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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자의 고집 (잠 18:2)

어리석은 자는 누구일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어리석은 사람은 그 삶이 고통스럽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어리석은 사람의 삶은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모든 판단의 순간에,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늘 판단의 연속이고 선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 인생의 모든 것들이 선택의 연속이고, 판단의 연속이고 할 텐데, 그럴 때마다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하고, 어떠한 판단을 하느냐가 우리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 판단의 순간에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의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죠.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 마나 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겁니다. 미련한 사람은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를 빚어버릴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죠. 몇 시간만 지나면 후회할 결정을 해버리고 마는 겁니다. 바보는 엉터리 결정을 해서, 스스로 무덤을 파고 마는 것이죠. 자신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으로 인해서,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피해를 겪게 되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게 바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선택을 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보다는 그 인생이 즐겁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인생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의 인생이 훨씬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인 것이죠.

물론 우리가 100% 완벽하게 고통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그런 불가항력적인 일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해서 모든 것을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고 하는 게 그런가요? 안 그렇잖아요.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많아요. 내일 아침에 날씨를 우리가 결정할 수 있나요? 못해요. 내일 비가 올지, 눈이 올지, 어떤 날씨가 펼쳐질지 우리의 힘으로 결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고와 사건들, 이런 것들도 내가 어떻게 방지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방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오는 사건이 있고 그런 고통이 있게 되는 것이죠. 전쟁이 일어나거나 지진이 일어나거나, 여러 가지 불가항력적인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내 개인의 힘만 가지고는 그러한 것들을 다 방지할 수가 없어서 완벽하게 고통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러한 일을 만났을 때라도, 그런 위기 가운데서도 지혜로운 판단을 하고, 지혜롭게 대처하기 때문에, 그 위기를 최소화하거나, 그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만들어 버리거나, 아무튼 그 어떠한 어려움을 닥친다고 할지라도, 완전히 좌절하고,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소망을 발견해내는, 그런 좋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위기를 더 위기가 되게 만들고, 그리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는 게 어리석은 사람,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당연하죠.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미련하지 않을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슬기로운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잠언서에서 들려주는 일관적으로 들려주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지혜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내가 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모든 결정 하나하나, 내가 하는 말 하나하나,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 될 텐데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대로 산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다 좋은 결과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악한 선택을 하고, 나쁜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의로운 선택을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결정을 한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삶은 형통한 삶이 될 것이고,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 되기 마련인 것이죠. 따라서 지혜란 무엇인가 다른 게 지혜가 아니라, 잠언서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교훈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게 바로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모면하기 위해서 얼렁뚱땅 거짓말을 하면서, 자신의 위기를 헤쳐나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잘못을 했다고 한다면,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선택을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 거예요.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죠. 도둑질하면 물건이 생기기도 하고, 도둑질하면 내가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처럼 유혹이 생기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잠시 잠깐 나를 이롭게 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나를 파멸로 이끈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직하게 땀을 흘리며 수고하며, 애쓰고 정직하게 돈을 버는 그 일을 하는 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살인하지 않는 겁니다.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살인과 같은 것인데,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원수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면 그 사람을 향해서만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고, 그 옛날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면서 그를 향해서 죽이려고 달려들게 되었을 때, 다윗이 죽은 것이 아니라 결국 사울이 죽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길이고 복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탐심을 부리지 않을 겁니다. 무례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믿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죠.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게, 잠언서 전체를 통해서 우리를 향해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우상을 따라다닐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미신을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무속을 쫓아다니며, 허망한 곳에 우리의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며 사는 게 복된 길이고, 그게 지혜로운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또 하나의 측면에서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잠언서 18장 2절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오늘 이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들려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무슨 말인가요? 사람들이 지혜를 알려주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지 않겠나?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겠나? 여러 가지 지혜로운 길들을 제안하면, 그 지혜로운 제안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만을 자꾸만 드러내고, 자신의 주장대로, 자신의 고집대로만 하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미련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사람들의 말에 귀를 닫아버리고, 사람들이 하는 충고에 귀를 닫아버리고, 사람들의 여러 가지 제안들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고, 오로지 자기가 생각한 것, 이게 제일 좋겠다고 생각한 자신의 생각만을 끝까지 드러내고, 끝까지 자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초지일관,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있는 그런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완벽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전 세계에서 제일 뛰어난 석학이라고 할지라도, 최고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완벽한 사람이냐 하면, 완벽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누가 필요합니까? 돕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죠. 우리의 눈은 앞만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 그것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뒤는 볼 수가 없어요. 내 뒤에 눈이 안 달려 있기 때문에 내 뒤를 내가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내 뒤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고,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말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고, 내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내게 이야기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단독적인 생각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지도자는 어떤 지도자인가?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지도자가 되는 것이죠.

무슨 이야기를 해도 말이 통하지 않고,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건의를 해도,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 그런 속이 꽉 막혀버린 지도자는 그 공동체를 완전히 망가뜨려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지도자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완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 일부러 부족하게 만드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잘 만들어 놓으셨죠.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누구를 만들었어요? 하와를 만드신 거죠? 그래서 하와가 옆에 있으면서 서로 도울 수 있도록, 내가 못하는 것을 도와주고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고,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서로 완벽하게 호흡을 맞출 수 있도록, 다른 돕는 배필이 필요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내가 옳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어리석음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유전적으로 IQ가 좋아야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지혜는 어디서 옵니까? 겸손에서 오는 거예요. 겸손, 내가 처음부터 태어나기를, 내가 처음부터 태어나기를 머리가 좋게 태어난다고 해서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음부터 어리석은, 유전적으로 내가 머리가 안 좋게 태어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차이가 있는 겁니다. 겸손한가? 교만한가? 겸손한가, 교만한가에 따라, 지혜로움과 지혜롭지 못함이 나뉘어지게 되는 것인데요. 만일 어떤 사람이 교만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멸망하고야 말 겁니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 되는 것이죠. 패망의 선봉이 되는 겁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제일 똑똑한 줄 알고, 자신의 생각이 완전한 줄 알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전혀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어리석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의견을 받아들여서, 자신을 고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귀를 닫아버리고, 내 생각만을 내세우고 자기 주장만 끝까지 밀어붙이려고 하는 그런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내 생각이 완전하다고 하는 오해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것이 전부인 줄 알고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오해하면서, 자기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구나”를 생각해야 돼요.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구나.” 그걸 생각하세요. 내가 보았던 게, 내가 이해했던 게, 내가 판단했던 게, 그게 완벽한 게 아니라, 내가 잘못 보았을 수 있겠구나. 내가 잘못 생각할 수 있었겠구나. 내가 모든 것을 보지 못하고 일부만 보았을 가능성이 있겠구나. 그것을 자신이 완전하지 않고 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하는 그러한 겸손함이 있어야 우리는 지혜로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독일의 철학자, 독일이 아니고, 프랑스에서의 철학자죠.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라고 하는 사람이 길을 걸어 가다가 뱀을 본 겁니다. 그래서 뱀을 보고서 깜짝 놀라서 도망갔어요. 그리고 도망가서 한참 일을 본 다음에, 이제 나중에 모든 일을 다 끝내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아까 뱀을 보았던, 그 자리에 다시 한 번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돌아가면서 보니까, 저기에 뭐가 있는 거예요. 뭐가 있냐면, 아까 내가 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 앞에 있는 겁니다. 자세히 보니까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에요. 그냥 새끼 노끈, 노끈, 못 알아들으셨어요? 줄이 있는 거예요. 줄이 줄이 이렇게 있는데, 그게 줄인 줄 모르고, 뱀처럼 보여서 깜짝 놀라서 도망갔던 거예요. 뱀이라고 생각해서, “아이고, 나 살려라” 하면서 도망갔었는데, 나중에 돌아오면서 보니까, 뱀이 아니라, 끈이 놓여져 있는 그 모습을 보고서, 데카르트는 거기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내가 눈으로 본 것이, 내가 경험한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내가 보면 본 게 맞고, 내가 느끼면 느낀 게 맞고, 내가 이해하면 이해하는 게 맞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내가 내 눈을 못 믿겠구나”라고 하는 충격을 받은 거예요. 내가 틀릴 수도 있겠구나. 내가 잘못 판단할 수도 있겠구나. “내가 잘못 보았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과연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믿을 수 있을까? “과연 내가 감각을 믿어도 되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서 데카르트는 온갖 질문을 계속 던지기 시작한 거예요. 도대체 내가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육체적인 감각도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우리들이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도 그것이 정말 진리일까? 수학적인 진리 1 더하기 1은 2라고 하는 게 진리예요? 진리가 아니에요? 진리잖아요. 그런데 데카르트는 질문하기 시작했어요. 혹시 이것도 1 더하기 1이 2가 아니라, 3이 정답인데, 악마가 있어서, 우리에게 1 더하기 1이 3이 아니라 2라고 우리를 자꾸만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기 시작했어요. 모든 것들이 다 의심이 들기 시작한 거죠. 정말 이것이 지금 존재하는 것이 맞는가? 모든 것을 다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데카르트가 생각하기를, “과연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라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게 맞는가?”라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그가 내렸던 결론이 뭐예요? 아무리 부정하려고 부정하고 또 부정해도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내 자신이 진짜인가 질문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다. “나는 질문한다 고로, 나는 존재하고 있구나”라고 결론을 내려서, 그 말이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거기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믿음을 확신해 나가는 단계로 넣어 나아가는 그런 일을 했다고 하는 게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무엇인가? 믿음은 우리가 믿는 것이지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아도 믿고,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확신하는 것이 믿음인데, 그런데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게 무조건 아무거나 믿는 게 믿음이 아닌 겁니다. 성경은 믿으라고 되어 있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의심해야 할 필요도 있는 거예요. 어떤 의심이죠? “내가 믿고 있는 게 과연 맞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확신하고 맹신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니라, 맹신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소경이 소경을 이끌고 가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그런 참담한 결과를 빚게 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경고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냐 하면, 과연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확실한가? 한번 질문을 던져보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면서, 그래서 더욱더 진리에 더 가까이 나아가야, 그게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오늘 잠언서 18장 2절의 말씀이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죠. 미련한 자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다 배척하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자꾸 주장한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게 아니고, 가짜가 참이 되는 게 아닌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는 항상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짜 정말 진리인가?”라고 하는 것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말도 들어보고, 귀도 기울이면서, 진리를 접근해 나가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은 미련한 자가 되기 쉽습니다. 성경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맞는 듯한 성경 구절을 발견하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구나” 확신해 버려요.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말씀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과 맞는 것 같은 성경 구절을 성경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그냥 확신할 게 아니고, 성경 다른 곳에서도 성경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한 번 더 찾아보면서 정반대의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이 말과 이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서로 비교해 가면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를 더욱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 무조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또 확신시켜주는, 확증 편향시켜주는 이야기들만 계속 귀 기울이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항상 겸손해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 미련해지기 쉽습니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미련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럴 위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이 많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가 10년 살아온 꼬마 아이들보다 20년 살아온 청년보다 3 40년 산 중년보다 6 70년 산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경험을 한 사람들의 지혜와 지식이 우리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이 노인들에게 우리 연장자들에게 그런 생각들이 많이 생기기가 쉬워요. 그래서 내가 옳고 젊은 애들은 다 틀려먹었고, 우리들이 기준이고 저 아이들은 전부 다 잘못되고 가시고 다 문제라고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생을 오래 살았다고 할지라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게 있습니다. 무엇을 경험해 보지 못했죠? 지금 현 시대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하고 지금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또 무엇을 경험하지 못하죠? 지금 미래에 다가오는 시대를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에요. 우리가 비록 나이는 많지만 젊은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많은 것을 경험하지 못한 채 나이를 먹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죠.

시대가 바뀌었어요. 옛날에 정말 아무것도 휴대폰도 없던 그 시대, 옛날에 자동 자가용도 없던 그 시대 그 시대가 아니란 말이에요. 지금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물들과 새로운 일들이 막 나오고 있는데 우리 나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했어요. 경험하지 못한단 말이에요. 오히려 우리 젊은이들은 다 경험하고 다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보는 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교만해지고 내가 옳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제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제가 그렇게 완고한 완고하게 늙어가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내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인 양, 내가 모든 것을 다 통달하고 있는 것인냥, 교만한 마음으로 배움이 중단되는, 더 이상 겸손하게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완고한 마음을 가진 채 늙어가지 아니하도록 하나님 도와주옵소서. 그게 우리의 기도 제목이고 여러분들도 함께 같이 그런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언제 우리가 겸손해야 됩니까? 분노할 만한 상황이 생기면,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분노할 만한 상황이 생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의 100% 내가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분노했을 가능성이 대부분입니다. 어떤 정치인에 대해서 어떤 사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내 마음속에 분노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그 분야에 대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가 생겼을 가능성이 많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생기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 겸손하게 만들어 주셔서, 제가 오해하고 있는 것을 벗어나서 정말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제 어리석게 내 주장만 하지 아니하도록 제 마음을 바꾸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주님 겸손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내 주장만 내세우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좋은 이야기를 해도 그 이야기들을 다 귀닫아버리고 내 주장만 강하게 주장하는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저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너그러움을 저희들의 마음 가운데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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