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외침 (잠 1:20-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잠 1:1-19) +++ 지혜의 유익 (잠 2:1-22)

잠언 강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지혜가 소리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외치고 있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가 막 소리를 지르고 외치고 막 그렇게 떠들고 있는데, 지혜가 어디에서 그렇게 떠드는가? 1절과 20절과 21절 말씀에 보면 ‘길거리에서 소리 지르고, 광장에서 외치고 있고, 시끄러운 길목에서, 성문 어귀에서, 성 중에서 지혜가 막 소리를 지른다’라고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혹시 여기에 계신 분들 가운데 길거리 지나가는 가운데, 막 지혜가 소리 지르는 걸 들어보신 분 계십니까? 광장을 지나는데, 시끄러운 곳을 지나가고 있는데, 지혜가 여러분들을 향해서 막 소리를 지르는 그 소리를 들어본 적이 계신가요? 없네요. 한 분도.

그런데, 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지혜가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성문 어귀에서, 시끄러운 골목에서, 성 중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 곳을 기록하고 있는데, 지혜가 소리를 지른다고 표현하지 아니한 곳은 어디일까요? 집 안에서 소리를 지른다거나, 학교에서, 직장에서, 교회당에서, 공항에서 소리 지른다고 하는 그런 표현은 여기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없지만 20절에서부터 21절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고자 하는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지혜가 어디에 있느냐?’ ‘어디서 소리를 지르느냐?’ 하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처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바로 그 장소, 모든 전반에 걸쳐서 지혜가 있고 지혜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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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여러 곳을 지적해서 설명해놓고 있지만,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등등 지혜가 소리 지르는 것을 몇 군데를 꼽아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기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자리 우리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막 소리를 지르고 있다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곳, 우리가 지나가는 곳, 우리가 가는 그곳마다, 우리가 움직이는 곳마다, 그곳에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지혜가 외치고 있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무슨 의미냐 하면,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꼭꼭 숨어 있어 가지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어서, 지혜를 얻으려고 한다하면 정말 보물 찾기 하듯이, ‘도대체 지혜가 어디 있을까?’ ‘도대체 이놈의 지혜는 어디로 갔을까?’ 하면서 정말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찾아야만,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에서 말해주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면, 지혜는 널려 있다고 하는 거에요. ‘널려 있다.’ ‘우리가 있는 곳, 그 어느 곳에든지 지혜가 있다’라고 하는 말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고, 성문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고, 우리가 가는 그 곳마다 잠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고 그렇게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멀리 지혜를 찾아가야만 그곳에서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대학에 들어가서 학문을 열심히 공부해야만 그래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정말 고생을 해가면서 찾아야만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지혜는 바로 우리 옆에 있다. ‘바로 내 옆에, 언제든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우리의 현장 가운데 지혜가 있다’고 하는 말씀을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책사로 제갈 공량을 맞이하기 위해서 삼고초려를 합니다. 와룡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 저 숲속에 있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열심히 찾아가서, ‘혹시 여기 와룡 선생 계십니까? 제갈 공명 선생님이 여기 계십니까?’ 했는데, 안 계셔요. 어디 멀리 여행 갔다는 거에요. 그래서 돌아갔다가, 또 다시 와서 또 ‘있습니까?’ 했더니, 또 없는 거예요. 그러면 한두 번 정도 찾아갔으면, 그 사람이 나한테 와야 되는데 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관우와 장비는 ‘이런, 참, 예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면서, ‘우리 가지 맙시다.’ 막 그러는데, 유비는 또 한 번 가는 겁니다. 삼고초려. 그 초가집을 찾아서 가는데, 그 제갈공명이 있는 그 집에서부터 2리나 떨어진 그곳에서 말에서부터 내려가지고, ‘이제부터는 걸어가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좋은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냥 그냥 말 타고 편하게 갈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서 그를 만나고자 하는 그런 예의를 갖춰서 만나자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쭉 걸어가서, 결국 그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게 되는 그런 엄청난 일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의 생각에는, 지혜가 어디에 있는가? 지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발견할 수 없는 저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구할 수 없는 저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지혜를 얻으려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할 것만 같고, 그래서 무엇인가 큰 일을 해야 될 것만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잠언서 1장 말씀에서는, 들려주시는 말씀이, 지혜가 저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혜가 꽁꽁 숨겨져서 찾을 수 없는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우리 곁에, 지금 우리가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는 바로 그 식사 자리에,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바로 그 만남의 장소에, 우리가 직장에서 일을 하는 바로 그 자리에,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장소에, ‘지혜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오늘 성경 말씀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고요.

첫째는 지혜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지혜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외치고 있다는 지혜가 계속해서 막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거에요.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소리를 외치면 들어야죠. 제가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들리죠? 그와 마찬가지로, 지혜가 소리를 막 지르고 있으면, 듣는 게 정상입니까? 안 듣는 게 정상입니까? 듣는 게 정상인 거예요.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일상 속에서 우리의 평범함 속 가운데 있는데, 그리고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든지 귀를 기울이기 만하면, 그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얻지 못해서 괴로워합니다. 왜 이렇게 아둔할까? 왜 이렇게 참 어리석은 일을 할까?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하지 못할까? ‘나는 왜 지혜롭지 못할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혜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지혜가 자꾸 소리를 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 지르는 것을 듣지 않으려고, 우리가 귀를 막아버리고 있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거에요.

우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애써서 그 지혜의 말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안 들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돈 버는 것과 비슷해요. 돈을 잘 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온 세상 천지에 돈이 둥둥둥둥 떠다니는 게 보인대요. 사람들은 돈을 못 벌어서 그렇게 막 힘들어하는데, 돈을 잘 버는 사람들하고 얘기를 해 보면, 자기는 가만히 서서 보면 돈이 흘러가는 게 다 보인다고 그래요. ‘아, 저렇게 하면 돈을 벌겠구나.’ ‘이렇게 하면, 돈을 벌겠구나.’ 돈이 흘러가는 게 다 보여서, 그냥 벌기만 하면 되는데, 사람들이 그 돈이 흘러가는 걸 못 보고 못 번다는 거에요.

IMF 때도 돈 번 사람이 있었고, 지금 코로나 시대에도 돈 버는 사람들이 있고, 아 똑같은 사람인데, 똑같은 환경, 똑같은 어려운 처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진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그 돈의 흐름을 볼 수 있고, 그래서 그 아주 힘들고 어려운 IMF나 코로나 시대 때에도, 오히려 그때 더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똑같은 상황 가운데서 전혀 벌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혜도 마찬가지에요.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꼭꼭 숨겨져 있어서 우리가 정말 그 지혜를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노력을 해야만 그래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지혜는 우리 옆에 있다.’ ‘가까이 있다.’ 그리고 조용히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소리 지르고 있으니까, 그 소리 지르는 것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듣기만 하면 된다’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공기와 같이, 우리가, 그 공기가, 우리에게 있어서, 그냥 숨을 들여 마시듯이 우리 곁에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서, 먼 곳에 있는 말씀, 어려운 말씀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말씀, 쉬운 말씀, 우리에게 지혜의 말을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데, 그 지혜를 우리가 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가까이 있는 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무엇입니까? 문제가 무엇이냐면, 그 지혜의 외치는 그 소리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싫어한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24절부터 25절에 말씀해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는즉” 무슨 이야기입니까? 지금 지혜의 말씀이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들려주고, 그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했다고요? 우리가 듣기 싫어했다.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듣는 것을 싫어해서 듣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의 상황을 연상시킵니다. 만유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류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께서 회당마다 다니시며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정말 말주변도 없는 이국진 목사가 설교한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회당에 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줄 때,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고,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놀라운 특권일 것이고,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영생의 복락을 누릴 수 있는 귀한 축복이 그들에게 주어졌는데,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셔도 다 거부해 버린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우리가 다 함께 뒹굴던 바로 그 아이가 지금, 우리,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배척해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인데,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 지혜의 말씀을 들려주었을 때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처럼, 지혜가 지금 길거리에서 외치고 있고, 지혜가 우리들이 있는 그 모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외치고 있지만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애써서 일부러 그 지혜의 소리에 귀를 막아버리고, 안 듣고 있는 것이 문제가 하는 거에요

우리에게도 지혜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 주변에 지혜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면, 충분히 우리는 그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지혜를 배우게 되는 것이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대화를 하면서,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 대화를 하면서 직장의 동료들이 함께 대화를 하면서,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지혜로운 말씀을 전해주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그 지혜의 말씀을 외면해버리고 있는 것이죠.

“삼인행 필유아사”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걸어가면 그 가운데는 반드시 선생님이 있다’라고 하는 그런 표현인데요. 그 누구에게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배우게 만들어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를 향해서 외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자연 만물이 움직이는 것을 통해서 해가 동쪽에서부터 떠서 서로 지는 그 자연 만물의 이치를 통해서, 꽃이 피고 그리고 나무가 자라고 환경이 바뀌는 그 자연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음성을 듣게 만들어 주셨고, 또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그 관계 속에서, 사람들과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울 수 있게 만들어주셨고, 또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과 사고와 여러 가지 우리의 경험들을 통해 우리가 지혜를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기회를 우리들에게 주셨는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지혜를 거부해버리고 귀를 막아버렸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꼭꼭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지르면서 내 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지혜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나요? 어떻게 지혜가 우리에게 어떻게 소리 지르고 있죠? 우리의 양심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양심에,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너는 왜 사랑하지 않고 저렇게 미워하고 있느냐?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의 양심을 두드리면서, 지금 이 순간에 미워할 것이 아니라, 원수도 살아가신 주님을 따라서, ‘주님께서 너를 용서해 주셨는데, 용서해 주지 않느냐?’고 하는 그런 양심의 가책을 우리들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큰소리로 우리의 양심을 향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악한 일을 하려고 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양심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니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안 되지.’ ‘큰일 나지.’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더라도, 온 세상 사람들이 몰라도,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니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하면 안 되지’라고 외치고 있는 거지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고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좋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러나 뒤로는 나쁜 짓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계속해서 양심의 문을 계속 두드리면서, ‘그렇게 하면 안되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에요. 남이 보지 않는다고 남의 것을, 공적인 것을 내 마음대로 착복해 버린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양심 가운데 말씀해 주고 계셔요. 어떻게? 우리의 양심 가운데 ‘쿵쾅쿵쾅’ 말씀해 주고 계셔요. 그 양심의 소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음성을 듣게 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무엇인가? 첫 번째 시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서운 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인 것이고,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행해야 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이라고 한다면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죠. 지혜가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지혜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굉장히 간단합니다. 한 가지 질문만 던져보면 되는 거에요. ‘과연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인가?’ 그 질문을 던져 보시면 돼요 한번 따라해 봅시다. ‘과연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인가?’ 그게, 그게 우리가 판단해야 될 기준이에요. 우리가 행동하는 그 모든 것 앞에서, 정말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인가? 내가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질문을 던져보고, 그 질문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으면, 힘들어도 해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게 유익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게 이득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일을 거부하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양심을 향해서 계속해서 크게 울부짖고 계십니다. 소리치고 있습니다. ‘김 집사, 박 집사, 이권사.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지’라고 우리들의 양심을 향해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그 소리 지를 때 우리가 어떻게 하냐면 귀를 막아버립니다. 듣기 싫다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는 것이 너무나도 불편하고, 마음이 불편하고, 눈을 감아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없어서,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자꾸만 자꾸만 귀를 가리고 눈을 감아버리면, 어느 순간에는 그 지혜가 울부짖는 소리, 소리치는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로 서야 될 텐데, 이렇게 내가 나태한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와 예배해야 될 텐데, 우리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데, 그 말씀을 애써 외면해 버리고, 귀를 막아버리고, 듣지 않으려고 하면, 소리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는데, 그런데 사실은 소리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계속 소리가 들리고 있어요. 양심을 향해서. ‘네가 그렇게 살면 안 되지’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 살면 안 되지.’ ‘죄악을 따라 살면 안 되지.’ ‘그렇게 악한 일을 하면 안 되지.’ ‘남들을 속이면 안 되지.’ 계속해서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지혜의 말씀들이 있는데, 그 말씀을 우리가 자꾸만 자꾸만 차단해 안 안 듣게 된다고 한다면, 어느 순간에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에 들려주는 그 외침을 못 들은 척 해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라, 악한 생각을 따라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악한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어리석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그 끝이 재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은, 조금 물질적인 이득을 얻기도 하고, 지금 당장은 조그마한 재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당장은 통쾌함도 느낄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의 마지막은 재앙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악한 길을 따라가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6절부터 30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우리가 지혜를 따라 살지 않으면, 지혜가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여호와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인데, 그러한 지혜를 따라 살지 않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재앙이 임하게 될 것이고, 그 재앙 가운데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유혹에 자꾸만 넘어가게 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혜의 외침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악한 유혹에 따라 넘어갈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죠. 만일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거룩하고 완벽한 길을 갈 수만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연약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죄악의 길로 따라가고 악한 길을 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게 순종하셨습니다. 사탄의 유혹 앞에서, 그 유혹을 따라가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전적으로 모든 것을 순종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지시고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영접해야 되고 또한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내주하시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무엇이어야 되겠습니까? ‘주님,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옵소서.’ 그게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죠. 우리가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아무런 깨달음이 없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그 지혜의 소리에 민감하게 들을 수 있는 그런 지혜를, 그 귀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마다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양심을 두드려주고 계시는 것인데, 때로는 사건을 통해서, 때로는 사고를 통해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친구를 통해서, 때로는 원수를 통해서, 때로는 우리 가족을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실 때, ‘그때 우리들이 빨리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되돌아오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하나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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