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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줄 알아야 (잠 12:15)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고, 누가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 하면, 솔로몬을 떠올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솔로몬이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주는 한 사건이 있었는데요. 어느 날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데리고 와서 재판을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 아이의 엄마라고, 자기가 진짜 엄마라고 서로 우기고 있는 그 두 여인들에게, 누가 진짜 엄마인지 판결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처럼 DNA 테스트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쉽게 판결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아기이기 때문에, 얼굴의 형태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런 난처한 상황 가운데, 놀랍게도 솔로몬은 모성애를 가진 여인을 찾아내는 방법을 보여주었고, 따라서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누가 진짜 엄마인지를 찾아내서 판결을 해주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무지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그런 어려운 난제를 쉽게 지혜롭게 풀어낸 그 솔로몬의 지혜를 모든 사람들이 감탄해 맞이하는 것이고,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 그러면, 우리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솔로몬처럼 그런 탁월한 지혜, 솔로몬처럼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막 솟아오르는 사람, 뭔가 좀 아주 탁월한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일 거라고 우리는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는 것을 다루고 있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미련한 사람을 어떻게 설명하냐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12장 15절 다시 한번 보죠.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어떻게 여긴다고요? “바른 줄로 여긴다.” 미련한 자는 자기가 하는 일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행동하는 것이 잘못된 게 없다고 생각한다. 바르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원문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원문에는 어떻게 되어 있냐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 것이니까요. “데렉 에일 야샬 베에나우”라고 하는 그런 히브리어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냐면, “어리석은 자의 길은 자기 눈에 똑바르게 보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길은, 어리석은 자의 길은 자기가 생각할 때, 자기 눈에 똑바로 보인다고 하는 그런 표현인데요. 그것을 의역해서, 우리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뭐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긴다고 그렇게 번역을 해놓은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기발하고, 뭔가 탁월한 아이디어 대단한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하는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켜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자기가 하는 일, 자기가 가고 있는 길, 자기가 하는 그 방법 그것이 옳다. 잘못된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12장 15절 말씀 뒤에를 살펴보죠. “지혜로운 자는” 어떻게 한다고요? “권고를 듣느니라.” 권고를 듣느니라. 권고를 듣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얘기입니까?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이게 옳을 거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잘못된 방법일 수 있겠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인 것이죠.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마음이 닫혀 버려서,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실수할 수도 있고, 내가 잘못할 수도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열어두고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권고를 잘 듣는 편입니까? 남의 말을 잘 안 들으시는 편입니까? 대체로 여성분들이 지혜로워서 잘 들으시잖아요? 남성분들은 대체로 안 들으시고.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권고를 조언을 듣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이상, 내 길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그 이상, 다른 사람들의 말이 우리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인데요. 우리가 권고를 들어야 되는 이유,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생각했던 그 생각, 우리가 판단했던 그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조언 다른 사람의 권고를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어떤 입장이냐면, 마치 커다란 코끼리를 만지면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가 궁금해하는 여섯 명의 소경과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6명의 소경이 코끼리를 붙들고, 이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하나씩 만져보는 겁니다. 눈으로 보지는 못한 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어떤 소경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졌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코끼리는 무엇과 같다? 나무 둥치와 같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어떤 소경은 코끼리에 코를 만지는 겁니다. 코를 만지면서 하는 말이 코끼리는 무엇과 같다? “마치 뱀과 같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소경은 코끼리의 귀를 만지면서 하는 말이, “코끼리는 마치 넓은 이파리와 같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어떤 소경은 코끼리에 몸을 만지면서 하는 이야기가, 코끼리는 마치 커다란 바위와 같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소경이 만지는 그 코끼리는 모두 코끼리의 일부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져 놓고, 그 소경들은 확신에 차 있는 거죠. 내가 안 만진 것도 아니고, 경험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내가 경험했고, 내가 만져봤고, 내가 이렇게 느꼈기 때문에 코끼리는 확실히 나무둥치다. 코끼리는 확실히 뱀과 같다. 코끼리는 이파리와 같다고 말하고, 자기가 경험한 대로 이야기를 하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대해서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무슨 소리냐고? 내가 만졌을 때는 분명히 나무 둥치와 같았는데, 코끼리가 뱀같이 생겼다니? 그런 어리석은 소리가 어디 있느냐? 코끼리가 이파리와 같다니? 그런 어리석은 소리가 어디 있느냐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겁니다. 서로 6명의 코끼리들이 서로 싸우면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이 진리의 일부분을 보았을 거라고 하는 것을 전혀 예상치 못한 채, 내가 이해한 것만이 진리의 전부인 거라고 그렇게 옹고집을 버리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가 클까요? 우리의 머리가 클까요? 진리는 우리의 머리통보다 훨씬 커요. 우리가 그 진리를 우리의 머리로 다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의 머리로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수가 없고, 이 세상의 원리를 다 깨달을 수 없고, 우리는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겨우 엄청난 크기의 진리 가운데 일부분만을 보면서, 이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했고 직접 내가 연구했기에,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코끼리를 내가 다 만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코끼리의 일부분만을 만졌을 뿐이고, 내가 만지지 아니한 다른 그 부분을 다른 사람들이 만지고 있었고, 그것을 보았다고 하는 그 점을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똑같은 사물을 놓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원통의 위에서 본 사람은 이것은 동그라미라고 강하게 주장하는데, 이쪽에서 옆에서 바라본 사람은 원통은 직사각형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동그라미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주장과 직사각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주장이 도무지 양립할 수 없고, 동그라미와 직사각형이 어떻게 일치할 부분이 있고, 어떻게 마음을 같이 할 부분이 어디 있어요? 동그라미면 동그라미고, 직사각형이면 직사각형이지, 그 둘이 합쳐질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데, 알고 보면 똑같은 원통을 어떤 사람은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옆에서 바라보면서, 자기가 바라본 그 입장에서 그것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인가? 아하! 내가 진리를 전부 파악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일부분만을 보았을 뿐이고, 그래서 내가 보지 못한 다른 면의 진리를, 나와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저 사람이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어떠한 일을 함에 있어서, 내가 100% 확실하다고 생각이 든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내 눈에 옳다고 생각이 되는 그 순간에라도, 내가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그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거예요.

잠언서 15장 22절의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많은 사람이 한 계획을 놓고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이 계획에 대해서 이렇게 하면 어떻겠는가? 저렇게 하면 어떻겠는가? 서로 이야기를 하게 될 때, 그 계획이 성공하게 되는 것이지만, 어떤 계획을 세우면서, 그 계획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밀어붙이게 된다고 한다면, 그 계획은 어떻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요? 실패할 가능성이 많다고 잠언서 15장 22절 가운데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생각했던 것이 잘못될 수도 있겠다고 하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생각한 것이 옳다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전혀 들어보지도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솔로몬처럼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람들은 때때로 기발한 생각을 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다 엇비슷하고 비슷비슷합니다. 아, 솔로몬처럼 탁월한 사람일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지혜롭게 행할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한 대로, 그냥 혼자 생각하고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같이 생각하고 대화하고, 같이 일을 의논해서 만들어 가는 것이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원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이 대부분 의견을 구하지 않아요. 조언을 구하지 않아요. 제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에도, 저 사람은 내 후배인데, 저 후배가 목회의 길을 가면서,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있으면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나한테 와서 한번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묻지 않고 그냥 혼자 결정하고, 내가 볼 때는 이거 참 위험한 길인데, 저렇게 가다가는 큰일 날 수 있겠는데,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저렇게 가면 안 되는데”라고 하는 그런 상황이 있는데, 전혀 묻지 않고, 그냥 자기 길로 가버리는 거예요.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냥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그냥 밀어붙이다가 망하는 겁니다. 내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내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 내가 성경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한다면, 와서 물어봐야죠. 목사님 성경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여기를 다니고 싶은데, 다녀도 괜찮습니까?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어봐야죠. 물어봐야지. 안 물어보고, 혼자 자기 생각으로 이렇게 하면 좋겠다. 저렇게 하면 좋겠다. 생각하고 그냥 밀어붙이면서,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그런 루비콘강을 건너가 버린 그런 결정을 해버리고 난 다음에,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없는 길로 가버리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한 가정으로 만들어 주시고, 부부로 만들어주신 이유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것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데, 어쩜 그렇게 다른지 몰라요. 똑같은 것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내가 좋다고 한다면, 아내가 싫다고 얘기하고, 아내가 좋다고 하면 남편이 싫다고 얘기하고, 모든 게 안 맞아요. 그런데 안 맞은 이게 그게 정상이에요. 안 맞아야 정상이고, 안 맞아야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을 이 사람은 다른 것을 보고 있구나. 남편은 다른 것을 보고 있구나. 아내는 다른 것을 보고 있구나. 어른의 시각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시각도 보고, 우리들의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어른들끼리 결정해 버리고 끝내버릴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이들에게도 물어보고, 부모님들에게도 물어보고, 친구들에게도 물어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과연 내가 생각지 못한 그런 허점은 없는지, 내가 예상치 못한 어떤 어려움은 없는 것인지, 경험이 많은 사람들 경험이 없더라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대화하고, 그러면서 조언을 구하면서, 우리가 실수하지 않는 길로 가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내 자신을 드러냈다가는 창피당할까 봐, 내 자신을 드러내면 무시당할까 봐, 내 자신을 드러내면 소문이 나서, 혹은 내가 그래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까 봐, 혼자만 고민하고, 아무런 조언도 구하지 않은 채, 그냥 내가 판단해 버리고, 잘못된 길로 가요.

내가 생각할 때는 분명히 이것 아니면 이것이고, 이것 아니면 이것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이 두 가지 방법이 다 망해버렸기 때문에,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절망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이 보면, 그 두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다른 길이 있는 거예요. 내가 생각지 못한 더 완벽한 길이 더 그 옆에 있는 거예요. 정말 좋은 길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 나는 코끼리 다리만 만지고, 다리만 보면서 답이 없구나. 이것은 정말 어떤 방법을 해도 안 되는구나 생각하면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까지도 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은 솔로몬처럼 이렇게 지혜롭게 태어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물어보는 사람입니다.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지혜로운 사람은 누군가? 물어보는 사람입니다. 의견을 물어보고, 의견이 어떠한지 생각 들어보고, 다양하게 들어보는 자가 지혜로운 자요. 조언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생각해 봐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속담에 어떤 말이 있냐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어디로 간다고요? “산으로 간다”라고 하는 속담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견을 많이 듣다 보면, 원하는 목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데로 갈 가능성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많이 하냐 하면, 의견이 많은 것을 싫어하는 성향이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말하고, 말이 많으면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간다고 말하고, 그래서 말이 많기보다는 말이 없어야 되고, 그저 내가 결정했으면, 지방 방송 다 꺼버리고, 일사불란하게 함께 뜻을 모아서 “앞으로 가” “돌격 앞으로 가” 해야, 그래야 무엇인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옆에서 한마디 하고, 또 이야기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배가 산으로 가서,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일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의견이 많은 게 좋을까요? 의견이 없는 게 좋을까요? 많은 의견이 있어서 그래서 그 의견에 따라 토의하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정말 배가 산으로 가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을 맞이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대로 밀어붙여서, 이런 이야기, 저런 얘기 다 밀어붙여, 그냥 계속해서, 성취를 향해서 무조건 달려가는 것이 좋을까요? 도대체 어느 게 좋겠습니까?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라고 오늘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는데,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양한 예가 나와 있기도 합니다.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다윗의 부하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사울 왕을 죽이십시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으나, 다윗은 그 조언하는 부하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렇게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옳은 결정이었고 지혜로운 결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겠다고 이야기를 했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주님, 절대로 안 됩니다. 십자가 지면 안 된다고 간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베드로의 말을 물리치셨습니다. 그 조언을 듣지 않았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면서, 베드로의 조언을 물리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에 가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큰일 납니다.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 사도를 향해서 간청하고 조언을 해 주었지만, 바울 사도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예루살렘 여행 계획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가보 선지자의 말을 무시해버리고, 그냥 제쳐버리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욥이란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옆에 아내가 욥을 향해서 말하기를,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조언을 했지만, 욥은 그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조언을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조언을 들었습니까? 르호보암이라고 하는 왕이 조언을 들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솔로몬이 죽고 난 다음에 왕이 되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르호보암 왕에게 나와서 솔로몬 때는 우리가 너무나도 노역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그 노역을 좀 줄여달라고 간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르호보암은 누구의 조언을 들었는가? 같이 함께 자라난 소년들의 조언을 듣게 됐습니다. 그 소년들이 말하기를 이렇게 백성들이 요구할 때 물러서면 왕으로서의 체통이 아무것도 아니고, 이 백성을 다스릴 수도 없고, 그러니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붙여야 된다고 하는 소년들의 조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대답하기를, “내 손가락이 솔로몬의 손가락보다 더 두껍지 않으냐?” 하면서 내가 너희들을 더 심하게 노역시킬 거라고 대답을 했고, 결국 백성들의 마음은 그 르호보암에게서 떠나버려서, 결국 남북 이스라엘로 나뉘게 되는 그런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됐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아기를 낳을 수 없으니, 차라리 내 시종 하갈에게 들어가서 아기를 낳는 게 좋겠다고 하는 그 조언을 들었고, 그래서 결국 잘못된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 됩니까? 안 들어야 됩니까?

들어서 잘못된 경우도 있고, 안 들어서 잘못된 경우도 있어요. 예를 들자면 애굽 왕 바로 같은 경우는 요셉이 충고를 합니다. 왕이시여, 이제 7년 후에는 흉년이 될 겁니다. 그 흉년을 위해서 7년 동안 저축해 놓았다가, 그래서 흉년 때에 먹여 살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요셉의 조언을 들었을 때, 애굽 왕 바로는 그 요셉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어린 소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너 같은 여자 아이, 너 같은 여종이 무엇을 알겠느냐?” 하면서 무시한 것이에요. 그 여종이 나아만 장군에게 말하기를, 장군님이시여, 장군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에 관해서 선지자를 만나 뵈었더라고 한다면 장군님의 병이 나을 수도 있을 거라고 하는, 그 어린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스라엘의 선지자 앞에 나왔다가, 결국 자신의 병이 치유받는 놀라운 기적을 얻게 된 것이죠.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그 나아만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나아만 장군은 화가 나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강물보다 저 아람 나라의 강이 훨씬 더 좋지 않으냐? 내가 이런 대접받으려고 왔느냐? 하면서 돌아가려고 하는 그 순간에, 나아만 장군의 부하가 장군에게 간청을 하는 겁니다. 장군님이시여, 선지자가 이것보다 더 심한 일을 시켜도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 정도 시켰다고 그걸 못하겠습니까? 그냥 속는 셈 치고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저 물속에 요단강에 한번 들어가 보라고 하는 그 부하의 조언을 듣고, 화가 나서 돌이켜 가다가 그 조언을 듣고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요단강으로 가서 거기서 자신의 병을 낫게 된 것이죠.

반면 아합 왕은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합 왕에게 전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전쟁을 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통해서, 왕을 죽이실 것이니까, 그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합 왕은 그 미가야 선지자의 조언을 듣지 않았고, 전쟁터로 갔다가 결국 그 전쟁터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안 죽으려고 왕의 옷을 다른 사람 입혀버리고, 자기는 일반 병사의 옷으로 갈아입고 도망 다녔으나, 결국 죽은 것이죠.

성경에 보면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들어서 잘 된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들어서 망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지 않아서 잘 된 경우, 의로운 경우도 있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지 않아서 망하게 된 경우도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잠언서 12장 15절의 말씀에 “미련한 자는 자기의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라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들어야 됩니까? 안 들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언을 듣는가? 안 듣는가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조언이 옳은 조언인가? 옳지 않은 조언인가일 것입니다. 만일 그 조언이 옳은 조언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들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 조언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죄를 짓게 하는 잘못된 조언이라고 한다면, 듣지 않아야 하는 것이죠. 간단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좋은 조언이라고 하면, 안 들으면 망하는 거고요. 나쁜 조언이라고 한다면, 들으면 망하는 거죠. 그러니까 조언을 듣느냐, 안 듣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과연 그 조언이 좋은 조언인가? 나쁜 조언인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 12장 15절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니까 무조건 조언을 들으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좋은 조언을 듣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있어요. 우리가 수많은 조언을 듣게 될 텐데, 그 조언 중에서 좋은 조언도 있고, 나쁜 조언도 있을 텐데, 좋은 조언을 듣기 위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생각한 것이 잘못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는 전제. 내가 옳다고 하는 전제가 있으면, 좋은 조언이든, 나쁜 조언이든 아무 조언도 듣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인정이 되면, 좋은 조언이든 나쁜 조언이든 들어보게 될 겁니다. 그런데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진리를 이야기해 주어도 안 듣게 되는 것이죠.

우리 사람들은 너무나도 어리석고, 자기 자신이 옳은 줄로 착각을 해서, 그래서 눈이 멀어버리고, 귀가 막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가 있지만,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듣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게 바로 우상을 닮아버린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편 135편 15절에서부터 1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무엇과 같으리로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우상과 같으리로다.

우상을 섬기게 되면, 그 심각한 피해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우상을 닮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우상을 닮아가는데 어떻게 닮아가는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우상을 섬기고, 우리가 우상을 섬기는 것 같은 삶을 살게 되면, 결국은 우리가 교만해지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결국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에,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해 주어도 듣지 않게 되고, 그래서 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망할까요? 망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옳기 때문에 망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망하는 겁니다. 모든 망하는 사람들은 왜 망하는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망하는 겁니다. 정치인들도 보면 그렇고, 이 세상에 있는 그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인데요. 내가 옳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우리는 망해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옳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진리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고, 귀를 닫아버리고, 그 어떤 조언이 들어와도 내가 옳기 때문에 아무것도 듣지 않고 보지 않는 우상과 같은 상태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는 그 모든 조언을 100% 다 들을 것은 아닙니다. 조언은 좋은 조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조언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아니 나쁜 조언이 훨씬 더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조언들을 따라간다고 한다면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남의 말을 안 듣는 독불장군도 문제지만, 귀가 얇은 팔랑귀도 문제가 되는 것이고, 사실은 듣느냐 안 듣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이 진리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인 것이죠.

그런데 그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먼저 확보되어야 하는가? 내가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구나. 내가 잘못 보았을 수도 있구나. “내가 옳지 못한 판단을 했을 수도 있구나.”라고 하는 겸손한 마음이 전제가 되어야, 그다음에 진리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있는데 그 진리를 진리의 접근을 막아버리는 것은, 내가 옳다고 확신하고 내가 옳다고 착각할 때 우리는 진리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정치에 빠져있는 사람들이나, 그리고 맹목적인 신앙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오류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죄성으로 가득 차 있어서 겸손하지 못해요.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내가 제일 잘 나가.” 그러는 거예요. 그것은 죄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저희들의 죄성을 제거해 주셔서 교만한 마음을 녹여주시고, 내가 옳다고 하는 그런 영적인 교만함을 녹여주셔서, 내가 잘못될 수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해 주시고, 그리고 나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진리들을 들을 때, 눈을 감아버리거나 귀를 닫아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지 않게, 저희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옵소서. 주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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