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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하나님의 영 (롬 8:9-11)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둘로 구분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떻게 구분할 수가 있죠? 남자와 여자로 구분할 수가 있겠고, 어른과 아이로 구분할 수 있겠고, 여러 가지 구분하는 방법들이 있을 텐데요. 영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과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림을 그려봤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 하나님을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기가 어려워서 그냥 하트로 표현했는데요.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영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이렇게 두 종류로 나눌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적인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고 한다면, 그 마음은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비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것이 들어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없고, 사탄이 우리들을 지배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오늘 읽은 로마서 8장 11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면,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소식입니다. 우리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날마다 날마다 하나씩 하나씩 그 기능을 잃어갈 수밖에 없어요. 옛날 젊었을 때에는 무엇을 해도 피곤치 않았을 텐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기능이 하나씩 하나씩 망가져 버리고 있고, 결국에는 우리의 육신은 죽어버릴 것이고, 썩어져 버리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죽음을 향해서, 썩음을 향해서 갈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육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의 육신은 썩어져 가는 것일까요? 왜 우리의 육신은 망가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며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지만, 그러나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고, 결국 죽음을 향해서 달려갈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의 육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누가 먼저 그렇게 되느냐? 나중에 그렇게 되느냐?”의 차이일 뿐, 그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우리의 육신은 자꾸만 후패해져 갈 수밖에 없고, 약해져 갈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썩어지고 무덤에 묻힐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향해서 로마서 8장 11절 말씀에서는 아주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고 있는 겁니다.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그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면, 그러면 그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이 우리들의 몸을 살리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던 것처럼, 그 옛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그리고 장사 지낸 바 되었으나, 다시 3일 만에 부활하게 만드신 것처럼, 우리들도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전제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는 전제입니다. 우리의 몸을 살리시는데, 어떻게 살리실 것인가? 예수님을 살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살리실 거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이 살아나신 그것이 진실이어야만,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어야만, 우리의 몸도 다시 살아날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첫 번째 전제가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이 사실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진짜로 일어난 일이어야, 우리도 다시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믿을 수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이 역사적인 진리입니까?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입니까? 어떤 것이죠? 예? 진리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어떻게 아셔요? 어떻게 아십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그때의 그 사건으로부터 이천 년이나 후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간적 간격이 있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예수님께서 직접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못 봤어요. 보지도 못했는데, 우리가 직접 경험한 것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만한 그런 이유가 우리에게 있을까요?

우리가 직접 목격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그 부활에 대해서 증언했던 “그 증언이 과연 믿을 만한가?”라고 하는 것을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증언을 했다고 한다면, “그 증언이 참된 증언인가? 믿을 만한 증언인가? 믿을 수 없는 신빙성이 결여된 증언인가?”를 따져봐야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수많은 증언들이 있는데, 거짓 증언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대놓고 거짓말하는, 대놓고 거짓 증언하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과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가 하는 이 증언이 우리가 믿을 만한 증언인가? 신빙성이 결여된 증언가에 대해서 한번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증거들을 살펴보게 될 때, 이러한 증거가 믿을 만한 것인가요? 믿지 못할 증언인가요? 믿을 만한 증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 번째는 그렇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언했던 바울 사도가 원래는 교회를 핍박했던 핍박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반대하던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철저하게 핍박했던 반대자의 입에서 나온 증언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는 것이죠. 열렬한 지지자의 증언은 믿기가 어려운 것이죠.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경기를 하는데, 우리 편과 상대편이 경기를 하는데, 애매한 판정이 있습니다. 과연 이게 인(in)인지 아웃(out)인지 참 판단하기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우리 편한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요? 그거 인(in)이라고 대답합니다. 우리 편에 유리한 대로 증언하는 겁니다. “내가 두 눈으로 확실하게 봤다. 저거 인(in)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하지만 상대편에게 물어보면 아웃(out)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기편에 유리한 대로 봤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우리 편이냐 우리 편이 아니냐에 따라, 열렬한 지지자냐 반대파냐에 따라, 그 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게 사람의 눈인 것이죠.

따라서 만일 열렬한 신앙인이었고, 열렬한 지지자였다고 한다면, 아무리 열렬하게 증언한다고 할지라도, 그 증언에 대해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객관적인 증언이 아니기 때문이고, 내가 한 번 우리 편이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 편에 유리한 방식으로 믿으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울 사도의 증언을 믿을 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바울 사도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의 일원 가운데서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박해하고 핍박하던 반대자였기 때문에, 그의 증언을 믿을 만하게 되는 것이죠. 무조건 좋게 봐주려고 하는 열렬한 지지자가 아니었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또 의심하면서, 철저하게 교회를 박해했던 그가 어느 날 완전히 변화하여,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언하고 다녔기 때문에 이 바울 사도의 증언은 믿을 만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 바울 사도의 증언을 믿을 만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렇게 바울 사도가 태도를 바꿈으로 인해서, 바울 사도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갑자기 태도를 바꿈으로 말미암아 물질적인 대단한 이득을 보았다든가,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의 말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자신의 태도를 바꾼 이유가 무엇인가? “돈 때문에 바꿨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바꾸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볼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 사도가 이렇게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버림으로 말미암아, 바울 사도가 얻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기득권은 다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되었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고난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서도, 자신의 증언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철저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켰고, 그리고 그 증언이 어떠한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 사도의 증언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 사도의 증언이 믿을 만한 것이라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렇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을 증언한 자가 바울 사도만이 아니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을 증언하고 다닌 것이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런 증언을 하고 다녔는데, 이들도 역시 한때는 예수님께서 죽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포기했던 사람들이고, 절망했던 사람들이고, 실망해버렸던 사람이고, 심지어 도마와 같은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내가 내 눈으로 보지 아니하면 내가 만지지 아니하면 내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던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동네에서부터 추방을 당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그 증언을 포기하지 않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불어났다고 하는 그 사실을 보면서, 이러한 증언이 참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죽으면, 아주 너무나도 절망적인 일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 불가능한 일이 그걸 믿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확실하게 자신들의 눈앞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을 증언할 수가 있었던 것이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몸을 살리신다고 하는 또 하나의 전제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고 하는 전제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 주님을 살리셨던 그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우리도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릴 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계셔야 된다고 하는 건데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고,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요.

어떻게 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을 것인가요? 어떻게 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냐면,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만들려고 한다면,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면서 “성령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을 내게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어느 순간에 그 기도에 따라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그런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인데, 우리가 열렬하게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실 거라고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고, 기도하면 또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 충만해지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 있는데요. 부흥회에 참석해서 통성으로 기도한다든지, 아니면 40일 동안 금식을 하면서 기도한다든지,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게 되면, 어느 순간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성령 충만하게 해 주게 된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는 것이고, 그러면 어떻게 우리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갑자기 방언을 하게 된다든지, 아니면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든지 하게 되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많이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야기는 다른 방법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주고 있는가? 사도행전 2장 38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임재할 수 있겠는가? 그 방법을 베드로 사도는 이야기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임재한다고 하는 것인데요. 회개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회개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한번 그림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회개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회개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런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이죠. 하지만 회개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이런 나쁜 짓을 했구나”라고 뉘우치는 것만이, 그것이 회개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 하던 삶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죄를 지으면서 살았다고 한다면, 죄를 버리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달리하는 것이고, 지금까지는 내가 사탄의 말에 따라 추종하며 살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추종하며 사는 우리들의 마음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 회개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의 선물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회개해야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의 마음의 주인을 지금까지는 사탄을 주인으로 섬기고, 돈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리고 명예와 권력을 우리들의 마음의 주인으로 섬기면서, 그것을 추종하면서 살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 주인을 버려버리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삶의 길을 걸어가는 게, 그게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라고,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가 누구의 뜻에 따라 사는가?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말해 주시는 대로 사는가? 아니면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대로 사탄의 말에 이끌려서 사는가? 누구의 말을 들으면서 사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달라지게 되는 것인데, 성령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대로, 악이 이끄는 대로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간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성령님께서 계시는 것이라고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3절 14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다” 이 말이에요.

우리 성령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죠. 우리 주님께서는 전능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박살내 버리고, 강압적으로 들어오실 수 있는 능력이 계시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문밖에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고 계시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해주고 계시는 것이죠. “얘야,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렇게 악을 행하면 안 된다. 사랑하면서 살아야지. 용서하면서 살아야지.”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고 계시는 것이죠. 그 음성을 우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애써 모른 척하고,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지 않는 것처럼, 안 들은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정말 귀를 기울여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고 한다면, 그 음성이 크게 들리는 거예요. 주님의 음성이 크게 들리고, 그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 순종으로 결단하는 의지가, 우리가 결단하게 될 때, 그때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와, 좌정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주장해 주시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님의 영이 성령이 우리들을 지배하고, 우리들의 생각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이 주님의 그 뜻에 순종하는 게,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다고 한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은 어떤 현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일까요? 방언을 말하는 걸로 나타날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그것은 일부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사이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나타나는, 성령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우리 마음 가운데 오셨을 때 드러나게 되는 현상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현상이 있습니까? 로마서 8장 13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다시 말하자면, 주의 성령이 우리의 우리 안에 있다고 한다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죄를 짓지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가 완벽해진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완벽해지는 것은 저 천국에 가서야 비로소 완벽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전히 넘어지고, 여전히 실수하고, 여전히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주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고 한다면, 죄를 즐기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거룩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가? 로마서 8장 15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부를 수 있는가?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아빠라고 부른다고 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그렇게 우리가 호칭을 그렇게 부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아버지 됨을 누린다고 하는 의미죠. 아버지를 의지하고,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와 동행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진짜 나의 아버지인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뢰하며 살아가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무서워 벌벌 떠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 두려움 가운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담대하게 살게 되는 그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계시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들의 몸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읽은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계십니까? 아멘.

하나님의 영이 계시면, 우리의 몸을 다시 살리실 거다. 우리의 몸은 썩어질 수밖에 없고, 망가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계시면, 우리를 다시 살리실 거라고 하는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는 우리의 몸이 자꾸만 망가져가고, 우리의 몸이 자꾸만 후패해져 가고, 심지어 사망하게 되고, 썩어져 가고 무덤에 묻힌다 할지라도 우리는 절망할 게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늘 망가져요. 옛날에는 건장했는데, 이제는 허리도 아프고, 이제는 다리도 아프고, 이제는 예전처럼 움직일 수 없는 상황들이 자꾸만 생겨가요. 아직 안 생긴 사람은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그렇게 돼요. 우리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건장한 게 아니에요. 결국에는 못 쓰게 되고, 결국에는 망가지고, 결국에는 문들어지고, 결국에는 죽어서 썩어지고 묻힐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의 육신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에 무슨 얘기를 하고 있냐면,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예수님을 살리신 그분께서 우리도 다시 살릴 것이다 말씀하고 계신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바라보면 절망적일 수 있어요. 우리의 몸을 바라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할 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다시 일으키시는 부활의 소망이 있고, 우리가 부활의 몸을 가질 거라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소망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어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수고가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절망할 것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의 삶은 모순 투성이고, 무엇인가 하나 제대로 된 것 없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의를 위하여 헌신했던 사람들은 억울한 일들을 당하고, 힘든 일들을 당하고, 악을 행하며 온갖 파렴치한 일들을 행한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 같은 일들이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왔는데,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기도 하고, 주를 위하여 헌신했다고 하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는 것 같고, 선하게 살라고 말씀하셔서 선하게 살기도 하고, 긍휼을 베풀기도 하고, 선으로 악을 갚았는데 아무런 보상도 아무런 인정함도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절망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4장 12절에서부터 14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내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헛수고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결국 그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갚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이 땅에서 받을 보상에 갈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저 하늘의 상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저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고 이 땅에서는 아무런 보상도 없고, 이 땅에서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이 땅에서는 무시를 당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부활의 때에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다”라고 하는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그 사랑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베풀어주신 사랑입니다. 우리로부터 받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니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 자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걸어간 하나님의 원수가 된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어요. 수치를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며, 우리를 건져주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의 어린이들의 야구 경기가 있었는데요. 초등학교 학생들, 중학교 학생들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 미국의 리틀 야구 월드시리즈 지역 예선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클라호마 팀과 텍사스 이스트 팀이 서로 맞붙는 자리였는데요. 텍사스 이스트팀의 쉘턴이라고 하는 투수가 공을 던지는 가운데, 자비스라고 하는 오클라호마 타자가 공을 치기 위해서 타석에 섰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투수가 던진 공이 자비스 타자의 헬멧에 정통으로 맞아버렸습니다. 그러자 이 자비스 타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거 정말 아프거든요. 저도 한번 맞아봤는데, 정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그 자비스 타자가 다시 일어나서 1루로 걸어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투수는 그 마운드에서 다음 공을 던져야 하는데, 어린 아이라 그게 너무 무서웠던 거예요. 내가 던진 공이 상대 타자의 머리에 맞은 것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어린아이니까 경험도 별로 없고 너무나도 무서워서, 공을 던지지 못하고 마운드 위에서 벌벌 떨며 흐느끼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자비스라고 하는 이 어린 선수가 1루에 있다가 자신의 헬멧을 잠시 내려놓고 투수를 향해서 걸어갔어요. 그리고 그 투수를 껴안아줬어요. “괜찮아. 괜찮아. 넌 잘하고 있어.”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너무나도 감동이 되어서 박수를 쳤다고 하는 그런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바로 그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안아주셨어요. 우리의 허물을 감싸주셨어요. 우리를 향해서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아니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요.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조그마한 보상이 없다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포기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께서 부활하는 그날에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인정해 주시고 보호해 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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