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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참된 표지

1. 종교개혁과 개혁교회

종교개혁 504주년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잘못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낙망하여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 주변에 위조지폐가 널려 있어도, 그 위조지폐 때문에 내가 가진 진짜 지폐마저도 버려야 할 것이 아니듯, 잘못된 교회의 모습이 있다고 해서 믿음을 버릴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짜 돌팔이 의사의 폐해가 있다고 해서,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의 탈을 쓴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고 해서, 교회를 거부할 것은 아니다. 교회에는 끊임없이 가짜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그 가짜가 교회는 아니다. 갈매기들이 낚싯배 주변을 따라다니지만 갈매기가 배에 속한 것이 아니듯, 사악한 무리들이 항상 교회 안으로 들어와 있지만, 그들이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유진 피터슨 목사의 말은 진리이다.

문제는 무엇이 참된 교회이고 무엇이 가짜 교회인가를 분별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인가 거짓된 교회인가를 판별할 수 있는 표지를 세 가지로 제시한 바 있다. 이것들은 참된 말씀의 선포, 바른 성례의 시행, 정당한 권징의 시행이었다. 이러한 기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기준이기는 하지만, 16세기 상황에서의 기준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즉 당시에 타락한 모습들에 대한 반응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참된 교회가 무엇인가를 제시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세 가지만 잘 지키면 자동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아주 아쉬운 일이다. 신학자들이 이 세 가지만을 참된 교회의 표지로 제시한다면, 그것은 아주 게으른 일이 될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의 교회가 어떤 면에서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반성하고, 그 점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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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른 성찬의 시행

안타깝게도 종교개혁자들이 제시한 참된 교회의 세 가지 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성찬식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는 예배 때마다 성찬식을 했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 것과 같은 비슷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례의 시행이 참된 교회의 표지라고 한 것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찬식을 시행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성례를 “바르게 시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시 로마 천주교회는 성찬의 빵이 진짜 예수님의 살이며 성찬의 포도주가 진짜 예수님의 피로 변한다고 생각했다.결국 신부는 구원을 제공하는 자가 되고 성찬을 주느냐 주지 않느냐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게 되어 있었다. 결국 구원이 사람에게 달려 있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영성체, 즉 성찬 빵과 포도주에 대한 미신적인 생각이 들어오게 되었다. 마치 그 빵이나 포도주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는 양 간주하기도 했다. 마치 기드온의 에봇에 열광했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잘못된 종교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은 사라지고, 인간의 미신적인 열정만을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성찬식은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주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성찬의 효력은 누가 주는 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했다. 참된 교회는 이렇게 바른 관점으로 성찬식을 시행하는 교회이다. 상황에 따라 성찬식을 시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매주 예배 때마다 성찬식을 시행하지 않아도 거짓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성찬은 은혜의 방편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하게 깨닫게 되는 방편이다. 성찬의 빵에 참여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게 된다. 성찬의 포도주에 참여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된다. 아무런 자격도 없고 공로도 없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성찬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은혜를 누리는 방편이 된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성찬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들에게 유익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으로 변할 위험이 있다. 팀 켈러 목사님이 <내가 만든 신>이라고 하는 책에서, 모든 좋은 것이 우상이 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 것처럼, 성찬이 아무리 영적으로 유익하고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잘못 오용하면 해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성찬을 하나의 율법으로 인식할 때이다. 마치 금식하는 것이나 구제하는 것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나 정결법을 지키는 것을 하나의 율법과 공로로 바꾼 바리새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찬이 하나의 율법이 될 때 그것은 우리를 죽이는 도구로 변하는 것이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했다. 이러한 관점은 아주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민족은 제사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그저 제사를 많이 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사는 회개하는 통회하는 심령이 빠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윗은 그것을 간파한 것이다. 성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 없이, 그저 성찬을 얼마나 자주 시행하느냐만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의 예배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대폭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성찬식을 주일마다 해야 할까? 코로나 상황 속에서 성찬식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일까?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는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지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3. 바른 권징의 시행

오늘날 권징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이 시대는 권면과 치리가 사라진 시대이다. 권면과 치리가 사라진 것은 사람들이 더 악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만큼 우리에게서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권면은 사람을 살리는 양약이 아니라 죽이는 독약이다. 권면과 치리가 없어졌음을 한탄하기에 앞서 우리에게서 사랑이 없어졌음을 탄식해야 한다.

아무튼 참된 교회의 3대 표지 가운데 하나가 권징인데, 이러한 권징이 사라졌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제대로 된 교회일까? 이런 질문이 떠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은 종교개혁자들이 바른 권징을 참된 교회의 표지 가운데 하나로 선택한 배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질문일 뿐이다. 사실 당시의 로마 천주교회에는 권징이 있었다. 당시의 로마 천주교회는 미사 때 말씀의 선포도 있었고, 성찬식도 시행했었고, 권징도 시행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로마 천주교회를 바른 교회, 참된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이 참된 교회의 표지로 말씀의 선포, 성찬의 시행, 권징의 시행을 꼽은 것은 단순히 교회 안에 그런 요소들이 있으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바른” 말씀의 선포, “바른” 성례의 시행, “바른” 권징의 시행에 방점이 있었다.

당시의 로마 천주교회에서의 권징은 자신들의 종교적 권한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시행되었다. 잘못을 하거나 잘못된 교리적 주장을 하면 권징을 해버리면 끝이었다. 출교시켜 버리면 끝이었다. 이러한 점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카노사의 굴욕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 왕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서 권징 처분을 받았다. 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한 것이다. 하인리히 왕은 성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고해복을 입고 금식을 하고 무릎을 꿇고 빌면서 교황이 용서해주기를 기다렸다.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이라 부르는 사건이었다. 로마 천주교회가 이렇게 권징권을 행사한 것은 종교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권징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의 표지로 “바른” 권징이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꼽았는데, 이것은 당시 천주교회의 관습대로 권징이 시행되어서는 안 되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대로 “회복”을 위한 은혜의 방편으로 권징이 시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권징은 잘못을 저지른 성도들을 교정하고 그들을 바르게 세우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권징이 사라졌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면서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 아니다. 권징이란 바르게 세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세우는 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데, 이러한 일은 단순히 “징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른 권징이 참된 교회의 표지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로서의 당연한 기능인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누구를 징계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당시의 로마 천주교회는 징계를 성도를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 교회는 잘못된 교회였고, 개혁해야만 했던 썩어빠진 교회였다.

바른 권징이 있는 교회란 단순히 징계를 하느냐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도를 영적으로 잘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품을 닮아가도록 양육시키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4. 바른 말씀의 선포

말씀의 선포가 참된 교회의 표지라는 것은 단순히 설교가 있어야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당시의 로마 천주교회에서도 메시지의 강론이 있었다. 하지만 그 강론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멀었고, 심지어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결국 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뜻은 숨겨져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격이 되어, 모두가 다 잘못된 길로 가다가 멸망하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만든 제도, 사람이 만든 전통이 교회를 움직이는 원리가 되어버렸다. 결국 그런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움직이는 교회가 아닌 엉터리 교회였던 것이다.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래서 “바른” 말씀의 선포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교회 내에서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어야 했다. 복음이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더 나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대신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기쁘고 복된 소식이다. 이 소식을 제대로 전해야 참된 교회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러한 복음은 사라져 버리기 일쑤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대신에, 지성이면 감천이니 열심히 종교적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쟁취하라는 메시지가 강단에서 전해지고 있다. 천국의 상급을 얻기 위해서는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사이비 메시지가 강단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이러한 교회는 정통 교단에 속한 간판을 달고 있다 할지라도 참된 교회일 수 없다.

5. 이 외에도 참된 교회의 지표는 많다

종교개혁자들이 3가지 지표를 든 것은 그 당시 로마 천주교회의 문제점들을 그 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16세기 때의 고민을 아무런 생각 없이 21세기 한국적 상황에서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이 제시한 기준이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으나, 오늘날 우리 교회가 어디서 잘못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반성하면서 참된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지를 더 고민해야 한다. 그게 신학자들의 사명이고, 목회자들도 성경을 묵상하면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고 말씀하셨다. 참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표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비방하고 분열의 길을 걸어간다. 그렇다면, 참된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임을 깨닫고 가슴을 쳐야 할 것이다.

성경 전체가 참된 교회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이다. 혹시 오늘날의 교회가 성경적 가르침에서 어떤 점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벗어나 이는 것들은 고쳐 나가야 한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라고 하셨는데,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교회 내에서 어떤 실력자가 교회를 좌지우지한다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교회를 마치 어떤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한다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마치 자신의 노력으로 이런 교회를 일구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 교회를 자신의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교회의 강단에서 참된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좌파든 우파든 정치 이데올로기를 전하고 있다면, 그리고 마치 정치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인 양 가르친다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돈과 명예와 성공이 우상이 되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상을 얻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간주되는 교회라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참된 교회의 표지는 좋은 교회인가 나쁜 교회인가를 감별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우리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교회는 모든 것이 엄선되어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빅토리아 풍의 응접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히려 지저분한 집의 거실과 같다. 어떤 집에 불쑥 찾아가면 주인이 사과에 사과를 거듭하는 것을 듣게 된다.” 완벽하고 아무런 흠이 없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다. 모두가 다 이런저런 면에서 부족하다. 참된 교회의 특징을 갖추지 못한 곳들이 많다. 참된 교회의 표지는 평가해버리고 정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반성하고 변혁을 위한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종교개혁 504주년을 맞이한 2021년 이제 다시 우리의 영적인 신발 끈을 묶고 다시 주님께서 제시하신 푯대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한 몸부림을 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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