. 약을 먹어야 돼요. 약을 바꾸기 전에는. 먹었어요. 알러지 생겨도 먹고, 얼굴 홍조가 생겨도 먹어요. 왜 먹어요? 이걸 치료해야 되니까. 이게 너무나도 아픈데, 이걸 치료, 이거 이것을 치유해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이런 단점이 나타나도 먹는 거예요. 그런데 만일 이런 단점들 때문에 안 먹으면, 계속 아픈 거예요. 치유가 안 되는 거예요.

우리 공동체는 우리는 비전의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비전의 사람들이 있어야 되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리더십에 들어가야 하는가? 구유가 더러워지는 것이 걱정되는 사람을 리더십에 뽑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문제가 없으니까, 편하고 좋죠. 뭐. 하지만 존재의 의미가 없어요. 누가 리더십 그룹에 들어가야 됩니까? 소의 유익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얻는 유익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외국과 어떤 외교를 맺는다고 한다면, 경제 통상을 해야 된다고 한다면, 장점만 있겠어요? 단점만 있겠어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거예요. 남과 북의 관계 속에서 무엇을 한다고 한다면, 장점만 있겠어요? 단점만 있겠어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고 다 그래요. 그런데 무엇을 부추겨요. 부정적인 것만 부추기는 거죠. 구유가 더러워진다. 구유가 더러워진다. 그러한 것을 카톡으로 만들어가지고 자꾸 돌리고, 그래서 구유가 더러워지는 것에 불만을 갖게 만들고, 그래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드는, 아무것도 못하게 만드는, 그런 일로 갈 게 아니라, 우리 성도들은 아주 잠언서의 말씀에 따라 잘 분별해야 되는 것이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구유가 더러워지는 것은 무조건 다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단점이 너무나도 커서, 포기해야 되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대출을 받아야 했었는데, 그 대출 이자가 너무나도 높아서, 그래서 정상적으로 활동을 할 수 없게끔, 그렇게 위협적인 이자라고 한다면, 그런 대출은 받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죠, 그런 것은 피해야 하는 겁니다.

잠언이라고 하는 것은 계명이 아니에요. 계명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것이지만, 잠언이라고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옳을 수도 있고, 옳지 않을 수도 있는 겁니다. 오늘 소의 이익을 보며 그 구유가 더러워진 것을 무시해야 한다고 하는 이 말씀은, 구유가 더럽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소를 버릴 게 아니라고 하는 이 말씀은, 그러니까 모든 단점이 있어도 그냥 무조건 장점을 보고 무조건 밀고 나가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들은 늘 신중하게 고민해야 되는 거예요. 그냥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서, 성경에 이 말씀만 보고 그냥 밀고 나가면 안 되는 겁니다. 성경 말씀에는 이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씀도 있어요. 우리가 건축을 한다고 한다면, 내가 가진 돈으로 충분히 건축을 다 할 수 있는지, 망루를 세울 수 있는지 먼저 계산해 볼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고, 전쟁을 한다고 한다면 내가 가진 일만으로 저 이만을 싸울 수 있는지, 계산을 먼저 해봐야 된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고, 성경에는 다양한 종류의 말씀들이 있는데, 한 말씀만 붙들고, 그러니까 “소의 유익만 바라보고 단점은 무시해도 괜찮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에, 과연 우리가 이 단점들을 무시하고, 그것을 잠재하고, 더 좋은 장점을 위해서, 유익을 위해서, 선택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구유가 더럽혀지는 것이 너무나도 커서, 소의 유익이 아무런 빛을 발하지 못한 상황인 것인지, 항상 살펴보면서 지혜롭게 판단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렵죠.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상황에 따라 적용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필요하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이고, 또한 사람들의 그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의 생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며, 무엇이 최선의 방책인지,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고민하면서 결단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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