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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성경 해석이 존재하는가?

예전에는 객관적 해석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도대체 옳은 해석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그 의미를 바르게 찾아낼 수 있을까가 학문적 관심이었다. 저자가 의도한 그 정확한 의미를 찾기 위하여 원문을 연구하는 일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저자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 저자가 처해있는 그 상황(Sitz im Leben)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아주 중요했었다. 그래서 고고학적 발견이 중요했었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었다. 우리가 문법적이고 역사적 연구를 꾸준히 해 나간다면, 결국 우리는 성경의 저자가 의도했던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석하는 그 해석자가 결코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다. 우리가 해석해야 하는 텍스트만 역사상에 출현한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를 해석해야 하는 해석자도 역사 속에서 존재한다.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진공 속의 존재로 해석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많은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진 주관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해석자는 객관적 해석을 내릴 수 있지 않고, 주관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객관적 해석일 것이라고 내놓은 해석이 사실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정답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그 정답을 찾는 것이 해석학의 과제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경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정답이 있다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답을 찾는 노력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의미가 나름대로 그 사람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바른 해석과 잘못된 해석이 존재했지만, 이제는 그 어떤 해석도 그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해석이 된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이 가장 먼저 수용된 분야는 예술 분야이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 때, 작가의 마음속에 있는 구상이나 의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작품이 탄생되는 순간 그 작품은 독립적(autonomous)이게 된다. 더 이상 작가는 그 작품을 통제할 수가 없다. 작품은 그 자체로 작가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 작품은 그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창출해낸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 작품을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즐긴다. 여기에는 오답이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 작품의 의미는 무한대로 창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작가들은 그 작품의 의미를 규정하지 않는다.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버린다.

오늘날의 해석학적 경향은 단지 예술품뿐만 아니라 모든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성경의 해석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바른 해석이 있었고 잘못된 해석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어떤 해석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해석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비유의 해석에서는 더 그런 경향들이 나타난다. 다음의 표현은 최근 한국교회 내에서 핫한 이슈가 되었던 청소년용 <매일성경>에 실린 한 구절이다. “원래 예수님이 즐겨 사용하신 우화와 비유의 목적은 수수께끼 정답을 맞힐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정연한 논리로 무엇을 설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화와 비유는 어떤 상황을 폭로하고 듣는 이들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대화하기 위해 문제를 던지는 것과 같아요.”1

한국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19세기 관점이 존재한다. 즉 한국교회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바르고 옳은 해석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반대로 바른 해석이 아닌 잘못된 해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바른 해석이 신앙생활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해석학적 관점이 차이는 청소년용 <매일성경>을 두고 폭발해버렸다. 이곳에 꾸준히 글을 써온 재미 경제학자 김재수 교수는 최근의 해석학적 경향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이 비유를 읽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해석을 찾아내었다. 그 결과 그의 비유 해석은 그동안 정답으로 알려진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해석을 제시했다. 아주 도발적인 관점을 제시하였다. 특히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기존의 탐욕적인 자본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내어놓았다.

그는 달란트 비유를 분석하면서 이렇게 질문한다. “혹시 달란트 비유의 진정한 주인공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일까요? 한 달란트 받은 이는 남을 착취해서 돈을 버는 부당한 방식의 사업을 거부하고, 주인에게 맞서기를 선택한 것일까요? 그는 분배적 정의라는 성경의 정신을 지키려 했던 사람일까요? 그의 싸움은 처절한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것일까요?” 그러면서 부당함에 당당하게 맞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그렇게 부당하게 맞서는 일이 실패자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런 실패들이 모여서 이 세상은 진보하는 것일 것이라는 교훈을 이끌어낸다. 더 나아가 김재수 교수는 불공정해도 어쩔 수 없이 그 계약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을의 입장인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사실 이러한 비유의 해석은 김재수 교수만의 독특한 해석은 아니다. 이미 신약학계 안에서는 해석학적 관점의 변화에 따라 전복적(subversive) 관점으로 비유를 해석해왔다. 20세기 후반부터 그런 경향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었다. 학계에서는 널리 유행하였지만, 한국교회의 정서상 이런 도발적인 해석을 교회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소개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김재수 교수가 청소년용 성경에 눈치 없이 소개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 결과 후폭풍이 심했다. <매일성경>을 발행하는 성서유니온을 향해서 실망감을 표현하는 독자들이 SNS에 그 불만을 올리기 시작했고, 본사로 이런 식이라면 구독을 끊겠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또한 성서유니온이 좌경화되었다는 비난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결국 성서유니온은 백기를 들었다. 김재수 교수와의 집필 계약을 파기해버렸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성경 해석에 바른 해석이 존재하는가? 한국교회 성도들이 분노하는 것처럼, 김재수 교수는 바른 해석을 무너뜨리고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는가? 아니면 어차피 해석이란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니, 그 어떤 해석이 옳은 해석이며 바른 정답이라고 할 게 없으니, 김재수 교수의 해석은 하나의 의미 있는 해석으로 용납되어야 하는가? 과연 객관적 해석이 가능한가? 과연 모든 해석이 무한대로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는가?

우선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하고 객관적인 정답의 해석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아무리 객관적인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다. 우리 자신이 전혀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는 한계이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게 된 역사적 산물이다. 우리는 진공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하는 동안에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수많은 영향 아래 빚어진 존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우리의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이해(前理解)가 우리의 해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노예제가 정당한 사회에서 자란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 노예 제도가 성경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다른 방식의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남성우월주의 관점과 유교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본주의야말로 하나님의 원칙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할 게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다른 관점에 귀를 기울이는 아량이 필요하다. 나와 정반대의 해석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무조건 틀렸다고 할 게 아니라, 혹시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해석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가 하는 묻는 말에 대하여 대답을 하지 않는 것 아내의 귀가 먹은 줄 알고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아내가 여러 번 대답했지만 내 귀가 먹어서 내가 듣지 못한 것과 같은 상황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내가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선입견에 따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의 관점은 성경의 해석은 소수의 종교 지도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의 조명이 있다면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신만이 성경 해석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아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를 통하여 바른 해석을 추구해나가야 한다. 원통을 이쪽에서 보면 동그랗게 보이지만, 다른 방향에서 보면 네모난 것처럼, 같은 사물 같은 성경 본문이라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더 나은 해석을 위해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나 혼자만의 독단적인 해석이 옳다고 주장할 게 아니다.

특히 내가 가지고 있는 어젠다가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성경이라는 우물을 들여다볼 때 우리 자신의 얼굴만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내고선, 그게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우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젠다가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이 뜻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래서 성경 묵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나의 마음이란 그릇을 비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나를 완전히 비우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이다. 마음을 완전히 비워서 나의 생각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객관적 읽기가 가능하지 않다. 어차피 성경 해석은 나의 존재를 투영해서 읽는 방식만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 때문에 내 어젠다가 정당한 성경 읽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예언이라고 말하는 것을 거짓 예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결정에 도박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이 도박을 정당화할 수 없듯, 우리의 읽기가 어차피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자의적 해석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래서 늘 귀를 기울여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객관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이야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어도 무방하다. 예술의 특징이야 감상하는 것이고, 해석에 무한대로 열려 있으며, 그러한 창의적인 읽기를 통해서 한 단계 더 깊은 예술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가 합의된 방식으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부동산 계약서이다. 부동산을 매도하는 사람과 매입하는 사람이 서로 매매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서를 작성한다. 그런데 그 계약의 내용은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나만의 독특한 해석이 허용되지 않는다. 만일 양 당사자 사이에 해석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권위 있는 해석의 판결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외의 해석은 인정될 수 없다. 실제적으로 부동산의 소유권을 넘기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이 일방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하는 것을 그저 웃어넘길 수 없다.

성경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고전 문헌일 뿐이다. 사람들이 고전 문헌을 읽는 이유는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전 문헌의 해석은 예술품의 해석과 많이 닮아있다. 역사적 사실이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 속에 기록되어진 이야기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나가기만 하면 된다. 성경의 저자가 비유를 어떤 의도로 기록했는가는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는 고전 문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비유는 단순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정답이란 없는 것이고, 예술품을 창의적으로 감상하듯 해석하면 될 뿐이다.

그런데 신앙 공동체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앙 공동체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묵상하기 위해서이다. 예술품의 경우 작가의 의도가 중요하지 않지만, 신앙 공동체에게 있어서 성경은 원 저자인 하나님의 의도가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객관적일 수 없기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은 채 마음대로 해석하도록 화두만 던져놓은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 저자의 본래의 의미(meaning)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의미를 발견한 것에 근거하여 그 말씀이 우리들에게 어떤 뜻(significance)으로 들려질 수 있는지를 주목해보아야 한다.

김재수 교수의 주장은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경제학자로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고 있으면서 또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제의 문제, 그리고 분배의 문제, 공평함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고, 그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애쓰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시스템 속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은 그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시스템을 통째로 흔들어버린다면 그 누구도 좋아할 리 없다.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시스템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고, 너무나도 사악한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그 시스템을 고쳐보려고 한다면 거의 대부분이 반발할 것이다. 사실 시스템과 우리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이기 때문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의 시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삶의 방식, 이 세상의 시스템에 그대로 순응하며 살아가는 게 옳지 않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질문하면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김재수 교수는 많은 허점을 보였다. 과연 1세기 품꾼이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받은 것은 불공정한 일이었을까? 물론 포도원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이익을 주인이 독차지하면서, 일꾼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의 품삯만을 준다는 것은 불합리할 수 있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1세기 상황에서, 그는 아주 자비로운 주인이었음에 틀림없다. 1 데나리온은 결코 부당한 액수가 아니었다. 더 나아가 그 주인은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1 데나리온을 주었다. 그는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품꾼은 을의 입장이었지만, 결코 을처럼 대접받지 않았다.

김재수 교수의 실수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에 투영하였다는 데 있다. 물론 이런 식의 해석이 오늘날 유행하는 트렌드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바른 해석은 아니다. 신천지의 비유 해석이 작위적인 만큼, 김재수 교수의 해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를 화두로 삼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도 있다. 꼭 원래의 목적대로만 사용하란 법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화두로 사용한 것뿐이지, 그 비유에 대한 바른 해석은 아니다. 화두를 해석이라고 우기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김재수 교수의 <달란트 비유>도 정당한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화두로 삼은 것일 뿐이다. 맥락에서 벗어난 인용이랄까? 우리가 흔히 증오하는, 어떤 덩치만 컸지 사실상 쓰레기인 언론이 늘 하는 작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태복음이 이 비유를 제시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콘텍스트 속에서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라는 19:30과 20:16을 <달란트 비유> 앞뒤에 배치해 마태복음이 수미쌍관(首尾雙關) 구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을 완전히 무시한 해석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은 제 아내가 아니었었습니다. 그건 제 어머니였었습니다.”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뒤를 빼고 앞 구절만 인용하면서 불륜에 빠진 남성이라고 비난하는 행태랑 크게 다르지 않다.

비유를 해석할 때에는 무엇이 닮은 점(類似點, tertium comparationis)인지, 무엇이 닮지 않은 점(對照點, tertium contrarietatis)인지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조점 때문에 비유 해석을 망쳐버려서는 안 된다. 김재수 교수는 주인이 하나님일 리 없다고 질문을 던져본다. “달란트 비유 속의 주인은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 빼앗아서 가진 사람에게 주는 사람입니다. 쓸모없다고 판단하면 어두운 곳으로 내쫓는 사람이구요. 과연 하나님이 이런 분일까요?” 그래서 기존의 해석보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어놓는다. 주인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포악한 대지주를 가리키는 것이고, 나쁜 사람인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체제(status quo)에 순응한 사람들이 아닌 오히려 시스템에 항거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더 위대한 것이고, 그를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비유라는 것 자체가 닮은 점이 있기 때문에 비유가 성립되지만, 전혀 닮지 않은 점이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재판관을 닮았다. 과부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재판관의 무자비한 면을 닮지 않으셨다. 또한 하나님은 밭의 주인을 닮았다. 씨를 뿌리고 나중에 추수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류를 심판하실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밭에 가라지가 뿌려지는지도 몰랐고, 알곡을 다치지 않으면서 가라지를 뽑을 재간도 없는 그런 무능한 주인과는 닮지 않았다. 닮지 않은 면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릴 게 아니다. 사실 비유의 해석은 대조점과 유사점을 성공적으로 분석하는 데 달려 있다.

비록 완전히 객관적인 해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사실 때문에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각기 소견에 좋은 대로 해석하며 살았던 사사기 시대로 다시 돌아갈 것이 아니다. 완전히 객관적인 해석 자체가 불가능할지라도, 우리는 해석 공동체를 통하여 좀 더 나은 해석에 접근해 나갈 수 있다. 그게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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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재수,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청소년 매일성경> 2021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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