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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찬양 (행 16:19-25)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엄청난 기적들을 많이 체험한 바 있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16장의 말씀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라고 하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겪었던 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보라고 하는 지역이 어디일까요? 한번 지도를 보면서, 빌립보가 어디 있는지를 한번 확인해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리스 북동쪽에 있는 빨간 점으로 찍힌 그곳이 빌립보라고 하는 지역입니다. 원래 바울 사도는 튀르키에의, 소아시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저 튀르키에의 지역에서만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었는데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권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바람에, 그 튀르키에의 지역을 뛰어넘어서, 그리스 지역까지 넘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기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빌립보 지역이나, 이런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그런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도시에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요. 그 귀신 들린 여종이 계속해서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겁니다. 자꾸만 귀찮게 하고 성가시게 구니까, 바울 사도가 그것을 보지 못하다가, 그 여종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귀신아, 그 여인에게서 나오라”라고 그렇게 선포하고 명령했는데, 놀랍게도 그 여종에게서 귀신이 쫓겨 나가고, 그 여종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그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 들렸다는 사람이 온전하게 되는 이런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을 때, 그때 보여주어야 하는 마땅한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그런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다고 한다면, 어떠한 반응이 나올 것이라고 여러분들은 기대하십니까? 아마도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바울 사도가 전하는 이 복음이 진짜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이 복음이 정말이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빌립보 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음이 강팍한 빌립보 사람들은 회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 사도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관청에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게 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빌립보 사람들은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 돈이 우상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그 귀신 들린 여종을 통해서 돈벌이를 꽤 짭짤하게 했었던 겁니다. 신 내린 그런 사람을 통해서 점괘를 받고, 그리고 돈을 버는 그런 일들을 한 것이죠. 그래서 그 귀신 들린 여종을 이용해서, 돈을 꽤 짭짤하게 벌었는데, 이제는 그 여정이 온전해져서 더 이상 예언을 하지 않는 겁니다. 더 이상 점괘를 말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제는 온전해진 그 사람 때문에 돈을 벌 수 있는 그 길이 막혀버리게 되었을 때, 이 빌립보 사람들이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우상은 우상이 우상이 아니라, 사실은 돈이 우상이었던 것이죠.

우상을 이용해서 돈벌이를 했던 것이고, 돈이 그들의 우상이었는데, 바울의 복음 앞에서 허망하게 그 우상이 가짜라고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고,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이제 진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고, 회개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그들의 우상이 돈이었기 때문에, 돈벌이가 막히게 되자, 이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고, 그들을 감옥에 쳐 넣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 그 차가운 감옥 속으로 갇히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감옥은 아마 지하에 만들어져 있었을 것 같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차가운 그 감옥 가운데 갇히게 되었을 때,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정말 당혹스럽게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옳은 일을 했는데, 옳은 일을 했다고 한다면, 보상을 받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옥에 갇히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정말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만일 참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정의의 하나님, 참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어떤 일을 경험해야 됩니까? 선을 행한 사람은 보상을 받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징벌을 받아야, 그래야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칭찬이 주어져야 마땅하고, 악을 행한 사람은 징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인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의를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행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감옥에 갇히는 이런 황당한 일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 것이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가 감옥에 갇히는 그런 모순된 일이 일어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세상이 아니라, 악마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버리고, 그리고 매로 치고, 그리고 그들을 옥에 가두었을 때 바울과 실라가 느꼈던 그 참담함을 여러분들은 조금이라도 느껴보실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선한 일을 했는데, 오히려 욕을 먹었다고 한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나는 정말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고 일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우리를 향해서 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우리가 교회 식당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주를 위해서 섬겼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그 밥맛에 대해서 맛이 없다고 말하고, 비난하고 욕하면, 여러분들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내가 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정말 충성을 다했는데, 박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갑자기 나를 향해서 욕해버리고 비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바울 사도도 정말 황당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고, 너무나도 괴로웠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사도행전 16장 25절 말씀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는 그 순간에 절망하고 괴로워했던 것이 아니라,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송하였다고 오늘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냐면, 한밤중이었다고 하는 것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빛이 사라져 버린 것이죠.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이죠. 깜깜한 밤입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들은 절망적일 수가 있는 겁니다. 괴로워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한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송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었던 것인데, 그 절망적인 순간에, 바울 사도는 실라는 무엇을 했는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방법입니까?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에서부터 1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기뻐해야 되는데, 언제 기뻐해야 됩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 좋은 결과가 나타났을 때, 수능 시험 봐서 만점 받고, 일류 대학에 합격하게 되었을 때, 장사를 했는데 장사가 너무나도 잘 되었을 때, 농사를 지었는데 풍성한 수확이 있을 때, 그럴 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기뻐해야 되는가? 항상 기뻐해야 된다는 거예요. 좋은 일이 아니라, 슬픈 일이 있을 때, 성공한 것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 건강한 것이 아니라, 병들었을 때, 그리고 우리의 모든 앞길이 다 막혀버리고, 모든 일들이 다 답답한 상황 가운데 있을 때에도, 그때는 절망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때는 슬퍼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럴 때에도 기뻐하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럴 때도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기도만 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즐거운 일이 있을 때나 좋은 일이 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정말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기도에 응답이 전혀 없는 것 같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기도하라고 하는 의미이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건강하고 좋은 일이 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정말 힘들고,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도, 그때도 감사하라고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 말씀에 따라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얘기했는데, 그 바울 사도는 그 말씀대로 순종했어요. 감옥에 들어가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고, 정말 힘든 그 상황 가운데서, 울면서 괴로워했던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했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과 실라는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고 감사했고, 찬양했던 것을 오늘 이 시간 눈여겨보고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절망 가운데서도, 좋은 상황이 아니라, 정말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리는 상황이 아니라, 갑자기 감옥에 갇히게 되는 그런 황당한 상황 가운데서도, 어떻게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고, 찬송할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비록 지금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갇히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것은 하나님이 그를 막을 그것을 막을 힘이 없어서 갇히게 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것은 하나님께서 잠깐 실수하셔서 갇힌 게 아니라는 겁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것은 하나님께서 잠깐 딴짓을 하다가, 미처 다 챙기지 못해서, 그래서 갇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바울 사도의 발걸음을 이 감옥 가운데 인도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때, 기도하며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었을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좋은 일뿐만이 아니라 나쁜 일도, 정말 멋있는 일뿐만 아니라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도,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는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며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읽지는 않았지만,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일을, 여러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바로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며 찬송하는 가운데, 옥문이 열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로 인해서 그 감옥을 지켰던 간수의 가정이 “형제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선생님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받을 수 있겠는가?” 질문을 하게 되었고, 바로 그 간수를 향해서 바울과 실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는 이 놀라운 복음이 간수의 가정에 까지 전파가 되어서, 그 간수의 가정을 구원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것은 어쩌다 보니까 재수 없어서 들어간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그들을 막지 못해서 그렇게 그들 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그 간수 가정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기 위한 놀라운 그 방편을 삼으시기 위하여, 이 바울과 실라의 발걸음을 감옥까지 인도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죠. 소아시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 바울과 바울의 일행을 마게도니아 지역까지 인도해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그 바울과 실라의 발걸음을 다시 감옥으로 인도해 주셔서, 그 빌립보 간수의 가정을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감옥에 갇히게 되면서도 그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찬송하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감옥 밖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감옥 안에도,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찬송을 들으실 수 있었기 때문에, 기도하며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인 거죠.

감옥이라고 하는 것이 왜 감옥인가요? 감옥이 감옥인 이유는 세상과 단절되기 때문에 감옥인 겁니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리고, 연결이 끊어져 버려야 감옥이 되는 것인데요. 그런데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감옥은 감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감옥에 있어도 연결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과의 연결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비록 몸이 그 감옥 안에 있었지만, 그 감옥이 감옥이 아니라, 사실은 그 감옥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천국과 같은 곳으로 변하였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연결이 끊어진 곳이 아니라, 감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간에 천국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고난이 고난이 아니고, 슬픔이 슬픔이 아니고, 억울함이 억울함이 아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닌 거예요. 찬송가 438장의 3절 가사에 보면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하는 그런 가사가 있는데, 그 가사는 정말 진실의 가사인 것입니다.

천국이 어디입니까? 천국은 저 멀리 우리가 가보지 못하는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천국이라기보다는, 물론 거기도 천국이겠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이 세상에서 동행하며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 자리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기 때문에, 천국의 삶이 되는 줄로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것은 감옥이 아니라 연결된 것이고, 연결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감옥이 아니라 천국일 수 있어서, 항상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줄로 믿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저는 지난주에 코로나에 걸려서 일주일 동안 자가격리를 했습니다. 자가격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어쩌면 감옥과 같은 곳에서 있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감사 카드를 쓰면서 제일 먼저 썼어요. 뭐라고 썼냐면, “하나님, 코로나 안 걸리고 잘 지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썼더니만 걸렸어요. 아무튼 코로나에 걸려가지고 자가격리를 하게 됐습니다. 일주일 동안 늘 밖에서만 살던 제가, 눈만 뜨면 교회로 오고, 늘 교회에서만 살고, 늘 집 밖에만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제가 일주일 내내 집 안에 갇혀 지내야만 했던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요? 아니었을까요?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렇게 고통스럽거나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열이 나고 몸살기가 있고, 그리고 기침을 하는 것 기침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것, 이런 것들은 불편하고 너무나도 힘들었던 것 맞습니다. 하지만 집안에 일주일 동안 갇혀 있는데 나빴느냐 하면, 나쁘지 않았어요.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제 아내하고 같이 있거든요. 제 아내랑 이렇게 일주일 동안 붙어 있어 본 적이 없었는데, 일주일 내내 붙어 있으면서 그러면서 같이 있는 겁니다. 나를 향해서 약을 먹으라고 권해주는 그 따뜻한 손길을 체험하면서, 그러면서 같이 있는데, 제가 우리 아내도 코로나에 걸려서 아프고 힘들 때 제가 설거지를 하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사랑하는 사람과 이렇게 일주일 내내 붙어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정말 너무나도 좋았고 바쁘던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쉼을 가진다고 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사실 설교자라고 하는 것은 늘 매주 매주가 스트레스입니다. 주일 지나고 나면, 돌아서면 또 주일이 되기 때문에, 또 설교를 준비해야 되고, 수요일 설교 준비해야 되고, 늘 설교 준비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인데,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되고, 새로운 메시지를 준비해야 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지난주는 우리 목사님께서, 임형섭 목사님께서 설교를 얼마나 잘해 주시는지, 제가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쉼을 가지는 게 너무나도 괜찮았어요. 괜찮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일주일 동안 보내면서 바울 사도를 생각해 봤어요. 바울 사도도 그러지 않았을까?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힌 것이 불편했을 겁니다. 차가운 감옥에서, 추운 그 방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발에 차꼬가 차이고, 매 맞은 곳이 쓰라리고, 그래서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너무나도 불편했을 것이고, 자유를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처럼 괴롭고 힘들었던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적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보다도 더 좋은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니까요.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사랑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는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기도하며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찬송을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모습으로 함께하시는 그 모습을 경험하게 될 때, 바울 사도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와 찬송이 넘쳐났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감옥을 천국으로 바꾸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됩니다. 기도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그러면 감사와 찬송이 나오는 것이고, 그 어떠한 고난도 그 어떠한 슬픔도 그 어떠한 실패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저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왔던 청교도들이 감사절을 시작해서 만들어진 것이 감사절 Thanksgiving Day, 추수 감사절입니다. 추수 감사절이 어떻게 시작이 됐을까요? 그것은 그 아메리카 대륙에서 농사를 지었던 그 청교도들이 너무나도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너무나도 기쁘고 너무나도 감사해서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좋아서 그래서 감사절을 지킨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 청교도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와서 농사를 지었는데 망해버렸어요. 낯선 땅에서 낯선 기후에서 전혀 알지 못하던 미지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쉬울 리가 있겠습니까? 농사라고 하는 것이 경험이 있어야 성공하는 것인데, 미지의 땅에서 첫 농사를 지었을 때, 다 망쳐버리고 별로 보잘것없는 수확만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그때 망했으니까, 절망했던 것이 아니죠. 추수 감사절이 11월 셋째 주, 마지막 주 목요일날 있는 것인데요. 왜 11월에 추수 감사절을 합니까? 미국은 수확을 11월에 하나요? 아니요. 우리랑 똑같아요. 아니 오히려 더 이를 수도 있어요. 보스턴 같은 경우는 우리보다 훨씬 더 추운 지방이기 때문에, 훨씬 더 일찍 추수하게 되는 겁니다. 이미 농번기는 다 지나가고, 이제는 추운 겨울에 들어서는 그때에, 이 청교도들은 감사하는 날을 만들었어요. 살아있는 것이 감사하고, 여기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감사하고,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면서, 감사하는 날을 만들어, 하나님 앞에 감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었던 사랑과 은혜를 나누어 주었던 주변의 사람들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도 하고, 감사를 표하면서 감사하는 날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다고 한다면, 기쁜 일이 있고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감사 카드를 바꿨어요. “코로나 걸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우리들의 인생은 늘 성공가도만을 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늘 성공 가도만 달리는 사람은,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이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계획했던 것들 성취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고요. 우리가 바라고 꿈꾸었던 것들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코로나 상황 가운데서 여러 가지 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더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원망과 불평만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이끄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로 찬양과 경배를 올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와 같이 허무리 많은 우리 인생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되지 않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과의 연결의 끈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감옥을 경험하신 것이죠. 십자가 위에서 지옥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버리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과의 그 남아 있는 연결고리 그 하나마저도 완전히 끊어지는 고통을 체험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피와 물을 다 쏟아주시고, 우리에게 그 놀라운 사랑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을 그 피로 하나님과 연결시켜주는 그 연결의 사랑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연결의 고리 가운데 잇게 되고, 천국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매 순간순간마다 “나는 광야에 있다. 홀로 있다.” 슬픔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이 저 깊은 감옥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끈이 끊어지지 아니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그런 믿음의 삶이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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