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히브리 민족을 구원해 내도록 사명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굴까요? 모세입니다. 모세는 당시 바로 왕의 눈을 피해서 저 먼 미디안 땅에서 숨어서 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40년 동안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주 신비하게 나타나 주셔서 사명을 주신 것이죠. 나무에 불이 붙어 있는데 그 불이 꺼지지 않는 아주 신비한 현상을 보여주시면서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그 모세에게 사명을 주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명을 듣게 되었을 때 모세는 자신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그 사명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사실은 못하겠다고 나는 할 수 없다고 그렇게 처음에는 그 사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사명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를 볼 때 그 사명을 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죠.
먼저는 자기 자신을 볼 때 아 자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미약한 겁니다. 이 엄청난 사명을 감당할 만한 그런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 없었던 것이죠. 예전에 젊었을 때야 우리 히브리 민족을 구하겠다고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기도 하고 젊었을 때야 정말 꿈을 펼치면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 모세의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이제는 인생의 황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고, 지금까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무엇을 하면서 지냈어요? 양치면서 지냈던 거예요. 사람들을 인도하고 무슨 엄청난 일들을 하면서 지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양을 치면서 평범한 삶을 하루하루 먹고 하루하루 살던 모세였기 때문에 과연 나 같은 사람이 나같이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 자신을 보았을 때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죠.
뿐만 아니라 이 모세가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그 사명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맡기신 사명이 양 몇 마리 더 줄 테니까 잘 돌보라 한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맡기신 사명이 어느 회사를 물려줄 테니까 그 회사를 경영하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 모세에게 주신 사명이 어떤 사명이에요? 이스라엘 민족 남자 장정들만 하면 60만 명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그 민족 몇 명이 정도 됐을까요? 다 합치면 한 200만 명 됐을까요? 어마어마한 그 히브리 민족을 데리고 그들을 애굽 왕 바로의 그 압제 밑에서 건져내서 그 민족을 이끌고 저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 내라고 하는 이 사명은 너무나도 엄청난 사명이기 때문에 그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상태입니까? 당시 최대의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애굽 나라의 노예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바로 왕이 엄청난 그 군사력과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장악하고 있는 그 애굽 나라에 쳐들어 나라에 가서 바로 왕과 담판을 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내는 그 일이야말로 너무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 모세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또 못하겠다고 하는 이유를 찾아본다고 하면 또 뭐가 있을까요? 이유가 양반이 많이 있을 겁니다. 아마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를 보았을 때도 이 민족을 이끌어내는 일을 못하겠다 말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어떤 민족입니까? 지금까지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의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그 정신세계가 노예의 멘탈리티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에요. 뭔가 독립성이 있고 뭔가 정말 진취적인 그런 기상을 가지고 있는 그 민족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의 자녀로 태어나 지금까지 노예로 살아왔던 그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가운데 노예의 멘탈리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낸다고 하는 것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어떤 군대의 훈련이 돼 있었을까요? 아니요. 아무런 전쟁의 경험도 없고 싸울 만한 아무런 힘도 없고 무기도 없고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아니한 이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낸다고 하는 것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모세는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건져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 따라서 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이 믿어줄까요?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뭔데?” 그러겠죠? “네가 뭔데?” 그동안 보이지 않고 저 멀리 도망갔던 죄수의 몸이오. 현상범인 그 모세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내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신뢰하면서 같이 갑시다. 같이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네가 뭔데 하는 그런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처음에 이 하나님의 사명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못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옵소서 나는 못한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 앞에 물어봅니다. 출애굽기 3장 13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르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까 모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직접 가서 그렇게 물어보면 “하나님,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되죠?”라고 궁금해서 물어봤을까요? 궁금했기보다는 아마도 못하겠다고 하는 핑곗거리로 이야기한 것 같아 내가 가서 이야기하면 “누가 널 보냈다고?” “도대체 누가 보냈어?” 하면서 반발할 것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못 가겠습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렇게 물어봤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아주 친절하게 하나님이 누구신가? 너를 보내는 모세를 지금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는 그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의 말씀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이 하나님의 대답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에 대해서 모세에게 알려주고 있는데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뭐라고 불렀어요? 스스로 있는 자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표현을 종종 쓰는데요. 이 여호와라고 하는 말 이것에 더 정확한 발음이 있다고 한다면 야회라고 해야 아마 더 정확할 거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회라고 하는 말 여호와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스스로 있는 분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예요. 스스로 존재하는 자 스스로 있느니라고 하는 의미가 바로 야훼라고 하는 이름이요.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인데요. 그 스스로 계신 분께서 너를 보냈다고 대답하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이름 스스로 있는 분이라고 하는 이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해 주고자 하는지 한번 살펴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첫 번째는 존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존재하는 거예요. 존재하는 하나님이 이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주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우리가 경험할 수 없으니까 우리의 그 인식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영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나 보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안 보인다고 해서 없나요? 아니죠. 안 보여도 공기가 있는 거 알고 계십니까? 대단하십니다. 공기가 안 보여도 알잖아요. 만일 우리 집에 이산화탄소가 들어 새어 들어온다고 한다면 안 보여도 냄새가 나지 않아도 그래도 아주 위험하게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거든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영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과는 달리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계신 것이 아니라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안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참 안타까운 일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정말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신뢰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유익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입을 수 있는데 그 하나님을 거부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몰라요.
여기에 맛있는 음식이 있다고 합시다. 사랑하는 엄마가 혹은 아내가 또 혹은 사랑하는 우리 부모님이 나를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여기에 만들어 놨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음식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없나 보다 하고 하루 종일 굶고 있으면 어떻게 돼요? 안타까운 것이죠. 있으면 아 있구나 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면 배가 부른 거예요. 배고플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것을 누리면 내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보지 않고 있는 줄 모르고 그냥 없는 줄 알고 하루 종일 굶는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는 것이죠.
이제 봄이 됐습니다. 놀랍죠. 겨우 내내 얼음이 얼기도 하고 눈이 내리기도 하고 이제 봄이 안 오나 그랬는데 봄이 왔어요. 조금 추워지긴 했지만 그런데 이제 봄이 왔기 때문에 무엇이 핍니까? 벚꽃이 필 거예요. 피어요. 우리 동네는 아직 안 피었어요. 제가 사는 그 구이에 이제 벚꽃이 쫙 피게 될 텐데 피게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벚꽃이 핀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가봐야 돼요? 가봐요. 가보면 아름답고 가보면 행복하고 그것을 즐기면 너무나도 마음이 따뜻한데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서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 위에서 십자가 위에 내어주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원하는데, 그 하나님을 모른 척하고 안 계신가 보다 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는 것이죠.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거예요. 안 계신 것이 아니라 두드리고 계시는 거예요. 내가 너의 마음 가운데 들어가고 싶다. 너와 교제하고 싶다. 너와 잔치를 벌이고 싶다. 그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의 놀라운 풍성한 은혜를 우리가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모른 척하고 아니다 하고 없는 사람에게는 없어요. 그러나 주님을 믿고 인정하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있을 줄로 믿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은 없나 보구나 했을 겁니다. 부모님들로부터, 우리 조상들로부터 늘 듣는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이삭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늘 들었어요.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서 이삭이라고 하는 아들을 주셨는지,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놀라운 약속을 해 주셨는지,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비록 지금 종살이하고 있지만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 주실 거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부모님들로부터 들었을까요?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그 약속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했을까요? 하나님이 안 계신가 하나님이 없나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마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구원해 주실 거라고 하는 생각이 점차 잊혀지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왜?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까 오늘도 내일도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에 전혀 나아진 게 없는 겁니다. 계속 그 종살이로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는 상황이 변화되지 않고 내 삶이 아무런 변화가 없이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준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다시 인도해 주신다고 하나님의 그 약속이 있다고 하는 그 이야기들이 점차 점차 희미해져 갈 수밖에 없고 의심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나는 누구라?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안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하시는 하나님이고 그 존재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실 거라고 하는 그 약속을 그 말씀을 오늘 모세에게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존재하는 하나님인데 어떻게 존재해요? 스스로 존재하는 거예요. 자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누군가에 의해서 태어난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그냥 있는 게 있나요? 아니요. 다 누군가가 만들었어요. 이 컵은 누가 만들었어요? 대한민국 최고의 장인이 만든 거예요 이 마이크는 누가 만들었어요? 유명한 기술자들이 만든 거예요. 이 강단은 누가 만들었어요? 기술자들이 다 만든 거예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누군가 만들어서 존재하게 된 것이죠. 우리가 왜 태어났어요? 그냥 태어난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왜 존재하게 됐어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으니까 태어나게 된 거죠. 계속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누군가에 의해서 존재하고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태어나거나 창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면서 모든 것을 잊게 만드신 하나님 근원이신 하나님 계속 우리가 근원을 쫓아가 보면 맨 마지막에 스스로 존재하면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신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이 생기게 된 것이고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이고 하는 것인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시겠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모세에게 주실 때 놀랍게도 우리가 출애굽기의 모든 말씀을 다 살펴보지는 않지만 처음에 모세는 못 가겠다고 말하고 할 수 없다고 말하고 그랬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들여서 애굽으로 갔고 아무런 힘도 없던 그 모세가 누구를 이겼어요? 바로 왕과 겨루어서 이기고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내서 결국 그 민족을 이끌고 저 가나안 땅까지 가게 되는 그러나 엄청난 놀라운 역사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게 될 때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게 될 때 이 엄청난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있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사명을 주실까요? 우리들은 사명을 안 주실까요? 주십니까? 믿습니까? 주십니다. 모세처럼 위대한 사명은 아니더라도 모세가 했던 그 엄청난 사명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사명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 자녀들을 기르는 사명에서부터, 우리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향해서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함께 살아가는 그 사명에서부터, 우리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그곳에서의 사명에서부터 우리가 지나가면서 만나는 사람이나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사실은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 사명을 주신 것이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명이 있습니까? 그것도 사명이에요. 어제 보니까 우리 전도팀이 열심히 전도하면서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것도 사명이에요. 힘들어하고 어려워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따뜻한 손 한번 잡아주는 것도 사명이에요. 정말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따뜻한 등 한 번 두드려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맡겨주신 사명이라고 하는 것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도 주셔요. 너무나도 커서 하나님 과연 이러한 사명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는 사명도 주실 때가 있는데,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러한 사명들을 들을 때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실 때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냥 가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동시에 무엇을 주실까요? 능력도 주십니다. 믿습니까? 모세 같은 사람 모세를 보내주시는데 그 모세가 엄청난 능력이 있어서 보냈나요? 아니에요. 모세가 지금까지 살면서 별다른 능력이 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냥 양만 칠 줄 알았어요. 모세가 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왕 앞에 보내면서 무엇까지 주셨어요? 기적을 행하는 능력까지 함께해 주셨어요. 지팡이를 던지니까 뱀으로 변하고 손을 넣었다 빼니까 나병이 발발하고 또한 바로 왕 앞에서 여러 가지 기적을 대해서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나올 수 있도록 능력도 함께 주시는 거죠. 이게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이 세상의 원리하고는 다른 것이죠. 이 세상의 원리는 뭡니까? 안 주고 하라는 거예요. 군대에 가니까요. 요즘 군대는 안 그럴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마는 예전 군대에서는 뭐라고 했었냐면 고참이 졸병을 부릅니다. 김일병 예 하고 하면 천 원짜리 하나 딱 꺼내주면서 PX 가서 새우깡 사 와 라면도 사고 콜라도 사고 초코파이도 사고 오징어도 사 오고 그리고 500원 남겨와 요즘은 안 그러니까 그런 군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군목으로 있을 때였어요. 부대 지원 중대장이 저한테 와가지고 묻는 거예요. 목사님 목사님 저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 앞에 그 도로에 옆에 보면은 벽돌이 깔려 있는데요. 목사님 제가 그걸 좀 퍼가지고 오면 안 될까요? 아니, 왜 왜요? 우리 연대장님이 부대를 좀 깨끗하게 좀 보도블록 깔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안 주고 깔으래요. 그래서 아 제가 그러면 안 되죠. 그러면 안 되죠. 남의 거 얘기하고 뭔가 좀 협조하고 얘기를 해야지 안 된다 그랬는데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안 주고 내놔라 아무것도 안 해놓고 너 왜 그거 안 했느냐 왜 그 사명 감당하지 않았느냐 아무것도 안 주고 앵벌이 시키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보내시면 능력도 주셔요. 믿습니까? 고린도후서 8장 12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오.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지도 않은 것을 가지지도 않은 것을 왜 안 내놨느냐고 물어보지 않아요 한 달란트 맡긴 사람에게 너는 왜 다섯 달란트 안 갖고 오느냐고 묻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에게 주시고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시고, 사명이 크면 사명이 큰 만큼 능력도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명을 주시는지 늘 고민하는 가운데 나는 못합니다. 피하고 도망 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 믿음으로 잘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이 사명이에요? 사명을 잘 생각해야 되는데요. 우리가 있는 그 자리가 사명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엄마입니까? 그게 뭐예요? 사명이에요. 남편의 자리에 있습니까? 그게 뭐예요? 사명이에요. 아내의 자리에 있습니까? 뭐예요? 그게 사명이에요. 피해서 도망갈 게 아니고 힘들다고 포기할 게 아니고, 나로 하여금 있게 하신 그 자리는 어쩌다 보니까 재수 없이 걸린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 자리에 있게 만들어 주신 거예요.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내가 가장 필요한 곳에 나를 넣어주신 것이 옛날에 어떤 우리 기독교 밀알 선교단에서 나온 글을 보니까 거기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어떤 장애아를 가진 그 부모님이 계셨는데 왜 이 아이를 나에게 주셨을까 고민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고 고백하는 글인데,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가장 좋은 부모가 누구일까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선택하셔서 가장 좋은 사람으로 이 아이를 위한 가장 좋은 사람을 함으로 나를 맡겨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그런 고백하는 글을 본 적 있어요. 하나님은 왜 나를 이 자리에 넣어주셨는가? 하나님이 왜 나를 이 상황 가운데 넣어주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사랑하시고 가장 적절하게 여기셔서 나를 이 자리에 넣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사명을 믿음으로 감당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만나는 그 사람 왜 만나요? 사명으로 만나게 해 주신 거예요. 강도 만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도와주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물질을 주셨다고 하면 왜 물질을 줘요? 그것으로 사람을 돕고 섬기고 사랑하라고 주신 거예요. 내가 경험한 것이 왜 경험을 그런 경험을 해요 실패의 경험이 있을 겁니다. 또는 아픈 경험이 있을 겁니다. 어려웠던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것들이 쓸데없이 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걸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그런 사명이 있기에 우리를 그런 길로 가게 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감당해 내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것이 있으면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를 바라봐야 됩니까? 나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는 것을 바라봐야 되고, 찰싹거리는 그 파도 보고 무서운 파도 보고 두려워 떨 게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래서 믿음으로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말은 아무거나 다 하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무대뽀로 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돼요. 아무거나 다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과연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셨는가? 다윗은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짓지 말라고 하니까 멈추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늘 고민해야 되는 거예요. 그냥 아무렇게나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인가 멈추라고 하시는가? 이걸 전문 용어로 사자성어로 뭐라고 얘기합니까? 낄끼빠빠라고 그래요. 내가 해야 될 일인가? 내가 감당해야 될 일인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시는 일이신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일이라고 한다고 하면 힘들다고 피할 것도 아니고, 나에게 능력이 없다고 피할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 믿음으로 잘 감당해 내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해야 됩니까? 바로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그 사명을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옛날 노예의 상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가 목숨을 내놓고 바로 왕 앞에 나갔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저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이 땅으로 십자가의 자리까지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다 내어주시고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받았기에 그 사명, 그 은혜 때문에 우리가 늘 살아가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내가 가는 길 가운데 만나는 사람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손을 잡아주고,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필요한 사람에게는 위로의 말을 해주고, 등 두드려줄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는 등 두드려주고, 복음이 필요한 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세상의 조건들을 보면서 어려움들을 보면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그 은혜의 바다로, 은총의 바다로 담대하게 달려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