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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 거듭나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받는 것

1.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 부흥회에서 부흥사는 성령을 받을 것을 외친다. 성령을 받지 못한 신자는 참된 구원을 받지 못한 쭉정이 신자일 뿐이고, 신앙생활에 기쁨도 없다. 오로지 이 문제의 해결은 성령을 받는 길밖에 없다. 만일 성령을 받는다면, 속에서부터 기쁨이 넘쳐흐를 것이고, 신앙생활이 즐거울 것이다. 성령을 받은 성도가 진짜 알곡 성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을 받을 것인가?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달라고 뜨겁게 기도해야 한다. 그냥 밋밋하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했던 그런 사즉생의 마음으로 기도에 매진해야 한다. 때로는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반복하기도 하고, 따따따따따따, 라라라라라라같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열정을 담은 소리를 내야 한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마 6:7)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열정적으로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방언이 터져 나온다. 혓바닥이 꼬이면서 소위 방언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될 때, 드디어 나도 방언을 받게 되었다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될 때,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있던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차게 된다. 방언을 받기 이전의 신앙생활과 이후의 신앙생활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에는 의심도 많았고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었고 겨우 끌려다니는 신앙생활이었지만, 방언을 체험하게 된 이후로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시간도 늘어나게 되고, 신앙에 대한 확신이 서면서 전도도 많이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즐겁기도 하고, 헌신적인 성도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성도도 있다. 모태신앙으로 믿음을 갖기 시작해서 수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런 신비한 경험은 해보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이 계신 것도 믿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기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방언을 받았다고 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기쁨과 감격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든다. 나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일까? 나는 그런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닌 것은 아닐까?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얻는다는 데, 과연 나는 구원을 받았을까? 도대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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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물과 영으로 거듭나야(3:5)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하시면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말씀하셨다. 도대체 물과 성령으로 거듭(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 표현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이해되곤 한다.1 우선, 세례 요한에 의한(또는 기독교의) 물세례와 예수님에 의한 성령 세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의미라고 한다면, 세례라는 의식이 구원에 아주 필수적인 의식이 되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은 지지될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엡 2:8-9). 세례를 받는 것은 그러한 믿음을 외적으로 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할 때, 물이 세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둘째, 물로 난다는 것은 자연적 출생을 가리키는 것을 가리키고, 성령에 의하여 난다는 것은 영적 출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 태어나는 것 외에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로 태어나는 것이 육적인 출생을 가리킨다면, 굳이 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시되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중생에 대한 이중적 묘사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두 가지 다른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이중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이 세 번째 이해가 옳다고 본다. 이 구절에는 헬라어 하기오(ἁγίῳ)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령으로”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영으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로 거듭(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죄를 씻는 것이 수반됨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었던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씻어야만 한다. 죄를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죄를 씻어 깨끗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 의식은 그러한 사실을 외적으로 드러내고 고백하는 의식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죄 씻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가능하다(마 26:28).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그렇게 죄를 씻어 그렇게 죄 씻음을 통해서 새롭게 되는 것이야말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죄 씻음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하였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몇 날이 못 되어, 즉 오순절 날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말씀하셨다(행 1:5). 여기서 말하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2항에서 언급한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이 구절들에는 모두 헬라어 하기오(ἁγίῳ)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로 세례를 받는 것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진정한 죄 씻음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우선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들의 죄를 씻어내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이다. 물로 몸을 씻듯이, 물로 세례를 시행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 죄를 씻어내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앞에 나아와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 증표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뒤에 오실 것인데, 그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레를 줄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어떤 영적인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행하고 있는 회개와 죄 씻음을 “제대로” “온전하게” 시행하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회개와 죄의 씻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통해서 진정한 회개와 죄 씻음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마치 구약 시대에 속죄제가 회개와 죄의 용서를 상징하였지만, 짐승의 피가 죄를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진정으로 우리의 죄를 없애는 것과 비슷한 관계이다. 불로 세례를 준다는 것도 상징적인 의미로서, 마치 불이 모든 것을 태워서 소멸하듯이, 죄를 태워버려 없애버린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둘째, 사도행전 1:5에서도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표현은 선지자적 사명으로 세움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 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강림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베드로가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행했던 오순절 설교에서 인용한 것처럼,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는 사건이었다. 즉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한 바 있다(욜 3:1-2). 이러한 예언은 이사야와 에스겔에서도 등장한다(사 32:15; 44:3; 겔 36:26-27; 39:29).

물론 구약 시대이든 신약 시대이든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천지창조 때 함께 하신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의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서게 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런 점에서 성령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역사하신 것이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은 없다. 그런데 특별하게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사람을 선지자적 사명으로 부르신다는 의미이다.

구약 시대에는 오로지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성령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가 있었다. 그렇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임재하신 것은 그들을 선지자로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마지막 때가 되면 특별하게 부름을 받은 소수의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예언은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취되었다. 그렇게 성령의 특별하신 임재를 경험하게 되자, 그들은 각종 외국어로 예루살렘에 순례를 와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일”(magnalia dei)을 전하는 것(행 4:11)은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에게나 주어졌던 사명이었다. 선지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들을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비밀을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해야 했다. 그것은 구약 시대에 아주 특별하게 선택된 자만이 할 수 있었던 그 선지자적 사명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선포하게 된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구약 시대에 기름을 부어 선지자적 직분을 얻는 것을 연상시킨다(왕상 19:16). 그런데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있는 사람들이 새 시대를 위한 선지자로 세움을 입게 되었다. 그것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음으로 제사장적 직분으로 임직되는 데 필요한(민 8:6-7) 율법적 절차를 거쳐 모든 율법의 요구 즉 의(義)를 이루신 것과 비슷하다.2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새 시대를 위한 선지자적 사명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지자적 사명을 받기 위하여 세례를 받을 필요(또는 기름 부음을 받을 필요)가 있었는데, 단순히 물이나 기름으로써가 아닌 성령의 임재로서 세례를 받아 선지자로 세워졌다.

4. 십자가 사건의 완성이자 결과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 즉 모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새 시대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게 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사건의 완성이자 결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 이전에는 오로지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고,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도 없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은혜를 받을 수도 없었다.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제사장을 통해서만 나아가야 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의의 화목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장벽을 허무셨다(엡 2:14-18).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을 허무셔서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막힘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제는 성령께서 누구에게나 오신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벧전 2:9).

5. 결론적으로

영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요 3:5)은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억지로 중언부언해가며 방언을 받기 위해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시도는 결코 건전한 것일 수 없다. 한때 성령이 임한 것 같이 보였던, 즉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에언을 했던 것처럼 보였던 사울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길에서 떠났던 것처럼, 우리가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구원의 증표일 수는 없다. 영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과 비슷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도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여 죄를 씻는 것을 의미하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선지자적 사명으로 세움을 입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사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이며, 거룩한 나라이자 소유된 백성이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선지자적 사명으로 부름을 받은 존재들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어떤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이 없다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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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Colin G. Kruse, John. 배용덕 역.『요한복음』(서울: CLC, 2013), 158-160.[]
  2. Jay E. Adams, The Meaning and Mode of Baptism (Nutley, Presbyterian & Reformed, 197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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