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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하지 말라 (약 4:11-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그러는데, 그러면 우리 가운데 불의가 자행되어도 침묵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

+++ 허탄한 자랑 (약 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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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제일 잘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그것은 욕하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요즘 올림픽 경기가 계속 진행이 되었고, 오늘로써 올림픽 경기가 마무리되게 되어 있는데요. 우리나라 선수들이 잘할 때에는 박수도 치고 칭찬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잘못하면, 기대에 어긋나게 되면, 온갖 비난을 국민들이 쏟아내고 있고, 악플들을 달고 있습니다. 특별히 많은 실망감을 주었던 종목이 무엇이었을까요? 올림픽 야구단이 많은 실망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야구팀이 동메달을 따더라도, 병역 면제 혜택을 박탈해야 된다고 하는 국민청원이 등원할 정도로, 사람들은 선수들에 대해서 온갖 비난을 해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정부 당국에 대해서도 엄청난 비난과 욕을 해대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들에게는 욕을 하고 비난하는 특권이 주어져 있는 것처럼, 이것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우리들은 늘 욕하고 비난하는 일을 자주 하고 있고, 매일매일 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비난하는 일은 비난을 하는 그 대열에 서는 사람들은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비난의 대열 가운데 들어가 있는데요. 심지어 목회자들도 얼마나 많은 비난들을 해대는지 모릅니다. 제가 종종 목회자들의 모임에 가게 되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때에는 모여서 정부를 비판하고 욕하는 일에 열을 올리는 경우를 보면서, 제가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 과연 이분들이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라고 설교했던 분들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비난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 정말 당황스럽기가 그지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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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또 여러 가지 지도자들이나 정부에 대해서, 수많은 그 텔런트나 스포츠 스타들을 향해서, 그들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고,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게 된다고 하면, 계속해서 불평하고 비난하고, 더 나아가 비방하면서도 당당한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이 있는데요.

그렇게 사람들이 이렇게 비난의 대열에 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사람들은 자꾸만 비난하는 일을 열심히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선 그 대상이 욕 들어 먹어도 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하면 욕을 안 할 텐데, 잘하면 비난하지 않을 텐데, 욕 들어 먹어도 싼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욕하고 비방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요. 그렇게 비방하고 비난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악한 품성을 가진 죄인들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남들을 비난하고 욕하는 일들을 하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요. 이렇게 하는 것들이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늘 불평하고 비난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서, 사실 이 앞에서 오늘 여러분들께 설교를 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C.S. 루이스라고 하는 영국의 문필가가 <시편 사색>이라고 하는 그 책에서 했던 말, 제가 여러분들에게 많이 소개해서 이미 익숙해졌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이 말을 자꾸만 반복하는 이유는 제가 아는 게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교육 자체가 자꾸만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깊이 묵상하고 또 묵상하라고 하는 의미에서 또 반복을 해보고 싶습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진실로 겸손하고 도량이 넓고 균형감이 있는 사람일수록 칭찬을 많이 하고, 괴짜이고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일수록 칭찬에 인색하다. 훌륭한 비평가는 불완전한 작품들에서도 칭찬할 점을 찾아내지만, 시원찮은 비평가는 끊임없이 금서의 목록만 늘려간다. 건강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화려한 환경에서 근사한 요리를 두루 경험하며 자랐을지라도 소박한 음식에서도 칭찬거리를 찾아낸다. 그러나 소화 불량 환자나 늘 까다롭게 구는 속물들은 모든 음식에 대해 트집을 잡는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슬리는 대상과 마주한 것이 아닌 한, 언제나 칭찬은 우리의 내적 건강이 밖으로 표출되는 소리다.”

한마디로 우리가 욕하고 비방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대상이 욕먹어도 싼 대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문제가 있고, 죄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너그럽지 못하고 배려할 줄 모르고, 조그마한 잘못도 용납할 수 없는 옹졸한 마음의 죄성으로 가득한 인생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늘 비난과 불평만을 해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성으로 가득한 죄인이며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들의 죄악을 씻기시고 구원하셔야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더러운 모습을 보셨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욕하고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더러운 모습을 감싸주셨습니다. 사랑의 모습으로 덮어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피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씻겨 주셨습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대우하셨습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탕자의 모습을 보고 칭찬할 점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죠. 오로지 비난받을 일만 잔뜩 해가지고 돌아온 그 탕자를 보았을 때, 무슨 칭찬거리가 있겠으며, 무슨 좋아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탕자의 형은 비난하는 겁니다. 저놈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들과 함께 삼켜버린 놈이라고 비난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비난하지 않아요. 욕하지 않아요. 비난할 게 없어서, 욕할 게 없어서, 책망할 게 없어서, 비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칭찬할 것도 없고, 모두가 다 비난할 것만 있는 그 아들을 향해서, 그 아들을 더러운 몸을 씻기시고, 그에게 옷을 입히며 사랑으로 자녀로 회복시켜주신 그 아버지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우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남들을 비난하게 될 때, 우리들의 더러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 마취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방귀를 뀌면, 창피한 그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는 가장 기발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누가 방구뀌었어?” 본인이 방구를 뀌고도, 그 순간에 제일 먼저 누가 방구를 뀌었느냐고 화를 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용의선상에서 제외가 될 거라고 하는 착각을 우리가 하는 것이죠. 그런 심리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부족한 점을 비난하고 욕하는 그 순간, 나는 그 순간에 그런대로 정의로운 사람으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 비난하게 되는 그 순간, 나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열광하게 되기도 하고, 비난하는 그런 사람을 향해서 정의의 사도라고, 그런 정의의 사도가 나타났다고 생각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내년도 대통령 선거를 앞에 두고 있는데요. 여당이든 야당이든 할 것 없이 네거티브 공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단점을 지적하고 비난하면, 그게 자동적으로 내가 대통령의 자격이 된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게 바로 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로 비난할 때 지지율이 올라가는 이상한 현상도 일어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네거티브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렇게 비난하고 욕했던 바로 그 사람이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죄를 뒤에서 저지르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죠.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런 마취 효과에 속아서, 자꾸만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야고보서 4장의 말씀은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들아, 서로 욕하지 마라.” 서로 비난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어요. 왜 우리가 비난하지 않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비난받을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비난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가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기 때문인 것이고, 만일 우리가 비난하게 된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은혜를 망각하는 그런 죄악을 범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읽은 야고보서 4장 11절 12절 말씀에서는 우리가 비난하게 되는 그 순간 율법의 재판관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내가 만일 윤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오.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고 멸하시기도 하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가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유일한 입법관이요 유일한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위치로 올리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비방하는 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괜찮은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로 올려버리는 영적인 교만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면서, 네가 누구길래 비난하느냐? 네가 누구길래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교만의 죄 가운데 빠질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비난하고 욕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 욕하고 판단하기보다, 그리고 그렇게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들의 일에 동조할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감싸주고, 칭찬할 거리들을 찾아내어서 칭찬하고, 격려하는 일에 우리 성도가 다 앞장서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의 단점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오고, 칭찬할 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꾸만 욕하고 비난할 거리들이 내 눈에 들어오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겁니다. “주님, 제 눈에 자꾸 다른 사람들의 티만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티를 볼 게 아니라, 내 눈속에 있는 들보을 먼저 보게 하여 주옵소서. 비난하기보다 칭찬하고 격려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세기 아시시의 주교였던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게 그가 직접 한 기도문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흔히 알려진 대로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에 보면,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했는데, 이러한 기도가 우리들의 기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만히 생각하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질문이 하나 떠오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모든 잘못들에 대해서 그냥 침묵하고만 있어야 하는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어떤 잘못이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어떤 범죄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선한 길로 가지 아니하고 나쁜 길로 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도 우리는 판단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비난하지 않아야 되기 때문에, 그 순간에 입을 닫아야만 하고, 우리는 침묵하고 있어야만 하는가? 그렇게 침묵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우리가 제기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비난의 대열에 욕하고 불평하는 대열에 서지 말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와 여러 가지 악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못 본 척하고, 그냥 방관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의 말씀인데요. 에베소서 4장 15절의 말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 성경보다는, 개역개정판 번역보다는, 쉬운 성경의 번역이 훨씬 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쉬운 성경으로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해드립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으로 진리만을 말하고,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면에서 성장하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진리를 말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을 말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진실을 말해줄 의무가 있고, 진실을 말해줄 때, 그 진실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면으로 성장해 갈 수가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제가 집에서 나오려고 하면, 제 아내는 매의 눈으로 스캔을 쫙 합니다. 그리고 제 옷에 뭔가 얼룩이 묻어 있으면, 이 옷에 얼룩이 묻었으니까, 다른 옷으로 바꿔 입고 나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바꾸어 입는 게 너무나도 싫지만, 그 이야기를 듣게 되면 바꾸어입고 나가요. 왜냐하면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내 모습을 보일 때, 단정한 모습으로 보여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고, 제 아내는 그것을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줍니다. 왜냐하면 이야기해 주지 않고, 저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을 때 잘못된 것이 있을 때 침묵해 버린다고 한다면, 결국에는 잘못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해 주는 것이에요.

이와 비슷하게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공동체 가운데 누군가 죄를 범한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길로 간다면, 무엇인가 실수를 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비판하지 말아야 되니까, 비방하지 말아야 되니까, 침묵하고 있어야 되는 것,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제일 좋은 것이고, 분위기가 좋은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니까, 침묵하고 있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냐면, 진실을 이야기해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신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이었는데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그냥 방치해 두고, 죄를 지어도 아무런 상관하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징계하실 수가 있겠는데, 징계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 것이죠. 그냥 내버려 두면 가다가 죽을 수 있으니까, 그냥 내버려 두면 영원히 파멸의 길로 갈 수 있으니까, 징계를 내려서라도 되돌아오게 만들고, 악한 길로 가지 못하게, 사망의 길로 가지 못하게 주님께서 징계하신다고 그렇게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인데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가운데 누군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한다면, 침묵하고 방치하는 것이 바른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진실을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 것이고,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잘못된 길에서부터 돌이키게 도와주는 책임이 우리 성도 공동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니 바로 그 일을 위하여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다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철저하게 타락한 죄성을 가진 인간이 우리들입니다. 목회자도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겠고, 장로님들도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겠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가능성들이 다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이고,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데요. 그 순간에 잘못된 길로 가도 그냥 방치해 둘 것이 아니라, 진실을 이야기해서 잘못된 길에서부터 돌이키게 만들어야 할 것인데, 에베소서 4장 15절의 말씀은 진실을 말할 때 어떻게 말해야 되는가? “사랑으로” 말해주어라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하나님께서 알아서 고쳐주시겠지. 하나님께서 해결하시겠지.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분들이 종종 계시는데요. 오히려 고린도전서 5장 12절과 13절의 말씀에 보면, 너희가 이 문제를 해결하라. 너희가 너희를 교회로 불러주었으니, 교회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책망하기도 하고, 권면하기도 하고, 말 안 들으면, 심지어는 출교시키는 일을 통해서라도 이 문제를 너희가 해결하라고 고린도 전서 5장 12절에서부터 13절에서 가르쳐주고, 그러니까 한편으로 헷갈립니다.

성경 한 편에서는 오늘 읽은 야고보서 4장 11절 12절의 말씀에서는, “비난하지 말라. 네가 누구길래 판단하느냐?”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또 성경 한편에서는 “너희가 사랑으로 진실을 말해주어야” 하고, 너희가 해결해야 된다라고, 잘못된 길로 가면 너희들이 돌이키게 해야 된다고 말해 주어서, 돌이키게 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어느 장단에 춤춰야 됩니까? 성경 말씀이 각각 다른 말씀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우리 성도님들은 이 두 가지 말씀 가운데서 하나만을 극단적으로 선택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판하지 말라고 했으니, 비방하지 말라고 했으니, 무조건 침묵해 버리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정반대로 너희가 해결하라고 했으니, 사랑, 진리, 진실을 말하라고 했으니, 양극단으로 가고 있는데요. 사실은 여기에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에 큰 핵심이 있다고 봅니다. 욕하고 비방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으로 상대방을 바르게 세우려고 하는 목적이 아니라, 그냥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그 상대방을 회복시키시고 회복시키고 옳은 길로 돌아오게 오는 그런 생산적이고 다시 세우는 그런 건설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 사람을 파괴하고 박살내는 그런 결과가 빚어질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비난과 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그것이 비난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감싸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회복시켜서 다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길 가운데서 “사랑으로 바른 길을 선택”해서 영적으로 선한 길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선택을 우리가 해야 할 것입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는 사랑으로 말한다고 말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독화살이 되어서 상대방을 죽이는 결과가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사랑으로 진실을 말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만들고, 오히려 더 역효과를 일으키는 그런 경우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우리가 고민하면서, 기도하면서, “주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해야 되는지, 우리 가운데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기도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냐면, 마치 부모님처럼 해야 된다고 생각이 들어요. 중2병에 걸린 자식을 보면서, 이 아이에게 말하지 않으면, 이 아이가 잘못된 길로 갈 것 같아서, 말을 해야만 하겠는데, 그런데 말을 하면은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만 같아서, 말을 하지도 못하고, 말을 안 하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면서 어떻게 해야 이 아이의 마음을 가다듬고, 이 아이를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할까 고민하면서, 눈물로 기도하며 말해야 될지 말하지 말아야 될지 고민하면서 그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우리 교회 안에 만일 우리 성도들 가운데 잘못이 있다고 한다고 한다면, 그 잘못은 누구에게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말해버리고, “나는 말했으니까 됐다”가 아니라, “나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결정해서 끝내버릴 것이 아니라, 과연 어떻게 해야 선하고 좋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지혜를 달라고 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리고 엎드리는 가운데 선하고 좋은 결과가 나타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냥 내가 옳은 말을 그냥 해버리는 것은 효과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치명적인 역효과를 가져올 때가 많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지혜를 주시옵소서. 사랑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그런 도움의 역할을 서로가 서로에게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우리 모두가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꿈꾸며 기도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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