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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을 이기는 선한 말 (잠 12:24-25)

오늘 24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지런한 자의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아주 지당한 말씀이죠. 그렇죠? 예외적인 케이스(case)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고, 또 부지런한 사람도 부림을 받게 되는, 그런 예외적인 케이스(case)들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예외적인 경우가, 케이스(case)가 있다고 해서, 보편타당한 진리의 말씀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죠. 당연한 것이죠. 부지런한 자는 부를 얻게 될 것이고, 부지런한 자는 성공하게 될 것이고, 부지런한 자는 다스리게 될 것이지만, 부지런하지 못하고 게으른 사람은 힘들게 될 것이고, 가난하게 될 것이고, 또 부림을 당하게 될 것이고, 어려움을 겪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부지런하기보다는 게으른 모습을 보일 때가 더 많을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며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보다 사탄의 법칙을 따르려고 하는 악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부지런한 자가 다스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법칙은, “부지런한 자가 얻을 것이고 성공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인 것이죠. 하지만 사탄의 법칙은 무엇입니까? 그런 수고하지 않아도, 부지런하지 않아도, 그래도 내가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사탄의 법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을 하게 되는 것이고요. 남의 것을 속여 편취하는 사기 행각이 벌어질 수가 있겠고요. 그리고 요행을 바라면서, 자기는 노력하지 않지만, 요행을 바라면서 성공하거나, 요행을 바라면서 무엇인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가 있는데,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법칙보다는 사탄의 법칙을 따르려고 하는 그런 마음의 동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이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탄은 우리들을 유혹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해서, 정말 수고의 땀을 흘려가면서, 부지런하게 해서, 그래서 그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법칙을 무시하고, 그런 수고가 없이, 그런 부지런함이 없이, 그냥 횡재할 수 있는 그런 요행을 바라고, 그리고 잘못된 방법을 통해서 그래서 성공하고 싶은 그런 마음들을 사탄이 부추기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속아 넘어간 사람이 누가 있었죠? 하와입니다. 하와에게 다가가서 유혹하기를 뭐라고 유혹합니까? 네가 만일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한 것이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인생의 목표일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하나님과 같이, 이렇게 하나님의 단계로 우리가 변화되어 가는 것, 지금은 부족하고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부족하지만, 전혀 부족함이 없는 그런, 하나님과 같은 그런 단계로 올라가는 거야말로 우리들의 목표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어떻게 하면 그런 단계에 올라갈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정말 좋은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죠. 온 세상을 다스리며, 정말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하나님께서 주신 그런 특권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사탄은 그런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겠는 것보다는, 선악과 하나만 먹어버리면 아주 간단하다는 겁니다. 힘들이지 말고, 선악과 하나만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돼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쉽고 편안한 길입니까? 그래서 그 말에 하와가 속아 넘어가게 된 것이죠. 그러한 유혹이 누구에게도 있었는가? 바로 예수님에게 다가왔던 사탄의 유혹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온 세상을 보여주면서, 그 영화를 보여주면서 한 가지 달콤한 제안을 하는 겁니다. 네가 만일 오늘 나에게 경배하기만 하면, 이 세상을 너에게 주겠다고 제한한 것이죠. 지금 이 세상이 사탄의 손아귀 가운데 있는데, 나에게 절하기만 하면, 이 세상을 건네주겠다고 하는 그 제안이야말로 얼마나 달콤한 제안인지 모릅니다. 수고하고 힘들게 세상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경배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매력적이고 그리고 달콤한 유혹이 되겠습니까? 수고의 땀을 흘리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고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제안을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안을 거부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죠.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이고, 힘든 길이고,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그런 정말 견디기 어려운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감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얻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서양 속담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No pain, no gain. “고통이 없이는 소득도 없다”라고 하는 말이고요.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는데, 이것은 보편타당한 그러한 말씀이기도 하거니와,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수고의 땀을 흘리고, 부지런히 일하고, 부지런히 노력할 때에야,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 수고의 땀방울이 맺은 그 결과물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 모두가 다 부지런하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구 선수 가운데 대한민국이 낳은 유명한 축구 선수가 누굽니까? 차범근입니까? 그건 아주 오래전 얘기고요. 지금은 손흥민이라고 하는 선수가 아주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축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손흥민 선수는 어떤 선수가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는 사람이에요. 오른발로 차도 들어가고, 왼발로 차도 들어가고, 어쩌면 그렇게 왼발이 주발인지, 오른발이 주발인지, 왼발이 주발인지 모를 정도로, 두 발을 아주 아주 자유자재로 쓰는 그런 선수가 손흥민 선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손흥민 선수는 양발을 잘 쓰게 됐을까요? 태어나면서 양발잡이로 태어났을까요? 아니요. 어려서부터 훈련을 하는 겁니다. 어려서부터 훈련을 하는데, 어떤 이야기를 들었냐면, 그 운동화에 압정을 집어넣어 놓고, 오른발에 압정을 집어넣고, 오른발로 차면 압정에 찔려서 아프니까, 왼발로 차게 만든 거예요. 그래서 왼발로 차는 연습을 그렇게 수없이 많이 해가지고, 그래서 양발을 다 쓰는 그런 훈련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손흥민 선수가 달려가면, 수비수가 오른발을 막아야 될지, 왼발을 막아야 될지 몰라서 그래서 꼴을 먹는 거예요. 엄청난 훈련의 결과로 말미암아 양발을 아주 자유자재로 쓰는 월드 클래스의 뛰어난 선수가 되어 버렸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손흥민 선수는 프리킥을 차면, 엄청나게 잘 들어가는데요. 정말 환상적인 골이 들어가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들어가는가? 모든 선수 함께 훈련을 마치고 그리고 이제 다들 돌아가게 되면, 그 선수는 혼자 남아서 또다시 프리킥 연습을 수천 번씩 하는 거예요. 천 번씩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에게 기회가 주어질 때, 그 골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매일매일 쉬지 않고 노력하는데, 저 영국에서 축구를 하다가 잠시 국가대표 경기를 위해 대한민국에 왔어도 새벽에 일어나서 뛰어다니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잠시라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부지런히 연습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때 세계 최상의 선수로 등극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모두 그렇게 화려한 모습을 부러워하지만, 그가 흘린 땀방울을 똑같이 흘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이죠. 참 대단하다. 저 선수 정말 엄청나다 하고 감탄하며, 나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들은 왜 평범한 사람들로 남아버렸습니까? 우리들은 그 정도 연습을 못 하는 거예요. 그렇게 부지런하게 할 수가 없는 것이죠.

설교를 하면서 제 예를 들은 것은 참 쑥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또 마치 제가 무엇인가 된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려질 것 같아서 부적절하기는 하지만, 저는 후배 목회자들을 향해서 목회자들에게 종종 저의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30대의 젊은 나이였을 때, 그때 제 아내가 저를 향해서 뭐라고 얘기했냐면, “당신의 설교는 은혜가 안 돼.” 당신의 설교는 은혜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개 아무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그렇게 은혜가 되고, 그렇게 내가 회개하게 되고, 정말 감동적인 설교를 듣게 되었다고 하면서, 저한테 그 설교를 들어보라는 겁니다. 제가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나빴겠습니까? 아. 신경질이 엄청난 거죠. 그런데 그 설교를 듣는데 한마디로 충격이었어요. 정말 은혜가 되고, 정말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되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제가 엄청난 은혜를 받았어요. 그러면서 제 마음 가운데 드는 생각이 무엇이냐면,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왜 내 설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전해도 아무런 반응도 없고, “이렇게 정말 무능력한 설교자일 수밖에 없는가?”라고 하는 고민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때 어떻게 했냐면, 그 목사님의 설교를 다 구했습니다. 당시에는 cd가 있는 것도 아니고, usb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시에는 카세트테이프로 설교를 녹음해서 나누어 주던 그 시대였습니다. 하나에 1불씩 파셨는데, 그것을 어떻게 구해가지고, 설교 테이프를 다 구해서 다 들었어요. 다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한 번만 듣는 것이 아니라, 열 번씩 듣고 스무 번씩 듣고 계속해서 들었어요. 계속해서 어떻게 하면, 똑같은 표현도 더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염려하면서, 걱정하면서, 내가 어떻게, 나는 왜 그렇게 안 될까 하면서, 계속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러고서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cd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지나니까 mp3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파일들을 다 모아 가지고, 제가 그 목사님에 대한 논문을 쓰라고 하면 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그 목사님의 설교를 한 편도 빠트리지 않고 다 들었을 뿐만 아니라, 매번 반복해서 차만 타면 무조건 그 설교를 들으면서, 그 설교를 또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왜 나는 이렇게 안 될까? 또 듣고 또 듣고 하면서 그것을 따라 해보려고 하고 노력하면서, 엄청나게 많이 mp3 파일로 제가 다 들었어요.

그리고 그 목사님만이 아니라 또 다른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 다른 목사님의 설교도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설교를 잘하시는지. 그분의 설교도 다 다운로드 받아가지고 다 모아서, 그분의 설교 전집을 다 모아놨어요. 그래 가지고 그 몇몇 목회자들의 설교를 다 모아놓고, 다 연구하면서 그래서 설교를 배우고, 그렇게 훈련하고 그랬더니, 요즘에는 조금 은혜받는다고 그래요 제 아내가.

그래서 그 이야기를 우리 후배 목사님들한테 해줬는데, 놀랍게도 우리 후배 목사님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저에게 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그때 모아놓았던 그 설교 mp3 파일 나한테 좀 주세요. 나도 좀 듣고 싶어요. 주세요.” 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요. 제가 부족해서 그렇겠죠.

아직도 갈 길이 멀고, 아직도 배울 게 너무나도 많은데, 그러나 우리가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조금 더 나아지는 것이고,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지 아니하면 발전이 없고, 아무런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부지런하게 정말 나아지기 위한 노력들을 하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지런함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바쁘게 움직이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쁘게 움직인다고 해서,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정말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지, 그래서 더 개선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그래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식당을 한다면, 왜 저 식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데, 왜 우리 식당에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가? 그냥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가서 맛을 보고, 광고도 어떻게 했는가? 어떻게 식당을 성공했는가? 매번 연구하면서, 또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또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냥 늘 하던 대로, 그 자신의 모습을 반복시키기만 한다고 하면 아무런 결과를 얻을 수가 없는 것이죠.

학생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아니 우리 가정만 해도 마찬가지예요.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고, 또 부모와 와 자녀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왜 우리 가정은 이렇게 불행할까? 다른 가정은 행복한데, 왜 우리 가정은 이렇게 불행할까 생각이 든다면, 그냥 예전에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연구해봐야죠. 왜 우리 가정은 이렇게 불행한지, 왜 남편과 아내가 서로 불화 가운데 있으며, 자녀와 부모 사이에 담이 막혀 버리고, 대화가 되지 않는지, 왜 우리의 가정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지,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서, 그래서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죠. 가만히 있으면 해결되는 게 아니고, 성경의 법칙이고, 하나님의 법칙은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개선하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할 때 개선이 되는 것이지, 그냥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하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될 대로 돼라” 하면서 가만히 있다고 한다면, 아무런 발전도 변화도 성공도 아무런 결과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우리가 모든 분야에, 내가 음식을 못한다고 한다면, 왜 저 사람이 만든 음식은 맛있는데, 왜 내가 만든 음식은 맛이 없을까? 고민해봐야죠. 물어봐야죠. 왜 이렇게 내 음식은 맛이 없는가 하고 배워야죠. 화장을 하는데 나는 왜 화장을 해도 태가 잘 안 나고, 저 사람은 화장을 조금만 해도 저렇게 예쁜가? 그게 부러우면 물어보고 배워야죠. 그건 잘 배우셨어요. 다 예뻐요.

지금까지 저는 끊임없이 배워왔습니다. 컴퓨터가 만들어질 때부터 인터넷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에 등장할 때부터, 저는 제 전문 분야가 아니지만, 홈페이지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배웠어요. 목회 사역에 있어서 홈페이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홈페이지에 대해서 배웠어요. 설교할 때 그림도 보여주고 싶은데, 멋진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 포토샵도 배웠어요. 누가 가르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이라도 어떻게 표현해볼까 배우고 또 배우고 배워서,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면, 말이 어눌하니까, 그림이라도 보여주면 좀 제대로 좀 전달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배웠고, 동영상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배우고, 또 여러 가지 zoom이나 이런 것을 배우고, 지금도 계속해서 배우고 있어요. 헬라어와 히브리어와 아람어와, 가지고 있던 실력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잊을 수밖에 없고, 그리고 사용하지 않으면 까먹을 수밖에 없기에, 또 배우고 또 배우고 또 연구하고, 그래서 정말 이 모든 것들을 다 늘려나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의 나이가 이제 70이 되면 더 이상 배울 게 없나요? 70의 나이도 배울 게 있고, 80의 나이에도 배울 게 있고, 똑같은 노인인데 저 사람은 그러면 어떻게 건강할까? 나는 왜 건강하지 못할까? 저 사람은 좋은, 참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왜 이럴까? 배우고 또 배우고 또 배워서 열심히 노력해서, 그래서 최선의 삶을 살아가야, 그래야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지, 그저 요행만 바라며 어떠한 잘못된 방법으로 짧은 방법으로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고 사탄의 방법일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직도 배울 게 많아요.

2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다시 말하자면 마음이죠. “즐겁게 하느니라.” 근심이 있으면 번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근심이 있다고 한다면, 기운이 가라앉게 될 것이고, 우울하게 될 것이고, 침체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러 가지 근심을 하게 되면, 그 근심은 여러 가지 문제를 볼 때 생기는 것일 텐데요. 그러한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보면서 생기는 근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욕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 움직입니까? 소망이 있을 때 움직이는 것이죠. 소망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인데, 소망이 사라져 버리면, 그 어떤 움직임도 가져갈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심에 빠져버리고, 그래서 우울감에 빠져버리고, 소망을 잃어버려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엘리아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에서 승리할 정도로, 최후의 일격을 가해서 이제는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싸움을 해서 져놓고도, 여전히 살기 등등하여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는 그런 이세벨 왕비를 보면서, 엘리야 선지자는 절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라고 생각될 때 절망해 버리는 것이죠.

시편 42편에서는 자신의 영혼을 낙망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노래한 것도 기록되어 있는데요. 우리 중에도 이런 모습들이 종종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내가 최선을 다한다고 다 했는데, 결과가 시원치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해 버리기 쉽습니다. 수험생들이 최선을 다해서 대학 입시를 위해서 시험을 치렀는데, 결과가 좋지 못할 때, 절망해 버리기도 하고, 재수를 하기도 하고 삼수를 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할 때, 절망해 버리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절망하고 있고 낙망하는 사람, 근심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특효약이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 좋은 특효약이 무엇입니까? 맛있는 보신탕을 먹는 걸까요? 맛있는 장어구이를 먹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에요. 그게 처방전이 아니라, 선한 말이 낙망에 빠져 있는 사람, 근심에 빠져 있는 사람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선한 말을 할 때 살릴 수 있다”라고 오늘 본문에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우리 인생들이 가지고 있는 이 말도 어쩌면 천지창조와 같은 그런 비슷한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살려내기도 하고, 그리고 사람들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말 한마디에 의해서 사람이 살아나기도 하고, 죽어나가기도 하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들이 우리들의 말로써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말하는 법입니다.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어떻게 선한 말을 할 것인가? 낙망에 빠져 있는 사람, 근심에 빠져 있는 사람, 그래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어떻게 우리는 선한 말을 하여 그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선한 말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용기를 갖게 만들 수 있겠는가?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가지게 하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칭찬하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해주는 선한 말로 그 가정은 회복될 수 있어요.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선한 말을 하게 되면 행복이 넘칠 수 있어요. 무너지는 가정도 선한 말이 들어가면, 살아나는 가정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조금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선한 말이 아니라 악한 말을 하고, 푸념하는 말을 하고, 저주에 찬 말을 하고, 실망하는 말을 하고, 비방하는 말을 하게 되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재능마저도 다 망가져 버리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어떤 말을 배워야 되는가? 근심에 쌓인 사람들은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그런 선한 말을 배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입술이 복된 성도님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내가 하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내 말 하나로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그런 귀한 말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우리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냈어요. 초등학교에 보냈더니, 1학년에 가서 그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우리 큰 아이가 1학년짜리 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가정통신문 하나를 우리들에게 내미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정통신문에 무엇이 써 있는가 하고 보았더니, 그 가정통신문의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당신의 자녀를 격려하는 100가지 방법” 무슨 말로 우리 자녀, “당신의 자녀들을 격려해 줄 수 있는가”라고 하는 100가지 방법을 적은 종이를 각 가정마다 다 준 겁니다. 거기 보니까,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들이에요. good! wonderful! great! awesome! marvellous! super! 그 칭찬하는 말들 잘했다고 하는 말들, good Job! 칭찬하는 말들을 백 가지를 적어서 줬는데요. 제가 그 종이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감동이 됐는지 몰라요. 왜냐하면, 제가 어렸을 때는, 우리가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말은 이런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동네에서 아주머니들이 자신의 자녀를 부르면서, 밥 먹으라고 할 때 부르는 소리가 있었어요. “이 바보야. 이 멍청이야. 이 망할 놈아.” 왜 그렇게 부르시는지, 그때는 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렇게 집으로 가서, 놀다가 집으로 가서 혼나고, 맨날 혼나기만 하고, 공부를 그것밖에 못하냐. 이까짓 게 뭐냐? 네가 그러니까 썩을 놈이지. 그런 말만 들으면서 우리가 자라왔고, 또 우리 자녀들을 그렇게 가르쳐 왔는데, 100가지 칭찬의 말이 내 앞에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아… 내 자녀를 향해서 함부로 말을 했던 그런 잘못들 생각하게 되면서, “아, 내가 엄청나게 잘못했구나.”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 100가지 칭찬의 말을 들을 때, 이 아이들의 모습에서 생기가 돋아나는 겁니다. 낙심했던 아이가 미소를 찾아가게 되는 것이고, 절망에 빠졌던 아이가 다시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고, 남편이 직장에서 힘들고 고통스럽게 그렇게 당하고 돌아왔을 때, 아내로부터 따뜻한 사랑의 말을 듣는다고 한다면, 아내가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을 때, 남편으로부터 따뜻한 사랑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한다면, 우리 부모님들이 이제 기억력도 희미해져 가고, 육신의 기능도 하나씩 하나씩 망가져가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을 때, 우리 자녀들이 부모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런 말을 해줄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선한 말이 해결책이에요. 우리 아이들을 향한 해결책이고, 실망하고 절망하고 있는 자들을 살리는 그런 어마어마한 말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말을 훈련하고 배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또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박수 쳐줘야 돼요. 내가 불편하고, 내가 여러 가지 피해를 당한 것이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 있어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격려해주고 위로해 줄 수 있다면, 식당에서 나에게 음식을 서빙해주는 그 사람이 실수를 해서, 나에게 잘못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고, 얼마나 참 울고 싶은 그 어린 종업원을 향해서 “괜찮아요.” 이야기해주고, “아, 힘들죠?” 이야기해주고, 사랑의 말을 해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맛이 없다고, 욕해버리고 짜증 내버리고, 갑질을 해대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원수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심판해 버리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시되,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시는 그 어마어마한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마다, 그들의 근심 가운데 있는 자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선한 말로 치유해 줄 수 있는 믿음의 역사가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선 우리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불러주셨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를 보내주시는 것이죠. 그때 지금까지 우리는 마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못 본 척하고 지나가버렸어요.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고 계시면서,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그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자들을 향해서,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단순히 강도 만난 자만 강도 만난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다가, 실패한 사람들, 이 세상의 길을 가다가 좌절한 사람들, 용기를 잃어버린 사람들,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이 놓여 있는데,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바로 그 사람 옆에 두신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나의 모든 것을 가지고 그 강도 만난 자를 치유해주기 위해서 바로 그 옆자리에 붙여주신 겁니다.

내가 나의 남편의 옆자리에 있게 된 것은, 우리 남편이 강도 만난 자와 같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내 아내 옆에 있게 된 이유는, 내 아내가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도와주라고 옆에 있는 거예요. 우리 자녀 옆에 우리가 있는 것은, 우리 자녀들이 강도 만난 자와 같기 때문이에요. 우리 부모에게 우리가 자식이 되는 이유는 우리 부모가 강도 만난 자와 같기 때문에, 그 옆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에게 돈이 없어도 괜찮아요.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아요. 말은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이 말이고, 선한 말이 이 세상 최고의 치료약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무조건 선한 말을 무차별적으로 말해버리라고 하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종종 어리석어서 옳은 말을 하기만 하면 다 되는 줄로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옳은 말을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고, 말이라고 하는 것은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말하는 거예요. 마음을 알아주어야 되고, 마음을 읽어줘야 대화가 되는 것이고, 위로가 전달이 되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을 알아주지 않은 채, 마음이 열리지 않은 채 해주는 말은 한낱 공해요. 쓰레기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소중한 말을 쓰레기처럼 던져버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이 아직 열리지 않았는데, 마음의 문을 아직 열지도 않은 그 사람에게, 옳은 말을 던져버리는 것은 쓰레기를 던지는 것과 같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서 27장 14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되리라.” 축복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고, 마음을 열어서, 마음으로 전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안타까운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늘 거꾸로 하는 것이죠. 선한 말을 하기보다는 악한 말을 하기 쉽고, 그리고 상처를 싸매기보다는 더 상처를 후벼 파서 괴롭게 만드는 일들을 하고 있어서, 더 힘들고 더 어려운 단계로 넘어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무너지고, 교회 공동체는 흩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순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우리들의 그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수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해야 할 것이고, 주님 앞에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될 뿐만 아니라, 그리고 내가 실수했던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해줘야 돼요. 우리 아이들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아빠가 죄인이라서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지 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 되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바로 우리 모두는 그 누구도 완벽한 인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넘어지고 늘 쓰러지는 인생이기에 또 실수하고 또 실수하기 때문인데요. 오늘도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리는 가운데, “주님, 저희들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풍성한 우리의 삶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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