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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성 목사 안수는 비성경적인가? (이광우)

이광우 목사님의 페이스북 글을 스크랩합니다.

[여성(목사) 안수는 비성경적인가?]

(지면 사정상, 경어체를 쓰지 못하고 평어체로 글을 쓰는 점,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여성 안수와 관련하여 전 세계적으로 찬·반 신학자들의 논문과 책이 이미 많이 나와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꼭 필요한 내용 외에는 신학적인 진술은 가능한 한 하지 않겠습니다.)_이광우 목사(전주열린문교회, 총신대학교 법인이사)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 ‘삼종지도(三從之道)’,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말로 여성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그래서 딸자식에게는 이름 석 자도 붙여주지 않던 나라, 유교의 가부장제(家父長制)에 찌들어 너무 오랜 세월 여권(女權)을 무참히 짓밟던 우리나라였다. 내 어릴 적 바로 윗집에 살았던 어떤 누나는 그 이름이 소리만으로도 몹시 웃기는 ‘딸 털이’였다. 딸이 많은 집이었는데 고추 달린 자식을 골똘히 바라느라 ‘딸을 그만 털어버리자’는 뜻에서 그 아버지가 딸자식 이름을 그토록 천하게 붙였던 것이다. 내 또래 철부지 동네 아이들은 종종 그 누나 이름을 부르며 그 누나를 마냥 귀찮게 놀려먹곤 하였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오면서 이 땅의 여성들이 그 잔혹한 여성 차별에서 해방되었다. 하여, 지금은 여성 중장비기사, 여성 대통령, 여성 격투기선수, 여성 총리, 여성 택시기사, 여성 교수, 여성 판·검·변호사, 여성 장교, 여성 타워크레인기사, 여성 공무원, 여성 국회의원 등등 사회 각계 각처에서 여성들이 열심히 사역하고 있다.

내 생애에 우리나라 선수가 세계 피겨스케이팅 경연에서 1등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세계 빙속선수권대회에서 내리 우승하는 모습을 보리라 상상도 못하였는데 불과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김연아, 이상화 같은 자랑스런 여자선수들을 보게 되었으니 참 감개무량하기 그지없다. 요즘은 여성 전투기 조종사도 많고, 내가 장교로 군복무했던 공수특전단에도 여성 특전 요원들이 많다. 몇 달 전, 세계 스카이다이빙 선수권대회에서 우리 특전사 여성 4인조가 감격스럽게도 준우승팀보다 압도적인 점수 차로 어엿이 우승을 차지했다. 내 기억에, 남성 특전요원들은 세계대회 상위권에서 맴돌 뿐 아직까지 우승한 적이 없다. 이 여성특전 요원들은 개인 낙하 횟수가 모두 다 1,000 회를 훨씬 웃도는 베테랑들이며 그중에는 자녀를 둔 주부 여군도 있다. 특전사뿐 아니라 다른 특수부대에도 여군들이 꽤 많다. 여자 경찰, 여자 소방대원들도 많은 세상이 아닌가. 이제 지구촌 거의 모든 나라 모든 영역에서 여성이 진출하지 못하는 영역은 없고 이것은 이제 현대사회의 상식이 되었다. 요즘 웬만한 직장에서는 남자 직원에게도 ‘육아 휴가’를 줄 만큼 남녀 구별이 사실상 희미해진 시대가 되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며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서 그런지, 한국교회 안에는 유독 여성 교인들이 많다. 한국교회 여성 교인 중에 아무나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귀한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아주 많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덕에 차별과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여성들도 당당히 자기 이름을 지닐 수 있게 되었고,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고, 자기 재능을 살려 국내외적으로 남성들도 차지하기 힘든 전문직에 보란 듯이 진출한 이들도 많아졌다. 그동안 장로교단을 포함해서 국내외 많은 교단들은 여성 목사 안수를 주지 않다가, 사회의 변화와 심도 깊은 신학적 반성에 발맞추어 그동안의 판단 오류를 늦게나마 시정하고 여성 목사 안수를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덩치가 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등의 교단에서는 여성을 목사로, 혹은 장로로 안수하기 시작한 지 꽤 됐고 작년에는 기장 총회장으로 여성인 김은경 목사가 세워지기도 했다. 전해 들은 소식으로는 요즘 천주교 내부에서도 여성 사제를 세우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한다. 그런데도, 장자교단(이런 용어도 사실은 별로 덕스럽지 않다)을 자임하는 우리 예장합동 교단은 ‘개혁신학’, ‘보수신학’을 주장하며 이 문제에 대한 교단 내 여성 사역자들의 눈물 어린 호소를 시종(始終) 무시해왔다. 여성안수 반대를 보수주의 신학 수호의 마지막 보루로 삼고 있기에, 최근 총회 때마다 상정되는 ‘여성 강도권 허락’이라는 ‘꼼수’ 비슷한 안건마저도 일고의 여지도 없이 기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늦깎이 신앙인의 팔불출(八不出) 티내기/

나는 우리 어머니의 전도로 대학생 시절에 예수 믿게 된 사람이다. 아버지가 경주 이가(李家) 익재공 파(派) 37대 종손(宗孫)이시고, 내가 38대 종손으로 우리 집이 종가(宗家)여서 한국전쟁 후 춥고 배고프던 시절, 우리 집에서는 제사만 일 년에 무려 13회였다. 예수 믿기 전, 가난한 살림에 종가의 며느리로서 수시로 힘겹게 제사상을 챙겨야 했던 우리 어머니는 “우리 광우 각시는 제사상 챙기는 일 없게 해야겠다”는 소박한 일념만으로, “알아보니 천주교인들은 제사도 지낸다더라” 하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혼자 교회당에 다녀오셨다. 딱 한 번 교회당에 다녀오신 어머니가 일주일 내내 큰아들인 나를 들들 볶아 두 번째로 교회당에 가시는 날 기어코 나를 끌고 가셨고, 이내 한 고집하시던 아버지를 포함해서 가족 전체가 교회당을 출입하고 예수 믿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게 시작된 신앙생활, 내 부모님과 우리 형제 5남매, 2대가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함께 세례를 받는 한국교회 역사상(?) 흔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얼마 전 소천하셔서 지금은 대전 현충원에 어머니와 함께 누워계시는 아버지는 생전에 장로로, 어머니는 권사로 주님을 성실히 섬기다가 은퇴하셨고, 장남인 나는 목사로, 동생들은 안수집사 권사로 주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으며, 종가인 우리 집이 예수 믿게 되면서 일가친척 대부분이 예수 믿게 되었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수 있으며(고전 7:16)”라는 성경 말씀이 진리임을 우리 어머니께서 당신의 삶으로 확실하게 증명하신 셈이다. 우리 교단이 추구하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주제가 ‘만인 제사장설’(벧전 2:9)인데, 여성이신 우리 어머니께서 우리 집안에서 ‘제사장’ 역할을 충실히 감당함으로 집안과 가문의 복음화가 이루어졌다. 돌이켜보면 참 어설프기 그지없던 초짜 신앙인이었지만 그런 점에서 우리 어머니야말로 종교개혁자들의 확실한 후예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약 40년 전 어느 주일 밤, 저녁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거의 강제로 ‘맞선’을 보는 자리에 나갔다. 당시 처녀였던 아내는 “이모 댁에 잠깐 바람 쐬러 다녀오자”는 장모님의 말에 속아(?) 보라색 월남치마 바람으로 따라 나와서 졸지에 나하고 마주 앉아 맞선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결혼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아무튼 그 맞선 본 날로부터 딱 3 주만에 우리 두 사람은 빛의 속도로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나 40년 가까이 살면서 그동안 4남매를 낳아 길렀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식들이 잘 자라 지금은 각자 세워진 자리에서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세월 따라 손자도 셋이나 둔 우리 부부는 이제 어느덧 고희(古稀)가 코앞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믿지 않을 이가 많겠지만 자식들 넷을 낳아 기르며 목사 부부로 살아오는 동안 우리 부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물론 의견이 잠시 맞지 않아 한나절쯤 서로 말없이 지낸 적은 몇 번 있지만 부부 싸움이라는 것은 아예 해본 적이 없다. 아내의 이름에 ‘영’ 자가 있고 내 이름에 ‘광’ 자가 들어있어서 우리 스스로 ‘영광 부부’라 자임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역행하는 삶은 살지 말자” 다짐했고 지금껏 그 약속을 서로 잘 지켜냈다. 우리 두 사람 사이, 사랑의 깊이를 떠나서 가정에서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냐 하는 치사한 이야기가 나온 적도 없고 그냥 물 흐르듯이 집안일을 서로 의논하며 살았다.

나는 내 아내의 지혜를 굳게 믿고 집안 대소사의 대부분을 아내에게 맡기고 무척 속 편하게 살아왔다. 아내의 지혜가 필요한 일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맡겼고 아내 또한 매사에 나에게 그러하였다. 개혁신학의 기조대로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을 생각하며 지나온 세월, 한마디로 아내와 내가 ‘한 몸’되어 이룬 가정은 매우 ‘질서’ 있는 공동체였다. 지금도 그렇고 우리 두 사람이 하늘로 돌아가는 날까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참 행복한 가정생활이었다. 그 뿌리에, 우리 주 예수님을 향한 아내와 나의 ‘믿음’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조금 전 내가 우리 부부 이야기에 ‘질서’라는 낱말을 굳이 꺼냈음을 기억하며 남은 글을 읽으시기 바란다.

/‘여성목사 안수 불허’는 ‘성경적’이다/

현재 우리 예장합동 교단의 신학적 기조는 이렇다. 먼저, ‘성경적’이라는 말이 자칫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무줄처럼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싶다. 대개 신앙인들이 자기주장을 할 때 아주 쉽게 “이것은 성경적”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런 표현이 위험한 것은, 성경 안에서도 전혀 상반되는 것 같은 진술(말씀)이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 주제와 관련하여 신약에도 그런 곳들(고전 14:34-35와 고전 11:4-5)이 있다. 이 상반되는 말씀을 각자 입맛에 맞게 인용하며 제멋대로 자기주장을 펼칠 가능성이 늘 열려 있기에 이 ‘성경적’이라는 말이 꽤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줄기차게 내세우는 주요 논리가 ‘창조론’, ‘돕는 배필론’, ‘질서론(남성머리론)’, ‘삼위일체론’이다. 내가 보기에, 이 논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론’이 전혀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이 우선 이상하기 그지없다. 그 이유가, 사실은 남녀 차별이 극심한 고대문화 속에서도 여성의 인권을 아주 중시하던 신명기 법이나 드보라나 훌다나 미리암과 같은 걸출한 여성 지도자들의 활약상을 전하고 있는 구약 본문은 무시하고, 이른바 가부장제를 지지할 만한 구절만 입맛대로 찾아 굳이 인용하려 들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다. 여자가 먼저 범죄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이다. (교회의) 질서를 위해 남자가 목사를 해야 한다. 남자가 가정의 제사장이다. 잘 봐라, 삼위 하나님 사이에도 ‘질서’가 있지 않느냐? 신약성경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도 분명히 있지 않으냐?” 등등이 그 핵심이다.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여자가 나중에 창조되었다 해서 여성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한심한 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남자만 하나님의 형상이고 여자는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남자는 ‘우월한’ 하나님 형상이고 여자는 ‘열등하고 부족한’ 하나님의 형상인가? 하나님의 형상인 남자 여자의 창조 기사가 ‘차이점(계급)’이 아니라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성경해석의 초보 원리조차 모르는 이들이 참 많다. 남성 여성의 ‘다양성’, ‘연합’, ‘상호 보완’에 관한 말씀을 악착같이 ‘계급(서열) 차이로 이해하려는 자세도 참으로 심각한 고질병이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 기록과 함께 고린도전서 15:22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씀에서도 남녀 본질의 동질성이 분명히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른 척하는 이들도 있다. 구약성경 아가서에서도 남녀 ’상호성‘과 ’평등성‘을 구구절절 정말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편하게 생각하자. 남자는 흙으로,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다. 남자와 여자의 재료 중에 어느 소재가 더 나은 ‘신(新)소재’인가? 손전화기나 자동차를 보라. 먼저 나온 것과 몇 년 뒤에 나온 신제품 중에 어느 것이 성능이 더 좋은가? 나에게도 형제들이 있고 내가 장남이지만, 나보다 늦게 태어난 여동생들 중에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이들이 있는 현실은 또 어쩔 것인가?

여자는 남자를 ‘돕는(히, 에제르) 배필’(창 2:18)이라고 주장한다. ‘돕는 배필’로 번역된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마주 서서 돕는 이’이고 약간 의역하면 ‘가장 잘 어울리는 짝’, ‘서로 도우며 사는 짝’이다. 요즘 부부 사이에 흔히 주고받는 ‘반쪽’이라는 말이 이 말의 정확한 해석에 아주 가깝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한 몸(칭 2:24)을 이루며 살지만 ‘반쪽’짜리 둘이 만나서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창세기 2장 18절의 ‘돕는다’는 뜻의 ‘에제르’라는 낱말이, ‘우리를 돕는 이’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 성구(출 18:4, 신 33:7, 시 20:1-2)에도 종종 쓰이는데 그렇다면 피조물인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우리만 못하고 우리보다 서열이 뒤진다는 것인가. 만약 그런 것이 ‘질서’라면 그것은 도대체 무슨 ‘질서’인가. “남편이 가정의 제사장”이라고, 그러니 남자만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심한 자들도 있다. 도대체 신학을 어떻게 공부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분명히 말하지만 유대인들 중에서도 오직 아론 지파에 속한 남자만 제사장직을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을 신학교에서 분명히 배웠을 것이다. 종교개혁자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만인(萬人) 제사장설’을 주장하면서 그 ‘만인’에 여성은 악착같이 배제하려는 해괴한 논리는 도대체 어떤 머리에서 나오는 것인가?

더 가관인 것은, “삼위 하나님 사이에도 ‘질서’가 있지 않으냐? 성자께서 성부에게 복종(?)하지 않으셨냐?”고 강변하는 이들도 있다는 점이다.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과 죄로 부패한 본성을 지닌 피조물을 1:1로 나란히 놓고 보는 신성모독적 관점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성을 스스로 입으시고 우리 곁에 오셔서 ‘온전한 참인간’으로서 공생애 기간에 하늘 아버지와 긴밀히 소통하셨던 기록을 악착같이 남녀 차별의 근거로 삼는 것은 아주 한심한 오만과 무지의 소치이다.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성부께서 성자를 이 땅에 ‘파송’하셔서 성자로 하여금 대속 사역을 완성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한번 물어보자. 그렇다면 성부께서 성자를 파송하셨듯이, 피조물인 남자가 역시 피조물인 여자를 언제 어디로 어떻게 파송한 적이 있다는 말인가? 설마, 많은 교회에서 대체로 그렇듯이, 교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여성 성도들을 한복 곱게 입혀서 교회 현관에 일렬로 세워 놓고 손님들께 90도로 인사하며 생강차나 나르도록 하는 것이 소위 ‘개혁신학과 보수신학’이 내세우는 교회 안, 남녀 ‘질서’의 본질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내가 몸담았던 대학교를 떠나 늦깎이로 신학을 공부할 때,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함께 입학했던 여성 동기들이 있었다. 여성 동기들 중에는 솔직히 나보다 훨씬 더 공부를 잘한 이들도 있었고, 신대원을 졸업한 뒤에도 공부를 계속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이들도 있다. 그런데, 신대원 졸업한 뒤로 나는 줄곧 ‘목사’로 불렸지만 내 여성 동기들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박사학위 소지자임에도 교회 안에 그냥 ‘여전도사’로 남아 있다. 일부는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주는 다른 교단으로 교적을 옮겨 사역의 목마름을 다소 해소한 이들도 있고, 그냥 해외선교사의 길로 달려가거나, 교단 내 기관에서 전문성을 살려 사역하는 이들도 몇 있지만, 많은 여성 동기들이 여전히 우리 교단 사역현장의 음지(陰地)에서 온갖 차별대우를 감내하며 눈물겹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들고 있다. 하여간 이런 현실 속에서 여성목사 안수를 허락한 예장통합의 신학이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여성 목사가 총회장을 하고 있는 기장이 이단인지, 아니면 우리가 뭔가를 끝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진지하게 생각을 다시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여성목사 안수도 ‘성경적’이다/

앞에서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면서 여성들이 해방되었다는 말을 했다. 오늘날 사회 각계 각층에서 여성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이 활동하고 있는가도 말씀드렸다. 나는 “여성목사 안수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인 만큼 “여성목사 안수를 허락하는 것 또한 성경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서로 대립되는 주장을 하는 세계적인 신학자들의 논지 역시 이미 충분히 개진되었다고 보고 있다. 다만, 성경 전체의 맥락과, 복음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 하나님 나라의 통전적인 원리,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비추어 우리 예장합동 교단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행위를 속히 그쳐야 한다는 생각은 개인적으로 분명히 갖고 있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여성상은, 여성도 남자와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 ‘돕는 배필’은 ‘반쪽’이라는 것, 그 반쪽끼리 서로 세워주고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사는 것이 진정한 인간됨이라는 것 정도를 말하는 것으로 얼추 충분할 것 같다. 어떤 학자는 타락 이후의 말씀인 창세기 3장 16절, “너는 남편을 원하고(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는 구절을 근거로 남성(만의) 목사론을 펼치기도 한다.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이처럼 타락한 남녀 관계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모든 막힌 담을 헐고 모든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신 것인데 유독 ‘남녀 관계의 차별’만은 회복할 능력이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한 가지 더, 창 3:16과 관련하여 확인해야 할 성경 해석학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나에게 구약성경을 가르쳤던 저명한 구약학 스승 교수님께서는 “이 본문이 히브리어의 평행법과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히브리어 평행법에서 앞뒤 구절이 같은 내용일 때는 두 구절에 있는 낱말을 하나씩 교차해서 생략하는 경우가 있다 하셨는데, 나는 은사님의 그 탁월한 관점과 해석이 성경 66권의 통전적 경륜에 비추어 훨씬 더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아래 괄호 속에 있는 낱말이 히브리어 평행법에서 교차 생략된 것으로 추정되는 낱말이다.

너는 남편을 (다스리기를)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리기를 (사모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창세기 3:16 본문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등 관계에서 힘겨루기를 하게 된 것이 범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라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타락으로 인한 죽음을 걷어내기 위해 인성을 입고 참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사역, 그 구원 이후의 남녀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 타락한 상태 그대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이들이 본문을 해석하는 방식대로) 여자는 마냥 ‘남편바라기’로, 남자는 여자를 마구 ‘다스리고 짓밟고 차별하며’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가. 그것이 남녀 인간에게 정말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지 정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인성을 입으시고 임마누엘하심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사탄이 하늘에서 쫓겨났고, 세상의 썩은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새 창조’의 질서가 세워졌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여성을 존중하시고 여성들의 굴레를 벗겨주신 것이다(한 가지 예, 요 4:1-42). 예수님의 대속(代贖)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십자가와 부활인데, 십자가 처형의 참혹한 현장에 비겁한 남자 제자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을 때 여성 제자들이 십자가 아래서 흐느껴 울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사흘 뒤 감격스런 부활의 첫소식을 전파하는 기독교 역사상 중차대한 일을 예수님이 여성들에게 허락하셨던 이 엄청난 사건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성을 사람 취급하지 않던 시절에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이혼을 분명히 반대하셨던, 당시로서는 아주 혁명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어떤 이는 이르기를 “12사도 중에 여자가 없었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하지만 이것은, 과거 봉건시대의 조선시대처럼 여성을 물건 취급하여 법정에서의 증언자 자격도 주지 않던 참혹한 시대에, 생명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이나 다름없는 예수님의 ‘임시 선교 전략’의 결과물이었음을 정말 끝내 헤아리지 못하는 것인가. “12사도 중에 여자가 없었다”는 말을 하는 이들 중에 혹시 ‘남자 목사’를 ‘사도’급으로 여기고 싶은 교만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우리 교단 헌법 4장 1조 ‘목사의 의의’에도 그런 말은 아예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2사도직은, 구약의 12지파에 상응하는 새 언약의 기초로서 교회의 터를 세우기 위해, 예수님의 임시 선교 전략에 따라 오직 유대인 남자에게만 주어졌던 한시적인 직분이었는데 오늘 우리나라 남성 목사들 중에 유대인은 없지 않은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받든 사도 바울이 말하는 여성상, 그 핵심에도 예수님이 설파하신 새 창조 질서의 원칙이 녹아 있고, ‘남녀 동등성’, ‘상호의존성’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성경을 정말 정직한 눈으로 깊이 들여다본 이들이라면 함부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울의 가정생활 지침에서도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복종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어느 신학자께서 정확히 지적하셨듯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35)는 한 구절만을 똑 따내서 남성만의 목사 안수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바울이 ‘은사론’을 펼치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의 앞부분인 고린도전서 11장 4-5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을 기반으로, 교회밖 사람들에게 욕먹지 않도록 “여자들도 교회에서 복장 단정히 하고 예언(설교)하라”고 바울이 가르쳤던 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정직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그래서 ‘성경적’이라는 말이 아주 위험하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이다). 구약의 요엘서 2:28-29 말씀에서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라는 약속이 오순절에 성취되어 남녀 구분 없이 성령 세례를 받은 이들이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달려나가 헌신했던 일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잠든 척하는 사람은 절대 깨울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 요즘 웬만한 교인들도 고린도전서가 고린도교회라는 특정 지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사도 바울이 쓴 편지라는 것은 다 안다. 그런 편지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딱 한 구절(고린도교회의 어떤 특정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사도의 부득이한 조치, 그것도 고린도전서 11장 4-5절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내용)을 만고의 진리로 받들며 ‘여성 목사 안수 불가’를 외치는 이들은 고린도전서의 그처럼 뻔한 저작목적을 정녕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마냥 잠든 척하는 사람처럼 알면서도 그냥 끝끝내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둘 다 성경적이라면?/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허락하는 교단이 있는가 하면 우리 예장합동처럼 여성 목사 안수를 허락하지 않는 교단도 있다. 서로 맞서는 이 주장을 펼치는 교단 소속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서로 “우리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신학적 평행선이 그어진 지 꽤 오래되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신학적인 논증을 피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시대가 달라졌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여성 지도자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이렇게 말하면 보수신학자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어김없이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하다”는 식으로 노루 친 막대기같은 궤변을 펼치며 “여성 목사 안수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한다. 그들의 말이 맞다. 시대는 변한다. 그래도 하나님의 진리가 영원한 것 또한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에게 항시 ‘그 시대의 문화 역사적 바탕 위에서’ 진리의 말씀을 주셨다는 엄연한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가? 솔직히 목사들 중에 설교 시간에 “나는 변화무쌍한 현실적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고 성경을 오직 문자적으로만 전달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있는가?

아무튼, 백 보를 양보해서 양측 주장이 다 성경적이라고 치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예장합동 교단은 여성 목사 안수가 비성경적이니까 끝까지 여성 목사 안수를 허락하지 않고 이대로 계속 갈 것인가? 제발 현실을 직시하시라. 보수교단, 개혁신학을 보수하는 장자교단을 자임하는 우리 교단 내 총신대학교 법인이사로 여성들이 세 분(한 분은 변호사, 두 분은 대학교수)이나 이미 들어와 계신다(얼마 전 개정된 법인 정관에도 앞으로 계속 여성 이사들을 영입하도록 명문화되어 있다). 애초에 이 여성이사들을 받을 수 없다고 총회 임원들이 나서서 사회법에 기대어 교육부 상대로 시끌벅적하게 소송을 제기했다가 슬그머니 다 취하하고, 이사회 안에서 당사자인 여성 이사들께 소송을 제기한 목사들이 공식 사과하는 작은 소동(?)도 있었다. 같은 목사로서 정말 몹시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나 역시 같은 법인이사로서 1년 남짓 이사회에서 활동하면서 이 세 분의 여성 이사가 얼마나 출중한 인재들인지를 실시간으로 경험했다. 이 점은 아마 다른 이사들도 거의 다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정말 백 보를 양보해서 두 주장 다 성경적이라면, 어떤 기준에서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는 듯한 구약성경 구절만을 입맛대로 뽑아 신약의 원리와는 맞지 않는 주장을 계속 집요하게 펼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새 창조’ 질서에 주목하면서 좀 더 통전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 나라의 경륜을 전제로 그동안의 생각을 바꿀 것인가. 교회 밖 세상에서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눈부시게 활약하는 이 시대에, 여성들, 특히 우리 예장합동 교단 안에 있는 여성 인재들에게만 유독 차별로 인한 불이익을 끝끝내 감수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믿고 따르는 ‘개혁주의’ 복음의 진리, 그 취지에 맞는 일인가,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앞서 팔불출로 욕먹을 각오하고 말씀드렸듯이, 내 아내와 나 사이에는 무슨 서열이나 계급이 전혀 없다.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내 아내의 지혜를 믿고 아내 역시 그렇게 나를 신뢰하며 40년을 알콩달콩 싸우지 않고 살아왔다. 그럼에도 참으로 ‘질서’ 있는 가정을 이루었다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가정 사역이 성공하였다고 자평(自評)한다. 남녀 사이에 상호존중이 없이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질서, 그래서 하늘의 평화가 없는 질서는 성경이 말하는 참된 질서가 결코 아니고, 개혁주의 신앙은 더더욱 아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이 구속받은 남녀 죄인들이 모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거룩한 공동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데, 왜 유독 우리 교단 소속 여성 인재들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게 그 무거운 족쇄를 계속 채우고 입에 재갈을 한사코 물려 놓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여성목사 안수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는 이 글이 너무 당혹스럽고 몹시 불편하고 언짢으실 것이다. 건전한 토론을 할 수 있는 훈련이 거의 돼 있지 않은 우리 사회의 오랜 악습(惡習), 나하고 다른 의견을 내는 이들을 걸핏하면 적대(敵對)하며 정치적으로 공격하기에 급급했던 일들이 그동안 교단 안팎에 더러 있었던 것을 쉽게 부인하지는 못하실 것이다. 나는 청년 시절, 예장합동 교단이 좋아 스스로 이 교단을 선택하여 예장합동 교단 신학교에 찾아와서 공부했고, 이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교단 소속 전주열린문교회에서 30년 넘게 사역했다. 현재는 총신대학교 재단법인의 개방·교육 이사로도 주님을 섬기고 있다.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교단 총회 지도자들이 “1년 더 연구하기로”와 같은 속 보이는 책임회피 식 탁상공론을 그만 그치고, 우리 교단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개혁신학’의 원리에 맞게, ‘사랑과 평화’의 정신에 맞게, 요즘 흔히 말하는 ‘공정과 상식’에 맞게, 여성 목사 안수 문제를 전향적으로 속히 매듭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누구든지 총회 안팎에서, 꽤 어려워 보이는(사실은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그 일을 정직하고 당당하게 해내시는 분들은 훗날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크게 칭찬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우리 교단 소속 여성 사역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남성 분들에게도 낳고 길러주신 존경하는 어머니가 있을 것이며, 사랑하는 아내가 있을 것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있을 것이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분들은, 앞으로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 여성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착취했던 그 봉건 시절처럼, 여성인 자기 어머니의 말은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가정에서 아내를 마음껏 하녀처럼 함부로 부리며 계속 사실 것인지 잘 생각해 보시라. “암컷이 짖으면 집안 망하는 법”이니 꼭 그렇게 남편(남자) 마음대로 하며 제왕처럼 호기롭게 사는 게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맞는지도 생각해 보시라.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분들도 자기 딸에게 어떻게든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자 애쓸 것이고, 좋은 학교에 보내 남들보다 더 좋은 공부를 시켜, 의사가 되거나 판검사가 되거나 대학교수가 되거나 장관 차관 혹은 여성 대통령이라도 되어 사회의 지도자로 살기를 바라실 것이다. 그분들 가운데도 사랑하는 딸을 이왕이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보내 훌륭한 복음 사역자로 세우고 싶은 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분들 중에, 남자들과 똑같은 신학 공부를 하고도 자기 딸이 지금처럼 평생 ‘여전도사’로 힘들게 살기를 바라는 이는 솔직히 없을 것이다. 과거 봉건시대처럼, 자기 딸자식을 천대하고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학교도 안 보내고 그저 집안에서 조신하게 십자수나 놓게 하려는 분들도 없을 것이라 믿는다. 남성 목사님들은, 너나없이 섬기시는 교회에 여성 성도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늘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실 것이다.

끝끝내 여성 안수가 신학적으로 불가하고 신앙 양심상 도저히 허용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총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앞으로 여학생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여성 목사 안수가 비성경적이라는 확신이 있는 우리 교단 지도자들은 시간 끌지 말고 즉시 여성목사 안수를 행하는 ‘이상한’ 교단, 예컨대 예장 통합, 기장과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셔야 할 것이다. 또한 총회 산하 교인들 헷갈리지 않게 그런 교단들을 ‘이단’으로 확실하게 규정해 주셔야 할 것이다. 여자목사들의 설교를 내보내는 기독언론사들과의 교류도 속히 차단하셔야 할 것이다. 여성을 한없이 차별하는 이 교단에 어엿이 몸담고 있으면서 “한국교회 대연합”이니 뭐니 하는 앞뒤 맞지 않는 번지르르한 주장도 그만하셔야 할 것이다.

아울러 교단 차원에서, 국가 시민사회 앞에 ‘하찮은’ 여성들이 함부로 전문직이나 중요한 자리에 나가지 못하도록 ‘성명서’라도 꾸준히 발표해서 ‘대정부 투쟁’을 당장 시작하셔야 할 것이다. 나는 성숙한 신앙의 특질이 ‘일관성’과 ‘한결같음’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거대 교단인 우리 예장합동의 신학적 발걸음이라면 적어도 만인 앞에 그 정도 최소한의 ‘일관성’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교단 차원에서 성명서도 발표하고 여성들이 우리 사회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꾸준히 대정부 투쟁을 당장 시작하시라고 감히 권면 드리는 것이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성경 66권이 지향하는 ‘남녀 동등성과 평등성’, ‘상호의존성’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 나라가 지향하는 사랑과 평화의 정신에 따라, 창피하게 더는 시간 끌지 말고 자랑스런 우리 예장합동 교단 안에서 ‘여성 안수’의 길을 흔쾌히 당장 열어 주시라. 우리 교단 내 탁월한 여성 사역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할 기회를 부디 ‘속히’ 열어주시라.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우리 교단 신학교에서 공부한 우수한 여성 인재들이 다른 교단으로 빠져나가는 일도 없을 것이고, 사역 일선에서 평생 ‘전도사’로 천대받으며 숨어서 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되면 아무리 지금처럼 학령(學齡)인구가 급감한다 해도, 총신대학교 신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정말 우수한 여성 인재들이 앞다투어 들어올 것이고, 그만큼 우리 교단의 앞날은 밝아질 것이다.

아울러, 내친김에 현 교단헌법도 교회직원 관련 조항을 개정할 것을 제안한다. 현재 교단 헌법에는 교회 직원 중에 남성안수집사, 권사, 남성장로가 있다. 교회 공동의회에서 똑같이 교인 2/3 이상의 지지를 얻고도 여성은 안수 없이 권사로 취임하고, 남성은 안수하여 집사 또는 장로로 세운다. 여성 목사 안수를 허락할 생각이라면, 그에 어울리지 않는 현재의 권사 제도는 차차로 폐지하고, 앞으로 공동의회에서 2/3 이상의 지지를 받는 이들은 남녀 구분 없이 모두 다 안수하여 안수집사와 장로로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 본다. 그러면 자연히 총회 총대 중에도 여성 총대도 나오게 될 것이다. 세속의 국회에도 여성 의원들이 많이 있는데 총회에 여성 총대가 참석하는 것이 그리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이 교단 안에 남성 교인들보다 훨씬 수가 많은 여성 성도들의 권익을 정당하게 보호하는 덕스러운 길이 될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임은 잘 아실 것이다. 교단 총회 앞에 간청하오니, 자랑스런 우리 예장합동 교단과 교단 소속 교회 안에서 더 이상의 여성 차별이 없게 하시라. 이번 106회기 총회의 멋진 구호처럼, 우리 교단의 남성 사역자들과 여성 사역자들이 함께 손을 맞잡고 ‘은혜로운 동행’의 길을 즐거이 걷게 속히 여성 안수의 문을 열어 주시라. 우리 교단 소속 여성 성도들의 무한한 잠재력과 은사와 재능을 지금처럼 이렇게 무참히 사장(死藏)시켜 하나님의 엄한 책망을 자초(自招)하지 마시라.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남성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와 ‘정의’에 대해 하나님 앞과 남녀 성도들 앞에 떳떳하게 설교하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개혁신학’과 행위에 최소한의 일관성은 있어야 하겠기에, 아울러 내가 우리 예장 합동 교단을 한없이 자랑스러워하고 정말 사랑하기에, 기다리고 참다 못해 오랜 기도와 고민 끝에, 우리 교단 소속 사랑하는 동역자들께 간곡히 드리는 호소임을 이해하시고, 우리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 어설픈 글을 부디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라. (2022.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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