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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표징(삼상 14:1-10)

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2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4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5 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8 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9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10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이러한 상황이면 겁에 질리고 사기가 떨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전혀 블레셋 민족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블레셋 민족과 싸우러 나간 한 사람이 등장입니다. 그 사람은 요나단이였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정예요원 병사들을 데리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단둘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기습작전을 펴서 블레셋을 혼란에 빠뜨려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뻔히 보이는 길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요나단은 전쟁의 승패가 군사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면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요나단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14:6).

그러면서 요나단은 징조를 기다렸습니다. 만일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가 너희에게로 갈 테니 거기서 기다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올라가면 안 된다는 징조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에게로 올라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넘겨주실 것이라는 징조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블레셋 사람들이 이리 올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승리를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요나단의 칼에 블레셋 사람 200명이 쓰러졌고, 블레셋 사람들은 공포에 떨게 되었습니다. 요나단만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흔드셨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공포 가운데 블레셋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전쟁하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수적으로 열세이고, 전투력 면에서는 열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아주 통쾌합니다. 마치 스포츠에서 지고 있다가 역전승을 하는 것을 볼 때처럼 짜릿한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이야기는 수적으로 열세인 편이 항상 이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일반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대체로는 힘이 있는 자가 이기는 것이고, 전략적으로 강한 군대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섣불리 공격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눅 14: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계산상 전혀 불가능한 것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누가 망대를 세우려 한다면, 먼저 자신의 재정이 준공하기까지 충분한지 먼저 따져보아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눅 14:28-30). 그러니까 요나단이 블레셋 군대와 싸운 이야기를 읽고, 또한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기적과 같은 스토리들을 읽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무조건 밀고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는 가운데 무리하게 추진했는데, 결국 기적적으로 교회당도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간증들을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간증은 오직 성공한 경우의 이야기들만 들릴 뿐입니다. 실제로는 무리한 교회당 건축으로 인하여 교회는 풍비박산되고 지어놓았던 교회당은 이단들에게 경매로 넘어가 버린 경우들도 많습니다.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믿고 교회를 개척하였지만, 90% 이상의 교회들이 얼마 가지 못해서 문을 닫아버리게 됩니다. 모두 무모하게 추진했다가 실패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도 가지고 계시는 공유적인 속성입니다. 지혜롭게 계산해보고 판단해보는 것은 비신앙적인 것이 아니라, 건전한 것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내에서 상식이 사라져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맹신이 판을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상식과 원칙은 비신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과 불신자의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들의 계산 속에 하나님을 넣는가 넣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요나단이 강력한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서 물리친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아닌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가면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을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셨고, 그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가져갔던 언약궤는 블레셋 민족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충분히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실 수 있었지만,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소망대로 움직여주시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전제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간구해야 하고, 의심하지 않아야 하며, 정욕으로 구해서는 안 되고, 죄를 지어서는 안 되며, 도중에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원리들이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편에서 어떤 공식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어주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밀번호만 잘 입력하면 우리가 어떤 용도로 인출하는지 묻지 않은 채 내어주는 현금자동지급기(ATM)와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방법보다는 우리의 목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응답의 비결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요나단의 경우 막무가내로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게 해주실 것인가에 대해서 민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겠다고 한다면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지 않는다면 전투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 해주실 것인가에 대한 표징을 얻기를 소원했습니다. 요나단은 그 표징을 블레셋 사람들의 반응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만일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내게 넘기시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만일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가 갈 테니 거기서 기다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넘기시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이런 비슷한 예들이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을 위해 신붓감을 찾으러 나홀의 성에 갔을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만일 물을 길러온 처자 중에서 내가 물을 달라고 요청했을 때, 나에게 물을 줄 뿐만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준다면 바로 그 처자가 하나님께서 이삭을 위해 정하신 사람으로 알겠다고 한 것입니다(창 24:12-14). 사사기를 보면 기드온의 경우도 이와 비슷합니다. 기드온은 양털 한 뭉치 위에 이슬이 내리고 주변이 마르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로 보겠다고 했습니다(삿 6:37).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요청대로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기드온이 또 요청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주변에 이슬이 젖는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것으로 알겠다고 한 것입니다(삿 6:39). 이런 방법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나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날 우리들은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그런 방법들이 사용되었던 것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몇몇 선지자들에게 또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몇몇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때 사용된 방법들이 제비뽑기, 우림과 둠밈, 그리고 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성경 66권 속에 온전히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혼 상대자로 이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직원을 뽑을 때 어떤 사람을 뽑을 것인가, 직장을 선택할 때 어느 직장을 선택할 것인가, 예배당을 지을까 짓지 않을까, 우리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할 때 어떤 분으로 할 것인가 등등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방법을 통해서 선택하곤 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나름대로 얻었고, 그래서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항상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일일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주셨던 것은 아닙니다. 아주 예외적으로 특별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보여주셨을 분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성경 66권 가운데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에, 이제는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사용하여 선택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부부가 오래 같이 살다 보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너무나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기도 제목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표징이 없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사실 우리들의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성으로 가득 찬 우리가 그 양심의 소리를,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억누르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담대하게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내일 아침에 비가 오면 이것을 추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러나 내일 아침에 해가 쨍쨍하게 비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하나님을 나의 일을 결정하는 것에 끼워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의 말은 이런 식으로 결정하는 것이 괜찮은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 왕은 제비뽑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게 누구의 책임인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을 제비뽑기로 뽑습니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것에 매여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의 방법이 주효했던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려 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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