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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전쟁

1. 새진리회의 해석

아마 크리스천이라면 넷플릭스의 새로운 드라마 <지옥>을 보면서 몹시 불편했을 것이다. 물론 <지옥>에서는 기독교가 등장하지 않는다. 정진수 의장(유아인 분)의 뒤를 이어 새진리회의 2대 교주가 된 김정칠 목사(이동희 분)가 목사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신흥 이단 종파의 이야기이지, 기독교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이라는 드라마가 던지는 메시지는 기독교에 타격을 입힐만한 파급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공의로운 신(神)이 존재하고, 그 신은 악을 행한 사람들을 응징한다는 것은 모든 종교가 공유하고 있는 명제이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로마서 2장은 이를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으로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라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롬 2:6-10)

그래서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죽을 날을 예고하고, 정확하게 그 예언한 날이 되면 죽음의 사자들이 나타나서 그 사람을 불태워 죽였을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떤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었을 때, 그건 그 죽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아주 심각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눅 13:4).

그래서 화살촉 대원들은 죽음의 고지를 받은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추적하고 들추어낸다. 아니나 다를까, 박정자(김신록 분)는 아빠가 다른 두 아이의 미혼모다. 박정자는 죽어도 마땅한 중죄인임이 틀림없다고 화살촉은 확신한다. 그리고 박정자를 향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한다. 도대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큰 죄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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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진리회의 해석의 모순

그런데 과연 이런 해석이 맞는 해석일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아도 새진리회의 해석은 여러 가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정말 죄를 지은 사람을 신(神)이 심판하는 것이라면, 왜 정말 사악한 사람들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살아간단 말인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그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 온갖 사악한 짓을 저지른 사람은 편안하게 잘 먹고 잘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귀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저놈을 잡아가지 않고?” 죽음의 고지가 악을 행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해석은 정 반대되는 예들이 수두룩하다.

죽음의 고지를 당하는 사람만을 표본으로 설정하고, 그 사람들이 왜 죽게 되었는가를 분석하면,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그 사람들만을 표본으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죽음의 고지를 당하지 않은 사람은 왜 고지를 당하지 않았는지를 함께 조사해야 옳다.

예수님께서는 대중들이 흔히 가지고 있던 해석을 뒤집으셨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5) 실로암 망대가 죽은 사람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죽은 게 아니다. 죄로 따지면 피차일반이다. 실로암 망대에 의한 해석은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어설프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새진리회의 해석이 잘못이라는 사실은 어린 아기에게도 죽음의 고지가 내려졌다는 데서 드러난다. 물론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적 관점이지만,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아직 아무런 죄를 지을 능력도 시간도 없었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아기에게 죽음의 고지가 내려졌다는 것은 죽음의 고지가 큰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한 형벌이라는 새진리회의 “해석”이 엉터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민혜진 변호사(김현주 분)는 새진리회가 사실을 왜곡하여 부당하게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고 사람들에게 알리려 한다.

3. 해석의 강요

하지만 새진리회는 그러한 민혜진의 노력을 막으려 한다. 화살촉 수장인 이동욱(김도윤 분)을 이용하여 아기에게 죽음이 시연되는 것을 막으려 한다. 자신들만이 독점해온 죽음의 고지에 대한 “해석”이 무너지면, 새진리회도 같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다. 자신들의 해석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통해 계속적으로 자신들이 누려온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실 연상호의 <지옥>은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종교화되어버린 정치 이야기이다. 어떤 사실이나 현상에 대한 해석을 대중에게 성공적으로 설득시키는 자가 권력을 잡는다. 이러한 공적인 해석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새로운 설득력 있는 해석이 나타나면, 기존의 권력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새로운 해석이 용인될 수 있는 그 어떠한 빌미도 탄압한다. 없애야 한다. 그래서 권력은 사람들의 해석을 좌지우지하는 언론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언론은 민주화 운동을 사악한 폭도로 해석하여 제시하기도 했고, 정부의 무능을 단순한 교통사고로 포장하기도 했으며, 쿠데타 세력을 아주 멋진 리더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어떤 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어지고, 어떤 인물은 비리의 상징으로 비난당하기도 한다. 어떤 제도나 법은 우리나라를 무너뜨릴 아주 나쁜 장애물로 해석되고, 경제민주화를 위한 제도들은 세금폭탄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만일 그러한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그러한 새로운 해석을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래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이미 해석에 의해 종교화되어 있다. 절대적인 추종 세력으로 변한다. 권력자가 제시하는 해석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화살촉이 되어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정당하다고 믿는다.

드라마 <지옥>은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그게 맞는 해석이니?”라고 말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새진리회의 해석은 순 엉터리이다. 만일 죽음의 고지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면, 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사악한 인간은 천수를 누리다가 편안히 죽는단 말인가? 만일 죽음의 고지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면, 왜 순진하고 착한 사람은 그렇게도 허망하게 죽는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어지는 모든 해석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맹목적인 광신적 추종자가 될 뿐이고, 권력자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해석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탐욕적이다. 그 해석이 누군가를 치켜세우고 있다면, 그 뒤에 무슨 이권을 주고받은 게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 해석이 누구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 뒤에 그 사람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래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있는 그 해석이 맞는가?

기본적으로 <지옥>은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종교화되어버린 정치의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의 영역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 모든 게 종교화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만 한다. 자녀들의 학업능력 향상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게 행복의 길이라는 “해석”에 다들 종교화되어 추종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다른 해석은 없는 것일까?

이미 우리 주변에는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들이 넘쳐난다. 수능 시험을 망친 아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고등학생 자녀를 둔 가정의 가정 공동체가 해체되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게 결코 성공하는 길도 아니고 행복의 길은 더더욱 아니라는 증거들이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종교화된 해석을 거부하는 게 너무 힘들다. 새진리회를 거부하면 화살촉에 의해 희생을 당하게 되어 있듯이, 사회적 왕따를 당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옥>은 외친다. 그러한 해석 자체가 지옥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좀 더 이성적인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엔 반기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사실은 우리가 배워야 할 소중한 진리를 담고 있다.

4. 종교 엘리트의 해석

종교도 일종의 권력이 될 수 있다. 이미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종교 엘리트 그룹을 형성했었고, 그걸 통해서 막대한 이득을 누리고 있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구약의 말씀은 그들에게 짭짤한 이득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잠언서 21:3은 기록한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을 책망하기도 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면서 고백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외쳤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1-14)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하지만 종교 엘리트들은 제사 제도의 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중세시대에도 반복되었다. 가톨릭 사제들은 그 나름대로의 해석을 통해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착취했다. 교회가 정한 해석만이 강요당했고. 그 어떤 다른 해석도 정죄되었다. 이에 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이 한 것은 <지옥>의 민혜진 변호사가 했던 그것과 비슷하다. 가톨릭의 해석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외친 것이다. 돈을 바치고 면죄부를 사야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저 받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외친 것이다. 이러한 외침은 가톨릭에게 치명적인 주장이었고, 당연히 핍박을 받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해석”의 권한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모든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성경은 아주 소수의 특권을 가진 사람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책이며, 만일 잘못 다루었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는 복어와 같은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읽고 누구나 해석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책이라고 하였다. 물론 성경에 난해한 구절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든지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성령님의 조명 아래서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해석을 독점하고 강요하여 종교적 권력을 누리려는 시도는 늘 반복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산물로 탄생한 교회 내에서도 가톨릭 종교 엘리트들의 행태가 반복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국 교회 내에는 십일조를 내지 않아서 암에 걸린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목사님을 대적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도 한다. 이러한 예들을 여러 개 모이면 강력하고 파워풀한 진리가 되어버린다. 하나님의 종 목사님에게 도전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반드시 고통을 당하거나, 사고를 당하게 되어 있고, 자녀들은 패가망신 당한다는 것은 우리 한국 교회 내에서 확립된 해석이다. 결과적으로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그게 바른 해석일까?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예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느 특정 집단 내에서는 광기 어린 교리가 되어버린다.

무안의 샘물을 바르면 쌍꺼풀이 생긴다느니, 어느 기도원의 물을 마시면 위장병이 낫는다느니 하는 그런 해석을 만들어내고, 그걸 통해 종교적 권력을 획득하는 게 이단이다. 목회자들은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목회자에 대한 우상화나 신격화가 이루어지면, 엄청난 동력을 얻게 되어 엄청난 규모의 교회로 성장시키는 게 쉽다. 전적으로 추종하는 성도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목회자들 마음 한켠에 있는 갈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지옥>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사이비 종교인 김정칠의 행태일 뿐이다.

성도들은 주어진 해석에 한 번쯤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그게 맞는 해석일까? 의문을 가져야 한다. 예전에 내가 시무하던 교회에 까칠한 성도가 한 명 있었다. 교회의 모든 일에 시비를 걸던 사람이었다. 내게 아주 차갑게 대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일을 하다가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 그때 그분의 아내는 정말 괴로워했다. 나는 그분에게 대답해 주었다. 살다 보면 죽는 일이 발생한다고 말이다. 어떤 사람은 악을 행하다가 죽기도 하는데, 고인은 가족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다가 소천하신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이다. 만일 그때 목사에게 대적하면 죽는다는 항간의 해석을 강화시키고 동조했더라면, 나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모두들 나를 겁내면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발생하는 것이고, 그분이 교회 내에서 까칠하게 굴었던 것도 사실이니, 그런 해석을 밀어붙이면 그 해석의 추종자들도 꽤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복음이 아니었다. 그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이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마 23:9-10)

5. 편향된 해석을 넘어

이단 신천지의 해석은 몇 가지 흥미로운 점들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러한 해석이 순 엉터리 해석이라는 게 드러나게 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해석에 맞지 않는 것들이 성경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그것들은 애써 외면한다. 마치 아기에게 죽음의 고지가 온 것을 은폐해버리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에겐 진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이 흔들리지 않는 게 더 중요하기 마련이다.

최근 어떤 교회의 목사가 외조카를 성폭행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 사실이 MBN에 방송되면서, 결국 그 목사는 교회를 사임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은 결백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아이가 어떤 원한이 있어서 거짓으로 진술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목사의 잘못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증거들이 많이 있는데, 여전히 그 목사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의 편이다. 왜 그럴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그게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게 사실이 아니어야만 했다. 그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이 가장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증거를 다 무시해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소리만을 듣는 것이다.

정치의 세계가 그렇다. 아무리 범죄와 비리의 사실을 들이밀어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의심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자신이 반대하는 정치인에게는 무슨 좋은 것이 있어도, 다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새진리회적 편향된 해석이 난무한다. 그런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당하게 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귀를 열어야 한다. 혹시 내가 너무 교조적이어서 다른 증거들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종종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에 확신이 차 있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공격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은 그러한 편향된 해석의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다. 바리새인들처럼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에 열려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진리이지, 내가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던 신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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