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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깨어 있으라 (마 25:1-13)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많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가르치실 때 비유를 들어서 많이 가르쳐 주셨는데요. 비유의 말씀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성경에는 예수님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할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말씀들을 우리가 가만히 살펴보면, 이 비유 가운데서 자주 등장하는 제일 많이 등장하는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 주제가 뭘까요? 그건 “종말”에 관한 비유입니다. 마지막 때에 관한 비유를 예수님께서 정말 많이 해 주신 것이죠. 마지막 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종말에 관한 비유를 정말 많이 해 주셨던 것이죠.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오늘 우리가 늘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주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종말이라고 하는 주제입니다. 종말이라고 하는 이 주제를 예수님께서 많이 말씀하셨으니까, 우리도 이 종말에 대한 주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겠죠? 당연합니다.

성도 여러분들께서는 종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생각하지 않고 지내셨습니까? 종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고 계시는 편인가요? 그것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 해보시면서 사시는 편입니까?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요. “목사님, 지금 현재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미래에 대한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기는커녕, 지금 내 코가 석자입니다. 지금 이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도 참 핸들하기 어려운데, 종말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실 분들도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우리가 종말에 대해서 생각을 하든 하지 않든, 종말을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언젠가는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것이 종말입니다. 마지막 때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종말이 없어지는 게 아닌 것이죠. 우리가 종말에 대해서 모른 척하고 있다고 해서, 종말이 오지 않는 게 아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종말이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가? 마치 도둑이 들이닥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도둑이 언제 오나요? 예상치 못한 때 오는 거죠. 마치 전혀 대비하고 있지 못했을 때, 어느 순간에 갑자기 쳐들어와서 훔쳐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오는가? 종말은 언제 오는가? 갑작스럽게 예기치 못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의 삶 가운데 다가오게 되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종말에 대해서 성경적인 가르침을 잘 알고 배우고 우리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주 중요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현재 많은 크리스천들은 이 종말과 관련돼서 두 가지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요. 양극단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하나는 잘못된 종말관을 가지고, 그 종말에 몰두해 있는 잘못입니다. 소위 “시한부 종말론”이라고 말하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날을 생각하면서, 잘못된 종말관에 빠져서, 거기에 몰두해 버리는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번째 잘못은 무엇이냐 하면, 종말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종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지도 않고,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냥 무시해 버리며 사는 양 극단의 태도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먼저 우선적으로 잘못된 종말 사상에 빠지는 것이 아주 큰 문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잘못된 종말론이 많이 등장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몇 년 몇 월 며칟날 재림할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잘못된 종말 사상에 빠져 있는 그런 잘못된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어왔던 것이죠. 대표적인 예가 무엇이 있겠어요? 기억이 나시죠? 1990년대에 있었던 다미선교회 사건입니다. 그 당시 여러분들은 그때 그 다미선교회의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군목으로 막 임관해서, 군대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그때 다미선교회가 아주 전국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그 다미선교회에서 주장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1992년 10월 28일 날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모든 질서가 다 중단돼 버리고, 예수님께서 오시는 바로 그날이 1992년 10월 28일이라고 해서 정말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런 예언들을 하는데 심지어 어린아이가 기도하다가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현혹되어 넘어가서, 정말 예수님께서 1992년 10월 28일 날 오는가 하면서, 잘못된 종말론 사상에 빠져서 정말 큰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그 사건을 일으켰던 이장림이라고 하는 목사가 사기죄로 나중에 잡혀 들어가게 됐는데, 알고 보니까 3억 원짜리 환매채를 구매했는데, 그 만기일이 언제냐 하면 10월 28일보다 한참 뒤에 있는 환매채를 샀다고 하는 것이 드러나서, 자신도 믿지 않는 것을 그렇게 사람들에게 말했다 해서 사기죄로 들어갔다고 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그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역사상 정말 많이 반복되어 왔었던 것이죠.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전쟁이 일어나고 또 전염병이 돌고 지진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상황이 닥칠 때마다, 늘 등장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종말이 가까이 왔다. 종말이 다가온다. “언제 종말이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켜 왔는데, 그러한 잘못된 사상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서, 그래서 삶을 망쳐버리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온 적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만일 누군가 몇 년 몇 월 며칟날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말하거나,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100% 가짜요. 100% 이단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종말론 사상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에 우리가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겠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인자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 아신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해서, 내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또 내가 성경을 연구해서 그 마지막 때의 날짜를 알아냈다고 말하는 등, 수많은 주장들을 하고 있는데, 그 모든 주장들이 다 엉터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한부 종말론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시한부 종말론의 문제가 무엇이냐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모조리 부정해 버린다고 하는데, 제일 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몇 년 몇 월 며칟날 오신다고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들까요? 더 이상 내가 직장 다녀서 뭐 하나? 더 이상 내가 이렇게 가정생활을 해서 뭐 하나? 이 세상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오시면 다 끝나버리는데, 이 세상에 종말이 오면 아무 의미가 없는데, 그래서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해 버리도록 만들어버린다고 하는 데, 아주 큰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 시한부 종말론이 많이 퍼졌을 때, 사람들은 갑자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 버립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가정을 떠나서 기도원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모든 것을 다 내 팽개쳐버리고, 오직 주님께서 오신다고 하는 그날만을 기다리면서 금식하고, 그리고 재산을 모두 다 팔아서 바쳐버리고, 그래서 그 기도원에 들어가서 이단 집단 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다 착취당해 버리는 그런 어리석음을 보이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사실 이 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이 잘못된 종말 사상은 현재의 모든 삶을 다 중단하게 만들고, 부정하게 만든다고 하는데, 아주 큰 문제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쳐 주셨나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해서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 “이 세상이 끝날 때가 다가온다. 이제 마지막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결론으로 무슨 이야기를 해주셨냐면, 그러니까 지금 네가 직장 다니고 있는 거 아무 의미가 없다. 그만둬라. 지금 네가 결혼 생활하고 있는 거 아무 의미가 없다. 그만둬라. 기도원에 가서 기도만 하고 있고 찬송만 하고 있어라. 금식하고 있어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히려 무슨 말씀을 해주셨습니까? 종말이 다가오기 때문에 지금 신실하게 살아야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때문에 이제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해서 강조해 주신 것이죠.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남아 있을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잘못된 시한부 종말론과는 완전히 다른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해주신 종말의 비유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떤 주인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기고, 먼 여행을 떠났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계산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계산할 때가 돌아올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 종말의 비유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그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니까, 지금 어떻게 살라는 거예요? 신실하게 살라는 거예요. 한 달란트 맡은 종처럼, 그 달란트를 땅속에 감춰 두어 버리고, 무책임한 아무런 삶의 건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그런 정말 무책임한 그런 삶을 살지 말고, 다섯 달란트 맡은 종들처럼 두 달란트 맡은 종처럼, 착하고 신실하게 선하고 의롭게 주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지금 오늘 여기서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게 예수님의 메시지인 것이죠.


마지막 심판이 있으니까, “때려치워라”가 아니라, 종말이 있으니까 “때려치워라”가 아니라, 종말이 있기 때문에, 지금 아직 우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에 따라서,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성경적인 종말론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건전한 종말 사상 성경적인 종말 사상은 무엇인가요? 지금 여기서의 삶을 더욱더 성실하게 만드는 그런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건전한 종말 사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 잘못된 관점이 무엇이냐 하면 종말에 대한 무관심이죠. 종말에 대해서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왜 나왔느냐? 잘못된 종말론 때문에 나온 겁니다.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서 반사회적이고 무책임한 삶을 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저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살지 말아야 되겠다. 종말에 대해서 생각할 게 아니라, 그냥 현실에 충실하게 살면 되겠다.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이 땅에서 내가 현실적으로 잘 살아가면 되는 것이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야 되겠다고 하는 반작용이 나온 것은 잘못된 시한부 종말론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초두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가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종말이 안 오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인생은 언젠가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든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든, 언젠가 마지막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것이죠. 어떻게 오게 됩니까? 개인적인 종말이든지 우주적인 종말이든지 어떤 종말이든지 맞이하게 되어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질문은 우리가 회피해 버리고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괜찮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맞이하게 되어 있는 종말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그러면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해주신 종말에 관한 비유 가운데 하나인 열 처녀의 비유를 잠시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교훈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혼인 잔치가 있습니다. 그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10명의 처녀들이 있었다고 이 비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이 10명의 처녀들은 신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도대체 이 신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10명의 처녀들은 누굴까요? 신부일까요? 10명의 신부는 아니겠죠. 아마도 들러리일 것 같습니다. 아니면 들러리가 아니더라도, 이 결혼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신부의 친구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결혼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이 10명의 처녀들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신랑이 오면 신랑과 함께 신부와 함께 결혼 잔치에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신랑이 자꾸만 늦어지는 겁니다. 오지 않는 겁니다. 왜 안 옵니까? 오늘날에는 아예 날짜를 정해놓잖아요? 몇 년 몇 월 며칟날 몇 시 딱 정해놓고, 그날 결혼식을 합니다마는, 이 당시에는 결혼식 날짜가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 돈을 가지고 와서 신부 부모님에게 돈을 줘야 신부를 데려갈 수 있는 겁니다. 오늘날에 결혼한 것을 얼마나 다행으로 생각하는지 몰라요. 이 당시에는 결혼하려면 지참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지참금을 많이 가지고, 신부의 부모님에게 그 지참금을 드려야, 신부의 부모님이 그 신부를 신랑에게 줬기 때문에, 신랑은 그 신부의 부모님으로부터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서 사랑하는 그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서, 지참금을 많이 마련해서 가야만 되는 겁니다. 많이 마련해서 가야 되는데 돈이라는 게 쉽게 구해집니까? 안 구해지잖아요? 그러니까 신랑이 그 돈을 구하는데 늦어지고, 늦어져서 신부를 데리러 오는 그 과정이 늦어질 수가 있었던 것이죠.


그때 이 기다리던 사람들은 언제 올 것인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 밤이 됐습니다. 저녁 식사도 했습니다. 이제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들 졸기 시작했어요. 이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고 전기도 없으니, 그 기다리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것이죠. 더군다나 이 사람들은 주로 새벽 4시 5시면 일어나서 하루 종일 일하다가, 하루 종일 지내다가 이제 저녁이 되었으니까, 밥만 먹고 저녁때가 되면 바로 잠에 들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시간이 되니까 너무 졸린 거예요. 그래서 10명의 처녀들이 다 졸고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 소리가 들렸습니다. 신랑이 왔다. 신랑이 왔다고 하는 그 소리에 이제 모든 사람들이 깨어나서, 이제 드디어 됐구나. 이제 결혼 잔치에 들어가게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일어나서, 그 신랑을 따라가려고 하는데, 5명의 처녀들은 등불을 켜려고 하니까 기름이 없는 거예요. 기름이 없어서 이 기름 없는 걸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가? 여차저차저차 해가지고 결국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결혼 잔치에 못 들어갔다는 거예요. 결혼 잔치 문은 닫혀버렸고, 문을 뒤늦게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지만, 안에서 열어주지 않고,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하면서, 결국 이 5명의 처녀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이 여인들은 안타깝게도 결혼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똑같은 질문이 떠올랐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제일 크게 먼저 들었던 질문이 무엇이냐 하면, 기름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이렇게 기름을 안 나눠주는 5명의 슬기로운 처녀들은 “너무 매정한 거 아닌가”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죠? 너무 매정한 거 아닌가? 또 하나 드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굳이 등불을 마련해야만 결혼식장에 갈 수 있는가? 결혼 잔치에 갈 수 있는가? 모두가 다 등불 하나씩 다 들고 가야 되는 겁니까? 그냥 꽁무니 잡고 따라가면 되잖아요? 아무리 깜깜해도 등을 들고 있는 사람 뒤만 졸졸졸 따라다니면 되잖아요? 왜 등불이 없으면 못 들어가는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중에 기름을 구해서 늦게 도착해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그 신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하면서 열어주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서, 왜 열어주지 않았을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저 같으면 열어줬을 것 같아요. 결혼식이라고 하는 게 뭡니까? 모두가 다 기쁜 날이고, 모두가 다 행복한 날이고, 그날은 거지들도 와서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열어주는 것이 그게 잔치의 기분을 내는 것이고, 그 결혼식의 그 행복함을 모든 사람과 나누는 것이 결혼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닫아버리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까?

어떤 교회는 이 마태복음 25장의 이야기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예배 시간 땡 치면 문을 잠가놓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혹시 얘기 들어보셨나요? 예전에 많이 들어봤어요.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늦게라도 와주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교회에 와서 졸고 있더라도 여기 와서 조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늦게라도 와서 예배드리는 그런 분들이 너무 고맙고, 감사하기 때문에 저 같으면 다 오라고 하고 싶어요. 어쩌면 실제 결혼식에서는 아마 늦게 온 사람도 아마 다 받아주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유를 이렇게 말씀해 주신 것은 이상한 결혼식이죠. 이상한 결혼 잔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약간의 비유를 실생활과는 약간 다르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천국의 특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강조하기 위한 그런 방법으로 이렇게 약간 비틀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그 내용들을 보면, 종종 약간씩 그 내용을 현실과 다르게 비틀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아마도 이 비유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의 결혼식은 늦게라도 갈 수 있겠지만, 그러나 저 하늘 잔치는 문이 닫히면 끝이다. 우리가 기회 있을 때 기름을 준비해야지, 기회 있을 때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중에 뒷북쳐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이미 천국의 문이 닫힌 다음에는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천국의 문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렇게 비유를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다음에, 결론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이죠. 그런즉 깨어 있어라.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깨어 있으라”라고 우리들에게 권고해 주고 계시는데요. 이 말씀도 약간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결혼식장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잠자지 않고 깨어 있던 사람이 들어갔습니까? 기름을 준비한 사람이 들어갔습니까? 기름을 준비한 사람들이 들어갔어요. 다 졸고 잤어요.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은 아예 못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다 졸고 다 자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 신랑이 왔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깨어서, 그래서 기름을 준비한 사람들이 들어간 것이지, 졸고 있던 사람들이 못 들어간 것이 아닌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깨어 있으라”라고 그렇게 권면해 주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잠을 자지 말아야 된다고 말씀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우리가 무감각하게 있지 않아서, 아직 우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 다섯 처녀들처럼 슬기롭게 미리미리 기름을 준비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해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이 어차피 다 똑같은 말씀인 것이죠. “기름을 준비하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고,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해 줄 수도 있는데,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아직 우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해야 한다고 하는 교훈을 우리들에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건전한 종말론은 무엇인가? 건전한 종말론은 마지막 때가 있으니까, 종말이 다가오니까, 이 세상의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그 오로지 기도원에 들어가 산속에 들어가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금식하고 있는 것이 건전한 종말론이 아닙니다. 건전한 종말론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종말론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때가 있으니까, 어떻게 하라? 지금 준비하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 이 세상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을 잘해야 된다고 하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 성경적인 종말론 건전한 종말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마지막 때가 있으니까, 어떻게 하라고요?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까, 이제 이 세상의 삶은 의미가 없다가 아니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어떻게 살아라? 서로 사랑하며 살아라! 미워하지 말고, 이제는 사랑하며 살아라.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라.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니까, 지금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라. 우리가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마지막이 다가오는데, 그것이 우주적인 종말론이든 우주적인 종말이든 개인적인 종말이든, 하나님께서 오늘 밤 우리를 부르신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그러면 더 이상 기회가 없는데, 기회가 없기 전에, 아직 우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신실하게 살고, 손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불평 없이 하고,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13장 11절에서부터 14절의 말씀 가운데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제 밤이 다 지나가고 동틀 때가 됐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종말을 주실 때가 가까이 왔으므로, 그 동트기 전에, 종말이 생기기 전에, 아직 지금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어둠 가운데 있지 말고 사탄의 지배 가운데 있지 말고, 방탕하고 음란하게 호색하며 악한 일을 하면서 살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들을 하는 삶을 살아라 하는 게,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성경의 가르침인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천국이 가까웠으니까, 다 때려치우고 기도원으로 가서 기다려라. 다 때려치우고 금식하고 있어라. 직장 그만두고 저 찬송만 부르고 있어라. 그게 아니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고,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고 하면, 그때가 오기 전에, 아직도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악한 길에서 돌이켜 믿음의 길로 걸어가는 그런 결단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성인이 있는데요. 우리 기독교에 아주 뛰어난 성자라고 할 수가 있는 사람이 성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젊은 시절에 방탕하고 정말 악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어머니 모니카가 어거스틴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지만, 이 어거스틴은 늘 악한 일을 하며 죄악의 길로 다니며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그 마음 가운데 “들고 읽으라”라고 하는 그런 마음에 감동을 느껴서, 성경 말씀을 폈는데, 하필 편 곳이 어느 곳이냐면 로마서 13장 11절에서부터 14절의 말씀을 보면서, 이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다고 하는 그 말씀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이제는 내가 악한 일을 모두 다 내어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다고 하는 결심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위대한 기독교의 성자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마지막 문이 닫히기 전에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같이 달렸던 한 행악자였습니다. 그는 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제 종말이 바로 눈앞에 놓여져 있을 때, 아직 그 문이 닫히기 전에 자신에게 남아 있는 바로 그 짧은 순간에, 회개하고 주님 앞에 믿음을 고백하며,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기도하고 주님께 나아갔다가, 주님께서 오늘 밤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는 놀라운 약속을 받게 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가운데 나오는 부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이 세상에 주어져 있는 수많은 시간이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에 회개하지 않는 삶을 살고 연락하며, 그저 이 세상의 만족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결국 나중에 지옥불에 떨어져서,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그때 가서 아뢰어 봤자, 아무런 기회가 남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보고 통탄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 아주 기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이 무엇일까요?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있다는 겁니다. 옆사람에게 말해주세요.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있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있어요. 근데 그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몰라요. 오늘 밤에 끝날 수도 있어요. 오늘 밤에 부르시면 우리의 삶이 지금 당장 끝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그 종말을 우리가 그냥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그 기회를 다 잃어버릴 것이 아니라, 아직 지금 우리에게 시간이 남아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결단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관계가 흐트러져 버리고 깨어져버리고, 그래서 고통 가운데 있는 가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가 망가져버리고,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 가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이웃과의 관계가 망가져 버리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지금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차일피일 미루면서 그냥 그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리고, 기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졸고 자고 있다가 신랑이 온다고 하는 그 순간에 허겁지겁 뒷북을 쳐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그 상황을 맞이할 게 아니라, 오늘 이 시간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남은 것을 기억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저에게 용기를 허락해 주옵소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해 주옵소서. 망가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먼저 낮아지고,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가는 가운데, 이 기회가 그냥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 남은 그 기회가 그 기회가 없어져 버리기 전에, 마지막 그 시간이 오기 전에, 주님 이 기회를 살릴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힘이 없고 부족하기에, 또 실수하고 또 넘어지고, 또 잘못하고 또 악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저 높은 곳에서 이 땅 위에 내려오셔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피 흘려주셔야만 했습니다. 그 주님 앞에 나가서 주님 도와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회개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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