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광이가 된 다윗(삼상 21:10-15)

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사울을 피해 도망한 다윗은 가드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가드는 블레셋 민족들의 땅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왜 다윗이 이곳으로 도망을 쳐야 했는지 그 이유를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스라엘 전체에서 다윗이 현상금이 걸린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드로 피난하는 것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보자마자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기스 왕에게 말했습니다.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러한 신하들의 보고에 아주 놀라운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다윗을 “그 땅의 왕”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른 것은 아주 신기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은 아직 사울이었기 때문이고, 이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그 현장을 목격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이미 다윗이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아직 왕이 아니었지만, 그가 한 일은 왕 같은 일이었고, 왕의 위엄이 그에게서 드러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도 다윗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거하려고 발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었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다윗은 어쩔 수 없이 왕의 기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의 신하였지만, 이미 그 속에 왕의 기품이 있었고, 도망자의 처지였지만 이미 다윗에게는 왕의 기품이 있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지역에 들어갔지만 역시 그 순간에도 왕의 기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게 우리가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해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우리가 이미 다윗처럼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아직 양치기 홍안의 소년이었을 때, 이새의 아들로, 여러 형들의 막냇동생으로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한 소년이었을 때, 하나님은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 이후로 다윗은 어디를 가든지 왕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울의 궁전에서 사울의 신하로 채용되었지만, 다윗은 왕 같은 일을 했습니다. 악기를 타면서 사울의 어그러진 정신을 온전하게 하는 일, 그 일은 왕의 일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아무도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싸울 수 없었고 벌벌 떨고 있을 때, 다윗은 왕처럼 나가서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어그러지고 망가진 것들을 바로 잡는 정치(正治)가 정치(政治)인 것이고, 그런 정치(正治)를 하는 자가 바로 왕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을 모르는 블레셋 사람들조차도 다윗을 왕으로 부른 것입니다.

외적인 모습이 왕이어야 왕이 아닙니다.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자리에 앉아있는가가 왕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사는가가 왕임을 결정합니다. 다윗처럼 신하의 위치에 있어도 왕의 일을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사울처럼 왕의 자리에 있어도 왕일 수 없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왕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우리가 다스려야 할 왕의 통치 영역입니다.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우리가 다스려야 할 바로 그 영역에서 왕처럼 다스릴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거지 같은 환경이라고 해서 좌절할 것이 아닙니다. 참된 왕은 어디에 있든지 왕으로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피난의 자리에서도 왕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왕으로 사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종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종으로 사는 사람은 내가 원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시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지못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짜증 속에서, 불만 속에서 일을 합니다. 하지만 왕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남이 시켜서 할 수 없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짜증 가운데 일을 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일을 합니다.

어머니는 그런 점에서 가정의 왕입니다. 자녀들을 돌보는데,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자녀들을 위해서 희생적인 일을 합니다. 그동안 수많은 목회자와 함께 일을 했는데, 두 종류의 목회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종류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도대체 왜 목사가 됐는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로 일하는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사역을 하는 것을 짜증스럽게 생각하고, 일을 더 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자신이 일을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기를 원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런 목회자를 보면서 저 사람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일을 하기 싫어하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없어지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이 막다른 광야에 서 있는 것 같은 것을 발견하고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종으로 살지 말고 왕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돈의 종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일하게 되면, 기쁨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명예의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의 종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줄 때에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박수가 없으면, 이내 무너져 버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왕으로 사는 길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2-23).

다윗은 왕으로서 살았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왕처럼 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왕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울 왕의 미움을 당하게 되었고, 블러셋 가드 지방에 가서도 신분이 노출되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가드에 가서 조용히 숨어지내려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평범하게 차려 입어도 다윗은 금방 노출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날처럼 사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윗의 몽타주가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놀랍게도 쉽게 포착되었습니다. 단지 전쟁할 때 멀리서 보았던 얼굴이니까 그 얼굴을 잊을 법도 한데, 사람들은 쉽게 알아본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이 탄로가 나자 다윗은 즉시 꾀를 내었습니다. 갑자기 미천 척을 하였습니다. 대문짝에 끄적거리며 침을 질질 흘리는 연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기스 왕은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화를 냈습니다.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이 당시에는 미친 사람을 두려워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정신병으로 취급하고 병원에 입원시키겠지만, 당시의 문화에서는 어떤 악한 영이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귀신이 들린 사람은 상대하는 것보다는 피하는 것이 당시의 문화였습니다. 그래서 아기스 왕은 다윗을 내쫓았습니다. 다윗은 또 한 번 블레셋 사람들을 이겼습니다.

다윗은 이 순간에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골리앗의 칼을 들고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전에 다윗은 혼자서 블레셋 군인들 200명을 죽이고 양피를 가져다가 결혼 지참금으로 대신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순간에 그런 전투를 하려면 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전의 경험에 의지해서 싸울 수 있었지만, 다윗은 싸우는 방법보다 피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미천 척해서 위기를 벗어났고, 싸우지 않고 상황을 극복해내었습니다.

신앙적인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영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만이 최상의 방법은 아닙니다. 때로는 피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방법도 한편으로는 너무 약한 것 같습니다. 전에는 병자를 고치고, 떡을 만들어 먹이시고, 풍랑도 잠잠케 하셨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 유대인의 왕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열두 영이 되는 천사들을 명하여 이 위기를 넘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승리의 길이었고 그 길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시편 56편은 다윗이 가드에서 잡혔을 때 쓴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보면 사무엘상의 표현과는 달라 보이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사무엘상 21:12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시편 56:11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두려워했던 것일까요?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사실 이것은 서로 다른 표현이라기보다는 다윗의 심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무엘서는 서술형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다윗의 심리상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가드 왕과 신하들 앞에 끌려가게 되었을 때, 다윗의 마음에 실제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무엘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은 다윗 마음의 결심과 다짐과 의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결심이고, 그렇기에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믿음으로 가지고 사는 것은 감정적으로 아무런 두려운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아무리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운 마음이 들거나, 좌절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 슬픈 마음이 드는 것 등등 이런 감정들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런 감정들은 주님께서도 가졌던 감정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는 통제할 수 있지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슬픈 일을 만나면 슬픈 감정이 생기게 되어 있고, 무서운 일을 만나면 겁이 나게 되어 있고, 화가 날 만한 일을 만나면 화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앞 탁 막혀버린 커다란 절벽 앞에서는 좌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인데도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미성숙한 사람일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그런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기에 그런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외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어쩌면 우리는 다윗이 만난 상황과 같은 일들을 만납니다. 그럴 때 무섭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안한 마음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주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이게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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