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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눅 13:23-30)

옛날 어느 나라에 한 임금님이 계셨는데, 그 임금님은 공처가 임금님이었다고 합니다. 온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다 호령하고 다스리는데, 오직 한 사람, 자기 부인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공처가 임금이었던 것이죠. 그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참 자기 부인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이 임금님이 너무나도 참 근심에 쌓여 있다가, 대신들 앞에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대들은 아내를 어떻게 대하는가?” 물었어요. “그대들은 공처가가 아닌가?” 하고 물었는데, 공처가 아닌 사람은 이쪽으로 줄 서고 공처가 아닌 사람은 이쪽으로 줄 서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신들이 우르르 공처가 줄로 다 줄 선 거예요. 그 모습을 보면서 임금님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나만 공처가가 아니고, 전부가 다 공처가구나. 그대들도 별 수 없구려. 그러면서 위로를 받고 있었는데, 딱 한 사람이 공처가가 아닌 쪽에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신기하게 생각한 거예요. 그대는 어떻게 공처가가 아니고, 도대체 비결이 뭐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그렇게 아내를 잘 다스릴 수 있단 말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신하가 대답을 합니다. “전하, 제가 오늘 아침에 집에서 나오는데, 우리 아내가 말하기를 절대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웃자고 누군가 만들어낸 말이니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게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서 많이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그 문이 아닌, 사람들이 잘 찾지 아니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어떤 한 제자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주님, 구원을 얻는 자가 많습니까? 적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런 질문에 대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의 숫자가 많지 않을 거다. 많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대답을 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은 넓은 문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의 길로 향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길,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비록 소수가 들어가겠지만, 그 길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러니까 무조건 소수가 옳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소수가 옳습니까? 다수가 옳습니까?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하는 게 옳은 건가요? 소수가 맞다고 주장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무엇이 옳은 것이죠? 정답은 옳은 게 옳은 것입니다. 숫자가 많은가 적은가가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고, 옳은 게 옳은 것이고, 잘못된 게 잘못된 것이지, 사람들이 많은가? 사람들이 적은가가 결코 진리의 판단 기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이단들이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하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10만 명이 넘는 새로운 성도들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단으로 오고 있다고 자랑하면서, 우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다고 그렇게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주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숫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옳은 것이고 옳지 않은 것이 옳지 않은 것이지, 과연 어떻게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민주적인 사회에 살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을 비교적 적은 사람의 숫자가 선택하는 것보다 선택하는 것이 그나마 낳은 것일 거라고 하는 그런 원칙 때문이기는 한데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닌 것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갔던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요. 지금까지 이 세상에 수많은 해악을 끼쳤던 수많은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그 지도자들은 소수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 아니라, 다수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죠. 히틀러와 같은 사람은 독일 인민들의 수많은 지지를 받아서, 히틀러라고 하는 그런 독재자가 탄생하게 된 것이고, 오늘날에도 그런 역사가 계속 반복되어서 우매한 민중들이 잘못된 지도자를 뽑아서 고통스럽게 겪는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러니까 무조건 소수가 옳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에서는, 그 좁은 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표현해 주고 있지 않지만, 이 말씀을 다른 복음서인 마태복음서에서도 동시에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7장 13절, 14절 말씀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가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으니라.” 왜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어려워합니까? 그 문이 좁기 때문에 그래요. 그 문이 협착하기 때문에, 들어가기가, 들어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이 들어가려다가 포기해 버리는 것이죠. 어려운 길이기 때문에 포기해 버리는 것이죠. 하지만 넓은 문은 어떤 문인가? 고생하지 않고 그냥 통과할 수 있어요.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그 문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우리가 무조건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도 아닐 겁니다. 무조건 어려운 것이 진리인 것이 아니라, 만일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한다면, 그 전제가 먼저 있어야 되겠죠. 만일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한다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포기하지 말라는, 옳은 길이라고 한다면, 그 길이 어려울지라도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인 것이지, 어려운 것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데, 어려운 것은 왜 어려운 것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왜 그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려울지라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중단하지 않아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분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복된 길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갔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을 꼽을 수 있을까요? 모세를 꼽을 수가 있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에서부터 26절의 말씀을 보면,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에게는 어떤 길이 놓여 있는가? 두 가지 선택의 길이 놓여 있는데, 하나는 바로의 궁정에서 그 모든 것을 누리며 편안하게 사는 길이었어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편안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이 보장이 되어 있는 그 길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길이 있는데,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길, 하나님의 민족과 함께, 주의 민족과 함께 같이 고난을 받는 그 길이 놓여 있는데, 어느 길을 선택했는가? 그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고난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길이 생명의 길이고 그 길이 옳은 길이기 때문에, 고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신약에 보면 바울 사도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바울 사도에게도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길이 놓여 있습니까? 유대교에 남아서 그냥 그대로 있으면서 승승장구하는 길이죠.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계속해서 성공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교회 공동체 속으로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고난의 길을 가게 되었는데, 그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간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간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면 주기철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신사 참배를 하라고 하는 일제의 강요 앞에서, 신사 참배를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그런 강요 앞에서 굴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받으면서, 탄압을 당하면서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걸어간 분이 바로 주기철 목사님인 것이죠. 예전에 주기철 목사님의 일대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참 감동적으로 연극을 만들었는데요. 탤런트 임동진 장로님이었던가요? 그분이 딱 이렇게 주기철 목사님 역할을 하면서 딱 연극을 하는데, 일제 순사들이 신사 참배를 하지 않으면 고통을 주는 겁니다. 막 협박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주기철 목사님이 그래도 신사 참배 못하겠다고 하니까, 그 주기철 목사님 앞에 못을 박아 박은 길을 앞에 놓고 그 앞을 지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 연극을 보니까 실제는 어쨌는지 모르지만,, 그러니까 그 주기철 목사님이 그 압제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그 못 길을 걸어가는 거죠. 발에 피가 나면서 걸어가는 거예요. 걸어가는데 어떻게 걸어가는가, 찬송을 부르면서 가는 거예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 이 찬양을 부르면서, 그 못이 박힌 그 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3절 찬양에,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고난의 길이지만 아픔의 길이지만, 좁은 길이지만,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로 가기 때문에, 그 믿음을 굴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다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낙담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고, 좁은 문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생명의 길이 바로 그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좀 더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넓은 문으로 다녔던 사람은 두 사람의 차이를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집에 문이 닫혔을 때 사람들이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집 여기서 말하는 집 문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겠습니까? 천국을 상징하는 것이고, 천국에 들어가는 문을 상징할 것입니다. 천국의 문을 열어달라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영생을 얻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청하고 있을 때, 놀랍게도 안에서 차가운 주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셔요.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밖에서 외칩니다. “주여,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주님과 함께 같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좀 더 생생한 예가 마태복음에는 더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요 마태복음 7장 22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렇게 외치는 거죠. 오늘날의 말로 이야기하면 무슨 얘기일까요? 저 천국에 가서 하나님 제가 목사였어요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장로였지 않습니까? 하나님, 내가 교회 다니지 않았습니까? 얘기하고 있는데 주님의 대답이 무엇이냐면, “나는 너 모른다”라는 그런 아주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된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누가복음 13장 27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주님을 따른다고 했지만 무슨 일을 했어요? 악을 행하고 다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다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좁은 문이고 좁은 길인데,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신 그 길은 그 좁은 길인데, 그 길이 싫어서 세상의 길로 그냥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그 길로 걸어갔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잘 이해하기가 어려운데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우리의 본성과는 정반대 되는 말씀이죠. 우리의 본성은 탐욕적이고 이기적이어서 나의 욕심만 챙기고 살아가고 싶은데,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남에게 도움을 주고 은혜를 베풀고 자비를 베푸는 그런 삶을 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고, 우리들의 마음은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냥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하나님의 말씀은 “용서해라.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고 계시는데 우리들의 마음이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기가 싫은 거예요.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버리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나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헌신하라고 말씀하기도 하시고, 주를 위해 살라고도 말씀하시는데, 그 길이 너무 어려우니까,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살려고 하는 그런 그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의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러나 생명의 길로 가지 않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런 넓은 문으로 가는 자는 지금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가 너희를 모른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고,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고, 내가 어떻게 행했는가에 따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놀랍게도 너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말씀하실 거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배치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내가 천국에 들어갈 만한 당당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순간,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주신 그 보혈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고,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 앞에 가서 “주님 제가 완벽하게 살았어요. 그러니까 천국 들여보내주세요.” “주님 제가 얼마나 뛰어난 목사인 줄 압니까?” 하면서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늘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이고, 늘 부족하기에,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늘 넘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그 은혜를 바라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야고보서의 주제와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누가 과연 진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를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냥 넓은 문으로만 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계속해서 죄악을 저지르며 마음대로 악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사는 사람은 그 믿음이 가짜라는 거예요. 가짜 진짜가 아니고 엉터리라는 거예요.

이건 참된 믿음은 참된 사랑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인데요. 참된 사랑은 무엇입니까? 참된 사랑은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하는 것이죠. 그런데 만일 어떤 여인이 어떤 한 남성과 사랑한다고 말은 해놓고, 그런데 같이 결혼해서 살자 말하니까, “내가 이렇게 조그마한 집에서 어떻게 같이 살아? 돈이 그것밖에 없어?” 하면서, 그 남자와 같이 지내기를 싫어하고, 그리고 자꾸만 이 남자가 아니라, 다른 남자들과 같이 어울려 지낸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거 맞아요? 아니잖아요? 사랑한다면 무엇입니까? 사랑한다고 한다면 함께 해야 되는 것이죠. 함께해야 그게 진짜 사랑인 것이고, 참된 사랑이라고 한다면 거지로 살아도 괜찮고 함께 있을 수만 있다고 한다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죠.

지난주에 신앙 톡투유를 하면서, 잠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마는 제가 제 아내에게 결혼을 허락받았던 것은, (참 좀 그런데요.) 제 아내는 요즘 늘 무슨 얘기를 하냐면 제가 프러포즈도 안 하고 그렇게 근사한 것도 없는데, 결혼했다고 굉장히 아쉬워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런데 사실은 프러포즈를 안 한 게 아니라 하기는 했어요. 어떻게 했냐? 아무것도 안 가지고 그냥 이야기했어요. 그때 저는 전도사였고 우리 아내는 최 선생이었었는데, “최 선생, 나는 최 선생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요.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해주는 것처럼 나는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요. 하지만 나와 함께 같이 갈래요?”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OK 그런 거예요. 이걸 우리 전도사님이 그대로 쓰면, 결혼을 평생 못할 텐데, 아무튼 그 그랬어요. 참된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고난이 있어도 사랑하는 거, 아픔이 있어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참된 사랑인 것처럼, 믿음은 무엇인가?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고난이 있어도 정말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도 믿음의 길로 걸어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너무나도 좋기 때문에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지만, 그러나 동시에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나를 따라오려면 십자가를 져야 한다. 고난을 당해야 된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한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그 길이 힘든 길이고 고난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 믿음의 길, 좁은 문으로 담대하게 걸어 나갈 수 있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렇게 하신 것이 먼저 하신 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었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리고, 십자가의 고통, 죽음의 고통을 혼자 다 지시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길을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 위해서 먼저 좁은 문을 향해 가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주님을 따르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물론 늘 어려운 것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길이 행복한 길이고, 궁극적으로 복된 길이고, 그 길이 너무나도 행복한 길이지만, 그러나 때로는 그 믿음의 길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우리의 본성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나아가는 길이 고통스럽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때로는 힘든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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