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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소식 (왕하 7: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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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문필가인 토마스 칼라일이 했다고 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어떤 말이냐면,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en. 아주 말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 침묵이라고 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이 말이 정말로 맞다고 실감되는 때가 종종 있는데요. 사랑하는 마음에서 했던 말이고, 걱정해서 했던 말인데, 오히려 우리 기대와는 정반대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험을 우리가 많이 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제가 우리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이 아이가 좀 더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고, 좀 더 좀 담대하게 행동했으면 좋겠어서 했던 그 말들이 오히려 그 아이로 하여금 주눅 들게 만들고, 한 발자국도 내밀지 못하도록, 아주 뒤로 물러서게 만드는 그런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 것이 있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차라리 그때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생각한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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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침묵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닌데요. 침묵만 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소통할 수 없고, 대화할 수 없는 것이고, 말하지 않으면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사실 대화를 하고 소통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3장에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말하면서, 전도서 3장 7절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거꾸로 한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잠잠해야 될 때 잠잠하지 못하고 말을 하고, 말해야 될 때 말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며, 거꾸로 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하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지혜를 주시옵소서. 지금이 말해야 할 때인지, 잠잠해야 될 때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진 것입니다. 사실 말이라고 하는 그 힘은 말의 힘은 총과 칼의 힘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고, 더 큰 파괴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야고보서 3장에서는 말을 어디에 비유하냐 하면, 불에 비유합니다. 불. 야고보서 3장 5절에서부터 6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불을 함부로 사용하게 되면 온 집을 태워버립니다. 불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도 불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요. 그렇다고 해서 아예 사용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하려고 하면, 불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고, 사용하되 조심하면서 해야 하는 것처럼, 말도 조심하면서 사용해야 할 텐데요. 말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말 때문에 교회가 무너지고, 말 때문에 이 사회가 무너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했던 아무 생각 없이 던졌던 말 한마디가 낙망하게 만들고 절망적으로 만들고, 또 의기소침하게 만들어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나는 오히려 잘 되라고 한 말인데, 그 말에 상처를 받아서 꼼짝달싹 못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인데,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요. 오래 참아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분노를 참는 것도 참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말을 참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침묵해야 될 순간에 침묵하지 못하고 내뱉은 말 한마디는 다시 주어 담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말을 해놓고 그것을 취소할 수 있는 기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컴퓨터는 참 편해요. 좋아요. 글을 썼다가도 딜리트(delete) 키를 누르면, 지워지는 것이 컴퓨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말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 내뱉으면, 내가 했던 그 말을 취소할 방법이 없습니다. 한 번 활을 쏘면, 그 활시위를 떠난 그 화살이 반드시 날아가는데, 그 날아가는 화살을 궁사가 통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쏜 화살이지만 내가 그 화살을 제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화살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날아가서, 결국에는 과녁을 맞히고, 그리고 그 맞춘 것이 피를 흘리게 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 번 내뱉은 말은 우리가 더 이상 통제할 방법이 없이, 많은 사람들 불특정 다수들에게 치명상을 입히면서 돌아다닌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말을 조심해야 되는데, 정반대로 침묵하는 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말하는 것이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침묵하는 것도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무너뜨리는데요. 어떻게 공동체가 무너지는가? 어떻게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망가지는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정말 하지 말아야 될 그 말들은 아무 제재 없이 말을 하면서, 정말 해야 되는 말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필요한 말이고 정말 중요한 말인데, 그 말들에 대해서는 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목소리를 크게 내면서 악을 선동하는 반면에, 선한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서 침묵하면서, 아무도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지 않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가 삭막해져 가는 것이고 악이 득세하는 것입니다. 사실 침묵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악에 동조하는 것이고, 악이 옳다고 적극적으로 떠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말을 해야 되고 선한 말을 해야 되고, 사람을 살리는 말들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죠.

제가 신혼 초에는 사소한 일로 제 아내하고 많이 싸웠습니다. 저하고 제 아내가 좀 이렇게 화목하게 보입니까? 늘 다퉈 보이는 것 같습니까? 지금은 좀 그래도 나이를 먹었다고 예전보다는 좀 덜 싸우는데요. 신혼 초에는 얼마나 많이 싸웠는지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창피할 정도였습니다.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더라고 한다면, 좀 더 넓게 이해했었다고 한다면, 좀 더 제가 희생하고 희생하고, 좀 더 양보했었다고 한다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것들을 이기적이고 편협한 마음으로 제 아내를 많이 힘들게 하고, 그리고 고생하게 만들었던 것이 너무나도 참 후회되는 일이었습니다.

한참 우리 부부가 많이 싸운 적이 있었는데요. 언제도 싸웠냐면, 우리 꼬마 아이 앞에서도 막 싸웠어요. 아이들 앞에선 싸우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화가 날 때는 그런 거 저런 거 따지지 못하고 그냥 싸웠습니다. 막 소리를 지르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데, 우리 큰 딸아이가 세 살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우리 아이가 울면서 제게 얘기를 했습니다. “아빠, 엄마한테 화내지 마. 차라리 나한테 화내.”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제가 충격을 받았어요.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나?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나? 물론 그 뒤로도 얼마나 많이 더 많이 싸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 아이가 했던 그 말이 우리 가정을 살렸고,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아 이 아이가 우리에게 할 효도는 다 했다 생각할 정도로 너무나도 고마운 말이었습니다.

불이 났을 때, “불이야”라고 소리 질러주고, 강도가 있을 때 “강도야”라고 하는 소리를 질러주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것처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그냥 외면하고 지나칠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는 것이 삶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아무것도 소망이 없고 절망 가운데 있어서, 이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다가가서, 손 한 번 잡아주고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주는 것이 목숨을 살리는 것이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함께 친구가 되어 준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살리는 엄청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인사하고, 따뜻한 눈으로 인사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던지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같이 마음을 열어주고 이야기해서, 이곳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성도를 통해서,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들으면서, 새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그런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읽은 열왕기하 7장 말씀을 우리가 읽었습니다. 특별히 우리 꼬마 아이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럽게 읽어줬는지 모르는데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아주 놀라운 소식을 침묵하지 않은 4명의 나병 환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 4명의 나병 환자들이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아람 진영으로 투항하기로 결정했다가 아람 진영에 가보니까 먹을 것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람 진영에 도착한 이들이 마음껏 먹고 배불리 먹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이 친구들 사이에 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배불리 먹고 행복한 것이 괜찮은 것이냐? 경종을 울리고 있어요. 전화벨을 울리듯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괜찮은 것이냐? 지금 저 성 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내 형제 내 동포가 있는데, 우리만 배불리 먹고 우리만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성경에 있는 표현을 그대로 한번 본다고 한다면, 열왕기하 7장 9절의 말씀입니다. “나병 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이 결단이야말로 엄청난 결단인 줄로 믿습니다. 이들은 지금 침묵하지 않고,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서, 여기에 먹을 것이 있다고 하는 그 복된 소식, 아름다운 소식, 기쁜 소식을 알리겠다고 결단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그것은 이들이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성 안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 굶주림 가운데 있던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놀라운 결단인 것이죠. 이 순간에 침묵을 하는 것은 금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들을 방치하는 죄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성 안으로 들어가서 저 아람 지역에 먹을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해 주고, 모든 사람들이 박수 쳐주고 환영해 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종종 착각하기를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하면 모두가 다 동의해 주고 모두가 다 박수 쳐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우리에게 박수 쳐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아냥거리고 욕하고 우리를 핍박하게 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나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내에서는 절대 그러면 안 되겠는데요. 누군가 헌신하겠다고 하면, 누군가 열심을 내겠다고 한다면, 비아냥거리고 그리고 무시하고 욕할 것이 아니라, 함께 격려하고 함께 도와줘야 되는 그런 교회가 돼야 되고, 공동체가 되어야, 그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나병 환자들이 성 안에 들어가서 저기에 먹을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모두가 환영해 주고, 모두가 좋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들이 가는 그 길에는 반대들이 많이 도사리고 기다리고 있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반대들을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까? 첫 번째는 성전 문지기의 반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나병 환자들이 사마리아 성 안에 들어가겠다고 하면, 성전 문지기들이 들여보내 주겠습니까? 들여보내 주지 않겠습니까? 안 들여보내 줍니다. 나병 환자는 율법에 따라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고, 그 나병 환자들을 이 성전 문제가 문 앞에서 쫓아낼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문지기들이 자기 문지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설명한다고 하면, 이 문지기들이 나병 환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겠습니까? 세상은 참 불공평해서, 힘 있는 사람들의 말에는 별거 아닌 거에도 대서특필하면서, 기울여주고 떠벌려주지만, 정말 중요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사람들 나약한 사람들의 말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아마도 나병 환자들은 그런 실패의 경험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성 안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 자체가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또 거부당하면 어떡하나? 또 우리를 무시하면 어떡하나? 우리가 하는 말을 믿어 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병 환자들은 성 안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지기 문지들이 자신들의 말을 전달했다고 한다면, 왕이나 대신들이 이 말을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이유 없이 강성한 그 아람 군대가 군수 물자 다 놔두고 그냥 퇴각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전하면, 그 말을 누가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사마리아 왕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필시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 성 문을 열게 만들고 우리가 나오면, 공격하기 위해서 매복을 쌓아놓고 그래서 우리가 물자를 가져오기 위해서 나오게 되면, 공격하기 위한 계략에 의해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저는 이러한 의심이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생각을, 그런데 이런 여러 가지 장애 요소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4명의 나병 환자들은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했고, 이 순간에 침묵하는 것이 죄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명을 허락해 주셨는데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목적도 없이 어쩌다 보니까,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선 우리 모두에게 다 사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인데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있게 하신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고, 그 하나님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사명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 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 그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일 겁니다. 우리들에게 이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웃이 누구 우리의 사명이 될 것인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겁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가던 길을 멈추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 되는 것이죠.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 어떻게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 때에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왕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2절부터 43절의 말씀.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을 때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 와서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주인에게 이야기합니다. 왕에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언제 주님께서 갇혔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었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배고프셨습니까?” 그랬다고 한다면 우리가 도와줬을 텐데, 우리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때 했던 왕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 곁에 있던 그 이웃들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는 그 현장에 보내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신가를 분별하면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사명인데요. 내가 만나는 사람 왜 만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어서 만나게 해 주신 것인데, 마태복음 5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하셨으므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때문에 맛있어지고, 우리 때문에 빛이 비치어지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은 그냥 자기들에게 자기들이 먹고 마시고 배 불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순간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저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서 이 좋은 소식을 알리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지금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양식이 없어서 굶주려 죽고 있습니다. 신음 가운데 있습니다. 특별히 코로나19의 상황이 지속되면서 더욱더 영적으로 피폐해져 가고 영적으로 갈급해진 인생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 언제 멸망할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 우리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하나님에게로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는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병 환자들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겁니다. 만일 우리가 아침까지 기다리면 화가 있을 것이라. 복음을 증거 하는 데 장애가 있을 수 있을 것인데, 그러한 사람들이 환영해주고 기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롱하기도 하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영생의 양식을 맛본 자들은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코로나19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합니다. 재정적으로 힘들고 여러 가지 사는 것이 어려워져서 힘들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들에게 더 큰 문제는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주님에게로 가면 거기에는 영적인 풍성한 양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그들을 저 천국의 잔치로 천국의 양식이 있는 곳으로 인도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귀하고 복된 일이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조급하게 할 것은 아닙니다. 조급하고 강제적으로 그리고 무례하게 행할 것은 아니지만, 기회를 보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사랑의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을는지 고민하면서, 우리 가족들에게 우리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저 하늘에 수많은 양식이 있고 이 땅에는 다 굶어 죽어가고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밖에 없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그냥 편안하게 계시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는 그 높고 높은 보좌를 위해서 이 낮고 천한 땅으로 오셔서 베들레의 구유 가운데에 누이시고,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 길까지 가시면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 양식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고 하면, 우리가 먹고 배부르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가 않고, 지금 우리가 이 순간에 침묵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고백하며, 사랑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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