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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히멜렉의 처형(삼상 22:11-19)

11 왕이 사람을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12 사울이 이르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13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에게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냐 하니 14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15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하건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16 왕이 이르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17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18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19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사울은 도엑의 말을 듣고 아히멜렉과 그의 가족 85명을 심문하였습니다. 아히멜렉이 다윗과 함께 공모하여 반역을 꾀한 것으로 몰아부쳤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정당하게 항변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의 충실한 신하이며, 사위이며, 호위대장이며, 지금까지 다윗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한 것은 계속해왔던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처형해버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울 왕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만났을 때 신고했기를 기대했습니다. 사울의 종교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임무란 곤경에 처하고 갈급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왕을 호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전을 그저 국가의 전통을 보존하는 사당(祠堂) 정도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만 간주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나와서 회개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은혜를 받고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곳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고 자랑하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목회자에게서는 그러한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울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사울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왕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충신이 아니라, 잘못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어야 충신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상관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친구가 하는 모든 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간다면 말리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죄악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길을 막아야 사랑입니다. 이런 점에서 적어도 이 군인들은 제대로 된 군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도엑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군인들의 항명으로 체면이 구겨진 사울의 편에 서서 순식간에 85명을 죽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잘 찾아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유대인 전체가 곤란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도엑도 그랬을 것입니다. 정당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악을 행하기란 어렵기 때문입니다.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신하의 당연한 도리라는 논리를 댔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설득시켰을 것입니다. 긴급수배 1호인 다윗을 신고하지 않는 제사장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정당화 작업을 거쳤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은 사울과 도엑에게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욕망의 장소였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성직자란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약 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셔서 분노한 것이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는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으셨습니다. 욕망의 도구가 되어버린 성전 대신에, 참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길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울이나 도엑과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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