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나눔의 즐거움 (고후 9:6-15)

저는 군목으로 사역을 해서 군대에서 5년간 사역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군 생활하던 부대는 여단급의 부대였는데요. 여단장께서 대령 신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근무하는 그 기간 중에, 준장으로 별로 진급하게 되는 그 모습을 제가 보게 되었습니다. 대령으로 있다가 준장이 되니까, 별을 달게 되니까, 많은 것이 바뀌더라고요. 당시에 무엇이 바뀌었냐면, 우리 부대의 정문을 교체해 버렸습니다. 대령급 부대가 아니라,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라고 해서 엄청나게 좋은 그런 정문을 만드는 것을 봤습니다. 장군이 되면 한 100가지가 바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으로 100가지가 무엇이 바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식당에 가보니까, 간부식당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 지휘관을 위해서 음식을 딱 준비를 해주는데, 예전에는 우리랑 먹는 게 똑같았었거든요. 장군이 되고 나니까, 은수저 숟가락으로, 젓가락으로 바꿔놓는 것을 봤습니다. 정말 군인들이라고 하면 별을 다른 것을 갈망하고, 이렇게 좋아하고 바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별만 다는 것 정도가 그 정도인데, 사실은 대통령이 되면 더 많은 혜택과 권력이 주어지는 것이죠.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얻습니까? 사면권도 있고 또 국군의 통치자가 되는 거죠. 통수권자가 되는 것이죠. 예전에 방위로 제대했어도, 혹은 병장으로 제대했어도 대통령이 되면, 국군의 통수권자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고 마칠 수도 있고, 또한 법률을 입법하게 되면 그 법률을 거부하거나 선포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지고, 여러 가지 임명직 공무원들을 마음대로 선택해서 임명하는, 그런 대단한 그런 특권들이 주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위치에 올라갈수록 , 여러 가지 특권이 주어지고 혜택이 주어지고, 권한이 주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잘 먹고 잘 살라고? 아니죠. 더 많은 권한과 더 많은 것을 주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만큼 많은 사명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대통령은 어떤 사명이 있을까요? 우리나라 국민들을 행복하게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대통령의 역할일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역사 가운데서는 그러한 사명을 망각해버린 지도자가 있을 수가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정말 국민을 위해서 일하기보다는, 친인척들을 챙기고, 그리고 잘못된 정책을 펼치는, 그런 지도자들이 있을 수가 있겠는데, 만일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탄핵을 당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다고 하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로 무엇을 바라보냐면, 사명을 바라보기보다는 그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이나 혜택의 관심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향해서 물어봅니다. 너의 꿈이 무엇이냐?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아이들이 대답을 합니다. “예,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 “예, 저는 장군이 되고 싶어요. 경찰이 되고 싶어요.” 여러 가지 꿈을 이야기하는데, 안타까운 것은 대체로 그런 꿈을 이야기할 때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행하는가 사명에 대한 꿈보다는, 그 사람이 누리고 있는 혜택이나 권한이 욕심이 나서, 그런 꿈을 가지려고 할 때가 많이 있는 것이죠. 그런 위치에 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을 수 있으니까, 내가 저런 사람이 된다고 한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까,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러한 혜택과 권한에만 눈을 뜨게 되는데, 사실은 그러한 것에 눈에 관심이 가기보다는, 그 자리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어떠한 일을 해야 할 것인가?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는 서로 다툼이 일었습니다. 누가 크냐? 제자들 가운데 “네가 크냐? 내가 크냐?”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졌는데요. 아마도 제자들 사이에서 이런 다툼이 일어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이 가장 높은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 가장 높은 자에게 주어지는 그 권한에 눈이 쏠렸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야 하고,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은, 그가 얼마나 높은 위치에서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을 바라보기보다는, 내가 과연 무엇을 위하여, 섬길 것인가? 내가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섬겨야 될 것인가? 그 사명에 눈을 뜨라고 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대통령이나 장군들에게만 여러 가지 권한과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나름대로의 사명이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시는 것이죠. 내가 가진 모든 것, 내가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것인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실까요? 그것은 바로 사명을 위해서 주시는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장군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권한을 주는 것처럼, 대통령에게 더 많은 권력과 혜택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고 맡기셨다고 한다면, 그냥 그것을 가지고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해 행복하게 지내라고 해서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사실은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기를 원하시는 사명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해주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이 있을 때, 그 옆을 제사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지나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왜 그냥 지나쳤을까요? 왜 그 정말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그 자리를 지나치고 말았을까요? 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이것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죠. 내가 할 일은 무엇이에요? 제사를 드리는 게, 내 할 일입니다. 내 할 일이 무엇이에요? 가족을 돌보는 게 내 일입니다. 내게 주어진 계획이 있고,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내 눈앞에 나타난 강도 만난 사람은 내 일이 아닌 거예요. 내가 신경 쓸 사람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을 보고도, “이것은 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누가 나타났는가?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유대인과는 철천지 원수지간에 있었던 그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던 도중에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났을 때,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틀어서 강도 만난 자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기 시작한 것이죠. 상처를 싸매 주고, 가지고 있던 포도주와 기름으로 그 상처를 다루어주고,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왔던 낙타에, 나귀에 그 사람을 태우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주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쏟아부어서, 그 한 사람을 살리는, 엄청난, 위대한 일을 행했던 것이죠. 사마리아 사람은 왜 그런 일을 했을까요? 심심하니까? 여유가 있으니까? 아무 할 일이 없어서? 그게 아니에요. 사마리아 사람도 자기가 세워놓은 여행 계획이 있어요. 그 길을 향해서 가던 길이었고, 그 사마리아 사람도 자기가 사용해야 할 그 재정 계획이 있었어요. 이 돈으로 무엇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가고 있던 길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이 강도 만난 사람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 내가 저 강도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된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이 길로 지나가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하여, 갑작스럽게 주어진 사명에 반응하고 도와주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여행 계획을 포기해버리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재정 활용 계획을 중단해버리고, 그 한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서 자신의 최선을 다해서 결국 그 사람을 살려내게 된 것이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늘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명을 주신다고 한다면, 그 사명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인지 생각해보고, 신실하게 믿음으로 반응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후서 9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읽은 이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헌금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내용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일어나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고린도 교회는 마음이 동했습니다. 형제 교회의 아픔, 형제교회의 그 슬픔을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질을 주셨다고 한다면, 그들을 도우라고 하는 사명으로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 예루살렘 교회를 돕겠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죠.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들의 마음을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그 일을 시행하라고, 그 일에 참여하라고 독려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7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이 귀한 나눔을 할 때, 이 귀한 하나님께 드림을 실천하게 될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억지로, 인색하게, 겨우, 마음이 먹히지 않은 채, 그렇게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늘 자기중심적이고, 늘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마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명에 순종하기보다는, 두려워하면서 억지로, 인색하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지못해서, 하긴 해야 되겠으니까, 조금만 하는 것이고, 최소한만 하려고 하는 경향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억지로 조금만 겨우 시늉만 내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7절의 말씀에서는 누구를 기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즐겨 내는 자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액수가 많아야 좋아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것을 드려야만 좋아하는 것이지, 조금 드리면 안 좋아한다. 크게, 통 크게 써야지 기뻐하는 것이지, 그냥 조금만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무런 물질적인 헌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역이 막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기뻐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많은 액수이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드리는 그 마음을 기뻐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성전을 가시다가, 어떤 가난한 한 과부가 동전 두 개를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헌금함에 넣을 때, 당시 성전 앞에 있던 그 헌금함은 소리가 나게 되어 있었는데요. 동전을 두 개씩 하면 딸랑딸랑 딸랑딸랑하면서 내려가요. 돈이 많은 부자들은 그 헌금궤 안에 들어가서 그 헌금을 부을 때, 촬촬 하면서 큰 소리를 내면서 들어가는데, 돈이 없는 이 가난한 과부가 집어넣게 되면, 정말 적은 액수가 들어가는 것이 들려서, 창피할 수도 있었는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가난한 과부를 보시면서 칭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없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다 넣은 것이라고 하면서 칭찬해 주신 것이죠. 많은 액수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열려 있고, 헌신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드릴 수가 있으며, 나눌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부모님을 바라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부모님들은 어떻게 자녀들을 사랑해 주셨습니까? 부모님들은 자녀를 사랑하기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하는 거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하고 도와주고, 자신을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아끼지 않는 것이죠. 모든 것을 다 주고 나서도, 마지막에 생각하는 게 무엇이냐면, 너무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에요. 자녀들에게 한없이 주고 싶은 그 부모의 마음은, 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이것이 나의 사명이고, 이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하는 자기 이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모성애가 있고 부성애가 있기 때문에, 자녀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기쁨으로 해주고 또 해주고 또 해주어도 만족스럽지 않고,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역시 우리도 우리가 어떻게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인색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라고 하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요.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기도 하고 또한 돌에 맞기도 하고 또한 죽임을 당할 뻔한 그런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또한 여러 가지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되는 그런 일들을 당했는데,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바울 사도는 “힘들어서 도무지 안 되겠다. 나 이제 더 이상 못해먹겠다.” 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울 사도의 마음 가운데,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게 목숨이 붙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게 이런 권한이 있고, 내게 능력이 있고, 내게 힘이 있고, 내게 재물이 있고,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두신 이유, 하나님께서 나에게 능력을 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를 살려주셨다고 하는 이해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의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의 고백이 등장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바울 사도는 원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잡아 가두고, 죽이고 교회를 핍박하던 교회의 원수였고, 원수 중에서도 괴물이었고 괴수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책임을 지었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데, 가장 최전선에 섰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런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 가장 좋은 반응일까요? 하나님께서 심판해 버려야죠. 죽여버려야죠. 멸망시키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바울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바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요. 저 다메색을 향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이기 위해서 가는 그 길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말씀하시고, 그 바울의 마음을 변화시켜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그런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바울 사도가 나중에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심판한 것이 아니라, 왜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셨을까? 왜 나를 죽인 것이 아니라, 나를 살려주셨을까?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그것은 “나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나를 살려주셨구나. 내가 왜 살아있는가? 복음을 전하라고 나를 살려주신 거구나. 내가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 이 일을 하라고 나를 살려주셨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따라서 바울 사도의 생각이 무슨 생각이냐 하면, 바로 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될 사명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살려주신 것이고, 내가 구원을 받은,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저 이방인들을 복음을 전하기 위한 그 사명이 나를 살렸기 때문에, 나는 이방인들에게 어떤 자라? 빚진 사람이라. 저 사람들이 아니었다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그래서 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득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내가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건강이든 목숨이든 달란트이든 재물이든 자녀이든, 그리고 나쁜 경험과 좋지 않은 그런 모든 경험까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허락해 주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냥 살다 보니까 어쩌다가 만나게 되는 경험이 아니라, 살다 보니까, 내가 열심히 살아서 그래서 얻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명으로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군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는 것은 우리나라를 잘 지키라고 하는 그런 사명을 위해서 주신 것이고, 대통령에게 엄청난 권한을 주는 것은 우리 국민을 잘 살게 만들라고 하는 그런 사명 때문에 주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존재 자체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주시는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사명에 살 때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고린도후서 9장 6절의 말씀 가운데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농부에게 사명이라고 하는 씨앗을 줬습니다. 농부에게 사명의 씨앗을 주었을 때, 그 농부가 그 씨앗을 가지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열심히 밥 해 먹어야 됩니까? 그것이 아니고, 땅에 심어야 되는 거예요. 땅에 심는 것은 어쩌면 허비하는 것 같아요. 땅에 내버리는 것 같아요. 이것은 아무런 결실도 없는 것이고, 내가 밥해 먹을 수 있는 것을 못 먹는 것 같아요. 하지만 놀라운 것은 농부가 씨앗을 받았을 때, 이것은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심으라고 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밭에 뿌리게 되었을 때, 많이 뿌리면 많이 거두고, 적게 뿌리면 적게 거두는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씨앗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명의 씨앗을 사명을 위해서 뿌릴 때, 엄청나게 많은 것을 거둘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의 씨앗이 있다고 한다면 먹어 해치워 버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준 이 사명의 씨앗이 어떤 사명을 위한 것인가를 기억하고 심어야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사명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선택하신 민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만들어서, 그리고 이방에 빛이 되게 만들어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부터 3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향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내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복되게 하기 위함인데, 아브라함을 복되게 하는 그 목적이 뭐예요? 아브라함만 잘 살라고? 그게 아니라, 너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고 제사장 나라로, 만들어 주신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너희들은 할례 받지 못한 민족이라고 하면서 배척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고 하는 교만함 가운데 빠지고, 제대로 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 결국 이스라엘은 그 특권을 빼앗겨 버리고, 그 이스라엘의 사명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이스라엘 민족 우리 성도들에게 옮겨오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원리를 깨달으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명으로 주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명에 반응할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게 놀라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씨를 뿌리면 없어져 버리고, 그래서 망할 것 같은데, 놀랍게도 씨를 뿌리면 많은 것을 거두게 되는 것이고, 씨를 뿌리지 않고 감추어 두면 남아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없어지는 역설이 하나님의 법칙인 것이죠. 잠언서 11장 24절에서 26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구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 16절에서 21절의 말씀을 통해서 대부분의 우리들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교훈하신 바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추수하였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여주었습니까? 누가복음 12장 16절부터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의 소출이 풍성함에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내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우리는 다음 주일날 비전 주일로 지킵니다. 매년 12월 둘째 주일을 비전 주일로 지키고 있는데요. 마음이 정한 대로 할 것이라고 하는 성경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헌신을 작정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헌금을 작정하려고 하는데, 선교 헌금과 비전 헌금에 작정하려고 하는데요.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인가를 주셨다고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인지, 고민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작정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성경적인 원리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10을 주시면, 그 가운데 하나는 다시 흘려보내는 것이 성경적인 기준이 될 수가 있겠는데요. 작정하지 않은 분야에서에서라도, 마음을 다해서 내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헌신하는 것을 작정하게 될 텐데요. 재물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능력이 있고 탈렌트가 있고 재능이 있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고 한다면, 건강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위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마치 부모님이 자녀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늘 생각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왜 이러한 축복을 주셨는지 고민하면서, 사명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자신의 그 평안함, 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내 사명이 아니라고 외면하는, 씨를 감추어 버리는 그런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은 늘 헌신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 또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다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 우리는 사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까? 왜 우리는 나누고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죠? 그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까지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는 일이라고 한다면 아까운 것이 아무것도 없이 다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아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요즘에는 우리 월드컵이 한창 진행이 되고 있는데요. 월드컵을 좀 보셨습니까? 열심히 보시는군요. 저도 봤습니다. 새벽에 잠도 안 자면서 봤는데요. 드디어 우리나라가 16강 진출이라고 하는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너무나도 기쁘시죠? 저도 너무나도 기분이 좋더라고요. 하루 종일, 어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3차전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1대 0으로 지고 있을 때는 정말 암울했습니다. 이러다가 1무 2패로 탈락하는 거 아닐까? 너무나도 안타까웠는데, 그 순간에 김영권 선수가 호날두의 어시스트를 받아서, 골을 넣는 그런 엄청난 수훈을 세웠습니다. 이 김영권 선수는 4년 전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골을 독일을 향해서 넣어서 우리나라를 살려낸 그런 선수였는데요. 이번에도 김영권 선수가 골을 넣어서 희망을 가지게 만들었고, 마지막에는 손익민의 정말 환상적인 드리블과 황희찬의 정말 완벽한 슛으로, 너무 부럽습니다. 그런 걸로 골을 넣어서 우리나라가 역전하고 승리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김영권 선수가 자칫 잘못하면 3차전에 못 나올 뻔했어요. 알고 계십니까? 2차전 가나와의 경기가 끝났을 때, 심판이 너무나도 억울한 판정을 내리는 겁니다. 분명히 연장 시간을 줄 만한 상황이 충분히 있었고, 코너킥이 주어지면 대부분은 그 코너킥까지는 차게 하고 경기 상황이 마무리되는 거 보면서 휘슬을 부는 것이 정상적인데, 악명 높은 테일러 심판은 코너킥도 안 주고 끝내버리니까, 우리 선수들이 다들 화가 나가지고 그 심판 앞으로 막 몰려들어서, 강하게 항의를 하는 거예요. 항의해봤자 소용 있습니까? 소용없지만 항의하는 거예요. 그래도 김영권 선수가 더 크게 항의했어요. 항의하는데 그 순간에 심판이 자기 손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는 겁니다. 왜 집어넣었을까요? 카드 주려고, 김영권 선수에게 카드를 주면 3차전에 못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짜잔 하고 나타난 사람이 있어요. 누구죠? 감독이 나타난, 감독이 나타나서 더 크게 항의하는 거예요. 더 크게 항의하니까, 감독이, 김영권 선수를 향해서 카드를 줄려다가 벤투 감독을 향해서 레드카드 내밀고, 벤투는 감독 자리에 앉지 못하는 결과를 얻었지만 김영건 선수는 경기를 뛴 거죠.

그런데 그게 바로 우리들에게 일어난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께 죄악을 저질러서, 영적인 레드카드를 받고, 영원히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이제는 아무런 소망도 없던 우리들에게 레드카드가 주어지는 그 순간, 우리 주님께서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고, 우리가 받을 레드카드를 대신 십자가 위에서 받으셔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셔서 우리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김영권 선수는 쓸 만한 가치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런 효용 가치도 없는 우리들을 살려내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레드카드를 받으셨다고 한다면,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왜 살리셨고, 우리에게 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가? 오늘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것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 심지어 좋은 경험뿐만 아니라, 나쁜 경험까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것도 허투루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작은 것도 귀하게 보시는, 그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런 사명으로 나에게 이런 권한과 은혜를 주셨는지 고민하면서, 주님, 오늘 저에게 갑작스럽게 맡겨주시는 주님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난 강도 만난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왜 우리에게 이런 은혜와 축복을 주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믿음으로 결단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