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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있으나 밖에 있는 자 (레 18:24-30)

지난주에 이어서 레위기의 말씀을 오늘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을 요약한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저 가나안 땅의 풍속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살게 되었지만, 그 가나안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풍속들, 가나안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그런 일들을 따라 하지 말고, 닮지 말라고 하는 그런 경고의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레위기 18장 3절과 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 살고 있었을 때, 그 애굽 땅에 있던 사람들이 행하고 있던 풍속들을 보았을 겁니다. 애굽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의해서 많은 영향도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해방이 되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텐데,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역시 가나안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텐데, 그들이 행하고 있는 풍속,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들에 영향을 받지 말고, 따라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라고 하는 것이 오늘 레위기 18장에서 명령해 주고 있는 그런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주 끔찍한 명령을 하나 주신 게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만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면, 가나안에 살고 있는 그 민족들을 전부 다 몰살시키라고 하는 명령입니다.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버리라고 하는, 그런 끔찍한 명령을 하나님께서 해 주셨는데요. 오늘날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 굉장히 불편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라고 하시는가? 왜 하나님께서 저 가나안 민족을 죽이라고 하는가? 굉장히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두 가지 점에서 이해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가나안 민족이 엄청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하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레위기 18장 24절에서부터 25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즉 그 가나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그 죄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잘 살고 있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스라엘 민족을 거기다 심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쫓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그들이 악을 행했기 때문에, 그 악에 대한 심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내셔서, 그 가나안 민족들을 심판하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 갈대와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와 내 후손들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언제 주느냐? 지금 당장 주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에 주겠다고, 지금 주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주겠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창세기 15장 1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16절 말씀에 보면, “네 자손은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고 싶은데,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고 싶은데, 아모리 민족의 죄악이 아직 다 차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직 심판할 정도까지는 안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줄 수가 없고, 아모리 민족의 죄악이 가득 차서,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심판해야만 하게 되는 그때에, 그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내어서, 그들을 심판해 버리고, 그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겠다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민족을 멸절시키라 몰살시키라고 명령하신 두 번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풍속을 따라 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민족들과 어울려 살다가,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고, 그들의 풍속을 따라 하다가 타락해 버리고, 죄악을 범하게 될까 봐, 그들을 끊어버려서, 그들을 멸절시켜서,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거룩을 유지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그런 명령을 해 주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 가운데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죠. 만일 이스라엘 민족도 그들처럼 되어버린다고 한다면, 만일 이스라 민족도 가나안 민족과 똑같아진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도 쫓아낼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도 망할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레위기 18장 28절과 29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이 가증한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그 옛날 이 가나안 민족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서 쫓아내신 것처럼, 그 땅이 토해버려서 쫓아내게 만들었던 것처럼, 만일 이스라엘 민족도 가나안 민족과 똑같아진다고 한다면, 가나안 민족의 풍속을 따라,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똑같이 토해내게 될 것이고, 똑같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경고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알고 있는데요.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거룩성을 유지했습니까? 가나안 민족처럼 그렇게 죄를 짓고 말았습니까? 죄를 짓고 말았죠. 가나안 민족처럼 우상을 섬기고, 가나안 민족처럼 음란한 행동을 하면서, 죄악을 저지르게 될 때에, 결국 북쪽 이스라엘 민족은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를 통해서 멸망을 당하게 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 비극적인 역사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가나안 땅에 살면서 가나안 민족에게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먹을 만지면 먹물이 묻게 되어 있고, 인주를 만지게 되면 인주가 묻게 되어 있고, 짬뽕을 먹으면 짬뽕 국물이 묻어요. 우리가 가까이하는 것에 묻게 되어 있고, 영향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인데, 이스라엘 민족이 그 가나안 민족들을 다 쫓아내지 못해서, 결국은 영향을 자꾸만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그런 상황을 가정해서, 오늘 레위기의 말씀 가운데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겁니다. 경고하는 겁니다. 너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들의 풍속을 따르지 마라. 그들의 규례를 따르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도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저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도 이 세상에 풍속이나 이 세상의 규례를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사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누굽니까? 우리는 누굽니까? 우리는, 크리스천은 세상 안에서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 in the world,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닌 것이죠. of the world.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땅을,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면서도, 이 세상의 풍속이나 이 세상의 규례에 따라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하늘에 있다고 하죠. 빌립보서 3장 20절의 말씀에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믿습니까? 우리 옆의 사람하고 한번 인사를 나눠봅시다. “천국 시민이시군요.” 좋습니다. 지옥 시민이 아니시기에 너무나도 좋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그런데 어디서 살고 있어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인데, 이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의 방법대로 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풍속에 따라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몇 가지 고민해 보아야 되고 생각해 보아야 될 점들이 있습니다.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요. 첫 번째는 “과연 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가나안과 같은 곳에서 살고 있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의 풍속을 본받으면 안 되었듯이, 우리도 이 세상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풍속을 본받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따라 살지 않고, 우리가 거룩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까? 그 방법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한번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저 가나 민족을 몰살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들을 없애버리고, 저들을 쫓아내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해 주고 계신데,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도 쫓아내야 될까요? 이 세상에 살면서 반기독교적인 사람들을 다 쫓아내 버리고, 그들을 없애버리고, 무찔러버리고, 그들을 다 쫓아내 버리고, 기독교 국가를 만들어야 되는 것일까요? 그렇게 기독교 국가를 만들 수 없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불신자가 많다고 하면, 우리끼리 어느 조용한 곳으로 가서, 교회 공동체만을 이루어 살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어떤 은밀한 곳을 만들어서, 그곳에 숨어 들어가서 거기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어떤 방법을 써야 옳겠습니까?

지금까지 역사상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두 가지 방법들을 사용해 왔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이 세상과 격리되어 사는 방법을 선택했고요. 또 하나의 방법은 악한 세상을 무찔러서, 기독교 국가를 만들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힘을 잡는 권력을 잡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두 가지 방법으로 노력을 한 것이죠. 특별히 수도원을 만들어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요. 중세시대 때 보면, 정말 하나님의 거룩성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도 싫어서, 이 세상에는 죄악이 너무나도 많고, 이 세상에는 악한 일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산다면, 내가 때가 묻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수도원을 만들어 놓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생활을 하는 것이죠. 수도원에 들어가서,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또 기도에 매진하고, 침묵으로 수행하면서, 그래서 하나님과 가까이하려고 하는 그런 수도사의 삶을 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농사를 짓거나, 이 세상에서 장사를 하거나,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때가 묻을 수밖에 없고, 더러울 수밖에 없으니, 이 세상의 풍속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그런 것들을 다 내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오로지 신앙생활만 하고, 오로지 찬송만 하고, 오로지 기도만 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그런 노력들을 많이 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가운데서 아주 특이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요. 그 사람의 예를 들자고 한다면. 그 사람의 이름은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은 5세기 때 살았던 사람인데요. 이 사람의 원래 직업은 목동이었습니다. 목자였습니다. 양을 치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수도사들의 전기를 읽었습니다. 수도사들이 어떻게 수도원에 들어가서 생활하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목동으로서,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더러운 인생인데, 수도사들은 정말 거룩을 향해서 가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좋아서, 수도사가 되기로 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죠. 그리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거기서 40일 금식 기도도 하고, 막 그렇게 하는데, 이 사람이 하도 40일 금식을 많이 하니까, 수도원 공동체가 좀 약간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서, 쫓겨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개인적으로, 이제 거룩을 추구하는데, 어떻게 했냐면, 쇠사슬을 묶어놓고 생활을 하든가, 아니면 땅 속에 자기 몸을 묻어놓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머리만 내놓고 있다든가 하다가 나중에는 기둥을 하나 세웠습니다. 기둥을 하나 세워서 그 위에 올라가서, 거기서 성경을 읽고, 거기서 기도하며 그렇게 지나게 되었는데, 그러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듣고 그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저기에 가면, 저 광야에 가면 기둥 성자라고 하는 시므온이 있는데, “그 사람은 정말 도가 트인 분이다. 정말 영적으로 영성이 가득한 분이다”라고 하는 소문이 나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그 시므온은 그 기둥 위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리고 제자들이 올려주는 음식만을 먹고, 그리고 그 기둥에서 자고, 그 기둥에서 생활을 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내가 이 이야기, 제가 이 이야기를 읽다 보니까, 그러면 대소변은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아무튼 어떻게 했겠죠. 아무튼 근데, 아무튼 이 사람은 그 기둥 위에 올라간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 기둥 위에 올라가, 사람들과 거리를 둘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기둥을 세워놓고 그 위에서 생활하다가, 사람들이 더 몰려드니까 더 높은기둥을 세워서, 기둥을 점점점점 더 높이 올려서, 그래서 그 기둥 위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그 모습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이 된다 하면서 그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기둥 성자가 그 제자들이 올려준 물을 가지고 세수를 해서, 세숫물을 버리면,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그 물이라도 좀 맞을까, 그렇게 하면서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도사들처럼 그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요? 이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의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을 받으면서 나도 수도사 생활을 좀 하고 싶다고 하는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요. 사실은 이것은 성경적으로 건전한 방법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불신자들을 정복해 버리는 거죠. 중세 시대 때, 십자군 운동이 있었는데, 이 십자군 운동은 이슬람교도들을 향해서 전쟁을 일으켜서 그들을 정복해 버리고, 이슬람이 다스리는 사회가 아니라, 기독교가 다스리는 나라로 바꾸어 버리려고, 무력을 써서 기독교로 바꾸어 버리려고 하는 그런 노력을 한 것이죠. 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해서 거룩성을 유지하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사실은 이 두 가지 방법 다 건전한 방법도 아니고,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부터 떠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내가 정말 도를 닦기 위해서는 속세와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떠나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죠? “이 말은 이 세상에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니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권면하면서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과 교류를 끊어버려라. 그들을 쫓아내 버려라.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오해하지 말라고 5장 10절의 말씀을 말하는 겁니다. 이 말은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부터 떠나버려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부터 떠나서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바울 사도가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죠.

더 나가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14절에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디의 소금이니?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어디의 빛이라?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우리끼리 소금이고, 우리끼리 빛이고, 우리끼리 거룩해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되고, 세상의 빛을 발휘해야 되고, 그래서 세상에게 전해야 될,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어야 될, 거룩한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도원 속으로 숨어 들어가거나, 아니면 무력을 통해서 이 사회를 기독교 국가로 바꾸어 버리려고 하는 시도는 성공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로 던져야 될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우리가 피해야 할 세상의 풍속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지 말고, 이 세상의 풍속에서부터 벗어나야 된다고 하는 그런 교훈을 얻을 수가 있겠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피해야 할 이 세상의 풍속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으로부터 유래한 풍속이라고 한다면, 다 거절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거부해야만 그래야 거룩하게 되는 것일까요?

한때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으로부터 벌써 수십 년 전에는 교회 안에서 기타를 칠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기타를 못 치게 했어요. 왜 못 치게 했죠? 기타가 무엇인가? 술집에서 술 먹고 노래하는 그런 유흥에 필요한 악기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맞지 않는 악기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는 바이올린이나 첼로로 해야지, 기타나 일렉트릭 기타나 드럼이나 이런 걸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사실 그것은 우리나라 몇십 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지만, 그것보다도 몇백 년 전에는 어떤 논란이 있었는가? 교회에서 피아노 치면 안 된다고 하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피아노나 올겐이나 이런 것은 세상의 유흥을 위해서 만든 것들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때 피아노를 쓸 수 있는가? 올간을 쓸 수 있는가? “악기 없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된다”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왜? 그것은 세상에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절대로 쓸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도 클래식 음악만 하나님 앞에 드려야지, 재즈풍의 노래나 뉴에이지풍의 노래는 그건 사탄이 준 것이기 때문에, “그런 노래들은 교회에서 부르면 안 된다”라고 하는 주장을 수십 년 전에 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피해야 될 세상의 풍속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거부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들의 풍속을 피하라고 하는 것은 가나안 민족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면 피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과 배치되는 풍속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가나안 땅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고, 또 가나안 땅에서 음란한 행위들이 있었는데, 그러한 가나안 민족들의 우상숭배, 가나안 민족들의 그 음란한 행위, 가나안 민족들의 그 탐욕적인 모습들, 그러한 것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는 것이지, 가나안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면, 다 거부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닌 것이죠.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면서는, 목축만 가능했던 것이죠.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농사라고 하는 것은 가나안 민족들이 하던 것이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농사를 지으면 안 된다는 이야깁니까? 아니죠. 농사를 짓는데, 농사의 기술들 가나안에서 개발한 농법들이 있고, 가나안에서 개발한 여러 가지 농사의 기술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나안에서부터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그 가나안의 그 기술들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그게 아닌 것이죠. 당시 가나안은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청동기 문화밖에 없었는데, 그 가나안 민족들이 가지고 있던 철기문화를 수입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까? 가나안 민족이 만들어낸 악기나 여러 가지 문화나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한다면, 가나안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모두 다 거절해야 된다는 이야기일까요? 그게 아닌 것이죠.

무엇을 배우지 말라고 하는 것인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거예요. 음란한 짓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고, 이 세상의 악한 일들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에서, 저 가나안의 풍속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이지, 이 세상에서부터 유래한 것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그래서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을 시민권자로서,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는지, 언제나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가나안 사람들처럼 이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악을 행하고, 똑같이 우상을 섬기고, 똑같이 미워하고, 똑같이 탐욕을 부리고, 똑같이 여러 가지 악한 일들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주신, 그 부르심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저 하늘에 계시면서, 우리를 바라보고 “더러운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거리를 유지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이 세상에 기독교가 아닌 다른 모든 종교들은 그 신이 너무나도 거룩하기 때문에, 이 땅에 내려오지 않습니다. 특히 이슬람교에서는 그 알라신이 너무나도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이름을 함부로 말할 수도 없고, 그 거룩하신 신이 이 땅에 내려온다고 하는 것은 생각할 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 주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 주님께서는 우리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 더럽다고 하고 우리와 거리를 두신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 가운데 오셨어요. 우리의 아픔을 싸매시고, 우리의 그 더러운 것들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위에 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이 받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세리와 어울리셨을 뿐만 아니라, 만지면 안 된다고 하는 그 나병 환자를 만지시고, 여러 가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만지시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그들을 회복시켜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로 변화되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을 닮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항상 질문을 던져야 돼요. 과연 이것은 세상의 풍속을 따르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인가? 내 마음 가운데 솟아나는 생각들이 있다고 한다면,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내가 이렇게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세상이 기뻐할 일인가? 내 마음 가운데 탐욕이 솟아오른다고 한다면, 만일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일까? 아니면 이 세상의 방법인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어떤 상황 앞에 있든지 간에, 과연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지, 아니면 이 세상의 방법을 따라 이 세상의 풍조에 휘말려 살고 있는 것인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점검하며, 믿음으로 결단하고 돌아오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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