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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뒤틀린 영성 (삼상 18:10-16)

천천과 만만 (삼상 18:6-9) +++ 치밀하게 계산된 음모 (삼상 18:17-30)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첫 번째 시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그 영혼을 달래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르신 악령이 사울을 지배하고 있을 때, 다윗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그의 마음을 달래고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를 위해서 악기를 연주했지만, 그 순간에 사울 왕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다윗에게 던져서 그래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하는 그런 시도를 했는데, 두 번씩이나 창을 던졌지만 다윗은 그 창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피하게 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돼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이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시도가 여러 번 등장하게 될 텐데요. 그 가운데 오늘은 첫 번째 시도로서, 이 사울 왕이 어떤 계획과 어떤 모략을 세워가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그 다윗을 향해서 즉흥적으로 그 다윗을 향해서 창을 던진 모습이 기록돼 있는 겁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고 있을 때 악령이 그 사울 왕의 마음을 충동질해서 광기가 일어나게 되었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창을 던졌는데, 그 창에 다윗이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다행히도 피하게 되었다고 오늘 두 번씩이나 피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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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읽어보면 아주 특이한 표현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 특이한 표현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고 하는 표현이 아주 특이합니다. 악령이 있는데요. 그 악령이 어떻게 활동하는가? 악령이 어떻게 악한 일을 하는가 하는 그것을 묘사할 때 다시 말하자면 그 악령이 사울을 충동질해서 그래서 다윗을 죽이게 만들었는 죽이려고 시도하게 됐는데, 그 악령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오늘 사무엘상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냐면,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가만히 읽어보면 우리가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악령을 부리시다니, 하나님께서 선하고 좋으신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악령을 부리셔서 악한 일을 하게 하는, 그 악령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통치하시고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그 악령을 사용하셔서 그 악령이 무엇인가 악한 일을 하게 한다고 하는 이 표현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표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죄와 악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 앞에서,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악과 죄와 나쁜 모든 일에 대한 그 책임이 궁극적으로 그 책임을 지고 있는, 최고의 책임권자에게로 올라가고 올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게 했기 때문에, 악한 일이 발생하고, 나쁜 짓이 발생하는 것이고, 죄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모든 죄와 악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나님에게 있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표현이 바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는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묘사하고 있냐면, 하나님은 악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성경 전체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아무런 흠도 오점도 없으신 완벽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신데,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 악령을 부리신다고 하는 오해할 만한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심지어 악령이라고 할지라도, 그 악령이 하나님의 통제권 밖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을 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최고의 통치자이신데, 결국 사탄도 마음대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마음껏 무한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사탄이 아니라, 사탄이 무한대의 권력을 가지고, 무한정 악한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사탄 또는 악령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그 권위 아래서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제한적으로만 움직이고 있는 그런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악령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마치 이것은 의사가 환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백신이라고 하는 주사를 주는데, 의사가 우리 몸에 백신이라고 하는 주사를 줄 때, 이 백신이 무엇이냐면, 바로 바이러스입니다. 온갖 바이러스를 약하게 만들어서 우리들의 몸에 주사하게 되는데요. 독감 백신을 맞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특별한 약을 맞는 것이 아니라, 독감 바이러스를 약하게 만들어서 우리들의 몸에 넣어주는 겁니다. 또 여러 가지 무슨 백신들이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 심각한 병들에 대한 그 백신들을 의사들이 우리들의 몸속에 집어넣어 주는데, 왜 의사가 우리들의 몸에 이런 바이러스를 집어넣어 주는가? 그 의사가 바이러스를 우리들의 몸에 넣어주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 바이러스에 걸려서 우리로 하여금 죽게 만들려고 병에 걸리게 하려고 바이러스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바이러스를 약화시키고, 우리의 몸에 면역력이 생기게 만들고 우리의 백혈구가 싸워서 이기는 그런 훈련을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바이러스를 약화시켜서, 의사의 컨트롤 속에서 우리들의 몸에 바이러스를 집어넣는 것이 백신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 악력마저도 사용하시는데,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사용하시는데,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그 악령이 마음껏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도록 방치해 두시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께서 연단시키시고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만드시는 그 방법으로 악령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악령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표현을 볼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그 어떤 것들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우연히 어쩌다 보니까 재수 없어서 나에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만나는 그 고통과 아픔 내 인생의 길 가운데에서 다가오는 그 수많은 장애물들, 그리고 내 마음에는 이쪽으로 진행됐으면 좋겠지만 이 길이 막혀버리고 엉뚱한 곳이 열리게 되는 그런 수많은 일들을 만나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불안한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을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아니하고, 왜 나로 하여금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게 하시는가? 왜 나로 하여금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해 주시는가?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발견해야 될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 모든 것들을 두려워하거나 겁낼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결국은 이 모든 걸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앗아가버리고 우리를 영원히 파멸로 이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을 통하여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옛날 요셉의 삶을 본다고 한다면, 요셉에게는 어마어마한 충격적인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을 형들을 면회하러 갔다가 형들을 위문하러 갔다가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시도했고, 그리고 자신을 미대한 상인들에게 팔아버리는 그런 너무나도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노예로 살아가야만 했었고,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는데, 주인 마님을 강간하려고 했다고 하는 강간 미수범이라고 하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요셉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고, 이 요셉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망하게 하기 위해서, 이 모든 일들을 일어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악인도 적당하게 적당하게 만드셨다고 하는 악한 날에 적당하게 만드셨다고 하는 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재료들을 좋은 일들 뿐만 아니라, 악한 일 나쁜 일들도 사용하셔서, 우리들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계획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담대하게 믿음으로서는 우리 모두가 다 둘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그 고난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다윗이 갑자기 자신을 향해서 창을 던지는 그 사울왕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는지도 모릅니다. 자기는 지금 골리앗을 무찔렀고, 사울 왕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고,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인데, 그런데 자기가 칭찬을 받아야 하고, 그리고 정말 대접을 받아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었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사울이 자기를 향해서 창을 꽂아 놓는 그 어마어마한 충격적인 사건을 만났을 때, 그때 이 다윗의 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좌절하고 충격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미래의 일은 알지 못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떨어질 수 없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은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그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사무엘상 16장을 읽어보면 다윗은 수금을 탈 때 사울왕에게 있었던 그 악령이 떠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고 악기를 연주할 때, 사울의 그 악령에 사로잡혔던 그 사울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다윗의 그 음악을 들으면서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되는 그런 일들이 예전에 있었습니다. 그게 사무엘상 16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울왕이 악령이 들렸을 때 다윗이 가서 그 사울 앞에서 음악을 켜는 겁니다. 수금을 켜는 겁니다. 예전에 그 수금을 켜면서 사울에게서 그 악령이 떠나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사울의 그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악령이 쫓아가기를 원하면서, 다윗이 그 음악을 연주를 했는데, 이번에는 그 음악을 듣고 사울의 정신이 되돌아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해졌어요. 그 순간에 사울은 창을 빼들고, 다윗을 향해서 던져버렸는데, 이제는 다윗의 음악도 사울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을까요?

예전에는 다윗이 연주를 하면, 다 사울 왕의 마음이 차분해지고 누그러뜨려 지고 악령이 떠나가는 그런 놀라운 기적이 있었는데, 왜 사무엘상 18장에서 다윗이 연주했을 때는 그 마음에서 악령이 떠나가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 오히려 더 다윗을 향해서 창을 던진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그 이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추측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울의 마음 가운데 다윗을 향한 시기와 질투 미움과 증오가 사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사울의 마음 가운데 다윗을 향한 그런 시기와 증오 이러한 마음들이 없었을 거예요. 그냥 어떤 한 청년이 와서 연주를 해줄 때, 그가 그 다윗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그 음악에 따라서, 그래서 자신의 마음 가운데 악령이 떠나가는 신비한 기적들을 체험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울 왕의 마음이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증오가 가득, 다윗이 연주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다윗을 다윗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저놈이 살아 있으면 내 왕위가 위태할 것이고, 결국은 내가 쫓겨나게 될 것이고, 저놈을 없애야 되겠다고 하는 그 증오의 마음이 사울의 마음 가운데 가득 차 있을 때, 결국 다윗이 수금을 탔지만, 그 수금의 소리가 아무런 도움도 혜택도 줄 수가 없었던 것,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해 주실 때 밭의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농부가 나가서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짝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가시덤불 사이에, 어떤 씨는 좋은 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그 씨가 어디에 떨어졌느냐에 따라서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고,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이었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문제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씨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사실은 그 마음의 밭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습니다. 묵상을 합니다. 설교를 듣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몸이 건조하고 아무런 열매를 맺히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목사가 문제지요. 물론 목사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목사가 문제일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셨을 때, 목사가 아니라 완벽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생생한 말씀으로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심령을 울리는 그 말씀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다 듣고 은혜를 받고 다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그 가운데 세리와 죄인들은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왔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오히려 그 마음이 완악해져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모습을 우리가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 우리들에게 들을 수 있는 귀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그 말씀이 우리들의 심령에 뿌리가 내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이 한 시간, 와서 주 앞에 예배드리는데, 이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 들리는 이 말씀이 나를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셔서, 이 심령 가운데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일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나의 죄를 발견하고 나 회개할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할 거리를 찾고,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게 그냥 흘려버리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근데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위대한 소년이 아름다운 악기로 연주를 했을 때, 그 연주는 악령을 쫓아낼 만한 파워풀한 연주였는데, 사울의 마음이 시기와 질투와 증오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놀라운 그 음악이 사울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생수의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그 주옥같은 말씀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든지, 우리가 설교 말씀을 듣는다든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그 모든 것들이 오늘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내가 결단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그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내 심령 가운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한다면, 그냥 오늘 또 재미없는 예배 그냥 그냥 드리고 가는구나 하면서 그냥 갈 게 아니고, 그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나아가야 돼요.

“하나님, 내게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으면서,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몸이 건조한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능력 있고 운동력이 있는데, 이 말씀을 들을 때 내 마음이 아무런 감동이 없고, 그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비난만 생겨나고 시기와 질투와 증오의 생각들로 내 마음이 가득 차 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심령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주님 내 마음을 만져주시옵소서. 옥토와 같이 갈아주셔서, 말씀을 들을 때 내 심령에 콕콕 심기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면서 두려워했다고, 12절과 15절 말씀 가운데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의 위치에 있었는데, 자신의 신하였던 다윗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온 백성들의 그 칭찬이 자자한 인기가 너무나도 높이 올라간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 다윗이 언젠가는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갈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사울왕은 자기 신하로 있는 다윗을 보면서 두려워하였다고 오늘 12절과 15절 말씀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사울 왕의 뒤틀린 영적인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윗을 보면서 잠재적인 위험을 느끼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는 이 사울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삐뚤어진 영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한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울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냐면, 다윗만 보는 겁니다. 사실 이 순간에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다윗을 볼 것이 아니라 다윗 뒤에서 움직이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다윗이 이를 지혜롭게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뒤에는 누가 있었냐면 바로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윗을 볼뿐만 아니라, 그 다윗 뒤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될 터인데, 사울은 다윗까지는 보았지만, 그 다윗 위에서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은 결코 보지를 못했습니다.

다윗이 훌륭했던 이유는 다윗이 그 자체로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훌륭할 수가 있었습니다. 12절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다윗을 묘사하면서,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했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성경 속에서 많이 기록해 놓고 있는데, 그런데 사울은 그 다윗을 보면서 그 다윗과 함께하신 하나님은 전혀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저 다윗을 보고 두려워하고 다윗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대로 된 영성이라고 한다면, 뒤틀려진 영성이 아니라, 바른 영성이라고 한다면, 다윗의 모습을 볼 때 어떻게 반응을 해야 정당한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그게 제대로 된 영성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 사람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배 아파할 것이 아니라,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파할 것이 아니라, 다윗이 승리하는 그 모습을 보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나 자신을 되돌아봐야 됩니다.

하나님, 저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골리앗을 무찔러 쓰러뜨렸는데, 하나님 왜 나는 그렇게 못했습니까? 왜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습니까?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됐고, 왜 내가 이곳에 이 모양 이 꼴인지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파악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회개하고 바꾸는 그런 모습을 보여야 그게 제대로 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할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미움과 시기와 증후와 질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고 하는 표시입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우리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 성도들의 말 가운데,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증오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막 나와요 창피한 줄 모르고, 미워하는 것을 정당한 줄 알아요.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더러운 모습인지 모르고, 그것을 그냥 정당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하지만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미움이 있다고 한다면, 시기가 있다고 한다면, 질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건강한 것이 아니라,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모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면서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이렇게 사용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믿고 신뢰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고만 달려드는 거에요.

다윗은 이 순간에 사울 왕이 자기를 향해서 창을 던졌지만, 이 순간에 다윗은 두려워했다고 하는 표현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어쩌면 시편 23편의 고백이 여기에 그대로 있는지 몰라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지금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었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계시는데, 그 길이 때로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어요.

다윗은 창을 던지는 그 순간에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심지어 악마마저도 제어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시기하고 증오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장점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 왕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을 때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난 그 이후에는, 사울 왕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한 다윗은 그저 수금을 타는 종에 불과했고, 신하에 불과했고, 아직 높은 위치에 올라간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다윗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화려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사울은 아주 초라한 인생이 되고야 만 것입니다. 누가 위대한 사람일까요?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을 기대해야 될까요? 겉모습이 화려한 것을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겉모습이 대단한 것 가지고 헛된 자부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과연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냐?”가 훨씬 더 중요해요.

사울이라고 하는 그 인물은 어떤 인물입니까? 사울은 왕입니다. 사울이 그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온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왕이라고 하는 최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나 그 위치에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군사들을 향해서 명령을 할 수 있는 최고 통수권자의 자리입니다. 사울 왕의 명령 한 마리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자리가 사울 왕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사울 왕은 초라한 모습이었어요. 아무도 존경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은 일개 신하에 불과합니다. 나이도 어립니다. 아무런 경력도 없습니다. 이제 겨우 골리앗을 죽였을 뿐입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다윗 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에 사울은 그 다윗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있는 다윗이야말로 대단한 인간이 되어 버린 줄로 믿습니다.

종종 우리는 겉모습을 보고 평가하고, 겉모습을 보고 시험에 들고, 겉모습 때문에 우리는 주눅 들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봅니까? 겉모습을 봐요. 아니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심지어 성도라고 이름하고 있는 사람들도 무엇을 봅니까? 무엇을 보죠? 겉모습을 봐요. 무슨 겉모습을 보나요? 건물을 봐요. 건물을 보고, 그 건물이 화려하면, 그런데 화려한 모습이었고, 조그마한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상가에서 예배드리면, “애개…”?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 교회가 감사하게도 이번에 예배당을 가지게 됐습니다. 너무나도 기쁘고, 감격스럽고, 지난주에 우리가 착공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 가운데 얼마나 기쁨이 넘치는지, 그 기쁨을 제가 그냥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건물을 가진다고 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우리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교회당 건물을 가지면,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좋지 않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제 마음에 기뻐요. 왜냐하면 이곳에 있을 때보다 좀 더 사역을 더 잘할 수가 있을 것이고, 더 영향력을 이 지역사회 가운데서 더 많이 비출 수 있을 것이고, 전도를 할 때 복음의 사역을 할 때 정말 유용하게 사용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고, 이것을 얻게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지금까지 모든 것들을 인도해 주신 것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하지만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화려한 건물, 전주 시내에서 제일 좋고, 시설이 가장 뛰어나고, 주차장 대수 몇백 대를 세울 수 있는 그런 주차장에, 모든 스포츠 시설까지 다 갖추고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갖춘 그런 어마어마한 교회를 세우면, 그러면 자동적으로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는 것 절대로 아닙니다.

그릇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보다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쓰레기를 담고 있으면, 그 무엇으로 만들었어도 쓰레기통이고, 그 안에 보석을 담으면 그것이 무엇이라고 할지라도, 보석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의 말씀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예루살렘의 그 어마어마한 그 건물을 보신 주님께서, 아마 이 인류의 역사상 예루살렘 성전보다도 더 아름답고 더 화려하고 더 웅장한 성전은 아마도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아름다운 성전을 보신 우리 주님께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돌 위에 돌 하나가 넘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고, 정말로 무너졌어요.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허울뿐인 사울과 같은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 이 세상 사람들이 불허하는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인생이 복된 인생이오. 그 인생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귀한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은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는데, 다윗은 그 사울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는 신하의 일을 계속하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으로는 정말 억울할 것 같아요.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자기를 죽이려고 창을 던지는 그 서울을 보면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고. 사울을 향해서 이를 악물을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사울과 상대하기를 싫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은 사울이 다윗을 천부장을 삼으니까, 천부장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고, 다윗이 사울의 종이 되어서, 사울을 섬기는 일을 꾸준히 지혜롭게 했다고, 13절의 말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할 수 있었던 방법은 사울이 창을 던졌을 때, 자기는 칼을 빼서 사울의 목을 칠 수도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죽였는데, 사울 죽이는 거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쉽습니다. 골리앗을 죽일 수 있었던 다윗이 사울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말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인기를 얻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면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은 그 사울이 무서울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그때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울 왕을 죽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왕으로 세우신다고 했으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쿠데타 일으키고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백성들을 위하여서 일을 지혜롭게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그 모습을 볼 때 다윗의 모습이 정말로 존경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들은 이런 간절한 소망이 생깁니다. 이 시대에도 이런 다윗과 같은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가 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꾼들이 판치는 이 시대에, 다윗과 같은 신실한 사람이 있을 수만 있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과 같이 시기와 반목이 판을 치고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서 안달이 나 있는 이 시대에 조그마한 실수 하나도 용납지 않고, 서로 잡아먹으려고 하는 이 시대에,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버려고 하는 이 삭막한 시대에, 다윗과 같이 신실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간절한 소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그런 분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과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고 조롱하고, 침 뱉었습니다. 창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채찍을 내리치며 온갖 모욕을 다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했고,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바로 그 시점에, 우리 같으면 “나는 더 이상 이 길 가지 못하겠다”라고 하고, 뒤돌아서 포기해야 할 것만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묵묵히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우리 위에 피 흘려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늘 우리에게 힘이 되어 줄 것 같은 사람들도 그 호흡이 끊어지면 더 이상 우리를 도와줄 수 없고, 사람은 그 마음이 변해서 더 이상 우리를 도와줄 수도 없고, 자식들을 믿었지만 그 자식들은 영원히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시대에, 돈을 의지하고 싶지만, 그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착취하고,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들고, 고통을 주는 이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우리의 연약한 것들을 다 내어놓고, “주님, 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은혜를 달라”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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