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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의 예언 (민 24:17-19)

성경 말씀을 잘 읽고 계십니까? 레위기 때 잠깐 한 번 쉰 것이 좋았죠? 어려운 성경 말씀이기 때문에, 두 주에 나누어서, 설날 잠깐 쉬었다가 읽게 된 것이 그래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레위기도 힘들었지만 이제 이번 주에는 민수기를 우리가 읽게 되겠습니다. 민수기도 어려워요. 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민수기에서는 그 민수기라고 하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끝없이 이어지는 인구 조사의 내용이 장황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인구 조사 어느 지파가 몇 명이고 하는 그 이야기들을 쭉 듣다 보면, 지겹게 느껴지고 도대체 이런 말씀이 왜 성경 속에 있나? 무슨 의미가 있나? 참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결국 성경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은 구절 중에 하나가 이 민수기의 구절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하면 잘 읽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성경 말씀을 잘 우리가 이해하고 잘 받아들일 수 있게끔, 성경을 참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 시대의 상황 속으로 우리가 빨려 들어가 보는 겁니다. 이 당시에 이 민수기의 그 구절들이 쓰여졌을 때의 그 상황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서, 그때 그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과 기분들 어떠한 마음들이었을까? 이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좀 체험해 보면서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래도 좀 힘든 구절이지만, 그러나 큰 도전이 되기도 하고, 또 그들이 느꼈던 감정을 우리가 동시에 느끼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이 숫자가 이렇게 반복되고 이름들이 반복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죠.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빨리빨리 문화가 있잖아요? 그래서 그냥 빨리빨리 지나가야 좋은 것인데,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가봤더니 졸업식을 할 때 졸업식을 몇 시간 동안 하냐면 3시간 4시간씩 합니다. 졸업식 가서 3시간 4시간씩 하는 그 졸업식에 앉아보셨습니까? 그런 적 없죠? 우리나라는 졸업식 몇 분 내에 끝나요? 길어도 1시간 아니면 한 30분에 끝나고, 상장도 대표만 주고 졸업장도 대표만 주고 끝냈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한 명씩 준다고 그래요. 그렇습니까? 예. 제가 미국에 갔더니 졸업생들의 이름을 한 명씩 한 명씩 부르는 거예요. 한 명씩 한 명씩 불러서 그 학생 한 명이 나오면 그 학생 수고했다고 악수해 주고 허그도 해주고, 또 이렇게 이거 넘겨주기도 하고, 한 명 충분히 축하해 주고, 그다음에 또 한 명 불러서 또 축하해 주고, 그렇게 해야 한 명씩 하니까, 졸업생이 천 명, 2천 명, 3천 명 되니까 몇 분이 걸리는 거예요. 3시간 4시간씩 그렇게 길게 졸업식을 하는데 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환호성이 터지는 겁니다. 야 잘했다. 어떤 학생이 나오면 또 막 박수를 치는 겁니다. 야 잘했다. 한 명 한 명 박수 치고 나가는데 우리 딸아이가 졸업하는 그 졸업식장에 들어갔더니, 졸업생 한 명 한 명씩 불러 부르는 가운데, 어떤 한 학생이 졸업 연단에 올라가서 졸업장을 받으려고 하니까, 장내가 떠나갈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다 일어서서 박수를 치고 그렇게 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래서 도대체 저 학생이 누구길래 저렇게 박수를 치는가 하고 봤더니, 좀 장애가 있는 학생이에요.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거예요. 지적인 장애가 있어서 모든 학업 과정을 따라가기가 정말 힘든 그 학생이 같이 그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는데, 그래도 그 아이가 모든 과정을 다 마치고 졸업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수고했다. 박수 치면서 감격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졸업식도 은혜가 되는구나.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민수기에서의 이러 이름들과 지파의 이름들과 숫자들, 또 우리가 보기에는 그냥 단순한 숫자일 뿐이고, 단순 지파의 이름들, 각 족장들의 이름들 뿐이라고 생각이 들 겁니다. 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 가운데는 이 이름 하나하나가 정말 감격적인 이름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족장들 그 지파들도 이 사람의 그 가족들도 이렇게 구원해 주셨구나! 하나님께서 저 가나안 땅에서 애굽 땅에서부터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이 지파들 한 사람 한 사람, 그 족장들 한 사람 한 사람, 그래서 그 가족들이 이렇게 숫자가 많아졌는데, 하나님의 약속은 그냥 사라지고 없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구나! 그 옛날 아브라함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질 거라고 했는데, 그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렇게 수많은 지파와 족장들이 그 가족들이 이렇게 많이 이루어진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하고 그 약속은 신실하고 우리를 향해서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의 약속이 전혀 거짓이 아니라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지키셨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런 장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민수기의 말씀을 보면서, 숫자를 세는 것 자체가 본질이라기보다는 히브리어 제목으로는 “광야에서”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어떠한 일들을 경험했고 겪었는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민수기의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애굽에서 나왔지만,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인 그 중간 시대를 살아가던 이스라엘 민족들의 삶 가운데 무슨 일이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 가운데도 어떻게 이루어지고 소망을 주었는가 하는 것을 민수기의 말씀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광야에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두 세대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세대는 민수기 1장에서부터 25장까지 나오는 그 세대가 출애굽 1세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출애굽 1세대는 그 특징이 무엇인가요? 불신앙과 좌절, 죽음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 사람들이 출애굽 1세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약속의 땅이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앙 때문에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지금 가나안 땅이 저 앞에 있으니까 들어가서 차지하자고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이 출애굽 1세대는 불신앙 가운데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겁니다. 우리 자녀들이 다 죽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결국 불신앙 가운데 사라져 간 세대가 출애굽 1세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다음 세대가 또 등장하는데, 그 두 번째 세대는 민수기 26장에서부터 36장까지 나오는 출애굽 2세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들은 이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인데, 이들은 저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을 상징하는 것이고 생명을 상징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민수기 14장 31절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그 이스라엘의 첫 출애굽 세대가 가나안 땅을 보면서 우리가 저 땅을 차지할 수 없다. “우리가 저들과 함께 싸우다가는 우리 자녀들이 죽을 것이다” 하면서 불신앙 가운데 거부해 버리고, 하나님을 거역했던 일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그 출애굽 1세대들은 심판을 하시고, 그들이 죽을 것이라고 했던 그들의 유아들을 성장시켜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이야기가 민수기의 말씀 가운데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세대를 본다고 한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직접 목격한 세대였고 경험한 세대였지만 안타깝게도 불신앙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고 불평했고, 민수기 12장에 보면 미리암과 아론은 그 모세의 리더십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불평했던 것이고요. 가장 큰 불평이 있었다고 한다면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그 약속의 땅을 싫어한 것이죠. 정탐꾼을 12명을 보냈는데, 그 12명의 정탐꾼들 가운데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 대해서 악평하기 시작한 겁니다.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 거기에는 아주 강대한 민족이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이야기해 버렸고,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이라고 하는 2명의 정탐꾼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바로 이 땅이다. 바로 이 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한다면, 우리가 차지할 수 있겠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믿음에 반응을 했던 것이 아니라, 불신앙의 반응을 해버렸고 결국 그들의 불평대로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버리게 되는 그런 불운한 역사가 민수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는데 그 은혜를 거부한 이스라엘 민족 때문에 결국 그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로 돌아간 것일까요?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음 세대를 준비시켜서, 그다음 세대로 하여금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을 성취하도록 만들어준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겠습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심판하시면서 하시는 내용이 뭐냐 하면 너희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민수기 15장 바로 그다음 장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너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들랑 이것을 지켜야 되고 저것을 지켜야 되고 들어가서 지켜야 될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해서 설명을 해줍니다. 좀 모순적이지 않습니까? 출애굽기 14장에서는 너희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 해놓고, 바로 그다음 장에 출애굽기 15장에서는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거랑 이런 계명을 지켜라 저런 계명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그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다음 세대를 일으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있겠고요. 민수기 마지막 부분에 가면은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며 지키라고 권면해 주는 것이죠.


하지만 이 제2세대 “출애굽 제2세대는 순종한 세대였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면, 출애굽 2세대는 믿음의 세대였을까요? 불순종의 세대였을까요? 그렇습니다. 불순종의 세대였던 것이죠. 심지어 모세와 아론도 하나님을 불순종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시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진행이 되는 것이죠. 특별히 모압 민족이라고 하는 그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기를 원했어요.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무너뜨릴까 어떻게 하면 망가뜨릴까 고민고민하다가 모압 민족이 생각해 낸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발람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불러다가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 발람 선지자가 모압 왕의 부름을 받고 가서 예언을 하게 되는데, 모압 왕으로부터 온갖 대접은 다 받아놓고 극진한 대접을 다 받은 다음에 그가 예언을 하는데, 그 예언이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는 예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축복의 예언을 해주고 계시는 것이죠.

오늘 읽은 민수기 24장 17절에서부터 19절의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규가 뭐죠? 규 규라고 하는 것은 임금님이 들고 있는 그 권위의 막대기를 규라고 합니다.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그의 원수 에돔은 그들의 유산이 되며, 그의 원수 세일도 그들의 유산이 되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오히려 이 발람은 모압 왕의 도움을 많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예언이 있었고, 사실 이 발람의 예언은 누구에 대한 예언이죠? 예수님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한 별이 나올 것이라고 하는 그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때 한 별이 떠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고, 그리고 그 예수님이 야곱의 후손으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후손으로서 와서,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시고, 온 인류를 구원해 낸 일을 하는 그 예언이 바로 발람의 예언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하지만 계속해서 비참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위대한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가 바알브올에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일을 했었고요.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서 온전히 이스라엘 민족이 죽임을 당할 뻔한 일들이 계속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죄를 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이 끊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들이 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의 그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취소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과 우리와 관계가 없어져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남은 자를 사용하시고 또 다른 세대를 사용하시고 하셔서, 구원의 약속을 끝까지 이루어 나가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민수기의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민수기 26장에 가면 또다시 지파들을 계수하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이제 1세대가 지나가고 제2세대가 들어서게 되어서, 제2세대가 들어선 그 이스라엘 민족을 지파별로 족장별로 다 계수를 하는데 그 숫자가 1세대와 2세대의 숫자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1세대가 많나요? 2세대가 많나요? 비슷한가요? 안 읽어봤으니까 모르죠. 아직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을 당하고 1세대가 죽임을 당하고 그런 심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을 더 더 불어나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팽개쳐 버린 것이 아니라 제2세대가 제1세대와 거의 똑같이 그대로 숫자를 유지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만들어주었다고 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를 멱살 잡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그 끈질긴 사랑을 민수기의 말씀 가운데서 볼 수가 있겠습니다. 단 한 지파만 좀 줄어들었어요. 어떤 지파입니까? 시므온 지파만 줄어들었어요. 25장에서 그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가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에, 그 지파는 좀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그냥 수포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된다고 하는 것을 민수기의 말씀 가운데서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에서 보면 슬로보핫 딸들이 나와서 인구 조사를 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유산을 우리 딸들에게도 주라. 이 슬로보핫의 자손들은 아들들이 없고 딸만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산은 아들을 통해서 계속 이렇게 주어지게 되어 있는데, 그 아들을 통해서 준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여성을 차별해서 그런 건가요? 왜 그런가요? 그 당시에 가족의 구조 자체가 한 가정을 이루게 되면 마치 우리나라에서 출가외인인 것처럼, 한 여인이 어느 가정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이 사람의 가정 안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그 아들에게 주어진 그 유산이 결국 그 사람에게도 다 똑같이 간다고 보기 때문에 아들 중심으로 모든 재산 유산들이 내려가도록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죠. 하지만 슬로보핫의 딸들은 아버지가 낳은 아들이 없어서 자신들의 형제들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돌아와야 될 그 유산이 다른 지파로 넘어가게 되는 그러한 위험 가운데 있을 때에, 이들이 찾아와서 우리들에게도 유산을 달라고 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서 그 슬로보핫의 딸들에게도 유산을 주도록 그렇게 명령을 하는 것이죠. 이런 걸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주어진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수기 마지막 부분에 가면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거의 도착해서 요단강 동편 지금의 요르단 지역의 이스라엘 민족들이 오게 되고 거기를 우선 점령하게 됩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절의 지파가 그 요르단 지방을 지금으로 말하면 그 요르단 지방을 그냥 차지하고 여기서 살겠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 땅은 사실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적절하게 타협을 해서 먼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난 다음에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살도록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결국 이 르우벤 지파, 갓지파, 므낫세 반지파가 선발대 역할을 하면서, 가나안 땅 정복에 나서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33장에서부터 35장의 말씀을 보면 출애굽 과정을 회상하는 이야기와 약속의 땅을 분배하는 이야기,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 레위인들에게 성읍을 주어야 한다는 것과 도피성을 지정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이 이스라엘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거룩함 정결함을 유지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민수기의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 우리들도 어쩌면 이 광야에서 살던 이스라엘 민족과 아주 비슷한 형편에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어요. 우리도 중간 단계에 있는 거죠. 아직 천국에 가기 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과 똑같이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 텐데,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했을 때, 그 시험을 당해서 넘어졌던 것들을 반면교사 삼아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떠났던 것들을 반면교사 삼아서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신실하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겠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다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민수기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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