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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주실 것이요 (마 7:7-11)

오늘 성경 말씀은 “구하라.” 그리하면 어떻게 한다고요?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말일까요? 구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일까요? 성경은 일관적으로, 구하면 주실 것이다. 찾으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는 왜 얻지 못하는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구하면 받을 텐데,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거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서부터 3절 말씀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무엇이냐면,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라고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의 현실에서, 우리들의 삶에서 이러한 성경의 말씀이 실제적으로 진리처럼 느껴지느냐 하는 것이에요. 성경에는 그렇게 쓰여 있는데, 정말 나의 삶 가운데,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들어 응답해 주시는가 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크리스천들 중에서는 늘 기도하면서 많은 응답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만나게 되면, “내가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고, 그렇게 기도의 체험이 있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참 잘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왜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시지? 나는 기도했는데, 내가 간구했는데, 왜 내 기도는 들어 응답해 주지 않느냐고 질문을 가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편에 속합니까?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에 속합니까? “기도했어도 응답을 받지 못했다”에 속하고 있습니까? 어느 편에 속하고 있습니까? 아예 기도를 안 했나요? 분명히 우리 가운데는 기도를 했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응답이 없는 것일까요? 성경에는 분명히 우리가 구하면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찾으면 찾을 거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문을 두드리면 열리게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왜 내 기도는 몇 년 동안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냐 이 말이에요?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진단을 내릴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가장 쉽게 내릴 수 있는 진단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 전에, 내가 기도를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할 수 있을 겁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했더라고 한다면, 응답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응답을 받기 전에 내가 먼저 지쳐버리고, 내가 먼저 낙망해서 포기해 버려서, 그래서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그렇게 진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단은 어느 정도는 맞지만, 100% 맞는 진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고, 늘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맞습니다. 우리는 실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한다면, 늘 기도를 해야 하겠죠. 예를 들어서 영적 성숙을 위한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는 것 같아도,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겁니다. “하나님, 더욱더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하나님, 더 믿음을 가지게 해 주세요. 하나님, 인내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여러 가지 영적인 성숙을 위한 기도는 그것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 옳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주기도문에서 가르쳐주신 대로, 시험에 들게 하지 않도록, 또 악에서부터 건져내주시도록 하는 이런 기도들은 계속해서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도의 응답이,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양에 정비례한다고 하는 생각은, 그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에요). 우리가 기도를 얼마나 했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도 있고,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기도를 조금 하면 하나님이 응답 안 해주시고,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거다. 우리가 하루 이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 안 해주시지만, 100일씩 천일씩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은 안타깝게도 그건 성경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방 종교의 관점이고, 미신에서 생각하는 관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냐면, 마태복음 6장 7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이런 말씀을 해 주셨어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따라서 해라? 아니요. 그들을 절대로 본받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우리의 정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만큼의 기도의 양을 채웠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대학 입시에 우리가 얼마나 공부했느냐에 따라 달려 있듯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실 기도 응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맞는다고 하면, 응답이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하면, 응답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그 방향과 맞으면, 그러면 응답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과 계획과 상관이 없는 기도라고 한다면 응답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예를 우리가 어디서 살펴보냐면, 바울의 예에서 살펴보는 겁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했어요. 하나님 내 몸에 있는 육체의 질병을 고쳐주세요. 육체의 질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육체의 질병이 얼마나 아팠는지, 뭐라고 불렀냐면 사탄의 가시라고 부르기까지 했어요. “하나님, 이거 사탄의 가시 아닙니까? 나를 이렇게 괴롭게 만들고, 정말 나로 하여금 힘들게 만드는 이 사탄의 가시와 같은 그런 존재인 이 질병을 내게서부터 없애주시고, 나를 이 질병에서 고쳐”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병에서 낫는 것보다, 낫지 않는 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바울 사도로 하여금, 바울 사도가 좀 더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보다 더 겸손해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응답해 주지 않은 것이죠.

더 나가서 예수님의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십자가를 안 지면 안 될까요? 십자가 없이 구원을 이룰 수는 없나요? 십자가를 좀 없애주시면 안 됩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많이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의 제목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정욕으로 구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듣지 않는다고 말씀하셔요. 구하여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정욕으로 구하기 때문이다. 탐욕으로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죠. “하나님, 저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데, 좀, 이 기도 좀 들어주세요.”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가? 안 들어주신다는 거예요. 시기와 질투 가운데, “저 사람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은데, 하나님, 좀 내가 보란 듯이 성공하게 되어서, 저 사람을 좀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안 들어주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탐욕의 우상을 섬기면서 하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오.”라고 말씀해 주셨고, 그 말씀은 마치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백지수표처럼 느껴집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라고 했으니까, “하나님, 구하면 준다고 그랬잖아요? 하나님, 구하면 준다고 그랬으니까, 주세요.”라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줄 것만 같아요. 그래서 백지수표 같아요. 우리가 거기에 무엇을 쓰든지, 하나님께서 다 응답해 주셔야만 할 것처럼 생각이 드는데, 사실은 기도는 백지수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까? 종종 우리 교계 내에서는 결혼에 대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면서, 기도할 때 그 결혼의 조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의 조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 세워놓고, 하나님 키가 적어도 180 이상은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얼굴은 현빈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학식은 스카이 정도 나오고, 전북대 정도 나오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조건들을 세워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 앞에 그 기도의 제목을 어려서부터 계속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실 거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연예인이 간증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 연예인의 이름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 연예인이 뭐라고 간증을 했냐면, 자신은 기도 제목을 결혼을 놓고서, 여러 가지 기도 제목을 세워놓고 기도를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키는 얼마이고, 언어는 영어도 하고 몇 개국어을 하고, 뭐 등등 여행을 좋아하고, 등등 여러 가지 조건들을 세우고, 그 한 스물몇 개 되는 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졌대요. 은혜가 되죠? 은혜가 됐어요. 거기까지는.

그런데 몇 년 뒤에 이혼했다고 하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기도했던 그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이혼했다고 하는 씁쓸한 뉴스를 들은 것이죠. 아마도 그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졌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을 수도 있겠지만, 왜 모든 조건이 다 맞아떨어졌을까요? 연예인이니까요. 우리가 그렇게 그런 기준 세워놓으면 안 와요. 자기 자신을 알아야 되는 거죠. 결혼을 위해서 그런 조건을 세워놓는 것이, 그렇게 세워놓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들어주셔야 하느냐면, 그렇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그 모든 조건들이 나의 욕심, 나의 탐욕에 근거한 것이고, 이 세상의 기준에 따른 그런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탐욕의 조건들이었기 때문인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사실 우리가 결혼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한다면, 그런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내 중심적인 기도를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짝지어 주시는 그런 배우자라고 한다면, 인내하며 그 사람과 잘 맞추어 살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분노가 일어나고, 성격이 안 맞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길 때, 그냥 포기해 버릴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약점을 도와주고, 그리고 함께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 제게 인내도 주시고, 또 내가 그를 충분히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도,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그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는 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을 해 주신다고 하는 것은 다 응답해 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응답을 해주시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하나님 앞에서는 엉터리 기도들이 너무 많아요. 마치 우리 꼬마 아이가 부모에게 사탕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아이스크림 먹다고 먹고 싶다고 요구하는 것처럼, 콜라를 마시고 싶고, 사이다를 자꾸만 먹고 싶다고 그렇게 요구하는 아이들처럼, 우리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어리석은 기도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우리가 기도할 때는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해야 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이 하나님의 내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한다면,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오”라고 말씀하셨어도, 응답이 안 되는 겁니다. 응답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응답돼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말씀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라고 하는 이 말씀이 거짓말입니까? 진리입니까? 거짓말이에요? 진리예요? 거짓말처럼 보여요. 다 주시겠다고 해놓고, 구하면 주시겠다고 해놓고, 뒤로 가서는 그건 내 뜻하고는 안 맞네. 못 줘. 일구이언을 하시는 하나님처럼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여러분들의 부모님은 여러분들에게 주고 싶어 할까요? 안 주고 싶어 할까요? 주고 싶어 해요. 우리 부모님이라고 한다면, 자녀에게 최상의 것을 주고 싶어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싶고, 자녀에게 유익한 것을 주고 싶고, 그래서 그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게, 그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저는 미국에서 16년간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벌써 돌아온 지 10년이 넘었네요. 그런데 제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때, 미국 땅에 두 딸아이를 남겨놓고 왔습니다. 그때 우리 둘째 딸아이가 고등학생이었어요. 여자아이를. 큰 애는 대학에 가 있고, 대학에서 지금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고, 둘째 딸아이는 고등학생인데, 한국 나이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짜리 되는 그 아이를 미국 땅에 혼자 남겨놓고 그냥 와버렸어요. 너무나도 무책임한 그런 부모의 모습인 것 같아서, 너무나도 미안하고 너무나도 아쉬운데, 그런데 그때 우리 딸아이를 향해서 제가 말했습니다. 얘야.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너에게 긴급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돈이 필요하면 말해. 네가 원하는 거 있으면, 뭐든지 말해. 그러면 내가 모든 걸 다 챙겨놓고, “너에게 해줄게”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근데 우리 딸아이는 엄청나게 고집이 세요. 필요한 거 있어도 말을 안 해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데도, 그냥 지가 참고, 지가 스스로 견디면서, 우리들에게 아무 말 안 하는 거예요.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안 해요. 그때 천불인가 놓고 왔는데, 그 천불을 놓고 왔는데, 그 천불도 거의 다 안 썼어요. 그냥, 그냥, 그냥 혼자 지내고 있는. 한 번은 이 아이가 정말 위급한 상황에 있는데, 전화를 해도 안 받고, 너무나도 답답해 죽겠는 거예요. 그런데 제 마음이 뭐냐면, 네가 뭐든지 말하면, 내가 다 도와줄게.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다 해줄게”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는데, 그런데 사실 제가 할 수 있… 들어줄 수 있습니까? 다 들어줄 수 없습니까? 못 들어줘요. 저는 이미 한국 땅에 와 있어서 못 들어주고, 능력이 없어서 못 들어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들어줄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나에게 요구를 했지만, 못 들어준 게 들어준 것보다 훨씬 더 많아요.

그런데 제가 제 딸에게 한 말이 뭐냐면, “내게 말해. 말하면 내가 다 들어줄게.” 그랬어요. 그 말이 거짓말이에요? 진실이에요? 한편으로는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요구하면 못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니까, 해줄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진실인 거 아시죠? 진실인 거 아십니까? 진실이에요. 다 주고 싶어요. 내 목숨이라도 내주고 싶어요. 그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이런 표현을 가리켜서 과장법이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오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시는 그 말씀은 내가 안 줄 것도 있는데, 근데 “그냥 너희를 속이기 위해서, 이렇게 그냥 얘기하는 거야”라고 말씀해 주시는 게 아니에요. 이건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우리들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기를, 너희가 구하면 내가 다 들어주겠다. 다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서 안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장 1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무엇으로?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불량식품을 요구해도, 우리 부모님은 영양식품으로 우리에게 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들은 그런 의미에서 잘 이해하지 못해요. 우리는 불량식품이 더 좋고, 우리는 이빨을 썩게 만드는 콜라나 사이다가 더 좋고, 그리고 우리는 주사를 안 맞는 게 더 좋아요. 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아이들이 주사를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맞히게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사랑해서 맞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 자녀가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냐? 자녀가 생선 먹고 싶다고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냐? 무슨 얘깁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악하고 참 부족하고 연약한 부모라고 할지라도, 자식에게만큼은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인데, 그 인간보다도 훨씬 더 선하시고 훨씬 더 은혜로우시고 훨씬 더 좋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그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제일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오.”라고 하는 말씀은 구하는 그대로 우리들에게 다 주신다고 하는 그런 문자적인 의미의 말씀은 아닐지라도, “내가 너의 아빠야.” 그러니까 내게 말하면, 내가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하는 사랑의 약속이라고 믿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그린웨이 교수님이라고 하는 분이 오래전에 계셨었습니다. 그 그린웨이 교수님은 선교 현장에 나가서, 선교 사역을 했던 경험이 있던 그런 교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선교 현장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선교 현장에 가서 선교하고 있는데, 어떤 꼬마 아이가 밤중에 문을 두들이더랍니다. 문을 열어보니까, 10살짜리 여자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거예요.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까, 그 아이의 엄마는 세 살 때 이미 죽었고, 지금은 아빠와 함께 살고 있는데, 그 아빠는 술주정뱅이에 그리고 자녀들을 학대하는 그런 아주 나쁜 아빠였습니다. 4개월 전에는 총으로 자기 딸을 쏴 죽이려고 하기도 하는 부모로부터 엄청난 학대를 받은 그 아이가 벌벌 떨면서, 자기 아빠를 피해서 도망가 도망 나와서 선교사님의 집에 문을 두드린 겁니다.

선교사님은 그 여자아이를 보고 너무나도 안타까웠어요. 너무나도 불쌍했어요. 이 아이를 그냥 집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일단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고, 그리고 아무래도 이 아이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어서, 자기 집에 딸이 이미 셋이 있지만 넷이 딸이 여럿이 있었지만, 가족들과 상의를 한 다음에 이 여자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절차를 마쳐서, 이 딸아이가 선교사님의 집에 입양아로서 딸로서 들어오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 아이에게 말을 했어요. “너는 이제 내 딸이다. 우리가 너희를 너를 입양했다. 여기 입양 증서가 있어. 이제는 우리가 너의 아빠고 엄마고, 너는 우리 딸이다.”라고 말하면서, “너는 우리 딸이니까, 이제 뭐든지 말해.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말해. 네가 우리 딸이니까, 우리가 다 해줄게. 걱정하지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말해.”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이 딸아이가, 이 입양된 아이가 선교사님을 향해서 한마디 부탁도 안 하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이 어른들이 너무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이 선교사님이 좋다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알지만, 혹시 내가 말을 잘못했다가, 예전에 부모님에게 혼났던 것처럼 또 그런 어려운 일을 당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있는 거예요.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선교사님 부모님에게, 양 부모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얘기를 해요. “너는 내 딸이다.” 여러 차례 얘기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어느 날이었어요. 그 아이가 어느 날 선교사님 앞에 와서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쭈뼛쭈뼛거리면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물어봤어요. “얘야, 너 뭐가 필요한 거 있니? 얘기해. 얘기해. 나한테 얘기해라.” 그랬더니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아빠, 나 신발끈이 망가졌는데, 신발끈이 필요해요.”라고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선교사님이 그 말을 듣고, 뒤로 돌아서 펑펑 울었다고 그래요. 이 아이가 나를 아빠로 생각하는구나. 이제 우리 가족이 되었구나. 그것이 너무나도 좋아서, 그 아이를 안고 울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원래 하나님과 원수였던 사람들이에요. 우리의 성품은 악을 행했고, 우리는 늘 나쁜 짓을 했고,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해 주셨어요. “이제는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구하라. 그러면 내가 주겠다”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하는 말씀이에요. 내가 너희를 보호하겠다고 하는 말씀이고,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이에요.

오늘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그 길을 외롭고 쓸쓸하게 나 혼자 걸어갈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들이 많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그 길 가운데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갈 때가 너무나도 많고, 내가 계획했던 것들은 다 무너져버리고, 내가 꿈꿨던 것들은 다 사라져 버리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 그때 마치 고아처럼 나 혼자 고민하고, 나 혼자 답답해하고, 좌절하고 쓰러져 있을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시는 말씀이 뭐냐면, “구하라. 그러면 주겠다.” 말씀하셔요. 그건 다른 얘기가 아니라, “내가 네 아빠야”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마음속에 새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공식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아빠, 내 신발끈 끊어줬어요.” 말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시고 사랑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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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이 예화는 노진준 목사님의 설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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