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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발을 씻기라 (요 13:12-17)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저녁 만찬을 하시면서,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날 식사하시는 가운데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서로 너희도 발을 씻겨주라고 교훈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에 해 주셨던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에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시다가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벗고, 친히 몸에 수건을 두른 후에,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하나씩 씻겨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발을 씻겨주는 것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늘 있었던 일이긴 한데요. 왜냐하면 참 오늘처럼 우리가 좋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 시대가 아니었고, 2천 년 전에 마치 샌들과 같은 그런 신을 신고, 그 중동지방의 그 황량한 땅에서 하루 종일 걸어 다니다 보면, 참 무척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발이었기 때문에, 그 발을 씻어주는 일이 늘 있었던 관습이기는 하지만, 그 발을 씻어주는 사람이 신분이 낮은 사람이 씻어주는 것이 풍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발을 씻어준다고 한다면, 종이 주인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고, 그리고 제자가 선생님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따라 발을 씻지 않았던 것 같아요. 씻어줘야 될 사람들이, 종들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씻어주어야 한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씻겨주고, 낮은 자가 발을 씻겨주어야 했었겠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날은 그 누구도 발을 씻어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날 일어서셔서, 마치 종들처럼 허리에 수건을 두르기 시작해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눈치를 보고 있었던지 모릅니다. 누가 먼저 발을 씻어주나? 저 사람이 발을 씻어주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 같은데, 그때 주님께서 먼저 일어서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줄 때, 제자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던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 요한복음 13장 14절에서부터 15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라고 하는 그런 섬김의 삶을 살라고 하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친히 발을 씻어주신 것이죠.

참된 선생님은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쳐주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이렇게 낮아져서 섬기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어쩌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가능성이 많이 있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이 섬김의 모습이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은 이번이 처음 씻어주는 것이었을는지 몰라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낮아지신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 하늘나라에서 보좌 앞에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천지 만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찬송을 받으셔야 할 그 주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주신 그 삶 자체가, 사실은 그 전체가 낮아지신 삶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위해서 처참하게 죽으신 것 자체가, 그 어느 것보다도 발을 씻기신 것보다도 더 낮은 곳으로 더 겸손한 모습으로 내려오신 것이었기 때문에, 이번에 발을 한 번만 처음 씻기신 것이지만, 그러나 그 삶 자체가 친히 낮아지신 삶의 모습을 친히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자들을 향해서 늘 교만하기 쉽고 대접받기 쉽고 그렇게 교만한 자리에 앉기 원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이 제자들을 향해서, 친히 낮아질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한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번 고난 주간을 맞이하게 되면서,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늘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진이 낮아지셨고, 그리고 가장 더러운 곳인 그 발을 씻겨주셨던, 그 주님의 모습을 늘 묵상하는 가운데, 오늘 또 우리 모두가 주님과 같이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다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낮은 자리에 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친히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하겠다고 하는 그런 결단들이 있어야 할 텐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본성은 그런 주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자꾸만 높아져서 대접받기를 원하는 그런 습성들이 있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높여주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접해 주기를 그렇게 바라는 습성들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죠.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높은가? 이것을 가지고 엄청난 신경전을 벌였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가는 가운데 누가 높으냐? 누가 우리 가운데 더 높은 자리에 있느냐? 이것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그때, 예수님께서 해 주셨던 말씀이 마태복음 20장 25절에서부터 28절 말씀 가운데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들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으로 주관하고,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가 대접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어라.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먼저 섬기라고 권면해 주신 말씀이 오늘 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어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서로 발을 씻겨주지 않는 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죄악이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손을 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라고 손을 주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냥 준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준 것이 아니라, 사명으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있던 어떤 장점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어떤 권세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주셨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라고 교만하라고, 그리고 뻐기라고 그러한 것을 준 것이 아니라, 나만 잘 먹고 잘 살게 만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가지고 청지기로서 살라고, 저와 여러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사용되지 않는 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죄악이라고 하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겸손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왕으로 세우셨다고 한다면, 그 왕으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좌에 앉아서, 영광을 받으면서 궁궐에 살면서 호의호식하라고 왕을 세워준 것이 아니라, 왕이라고 하는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면, 백성들을 잘 돌보고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면서, 그리고 섬기는 삶을 살라고 왕으로 세워주신 것이죠. 학교에서 어떤 학생을 반장으로 세워줬다고 한다면, 교만하라고 반장의 자리에 세워준 것이 아니라, 그 학생들을 위해서 봉사하라고 세워준 자리가 반장이라고 하는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것을 주시고, 직분을 주시고 또한 권세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재능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그냥 거저 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청지기로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며 섬기는, 섬기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 내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해서 적용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읽을 때에도 너희가 서로 발을 씻겨야 한다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읽을 때, 우리가 종종 어떤 생각을 하냐면, 내게 적용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적용시키는 것이죠. 우리 목사님이 발을 씻겨야 되지 않을까? 우리 장로님들이 발을 씻겨야 되지 않을까? 어떤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발을 씻겨야 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자꾸만 적용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적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주 아주 오래전에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교계 신문에 담임 목사님 청빙 광고가 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담임 목사 청빙 광고가 난 문구가 아주 흥미로워서 제가 그것을 기록해 놓았는데요. 그 교회에서는 뭐라고 청빙 광고를 내면서, 이렇게 청빙 광고를 냈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도들의 발을 씻겨주실 목사님을 찾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광고를 내놓았습니다. 저는 그 광고를 낸 교회의 성도들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어요. 왜냐하면 이 시대에 수많은 목사님들이 계시지만, 참된 목회자를 찾는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정말 존경할 만한 목회자, 정말 존경할 만한 진정한 목회자를 찾고 싶다고 하는, 그런 갈망을 거기에 표출한 것이 아닐까 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제 자신을 살펴보는 그런 기회로 삼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조금 아쉬웠습니다. 왜냐하면 이 청빙 광고를 내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 구절을 보면서, 이 주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섬겨야 되겠구나. 내가 낮아져야 되겠구나. 내가 발을 씻겨야 되겠구나.” 하는 그런 마음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도자에게 다른 사람이 발을 씻겨주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는 그런 갈망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약간은 아쉽더라고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고 한다면, 그 말씀이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가 이렇게 낮아져야지. 내가 이렇게 섬겨야지.”라고 하는 그런 결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한 기준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판단으로 적용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발을 씻겨줘야지 하는 그런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이 발을 씻겨주지 않는가? 왜 발을 씻겨주지 않는가?”라고 생각한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적용인데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나 자신을 향한 적용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참 많은 권면들이 있습니다. 남편을 향한 권면, 아내에 대한 권면, 또 부모님들에 대한 권면, 자녀들에 대한 권면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들을 향해서 권면하는데, 뭐라고 권면합니까?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랑하되 주께서 자기 몸을 교회를 위해서 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씀을 읽으면, 아내들이 “아멘” 그래요. 그러면서 또 성경 말씀에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주께 복종하듯이 복종하라. 그러면 남편들이 “아멘” 그래요. 아니 아내들이 “아멘”, 아니 남편들이 “아멘” 그렇게 볼 게 아니고, 내게 해주시는 말씀을, 나에게 주셨던 그런 말씀으로 봐야 되는 거죠.

예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님 중에 한 분이었던 데이비스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데이비스 교수님이 자기 신의 아내가 암 투병하고 있는 가운데 있을 때, 그 암투병하고 있는 그 사모님을 위로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왔을 때, 그 데이비스 교수님이 한 말이 참 감동적으로 왔습니다. 그 교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얘기를 하냐면 I am a sinner.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아내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씀대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감동이 됐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판단하고 재단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신 그 모습을 보면서, 왜 사람들은 발을 씻겨주지 않는가? 왜 지도자가 발을 씻겨주지 않는가? 왜 저 사람은 나의 발을 씻겨주지 않는가? 그걸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구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구나.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안아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사랑하지 못했다고 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회개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종종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먼저 발을 씻기면 저 사람도 감동을 받아서 나의 발을 씻겨주겠지.”라고 하는 기대를 할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요. 우리가 발을 씻길 때는 그런 기대를 하면서 발을 씻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너희가 서로 발을 씻기라” “씻어주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서로 발을 씻겨주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내가 씻겨주고, 그리고 저 사람이 나를 씻겨주고, 나도 베풀고 저 사람도 나에게 베풀고, 그래서 서로가 베풀고 베풂을 받는 그것을 기대하라고 이 말씀을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서로 발을 씻겨” 씻어주라고 하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줄 것을 기대하지 말고, 먼저 우리가 먼저 서로 나서서 서로 먼저 발을 씻겨주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해주신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이냐면, 제자들을 다 모아놓은 다음에 베드로를 지목하면서, “베드로야, 그래도 네가 수제자 아니냐?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네가 씻겨줘야 되지 않느냐? 네가 먼저 해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라,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다른 사람이 발을 씻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지 말고, 먼저 내가 나서서 발을 씻어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주고받아서, 그래서 서로서로 발도 씻어주고 발 씻김을 받고 하는 그런 모습을 기대하라고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리고 내가 발을 씻어주더라도 그 사람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내가 먼저 나서서 서로 먼저 나서서 발을 씻어주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종종 선을 행하다가 낙담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실패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상대방의 반응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용서해 주면 저 사람이 개과천선하겠지. 내가 사랑을 베풀면 저 사람도 나를 사랑해 주겠지. 내가 이만큼 따뜻한 사랑을 베풀면, 저 사람도 나에게 그만큼 사랑을 갚아주겠지.”라고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실패하는 거예요. 실패하는 이유는 내가 이만큼 하면 상대방이 해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거예요. 세상이 그렇게 착하지 않은 거예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내가 발을 씻게 버리면, 더 많이 뺏어가는 세상이에요. 내가 이만큼 선하게 베풀면, 나를 악용하는 세상이 이 세상이에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내가 사랑을 베풀면, 무시하고 깔보는 세상이에요. 내가 사랑을 베풀면, 마음이 변하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용서하면 그 저 사람도 개과천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깔보고 무시하면서, 더 나쁜 짓을 하는 세상이 바로 이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선한 반응, 다른 사람의 좋은 반응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는 바로바로 실망하게 될 것이다. 바로바로 낙망하게 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향해서 사랑을 베풀 때, 내가 이만큼 하면 “남편도 좀 양심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양심이 없어요. 그게 인생이에요. 더 나쁜 모습을, 오히려 더 보일 때가 많이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말씀하신 그것은 받지 못하더라도, 먼저 나서서 서로 먼저 나서서 발을 씻어주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줄 때 열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 누구의 발도 씻어주셨나요? 가롯 유다의 발도 씻어준 거어요. 그 자리에 성만찬의 자리에 가롯 유다도 앉아 있었고, 발을 씻겨주실 때 그 가롯 유다에 발도 씻어주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 씻김을 받은 그 가롯 유다는 그날 밤 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예수님을 체포하는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사랑을 해준 것이 부족해서 배반했나요? 예수님의 사랑이 뭔가 100%가 아니라 50%였기 때문에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게 아니고, 끝까지 사랑하셨지만, 그러나 그 예수님의 사랑을 배신해 버리고, 예수님을 팔아버린 그 가롯 유다의 모습이 우리가 이 현실 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내가 이만큼의 사랑을 베풀면, 내가 이만큼의 발을 씻어주면, 저 사람도 양심이 있으니까, “나에게 이만큼은 해주겠지.”라고 하는 그런 기대를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언제나 실패하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제가 아주 아주 옛날 전도사 시절에 유초등부를 맡아서 유초등부 전도사로 사역을 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입니까? 30 몇 년 전이죠. 그 당시는 에어컨도 없었고, 선풍기 돌아가는 아주 뜨거운 여름날 여름 성경학교를 하는 겁니다. 동네를 돌면서 북 치고 장구치고 하면서 한 바퀴 돌았더니, 모든 동네 아이들이 다 들어와서, 예배당하니 꽉꽉 들어차서, 그 가운데서 여름 성경학교를 하는데 아이들도 많이 들어와 있고, 그리고 너무나도 더운 날씨이기 때문에 예배당만이 무척 더운 거예요. 그런데 선풍기가 벽에 몇 개 달려 있는데, 그 선풍기 앞자리는 명당자리인 거예요. 아이들이 그 자리에 서로 앉으려고, 그 선풍기 자리를 주려고 막 서로 막 밀치고 다투면서, 서로 양보하려고 하지 않고 막 그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얘들아 날씨는 참 덥고 힘든데, 아이들이 많이 있는데, 선풍기는 하나밖에 없고, 선풍기 바람이 나오는 좋은 자리는 이거밖에 없구나. 누군가는 양보해야 되고, 누군가는 이 좋은 자리에 앉아야 되겠는데, 얘들아 이 좋은 자리를 양보하고 싶은 사람 누구냐 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얼마나 감동적인 대답을 아이가 하는지 모릅니다. “전도사님, 제가 양보할게요.” 그 모습을 보면서 조그마한 아이가 양보하는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제가 감동을 받았는지 몰라요. 그래 고맙다. 네가 양보한다니 너무나도 착하구나. 너무나도 고맙다고 얘기하고 갔어요. 근데 조금 있다 보니까, 또 싸우고 있어요. 근데 그 아이가 아까 전에 양보했던 그 아이가 얘기하는 거예요. 아까 내가 양보했잖아. 이번에 네가 양보해. 한 번 양보하면 네가 양보해. 그게 우리들의 마음, 그래서 늘 실패하고 그래서 늘 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렇게 발 씻어주는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이 충족되면 발을 시킬 게 아니라, 서로서로 먼저 발을 씻겨라. 내가 발을 씻겨도 저 사람이 나를 발을 씻겨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발을 씻겨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위해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신 것처럼, 그렇게 발을 씻기라고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관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서로 발을 씻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의 발을 먼저 씻어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이 세상 가운데 오셔서,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시키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목숨을 버리셔서 죽기까지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살을 내어주시고 피를 내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이 받았기에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발을 씻기는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성찬 예식을 행하게 될 텐데, 이 성찬 예식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발을 씻기셨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죄를 씻기기 위해서 그냥 낮아지심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과 피까지 다 내어주신 것을 기억하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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