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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우리에게로왔다 (요 1:9-14)

성탄절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이 성탄절이고요. 우리는 성탄절 예배를 24일 날 저녁때 드리기로 계획하고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성탄절이 무엇인가요? 성탄절은 거룩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이죠. 예수님께서 태어난 날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씀을 드린다고 한다면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진짜 생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천주교를 비롯해서 서방교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교회들에서는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지만, 기독교의 또 다른 한 부류라고 할 수 있는 동방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예를 들어서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혹은 그리스나 이집트 같은 곳에서는 성탄절이 1월 6일이기도 하고요. 어떤 교회에서는 1월 7일을 성탄절로 짓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진짜 생일이 진짜 태어난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탄생한 날이 겨울철이라기보다는 아마도 3, 4월 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마는, 아무튼 예수님의 태어난 날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탄절을 언제 지키는가? 그저 교회가 수천 년 동안 관행으로 내려온 것처럼, 특별히 딱히 정확하게 예수님의 생일을 안다면야 생일날을 바꿀 수가 있겠지만, 정확하게 어느 날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12월 25일은 365분의 1의 가능성을 가지고, 예수님의 생일 날짜 확률인데요. 아무튼 그냥 지켜오면서 우리가 성탄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한번 살펴보고, 그 의미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음미해보는 귀하고 복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성탄절을 앞에 두고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하는 이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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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 다시 말하자면 로고스가, 하나님이신 그 로고스가, 말씀이 육신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보면, 어떤 의미가 담긴 단어를 사용하고 있냐면, 텐트를 쳤다고 하는 말의 그런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장막을 쳤다. 텐트를 쳤다. 우리와 함께 그렇게 머무시고 계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쳤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할 때를 상기시키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다가, 해방이 되어서, 그래서 적과 꿀이 흐른다고 하는 그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가는 그 과정 가운데,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황량한 땅 광야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그냥 내 팽개쳐둔 것이 아니라, 그냥 방치해 두고, “난, 너 모른다”라고 하고 외면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셨는데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불기둥과 구름기둥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뭉게뭉게 피어 있고,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과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가든지 아니면 주둔하든지, 그 구름 기둥을 보고 또 그 불기둥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구나” “하나님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하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게 무엇이냐면 바로 성막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막을 만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을 어디에다 쳤냐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진영 한가운데 성막을 쳤습니다.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나누어서 숙영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 한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 그 하나님의 성막이 거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요. 바로 그러한 출애굽 당시에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셨다고 하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표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거하셨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 본다고 한다면 광야의 이스라엘 민족과 같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들은 죄악의 노예가 되어서 사는 인생이죠.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 바로의 노예가 되어서, 그래서 그 바로가 시키는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만 했었던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악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인생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셨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그 구원받은 우리를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저희들과 함께 거하셨다. 장막을 치셨다. 우리들이 인생의 길을 가는 가운데, 우리를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혼자 방황하게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함께 장막을 치셨다고 하는 이 표현을 보면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로 오셨는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이죠. 만일 어떤 임금님이 궁궐을 떠나서, 일반 서민들에게로 온다고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황공무지로소이다.” 할 만한 일입니까? 임금님이 어떻게 누추한 우리 집까지 올 수가 있는 것입니까? 정말 놀라운 일이겠죠.

그런데 그 임금보다도 훨씬 더 높으신, 우리 주님 만유의 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정말 황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는가?” 하는 그 질문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셔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실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주님 앞에 갈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선을 행해서 갈 수도 없고, 노력을 해서 갈 수도 없고, 모든 인생들이 다 넘어져 쓰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신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려고 많은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 성공하느냐면, 못해요. 마치 오징어 게임에 보면, 456억이라고 하는 그 어마어마한 돈을 얻기 위해서 거기 참가자들이 열심히 게임을 합니다. 그래서 저 상금을 내가 받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가는데, 그런데 그들이 그 과정 가운데서 듣게 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237번 탈락입니다.” “167번 탈락입니다.” “13번 탈락입니다.” 우리는 저 목적을 향해서 가려고, 정말 무단히 애를 쓰고 있는데, 탈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에요.

내 마음은 잘 뽑아보고 싶은데, 깨져버리는 걸 어떡해요?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고, 이 영화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한 사람이라고 하는 성공한 사람을 보여주고 있지만, 영화니까 성공하는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실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는 그 누구도 목표에 다다를 수 없고, 그런 이 세상의 목표도 다다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말 거룩하시고 참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나아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종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다른 종교에서의 신은 차가운 신입니다. 마치 염라대왕과 같고, 그래서 아무런 감정도 없이 재판장과 같은 신들이 이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신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간에게로 오는 신이냐면, 오지 않습니다. 이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그냥 저 하늘 위에 자리를 그냥 지키고 있는 거죠. 이슬람교의 신이든지, 그 힌두교의 신이든지, 무속 종교의 신이든지 그 어떤 종교의 신들은 다, 어떻게 있냐면, 하늘에 가만히 있고 내려오지 않는 신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서, 우리를 향해서 너희가 열심히 살아봐라. 그래서 올라오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열심히 올라가는 과정 가운데 실수하면, ‘넌, 탈락이야’ 차갑게 탈락을 외쳐버리고 마는 것이, 이 세상 거짓 종교의 신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 거짓 종교의 이 세상 다른 모든 종교의 신들은 왜 인간들에게로 오지 않습니까? 첫 번째는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신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신은 전부 가짜 신이고, 존재하지 않는 신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겁니다. 가짜 신이기 때문에 올 수가 없는 신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논리에 따르자고 한다면, 그 다른 종교의 신들은 우리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가기를 원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출가를 하기도 하고, 우리가 도를 닫기도 하고, 온갖 고행을 하면서, 정말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면서, 그래서 우리가 최고의 경지까지 올라가야, 그때서야 겨우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이 세상 모든 다른 종교의 신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면, 사랑이 많으신 부모님과 같은 하나님이에요.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아버지는, 너희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와 같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우리가 멸망의 길 가운데 가고 있을 때,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있을 때, 그냥 외면해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시는 것이죠.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오셨습니까? 왜 오셨습니까? 첫 번째는 우리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고, 없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올 수 없지만, 우리 주님은 살아계시고 존재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오실 수 있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우리 주님은 어떤 주님이십니까? 사랑이 많으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로 오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의 자녀가 무엇인가 잘못되어 넘어진다고 한다면,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 부모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물론 우리 아이들의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서 지켜보는 경우가 있겠고, 도와주는 것을 약간 절제할 수는 있겠지만, 아이가 쓰러져 큰 문제가 생기는 상황이 된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그냥 바라만 보고 오지 않을 부모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모는 사랑이 많은 부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그냥 아무런 감정이 없는 염라대왕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이고, 성탄절이 무엇인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찬한 우리와 함께 우리에게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것이 성탄절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1장 12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께서 오셔서, 예수님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리들에게 영적인 선물로 오신 거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고, 우리에게 정말 복된 인생으로 우리에게 오셨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요.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접하지 않고 내쫓아 버리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데, 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거부해버리고 관심이 없을까요. 그것은 영접을 하기 위해서는, 영접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모셔들인다고 하는 이야기인데, 모셔들이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려고 한다면,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왕좌를 비우는 일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그 왕좌 가운데,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우리는 그 가짜 왕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잘못된 왕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데, 그 왕을 섬기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왕을 섬기고 있다가도 예수님이 오신다고 한다면 그 왕을 쫓아내 버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영접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려고 했더니, 우리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다른 왕이 앉아 있는 거예요. 다른 왕이 앉아 있기 때문에, 이분을, 이 왕을 쫓아내지 않고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인데요. 이스라엘 민족들은 애굽 땅에 살 때 누구를 왕으로 섬겼습니까? 애굽의 왕이었던 바로 왕을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 왕은 어떤 왕이었냐면, 이스라엘 민족을 착취하는 왕이었습니다. 착취하는 왕이었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왕이었고,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살기 위해서 그 왕을 추종해야만 했습니다. 만일 왕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 망하는 겁니다. 왕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 죽게 되는, 그런 위협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애굽 왕을 따르면서 살아야만 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시게 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그 순간에는, 그 애굽 왕을 버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라고 하는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죠. 이와 비슷하게 우리들의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새로운 왕으로서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겠는가?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왕좌에서,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우리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그 잘못된 왕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쫓아내 버려야 되는 겁니다.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비어 있는 적이 없습니다. 여기 컵이 하나 있는데요. 이 컵에 지금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안 보이시니까 모르시죠. 비어 있습니까? 무엇인가 들어있습니까? 들어있어요. 뭐가 들어있죠? 공기가 들어있어요. 비어있는 것 같은데, 이 컵 안에 공기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컵에 무엇인가, 이 컵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 공기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가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중립적이고, 나는 무신론자고, 나는 기독교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니고, 나는 중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우리들의 마음은 중립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섬겨야만 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마음 가운데 마음의 보좌 가운데 왕좌 가운데 예수님을 모시든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모시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3절에서부터 4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술이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유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다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우리들의 마음의 방해 마음의 방해 귀신이 들어왔다가 나가면, 아무것도 없는 빈 상태가 잠깐이라도 있을 것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고는 있지만, 사실은 이렇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비어 있을 때가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내 마음 가운데서 무엇인가가 나가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곱 귀신이 다시 들어오는 것처럼 더 심한 것이 우리들 마음 가운데 들어오는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은 빌래야 빌 수가 없다는 거예요. 항상 무엇인가 들어와 있다는 거예요. 마치 이 컵과 같아서, 이 컵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빈 것 같으면 공기가 들어와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항상 무엇인가 우리들의 마음을 장악하는 왕이 있어야만 된다는 거죠. 항상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우리가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마음에서부터 지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왕을 쫓아내 버리고, 새로운 왕이신 예수님을 모셔드리는 것이 영접하는 것인데, 우리가 이 마음속에 있는 이 왕을 쫓아내려고 하기보다는, 이 왕의 말을 듣고 사는 것이 더 그럴듯하고 괜찮아 보인다고 하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왕을 모시고 있습니까? 돈이라고 하는 왕을 모시고 살고 있고, 명예와 탐욕 이기심 물질의 왕들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탄이 우리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먼저 비워야, 그래야 예수님이 들어올 수가 있겠는데, 사람들이 이미 자기의 마음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그 왕을 쫓아내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고, 아니 그 왕과 더불어 사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어떤 케이스냐면 바로 헤롯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 동방에서 온 3명의 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저 먼 곳에서 동방에서부터 별을 보고 찾아왔는데,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도대체 그 새로 태어난 왕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을 때, 헤롯은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아닌 누군가가 왕이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헤롯왕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 가운데에 있는 그 왕의 자리를 누군가가 대신 차지한다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대표적인 케이스를 또 하나 찾으라고 한다면 예수님에게 찾아왔던 어떤 젊은 관원을 예로 들 수가 있겠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예수님에게 찾아왔습니다. “예수님,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과 이야기를 하시는 가운데, 그 청년의 진짜 문제를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줘 버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 “니가 지금 따르고 있는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니, 둘 중에 하나는 버리고 누가 나의 하나님인지를 인정하라. 결정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만 섬기는 줄 알았어요. 십계명에 말하기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고 말씀했는데, 그래서 이 청년은 나는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주님께서 그 청년의 진짜 마음속에 들어 있는 신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것이죠. 니가 혹시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돈이 아닌,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라고 요구했는데, 그 상황 가운데에서 이 사람이 머뭇머뭇거리다가 고민하다가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을 할 때, 우리는 어떻게 결혼을 했습니까? 아직 안 하신 분이 있다고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요? 간단합니다. 여성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다 버리고 한 남자만 선택해야 해요. 남성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여자를 다 버리고 한 여자만 선택해야 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 가운데, 이 남자도 좋고 저 남자도 좋고, 이 여자도 좋고 저 여자도 도 좋으면 결혼할 수 없는 거예요. 결혼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 다른 모든 사람들을 다 버리고 한 사람만 선택하는 것이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은 손해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그 욕심 때문에, 그래서 물질을 섬기려고 하고, 우리들이 지금까지 섬겨온 것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그것을 따르려고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죠. 마태복음 6장 24절의 말씀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나, 예수님 믿어”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나, 교회 다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의 왕좌에 지금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그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엉터리 왕들을 다 쫓아내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엉터리 왕들을 우리들의 마음에서 쫓아내 버리고, 참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 우리를 구원해 줄 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갑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 정치인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고, 이 세상에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고,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데,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구주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선택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너희들의 마음의 왕좌 가운데 “나를 받아들여라”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러한 요구에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만이 나의 왕이십니다.”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닌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그러면 쫄딱 망하는 것이 아닐까? 해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것이고요. 우리가 다른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데 성경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우리는 왕자와 공주처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길은 쫄딱 망하는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고 왕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40년 동안을 살아가면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운데, 홍해 바다를 만나면 두려워 떨고, 먹을 것이 없으면 두려워 떨고, 마실 것이 없으면 무서워했고, 적군과 마주치면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서, 거기서 바로 왕을 섬기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잘못된 길이 아니라,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늘 예수님이 우리들의 마음의 왕좌로 모셔서, 주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절은 그런 의미에서 1년에 한 번이 아니라 사실은 매일 매 순간이 성탄절입니다. 주님께서는 매일 매 순간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겁니다. “네가 붙잡고 있는 거, 그거 내려놓고, 나를 영접해라”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순간이 성탄절이 되어야 됩니다.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내 마음에 자리 잡아 주시옵소서” “ 님께서 나의 왕이 되어 주시어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싶습니다.” “주님만을 선택하며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나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고, 주님과 동행하는 길만이 우리에게 참된 구원과 안식을 주실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를 향해서, “다른 왕을 내쫓아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요구하신 그 하나님께서, 사실은 저와 여러분들을 선택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다른 모든 것들을 다 내어버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매 순간순간에 삶 가운데서 “주님, 나의 마음속에 왕자로 오셔서 좌정하시고,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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