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나와 함께 있으라(삼상 22:20-23)

20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21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알리매 22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23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

사울 왕은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아무 힘이 없는 제사장과 그 친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헤롯의 모습과 아주 유사합니다. 헤롯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 탄생했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적이 아니라, 사울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동지로 여겼다면 큰 축복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울 왕은 다윗을 적으로 간주해버렸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인류 가운데에는 헤롯 왕도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참 왕이신 주님을 영접했다면 헤롯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적으로 삼아버렸습니다.

사울이 아히멜렉 제사장과 그 모든 친족을 죽이는 그 상황에서 살아남아 다윗에게로 도망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비아달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다윗에게 온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울이 다스리는 나라에 제사장이 존재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울에게서 제사장이 떠나고 다윗에게 와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점점 다윗은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왕의 모습을 갖추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다윗 주변으로 400명의 용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나중에 그 숫자는 600명으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이제 제사장까지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에봇을 가지고 다윗에게로 합류하였습니다.

반면 사울 왕 주변에는 사람들이 떠납니다. 그래서 사울은 한탄한 바 있습니다.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삼상 22:7-8) 다윗에게는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의 물을 떠다 주는 심복들이 있었지만, 사울 왕에게는 그런 충신들이 다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을 품고 가야 하는데, 적대시하게 될 때 제사장은 그를 떠나버린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사울 왕은 신접한 여인에게나 찾아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사람 사이의 관계도 바르게 세워집니다. 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사람과의 관계도 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자만이 이웃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경우,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자 결국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돌변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게 된 후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비아달을 통해서 다윗은 도엑이라는 사람이 제사장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다윗의 반응은 시편 52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는 도엑에 대한 분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결국 감사와 결단으로 끝납니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시 52:9) 이 표현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도엑이 제사장을 죽이는 황당하고 참담한 일이 벌어졌는데, 왜 다윗은 감사하는 표현을 하는 것일까요? 악이 판을 치는 것 같은 상황에서 감사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악인의 결국과 의인의 결국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것을 다 볼 수는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보면서 감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도엑만 바라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사람만 바라보면 감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비아달에게 함께 있자고 제안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삼상 22:23) 결국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피해 있으면서 다윗을 위한 제사장으로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있는 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우리가 피할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재물도 권력도 우리를 보호해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 피하는 것만이 살길입니다.

이전 글 읽기 – 아히멜렉의 처형(삼상 22:11-19)

다음 글 읽기 – 명목상의 왕, 실질적인 왕(삼상 23:1-5)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