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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눅 10:29-37)

주일 오후예배 때 마다 예수님의 비유를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오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살펴보게 됐습니다. 아주 유명한 비유인데요. 그런데 사실은 이것은 비유(parable)가 아니라, 예화(illustration)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비유는 이것(A)을 이야기하면서, 이것(A)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B)을 의미하는 것이 비유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오늘 읽은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비유라기보다는, 교훈을 들려주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story), 교훈을 들려주기 위해서 들려주신 하나의 예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예화 가운데 제사장과 레위인이 등장하는데요. 레위인과 제사장은 그 당시에 성직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고,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도움을 주지 않고, 그냥 그 자리를 회피해 버린 것이죠. 왜 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요? 그들로 하여금 이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하게 만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왜 이들이 그렇게 자비를 베풀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 그 마음속에 있는 동기들을 우리가 알 길이 없을 겁니다.

다만 우리가 추측해본다고 한다면, 그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이유와 비슷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우리가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하고, 자비의 손길을 베풀지 못하면서 살고 있는데요. 우리가 그렇게 베풀지 못하면서 살고 있는 이유가 사람들마다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 똑같은 이유를 제사장과 레위인도 가졌을 겁니다. 아마도 바빴을 것 같아요.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지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무섭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겁니다. 강도 만난 그 현장을 보면서, 너무나도 무서워서 그 자리를 빨리 도망가고 싶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가 어떤 이유인지 우리는 알 수 없겠지만, 아무튼 제사장과 레위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냥 지나친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죠. 죽어도 상관없다고 하는 것이죠. 그 생명을 잃어버려도,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이 사람들은 지나쳐 버린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이죠. 내가 도와주지 아니하면 큰일 나겠다. 내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면, 이 사람의 목숨이 끊어질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그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이 사마리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겁니다.

사마리아인은 바쁜 일정이 없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누구에게나 다 바빠요. 다 나름대로의 계획과, 나름대로의 그 스케줄들이 있기 때문에, 사실 내 온 열정을 다 쏟아서 내 스케줄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내 삶이 무너질 수 있는 겁니다. 손흥민 선수가 광고를 찍는데요. 조건이 있다고 그래요. 무슨 조건이 있죠? 다 세팅 다 해놓고, 다 준비해 놓고, 가서 잠깐 가서 찍고 나올 수 있는 조건 하에서, 광고를 찍는다는 거예요. 왜? 내가 지금 거기에 시간을 투자할 시간이 없는 거예요. 나는 지금 축구를 해야 되는 거예요. 더 몸을 만들고, 더 열심히 뛰어야 되고, 내 인생을 거기에 바쳐야, 그래야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는데, 내 삶의 그 조그마한 시간을 다른 곳에 허비해버리면, 그 경쟁 사회에서 나는 밀려나는 겁니다. 조금만 한눈팔면 내 목표를 이룰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가능하면 중요한 것이 아니면, 제쳐버리고,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릴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목표하고 있는 바가 없었겠습니까? 있었을 거예요. 나름대로의 여행 계획과, 바쁜 일정을 빠르게 소화해야만, 자기가 이룰 수 있는 그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 강도 만난 자 앞에서 멈추어 버렸어요. 자신의 일정을 포기해 버린 거죠. 지금 내가 이 길을 빨리 가서, 저 사업가들과 함께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장사를 하고, 계약을 성사시켜야만, 그 장사에서 성공할 수 있는데, 그 만남을 포기해버리고,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죠.

호텔을 예약해 놨다고 한다면, 오늘 밤에 가서 거기서 자야, 내가 그날 밤 호텔에서 잘 수 있는데, 이것을 내가 해줌으로 말미암아, 그 호텔 안에 가지 못하면, <여기 어때> 예약해 놓고, 못 들어가는 거예요. 제사장과 레위인만 바빴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다 바쁜 인생들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바쁜 일정을 포기해 버려 버리고,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에 대한 재정 지출 계획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돈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부족한 거잖아요? 남아도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볼 때 저 사람은 남아 돌 것 같은데도, 부족하다고 그래요. 늘 부족한 것이 돈이고, 그거 가지고 다 써야만, 겨우 할 수 있는, 그 재정 계획이 있었을 텐데,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투자처에, 자신이 장사를 하거나,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할 그 재정 사용 계획을 포기해 버리고, 그 돈을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강도 만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만나게 해주신 주신 사람이고,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저 사람을 도와주라고 하는 그런 계획 가운데, 만나게 해 주셨다고 하는,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는 모든 일들은 그냥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진다고 하면, 우연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땅에 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오늘 만난 이 사람, 내가 오늘 만나게 된 저 강도 만난 사람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이 만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 사람에게 보내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신 거예요.

그 이야기는 바로 나의 사명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강도 만난 사람을 사명으로 내게 보여주신 것이죠.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서도, 아마도 그 강도 만난 사람은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내가 할 일은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오. 내가 하는 일은 성전에서 제사장을 돕는 일이오. 나는 이 세상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은 저기에, 저곳에, 저 너머에 나의 일이 있는 것이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 이것은 그냥 지나가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랬을 것 같지만, 사마리아인은 그 순간에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데요. 따라서 정말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이 만난 그 현재를, 지금이 있는 바로 그 자리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명의 자리로 항상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은 꿈을 꾸면서 하나님께서 원대한 소망을 갖게 만들어주셨어요. 해와 달과 별들이 내게 절하는 그 어마어마한 꿈을 어렸을 때 꾸게 된 것이죠. 형들이 세운 단들과 부모들이 세운 단들이 내게 절하는 그런 원대한 꿈을 꾼 것이죠. 그런데 그 꿈을 꾸었던 요셉이 만나게 된 첫 번째 자리가 무엇이냐 하면, 애굽 왕 보디발, 보디발 장군의 노예로서의 상황에 내어 던져지게 된 겁니다. 그 상황 가운데서 힘들다고, 내 인생이 왜 이러냐고,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하면서 울부짖은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요셉은 그 자리에서 내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찾고 충성을 다한 거죠.

보디발을 섬기고, 보디발의 아내를 섬기고, 그 집 사람들을 섬기는데, 내가 하나님을 섬기듯이, “종들아, 너희 상관을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고 하시는 그 말씀에 따라서, 요셉은 자기 주인을 하나님을 섬기듯이 섬겼는데요. 그런 모습을 보여줄 때 주인이 감동을 받고, 모든 것을 그에게 맡깁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뿐이었고, 그 요셉은 어디로 가게 되었냐면, 억울하게 누명을 받아서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탄식하면서, 괴로워하면서, 그리고 절망감에 빠져버린 것이 아니라, 우울감에 빠져버린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감옥이야말로, 내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 사명의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또 받아들이고, 거기서 성실하게 일을 하는 것이죠. 거기서 감옥에 있으면서, 간수들을 위해서 일해주고, 동료 죄수들을 위해서 꿈을 해몽해주고, 정말 그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요셉을 그런 훈련 장소에서 훈련시킨 다음에,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다윗은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정말 어마어마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하나님의 백성의 두 번째 왕으로 기름 붓는, 그 엄청난 일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이 너무나도 기뻐 좋아했을 겁니다. 너무나도 감격스러웠을 겁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 맨 처음에 가게 된 것이 어디냐면, 사울의 종으로 가게 된 것이죠. 사울의 종으로, 사울을 위해서 나팔 부는 자가 되어 있는, 피리를 부는 자가 되어서, 사울의 그 정신 나간 것을 바로잡아주는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고, 골리앗과 싸웠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사울이 죽이려고 달려들 때 피난하면서, 그리고 아둘람 굴속에 들어가 피신하면서, 여러 곳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피난 생활을 하는 가운데 다윗은 그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씻어주고, 그들이 외부의 공격을 당하면, 나가서 재물을 찾아주고, 그들을 보호해 주는, 자리는 산적 두목과 같은 자리였지만, 그러나 왕의 역할을 했던 모습을 볼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은 내 때가 아니야. 내가 나중에 성공하면, 나중에 공무원 시험 합격하면, “공무원 시험은 권성동” 하면서, 내가 합격하면, 그러면 그때 가서 내가 주를 위해서 일하겠다. “지금은 내가 내 코가 석자니까, 지금 내가 열심히 수고하고 애써서, 내 목표를 이룬 다음에 그때 내가 하겠다.”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어느 날 갑작스럽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강도 만난 사람을 내 옆에 보내주실 것이고, 내가 정말 예상치도 못했고 기대하지도 못했던 그런 사명이 우리들 앞에 놓여 있을 때, 그냥 외면해 버릴 것이 아니라, 그 사명 앞에, 아무것도 없지만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줄 때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넉넉하지 않았어요. 부족했어요. 사실 사마리아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여행하기에 족할 정도의, 아니 여행하기에도 약간 빠듯한 정도의 그런 물자와 시간과 능력만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때 이 사마리아 사람은 내가 도울 만한 처지가 못 되는데, 내가 가진 것으로는 이 사람을 살릴 방법이 없는데 하면서 물러선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포도주로 상처를 시킨 거예요. 자기가 가지고 있던 헝겊으로 상처를 싸매 준 거예요. 자기에게 있는 낙타에 그 사람을 태우고 여관으로 간 거예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사람을 도와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을 “내놔라.”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아닌 것이죠. 고린도후서 8장 12절 말씀에 “할 마음만 있으면” 뭐 하는 대로 받으실 것이요?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없기 때문에 못 드리는데, “너, 이거 왜 안 내놔?”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밖에 못 내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넌 왜 그거밖에 못해?”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무엇을 받으시는가? 있는 것을 받으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만 보신다는 거예요.

왜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받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전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온 세상과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말씀하시면 되는 것이지, 우리에게 달라고 할 필요가 없으신 하나님이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없어도 만들어내느라고 요구하는, 그런 거지 왕초와 같은 그런 치사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없는 것을 (빼앗아가는),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드리기를 원하는가? 그 마음을 보시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은 정말 연약한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겁니다. 어떤 한 소년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손을 주님 앞에 드린 거예요. 그걸 누구 코에 붙이겠어요? 누구 먹겠어요? 지 혼자 먹기도 힘든 그 도시락을 주님 앞에 내놓았는데, 주님께서 그걸 통해서 5천 명을 먹이시는 거예요. 사렙다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마지막 남은 그 기름을 드린 거예요. “이거 먹고 죽자.” 했던 그것을 드렸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드러납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첨단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게 된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이 사람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능력이 많은 사람이어서 살린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이 강도 만난 자를 살린 것이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이 강도 맞는 사람을 보고서 “아이고. 죄송합니다. 내가 살려야 되는데, 살릴 능력이 안 되네요. 잠깐만 기다리시면, 제가 의대에 합격해서, 의사 합격증 받아서, 그래서 내가 치료해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지금 내가 돈이 없으니까, 지금 가서 장사해 가지고, 돈 많이 벌어 가지고, 내가 빌 게이츠와 같이 돈이 많아지면, 그때 와서 도와주겠습니다.” 하지 않았어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 기껏 해봤자 기름밖에 없고, 기껏 해봤자 포도주 밖에 없고, 헝겊 몇 조각밖에 없는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데리고 갔는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바로 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사실이 놀랍나요?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안 놀라워요. 왜냐? 우리는 사마리아인에게 감정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지만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엄청난 반목이 있었습니다. 영호남의 갈등 이상의 반목이고, 저 북한 공산당과 남한 사람들과의 갈등 이상의 반목이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민족이 앗수르 나라에 의해서, 멸망한 이후에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혼혈 민족이 되어 버렸고, 남쪽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왔을 때, 그리고 예루살렘을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했을 때,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가와서 우리도 이스라엘 민족이니까, 우리도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협력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제안을 기뻐하며 받아들였을까요? 거부했을까요? 나 같으면 받아들였을 건데, 놀랍게도 유대인들은 거부해 버렸습니다. 너희 같은 혼혈 민족 하고는 상종을 안 하겠다고 하면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부해버린 거죠.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예루살렘에 접근도 못하고, 그리심 산에다가 자신들의 성전을 짓고 거기서 예배를 드린 겁니다. 그것만 해도 그냥 남쪽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고, 북쪽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고, 그 정도는 괜찮았을는지 몰라요. 그런데 주전 128년에 요한 힐카누스라고 하는 유다의 지도자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저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전을 파괴해 버린 겁니다. 그들의 신앙의 중심이었던 그리심산을 찾아가서, 박살 내버리고 돌아온 것이죠.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과 남쪽 유다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반목이 있었던 거예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주후 6년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에 죽은 사람들 시체를, 시체의 뼈를 예루살렘 성전에 뿌려버린 거죠. 그 거룩한 성전에 사람들의 뼈, 부정한 사람들의 뼈를 성전에 뿌려버리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서로서로의 종교의 심장부를 공격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은 서로 죽일 듯이 달려들었고, 그 반목과 질시가 너무나도 커서,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라고 하면은 치를 떨고, 그 마을로 안 가는 겁니다. 남쪽 예루살렘 쪽에서부터 저 북쪽 사마리아 저 북쪽 갈릴리까지 가기 위해서 사마리아를 통과해 버리면 너무나도 편한데, 일부러 빙빙 돌아서, 일부러 빙빙 돌아서 딴 길로 해서, 며칠씩 더 걸리는 그 길로 갈 정도로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엄청난 반목과 질시가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유대인 한 사람이 쓰러져 있을 때, 그를 그렇게도 미워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 유대인을 살려준 거예요. 이게 놀라운 일이죠.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주시는 이유는 무엇이냐면, 단순히 “너희들이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어라.” 그냥 “자비의 삶을 살아라”의 교훈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주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주시는 이유는 너희는 “너희 원수도 사랑해라.” 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제한적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합니까?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에게 사랑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친구들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들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같이 놀아주고, 같이 즐거움을 나누고 있는 친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나에게 생일 때 “스타벅스 쿠폰”을 쏴줬거든요.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아는 척해줬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비수를 꽂아버린 그런 사람, 내 돈을 사기치고 도망간 바로 그 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는 공산당은 죽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쫓아내야 된다고 생각하고, 동성애자들은 밟아버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이라고 한다면, 말도 섞기 싫은 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로마 병정이, 너희를 압제하는 로마 병정이 너희에게 짐을 지워서 5리를 가게 하거들랑, 5리뿐만이 아니라 10리까지 봉사해 주어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누군가 너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같이 대들고 싸우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왼편 뺨을 갖다 대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바로 이걸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거죠.

왜 우리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합니까? 왜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마저도 사랑해야 됩니까? 그것은 마태복음 5장 43절에서부터 45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리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니라.” (45절은 그냥 보여줘 보세요.)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이 악인 선인(善人)만 사랑한 게 아니라, 악인(惡人)도 사랑해줬지? 그러니까 “우리도 친구들만 사랑할 게 아니라, 우리도 악인도 사랑해야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 해를 선한 사람에게만 내려 비쳐주는 게 아니라, 악인에게까지 비춰줬기 때문에, “악인인 우리”가 해를 받고 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비를 의로운 자에게만 내리는 게 아니라, 불의한 자에게도 내려주기 때문에, “불의한 우리”가 비를 받고 사는 거예요. 우리가 악하고, 우리가 나쁜 놈인데, 하나님께서는 “나쁜 우리들”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셨기에 우리가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햇빛을 본다면, 그냥 볼 수 없어요. “나와 같은 죄인에게 햇볕을 내려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비를 만나면 그냥 비를 볼 수 없어요. “나와 같은 죄인에게 비를 내려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사랑을,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사랑을 우리가 받았기에,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나를 배신하고, 나에게 악한 일을 하고, 내 삶을 망가뜨려 버린, 그런 파렴치한 놈들도 사랑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죽게 된 그 모습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선 우리를 바라보시며 “그거 참 샘통이다.” “나가 죽어라.” “네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떠나 있더니, 잘 됐다. 죽어버려라.” 하면서 우리의 죽음을 방치해두신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사용해 주셨습니다. 단순히 기름과 포도주만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바르시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구원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이 생명의 구원을 얻게 된 것이죠.

그런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매 순간순간마다 힘들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갑자기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그 사랑의 사명에 아멘으로 순종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번 여름에 8월에 비가 많이 내렸는데요. 비가 많이 내려서 여러 가지 참변을 당한 소식들이 안타깝게도 많이 들어옵니다. 8월 초에 가평군 북면 화악천 계곡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63세 된 아버지가 발을 헛디뎌서 강물에 빠지게 되자, 그 아들이 30세 된 아들이 아버지를 건지기 위해서 같이 뛰어들었다가 두 사람 다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이기 때문에 지체하지 않고 뛰어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기억한다고 한다면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믿음으로 따라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을 매 순간순간마다 해 나갈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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