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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교회와 정치 (계 14:12 [12:1-14:20])

오늘은 요한계시록 12장, 13장, 14장 석장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그림을 보면 좋겠는데요. 바다에서부터 어떤 짐승이 올라오고, 또 연이어에서 땅에서부터 짐승이 올라오게 되는데, 이 짐승은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면 죽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도들을 미혹하고, 특히 이마나 오른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면, 매매도 할 수 없게 한다고 하는 그런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치워도 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이 말씀을 미래적 관점으로, 예언적 관점으로 이 말씀을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이 이야기는 미래의 어느 시기에, 종말의 때에, 사람들을 핍박하고, 특히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그런 무서운 존재인 짐승이라고 하는 존재가 나타날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 살고 있었던 우리들의 일상이 다 깨어져버리고, 짐승에 의해서 고통받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하는 이 예언은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면, 만일 이런 시기가 온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순교를 각오하더라도 우리들의 이마나 오른손에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거부해야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설교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짐승의 표를 받아 지옥에 가는 것보다, 그것을 거부하고 항거하면서 순교하는 것이 훨씬 더 낮기 때문에, 만일 이런 짐승이 나타나서 이런 짐승의 표를 받게 만든다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 항거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주장들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들으실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 주장들을 많이 들어보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시는 걸 보니까, 많이 들어보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짐승이 언제 나타날 것인가? 666이라고 하는 숫자를 가진 짐승이 나타나서,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는데, 그 짐승이 언제 나타날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또 한 번 그림을 보여주시면 좋겠는데요. 짐승, 적그리스도, 사탄을 의미하는 이 666이라고 하는 것은 rfid 칩이 내장된 카드를 의미한다. rfid라고 하는 것은 “무선 재고 관리 시스템”입니다. 그런 칩이 내장된 카드가 도래하는 것은 바로 적그리스도가 온 것이고, 아니면 베리칩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칩을 사람의 몸에 심어 넣는 것이 곧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원래 이 베리칩이라고 하는 것, 파지티브 아이디(positive id)라고 하는 것은 애완용 동물이나 가축 관리를 위해서 삽입했던 그런 전자 인식표에 해당하는 것인데, 사람들에게도 사용을 허가해서 지금 난리가 난 겁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심도록 그렇게 미국 fda에서 승인을 했는데, 이런 것을 맞으면, 우리가 짐승의 표를 맡는 것이니까, 절대로 거부해야 된다 이야기하고 있고, 지금은 한 물 가기는 했습니다마는, 666 바코드라고 하는 것, 바코드도 666에 해당하고 qr 코드라고 하는 것도 666에 해당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을 사용해서도 안 되고, 받아서도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주장들을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은 아주 우리 기독교계에 아주 널리 퍼져 있는 그런 내용인데요. 이런 이야기들이 널리 퍼지게 된 데 아주 많은 공언을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우리가 잘 아는 송명희 시인입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가진 지식 없으나,”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던 그 송명희 시인이 쓴 소설 가운데 하나가 <표?라고 하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이 <표>라고 하는 제목의 소설 내용이 뭐냐 하면, 바로 요한계시록 13장의 이야기를 가지고 소설을 만든 겁니다. 마지막 때에 짐승이 나타나서, 우리들에게 짐승의 표를 맞게 할 텐데, 그것이 바로 바코드이기도 하고, 베리칩이기도 하고, rfid라고 하는 걸 맞게 하는데, 이걸 맞게 되면, 우리가 지옥에 가게 되니까, 절대로 맞아서는 안 되고, 거부해야 하고 순교를 각오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책이 바로 송명희 시인의 <표>라고 하는 소설입니다.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이런 비슷한 소설이 나왔는데요. 팀 라헤이, 제리 젠킨스라고 하는 소설가들이 쓴 <레프트 비하인드>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책이 여러 권으로, 아주 대하소설처럼 그렇게 만들어져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한참 동안 베스트셀러로 팔린 그런 소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제8장에 <마크>라고 하는 그런 제목의 책이 있는데, 그 내용도 역시 똑같은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의 이야기를 들어서, 마지막 날에 이런 짐승의 표를 우리가 받으면 안 되고, 우리는 이런 것들이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거부해야 된다 하는 그런 내용들이 소설로도 많이 나와 있어서, 아마 우리 교인들 가운데 이런 주장들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고, 또 우리 주변에서도 전단지를 통해서, 이런 거 받지 말라고 하는 그런 전단지들도 집에 많이 배포되었을 것이고, 또 길거리에 나가다 보면, 한옥마을만 가도, 거기에 가도 사람들이 나와서 관광객들에게 “제발 베리칩 맞지 마세요” 하면서 전도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한마디로 이런 주장들은 엉터리 주장입니다.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주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666이라고 하는 것,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의 표를 666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rfid나 베리칩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정당한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2천 년의 역사 가운데 666이라고 하는 것을 이것이 666이다라고 말해왔던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동안에 이게 666이라고 말해져 왔던 것들의 예를 제가 불러드리겠습니다. 666이 무엇이냐? 로마 제국이 666이다. 네로 황제가 666이다. 천주교가 666이다. 교황이 666이고, 16세기 17세기의 인도주의적 박해 단체였던 프리메이슨이 666이고, 이스라엘의 수상이 666이며, 이슬람의 지도자가 666이고, 락앤롤 이런 하드록 음악이 666이고, 펑크 뮤직이 666이고, 보드카 술이 666이고, 에너지 드링크 몬스터가 666이고, 히틀러가 666이고, un이라고 하는 기관이 666이고, 미국의 대통령이 666이고, 워싱턴에 있는 기념탑이 666이고, 유럽연합이 탄생했는데 그 유럽연합이 666이고, 김일성이 666이고, 인터넷이 666이고, 컴퓨터가 666이고, rfid 베리칩, 바코드, qr 시스템 이런 것들이 다 666이다. 지금까지 주장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666이라고 지목된 것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다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은 다 666이라고 붙인 거죠.

이렇게 마지막 날에 나타날 666에 대해서 이렇게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아무런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관점에서 비롯된 것인데요. 사실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는 것을 바라볼 때,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보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볼 때, 주로 어떻게 보냐면, 이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들에 대해서 예언해 주는 책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걸 바로 가리켜서 미래적 관점, 혹은 예언적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게 예언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럼 어떤 관점으로 요한 계시록을 바라보아야 되는가? 요한 계시록을 바라볼 때 요한 계시록을 거울로 바라봐야 됩니다. 거울. 거울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보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오늘날 교회에 오기 위해서, 오늘 교회에 오기 위해서 옷을 차려 입고 화장을 하고, 여러분들은 어디 앞에 섰습니까? 거울 앞에 섰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옷 입은 것이 내가 화장한 것이 어디 잘못된 것은 없을까? 내가 나를 볼 방법이 없기 때문에, 거울 앞에 서면 내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울 앞에 서게 되는 겁니다. 요한 계시록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영적인 거울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우리가 만나는 현실만이 눈앞에 보입니다. 우리가 만난 그 어려운 일들만이 눈앞에 보입니다. 그래서 그 현실만을 바라보고 고통스러워하고, 현실만을 바라보고 정말 무너져버릴 수밖에 없는데, 그런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영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거울을 비추어주신 겁니다. “너희들의 모습을 한번 봐라.” 지금 이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그 일들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인 차원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영적인 측면에서 여러분들의 상황을 쳐다보라고 보여주신 거울이 바로 요한 계시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이 안에 예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측면도 조금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적인 거울”이라고 보는 것이 제대로 되는 관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비유하자면 “미술 치료”에 비유할 수가 있겠습니다. 제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보니까, 어떤 미술 치료하시는 분이 어떤 꼬마 아이에게 그림을 그려서, 그림을 한번 가족을 표현해보라고 하는 그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번 그림을 한번 보여주시죠.) 어떤 꼬마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데 가족들을 표현할 때 “물고기로 한번 표현해봐라.”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 꼬마 아이가 어항에 있는 그러한 물고기로 자기 가족을 표현했습니다. 엄마를 어떻게 표현했냐면, 커다란 문어로 표현했습니다. 아빠는 어떻게 표현하냐면, 저 밑에 있는 그런 메기로 그림을 그려놨습니다. 막내 동생은 조그마한 문어, 둘째 동생은 위에 떠 있는 물고기, 그리고 나 자신은 수초에 가려져서 반절만 빼꼼 보이는 꽃게로 그려 놓았습니다.

장현정 미술치료 전문가가 상담했던 내용 중에 하나인데요. 이 꼬마 아이가 자기 가족을 표현할 때 왜 이렇게 그렸을까요? 장현정 미술치료 전문가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를 문어로 그려놓은, 큰 문어로 그려놓은 것은 엄마가 정말 자기 집안의 모든 것들을 다 간섭하고, 다 주무르면서, 모든 것을 다 참견하는 오지랖 넓은 엄마의 모습 때문에 저렇게 그렸다는 거예요. 아빠는 왜 저렇게 그렸는가? 집안일에 별로 관심이 없고,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그런 메기의 모습으로 아빠를 그려놓은 것이죠. 다른 것들은 뭐 설명할 수 있겠지만, 자기 자신을 왜 꽃게로 그려놓았는가? 나는 부끄러움이 많고 조용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 나가고 싶지 않아서, 수초 가운데 숨어 있는데, 그런데 누군가 나를 건들기만 하면, “콱 물어버릴 거야”라고 웅크리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이죠. (이제 치워도 됩니다.)

이 아이가 이렇게 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 훗날 우리가 살다 보면 문어가 나타날 것이고, 물고기가 나타날 것이고, 꽃게가 나타날 거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그린 것이 아닙니다. 이 꼬마가 이런 그림을 그린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바라보는 가족의 모습을 물고기로 표현한 것이죠. 엄마는 이런 모습이구나. 아빠는 저런 모습이구나. “나는 어떤 모습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그려놓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요한 계시록이 무엇이냐?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미술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지금 성도들이 사도 요한이 힘들게 힘들게 이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처한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지금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힘들게 살아가고 있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사도 요한에게,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들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다” 하면서, 그림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너희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이런 모습이다. “잘 봐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보여주면서, 우리의 상황이 저런 상황이구나. “우리가 지금 저런 모습 가운데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거울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두 짐승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런 짐승이 나타나겠구나.”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핀트를 잘못 맞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여인과 용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임신한 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다 되었는데, 붉은 용이 나타나서, 만일 그 여인이 아기를 낳기만 하면, 그 아이를 삼켜버리려고 도사리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결국 그 아이를 출산하게 됐습니다. 해산하게 됐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 아이가 누군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한 남자를 낳게 된 것이죠. 용은 그 아이를 죽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물을 통하여서 떠내려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땅이 벌려서 입을 벌려서, 그 물을 삼킴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과 아기는 무사하게 보존이 됩니다. 용이 죽이려고 했지만, 광야로 도망가서 1260일 동안 그 아이를 보호하면서 기르게 됩니다. 미가엘 천사와 용이 싸우는데 노래합니다. “즐거워하라. 땅과 바다는 화 있을 것인데, 마귀의 때가 얼마 남지 아니했다”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지워도 됩니다.)

이 요한계시록 12장은 무슨 이야기일까요? 어떤 이야기일까요? 요한계시록 12장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예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았을 때, 그 탄생은 정말 위험한 탄생이었습니다. 헤롯왕은 동방박사들에게 어디서 태어날까를 물었고, 그래서 헤롯왕은 이 아기를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남자 아기들, 두 살 아기의 모든 남자 아기를 죽일 정도로 엄청난 위험의 상황 가운데 있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나요? 살았나요? 살았습니다.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요셉의 가정을 애굽으로 인도하셔서, 그래서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된 겁니다. 그 이야기를 판타지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계시는 거죠.

예수님이 죽을 수 있었던 그런 위험 가운데 있었지만, 결국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던 그 사건을 판타지의 그림으로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초대교회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구원이 망해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이 구세주 만유의 주를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셨고, 결국 이스라엘 온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실패하지 않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죠.

이제 요한계시록 13장에 한번 가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가면 짐승 두 마리가 등장합니다. 한 마리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고, 또 한 마리는 땅에서부터 올라온 짐승인데, 용이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짐승에게 주어서, 그 짐승이 각 민족과 백성들을 다 다스리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다 죽이기도 하고, 신성 모독을 하기도 하고, 그리고 이 짐승이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한 사람들은 죽이기도 하고, 온 세상을 지배하는 모습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자 이제 지워도 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 두 짐승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 때가 되면 짐승이라고 불리는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언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초대교회 성도들이 만나고 있는 상황을 짐승으로 상징해서 알려주고 있는, 지금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성도들은 지금 박해를 당하고 있고, 초대교회가 지금 힘들고 어려운 그 고난 가운데서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그려주고 있는 겁니다. 이 짐승들이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서 권세를 가지고서, 폭정을 일삼고 있는데, “그 폭정을 일삼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원래 유태인들의 복장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의 복장을 보면 이런 식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시커먼 성구함이 달려 있는데요. 히브리말로 테필린이라고 하는 것을 머리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손에는 검은 띠를 띠고 있습니다. 테필린이라고 하는 것은 성구함이라고 번역할 수가 있겠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말 성경에서는 뭐라고 번역했냐면 “경문”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마태복음 23장 5절에 “사람에게 보이고자 사람들이 경문의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해놨는데, 이런 번역은 쓴 엉터리 번역이죠. 하나마나한 번역이에요. 경문이라고 하는 말을 알지도 못하는 단어인데, 그런 말로 번역하면 누가 이해를 하겠습니까? 쓴 엉터리 번역이죠. 번역을 하려면, 뭐로 번역하는 게 좋겠습니까? 성구함으로 번역하면 쉬운데, 왜 경문이라고 번역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아무튼 유대인들은 이 성구함이라고 하는 테필린을 머리에 이마에 메어 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메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신명기 6장 8절의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명기 6장 8절에서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다가 미간에 붙이고, 이마에 붙이고 표를 삼았는데, 그 성구함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 뭘까요? 신명기 6장 4절 5절 말씀을 넣어서 그 안에 넣어놓은 겁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하는 말씀을 적어서, 이마에다 붙이고 다니는 게 바로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팔에다 띠를 띠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의미로 띠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짐승이 나타나서 그런 성구함 떼어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그 성구함을 떼어버리고, 뭘 붙이라고? 짐승의 표를 이마에 붙이라.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 섬겨봤자 아무 의미 없다. 예수님 믿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이 세상에서 살아나려면, 사탄에게 복종하고, 이 세상 권력에 복종해야 먹고살 수 있는 것이지, 이 세상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죽을 테니까, 내 명령을 듣고 살아라고 하는 그런 의미예요. 그 짐승의 표를 머리에 붙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그러니까 이것은 바코드나 rfid나 베리칩이나 하는 것을 붙이는 것을 의미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이 세상 악에 순종하며 살라고 하는 영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거겠습니까? 영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는 인을 찍어서, 소유주가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에게 속했다고 하는 그 인을 떼어버리고, 짐승에게 속하게 되는 인을 붙여야 살 수 있다고 하는 그 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 실제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우리가 신체에 심었느냐? 말았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압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문자적으로 어떤 표를 붙여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주님의 인을 받는 것이 되는 것이지, 그게 아닌 어떤 것을 사용한다든지, 사용 안 한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계시록 13장에서 전달하려고 하는 그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두 짐승이 나오는 이 그림을 통해서, 지금 현재의 상황이 마치 짐승이 나와서 설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상황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거울로 우리들에게 비추어주셨는데, 이 거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시려고 하는 주님의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짐승들이 아무리 날 뛴다고 하더라도, 이 짐승들이 무한대로 설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기간은 정해져 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끝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14장에 넘어가면서 말씀해 주듯이, 아무리 짐승의 세력이 크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짐승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승리합니까? 하나님이 승리하신다는 것이죠.

요한계시록 14장의 그림을 한번 보겠습니다. 짐승이 지나간 후에 어린양은 시온산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24 장로들 앞에서 14만 4천 명이 하나님 앞에 찬양을 올리는데, 큰 우레 소리, 맑은 물소리, 거문고 타는 소리와 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그때 천사 하나가 나타나서 말합니다. 모든 민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 복음이 뭐죠? 기쁜 소식이죠. 모든 사람들에게 전할 기쁜 소식이 있는데, 심판의 시간이 왔다. 짐승들이 끝까지 영원히 설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때가 왔으니,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라고 노래합니다.

두 번째 천사가 나타나서 노래합니다.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도다.” 바벨론이 지금 온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줄 아는데, 그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천사가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세 번째 천사가 나타나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이마의 표를 받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받을 것이고, 그리고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신앙생활하다가 고통을 당해서 죽어도, 그걸로 실패가 아니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돌보실 거라고 하는 메시지를 하고 있는 것이고,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나서, “이제 때가 되었으니, 낫을 휘둘러 이제 거두소서.” 다른 천사가 말을 합니다. 이제 진노의 포도주를 포도즙 틀에 던지니, 모든 피가 1600 스타디온에 퍼진다고 하는 그런 노래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해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리 짐승의 세력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계획이 승리하게 될 것이고, 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승리로 이끄신다고 하는 그런 메시지입니다. (없애주셔도 좋겠습니다.)

짐승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위협하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거에 대한 대답을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답은 아무리 세상의 위협이 무섭다 할지라도, 짐승에게 굴복하며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위협 앞에 굴복하며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무리 이 세상의 위협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그 이 세상의 위협에 맞짱 떠서 그들과 싸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가만히 읽어보면, 지금 저기 무서운 짐승이 나타났으니까, 저기 저 무서운 세력이 있으니까, “성도들아, 너희들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무장을 해서 저 짐승과 싸워라”라고 권면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 정권과 싸워서, 그들을 장악하고 그들을 이겨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요한 계시록에서 들려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지금 엄청난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들과 싸워서 이기라고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켜라.” 인내하며 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 말씀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으니,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우리를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바로 그 악한 세력들 짐승의 세력들과 맞짱 떠서, 싸워서 극복해서 우리의 권리를 차지하고, 우리의 신앙의 자유를 차지하고, 우리가 승리하며 나갈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말고 살아가라”라고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성도들은 복음을 많이 오해해 왔습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종종 정치적인 언어로 표현이 돼 왔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황제가 있는데, 복음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황제가 진짜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시고 하나님이 주이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만왕의 왕이시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이고, 이 로마 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성경에서 이야기해 주고 있기 때문에, 복음의 메시지는 정치적인 메시지로 항상 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해해 버렸습니다. 신앙이 무엇인가? “정치적인 운동이구나”라고 오해를 한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5천 명에게 떡을 먹이셨을 때, 그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5천 명의 사람들에게 떡을 먹이시는 그 장면을 보고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야말로 다윗의 나라가 회복되었구나. “다윗의 왕조를 재건할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옛날 모세가 우리를 애굽 땅에서부터 인도해내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셨는데, 예수님께서는 제2의 모세가 되어서, 만나를 내려주었던 모세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떡을 주시는 것이니까, 예수님께서 제2의 모세가 되어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우리를 저 압제로부터 구원하시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거기서 아멘 하면, 안 돼요.)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예수님을 임금 삼고, 쿠데타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보면서, “고맙다. 너희들아. 너희가 내 마음들을 잘 아는구나.” 하면서, 그들과 함께 쿠데타를 도모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피하여 숨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 복음을 오해하고 있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정복해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런 나라를 쿠데타로 일으키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에 빌라도의 재판정 앞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는 그 빌라도의 질문 앞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빌라도 앞에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오해하였습니다. 복음을 어떤 식으로 오해했냐면, 십자가의 방법으로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복음인데, 그 복음을 오해해서 우리가 악의 세력을 무찌르고, 악의 정권이 있다고 한다면, 타도해버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력으로 이룰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게 복음일 것이라고 오해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십자군 운동입니다. 십자군 운동에 대해서 아마 세계사 시간에 공부를 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십자군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1095년부터 1492년까지 약 400년 동안 기독교와 이슬람교도들이 싸웠던 전쟁이 십자군 전쟁입니다. 유럽에 있는 크리스천들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어요. 왜냐하면, 저 성지 팔레스타인이 바로 휴교도들 이슬람교도들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 성지 예루살렘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바로 그 지역이 이슬람교도들의 본거지가 돼 있고, 이슬람교도들이 성지를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에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유럽의 크리스천들은 십자군에 참여하라고 하는 정치인들과 그리고 그 십자가를 이용해서 장사를 해 먹고 싶은 후추를 싸게 공급받기를 원했던 장사꾼들의 선동에 성도들은 속아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믿음이 좋았지만 무지했던, 유럽의 성도들은 십자군으로 자원을 했고, 그래서 십자군이 되어서 이슬람교도들과 전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400년 동안 1차 2차 3차 4차 5차 6차 7차 8차 9차 수많은 십자군 전쟁을 했는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실패해버렸습니다. 다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도와주셨습니다. 무력으로 복음을 확장시키고, 무력으로 이슬람교들을 없애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던, 그 십자가 운동은 복음적이고, 신앙적인 운동처럼 생각이 되었지만, 사실은 정치인들과 장사꾼들의 속임수에 놀아난 어리석은 성도들의 움직임이었을 뿐입니다.

무력으로 복음을 확장시키거나, 무력으로 복음의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폭력적인 세상에 상당 기간 살게 되면, 우리도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기 쉽다. 특히 우리의 대의의 명분은 옳고 상대방이 악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 때 더욱 그렇다.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기가 쉽다. 뜨거운 열심이 있을 때, 그럴 위험이 더욱 크다. 사도 요한은 인내하라는 권면을 주면서, 거기에다 폭력에 호소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를 달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즉 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겁이 나서 순순히 응하는 것 못지않게 나쁜 것이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도 얼마든지 처할 수 있는 한 폭력적인 장면에서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적을 죽이는 것은 바다짐승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의 방법이 아니다. 우리에게 속한 것은 인내와 믿음이다.” 멋있는 말입니까? 제가 하면 멋이 별로 멋이 없는데, 유진 피터슨이 하니까 멋있어 보이네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1세기 성도들이 살던 그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오고 땅에서 올라오는 그런 환상을 보여주는 것에서 알 수가 있듯이, 우리를 위협하는 세력은 전방위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너무 힘들면, 이곳을 피하면 괜찮을까? 아니에요. 이 엄청난 고통의 자리에서 내가 피해버리면, 이곳을 떠나버리면 행복한 곳이 있을까? 그렇지 않아요. 속세를 다 버리고 저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으면, 아무 문제없을까? 그게 아니에요. 환상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 짐승은 바다에서도 나오고, 땅에서도 나오고, 전방위적으로 막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약한 세력에 복종하며 살아야만, 짐승의 표를 받아서 짐승에게 복종하고, 악에게 복종하고 그래야만 겨우 먹고살 수 있고 매매를 할 수 있고, 그래야만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 그런가 보다” 하고 이 세상의 방식에 굴복해 버립니다.

하지만 오늘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해주고 있는 내용은 그렇게 살 것이 아니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대로 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다가 짐승의 위력이 너무나도 커서, 그래서 매매를 못하게 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겠고, 그러다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를 하더라도, 그 삶이 개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이 개죽음이 아니라, 오늘 선언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고, 그러므로 인내하며 힘들고 고달파도, 믿음을 가지고 살라. 그 말이에요. 도망갈 것도 아니고, 굴복할 것도 아니고, 믿음을 가지고 살라. 왜냐? 그것이 참된 길이고, 죽는다고 해도 복된 죽음이고, 우리의 인생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의 거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 요한계시록의 거울 가운데 나타난 예언의 요소가 무업니까? 이 악마의 세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고, 결국은 우리가 승리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고 하는 그 예언의 내용들을 우리가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앞으로 기술이 발달해서 이제 병원에 가면 우리들의 몸에 뭔가를 착 쏴가지고, 그래서 환자가 누군가 식별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릅니다. 요즘에는 병원에 가면 무엇으로 식별하죠? 종이 띠를 여기에다 붙여주고 바코드를 찍어서, 그래서 병원에서 이 사람이 누군가 실수하지 않고 바코드를 보고서, “이 사람, 환자가 맞구나.” 하고 치료를 하는 시스템인데, 아마 기술이 발달하게 되면, 이런 종이 시스템이 아니라 어떤 기계를 가지고 와서 우리 손에 뭔가를 딱 주입하고, 그리고 우리를 치료하는 세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게 짐승의 표인 줄 알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마 여러분들의 이마에 그걸 찍어서, 그렇게 하는 세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런 물리적인 표를 받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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