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추격과 하나님의 보호(삼상 23:6-14)

사울의 추격과 하나님의 보호(삼상 23:6-14)

6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 7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8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9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 하는 음모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10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1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12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13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했다는 소식은 사울에게 바로 전해졌습니다. 사울은 이 소식을 듣자 너무 좋아했습니다. 숨어지내던 다윗의 행방이 묘연했는데, 다윗을 찾게 되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일라는 성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문만 걸어 잠그면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때야말로 다윗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의 이 말은 정말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편이 아니라 다윗의 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잘 따른 사람은 다윗이지 사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자의 입에서 가장 신앙적인 것 같은 어투가 튀어나온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 대한 증오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일라가 블레셋의 침공을 당했다는 소식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던 사울이, 다윗을 죽이는 일에는 군대를 동원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앙의 모습뿐인 사울이 불신앙적인 일을 하면서 신앙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신앙적인 말과 표현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적인 표현을 써서 말을 한다는 것이 결코 그 사람이 신앙적인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신앙적인 표현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등등 신앙적인 표현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언급하고, 신앙적인 표현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앙적인 사람이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표현을 잘 쓰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에게 영적인 권위가 있는 것처럼 위장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파워를 행사하려는 사람들일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신앙적인 표현으로 포장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울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잡으러 다니다가 굴에 들어간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굴이 하필이면 다윗과 그의 용사들이 숨어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때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 24:4) 또한 사울이 진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다윗과 아비새가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사울은 그때 보초도 없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아비새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삼상 26:8)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사울을 내 손에 붙이셨도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런 태도는 사울의 태도와는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불신앙적인 사울은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끌어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에게 하나님이란 자신을 위해 봉사해주어야 하는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야말로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 풀려나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일이 잘 풀린 경우는 요나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하여 욥바로 갔는데, 거기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욘 1:3) 하지만 그렇게 일이 잘 풀린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는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당시에는 에봇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다윗과 600명의 용사들은 무사히 사울을 피하여 도망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엄청난 인원을 동원하였지만, 다윗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울은 다시 회개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면 곰곰이 묵상해보아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다윗을 넘겨주지 않으시는지 고민해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런 기회마저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다시 다윗과 사울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 앞에 더 엎드렸습니까? 그리고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왜 원수가 판을 치게 내버려 두십니까?” 하나님 앞에 매어달렸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다윗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응답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는 그 관계를 보여주는 수단이며 척도일 뿐이기에, 그런 상황에서 엎드렸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관계여서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그냥 무덤덤합니다. 재수 없었다고만 생각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앞에 따지지도 않습니다. 사실 따질 수 있는 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기회를 준 것 같은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 판명이 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따졌어야 합니다. 그렇게 따지다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음을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전 글 읽기 – 명목상의 왕, 실질적인 왕(삼상 23:1-5)

다음 글 읽기 – 요나단의 위로(삼상 23:15-18)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를 발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