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같은 상황에 우리가 처한다면, 우리는 실망하게 된다. 나는 사랑하나, 오히려 나를 대적하는 그 모습을 볼 때, 마치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종 마음을 수련하면 그런 것이 아무렇지도 않고 괜찮을 것이라고 하는 종교나 유사종교의 주장을 듣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마음이 평안하다는 것은 오히려 잘못이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질 수만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낙심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실망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반응에 대한 안타까움과 마음의 아픔을 의미한다면, 낙심은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의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적지 않게 실망했을 것이다. 자신이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는데, 오히려 잘못된 길로 들어서버린 교회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안타깝지 않았다거나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태연할 수 없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바라보면서 실망했을 것이고,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을 것이다. 실망감(discouragement)과 좌절감(frustration)이 바울 사도에게 없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표현한 사랑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낙심(losing heart)한 것은 아니었다(고린도 전서 4:1). 바울 사도는 자신이 행하던 사역의 열매가 초라한 것을 바라보면서, 적지 않게 실망했고 좌절감을 느꼈을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열정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사역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실망할 수 있으나 낙심하지 않는 것이고, 좌절감을 느낄 수 있으나 그것 때문에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더 위험한 것은 실망감을 느끼는 것이나 좌절감에 휩싸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열정을 잃는 것이다. 실망감이나 좌절감은 우리가 가지는 사랑의 깊이가 크면 클수록 비례하여 커질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의 크기를 줄이면, 그에 비례하여 실망감과 좌절감도 줄어들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망감도 없고, 좌절감도 없다면, 그것은 안전한 것도 아니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자식이 상팔자와 같은 것이다. 내 열정을 다해 사랑할 자식이 없다면, 자식 때문에 고난을 당할 일도 마음이 아플 일도 없다. 하지만 나는 고난이 있더라도, 자식을 사랑하고 싶다. 목숨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사람은 목숨을 바칠 만한 대상이 없어서 안전한 사람보다는 훨씬 행복한 사람이다. 만일 적당히 사랑하기로 결심한다면, 그에 비례하여 실망감이나 좌절감도 적절하게 없어질 것이다. 아니 아예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다면, 사랑 때문에 아픔을 겪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사랑을 대상을 없애버리거나 사랑의 정도를 줄임으로써 사랑이 가져오는 아픔을 애써서 회피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실연의 아픔을 겪는 사람은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라 결심하는 것을 보았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다가 아픔을 겪은 이후로는 더 이상 이제는 교회로 인하여 아픔을 겪지 않으리라 결심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아마 그들은 더 이상 사랑이 주는 아픔을 겪을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사랑이 주는 참된 기쁨도 맛볼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러한 사랑의 아픔을 견디는 것이다. 비록 사랑 때문에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래서 적지 않게 실망하게 되고 적지 않게 좌절감을 느끼게 되더라도,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끝까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사랑이다.
* 다음 글 읽기 – 견디는 것은 그 자리에 있는 것
* 이전 글 읽기 – 사랑을 하자는 데 왜 고난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